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35인의 여성/노동/계급 이야기
낸시 홈스트롬 엮음, 유강은 옮김 / 메이데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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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철학자인 낸시 홈스트롬(Nancy Holmstrom)이 편집한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달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35인의 여성/노동/계급 이야기󰡕(The Socialist Feminist Project: A Contemporary Reader in Theory and Politics, 2002)는 󰡔아름다운 외출󰡕이 기록한 시기로부터 100년이 지난 후인 1980년대 후반에서 2000년까지 쓰여진 35편의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아름다운 외출󰡕은 1950년대 후반부터 일어난 2세대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이 뒤흔든 20년”(1970년대-80년대)의 토대가 된 시절을 기록하고 있다.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달다󰡕는 1970-80년대에 여성억압을 둘러싸고 제시된 다양한 분석을 사회주의 페미니즘 관점에서 재정리하면서 1990년대 이후 진행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가속화를 분석하고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쇠퇴에 전면적으로 대응하려는 여성들의 움직임을 담고 있다.

 

󰡔아름다운 외출󰡕이 영국과 미국에서 자신들의 꿈에 쫓겨 고달프지만 열정적인 여성들의 행동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갈 첫 걸음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면,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달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에는 기나긴 투쟁과 이론화의 역사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또한, 최근 20여년간 우리가 겪어 온 일을 분석하고 현재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강조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홈스트롬은 서문에서 “계급과 성뿐만 아니라 인종/민족이나 성적 지향같은 정체성의 다른 측면까지도 통합하는 일관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여성의 종속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한다(9-10). 필자가 보기에 정의라고 하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 넓은 규정이긴 하지만, 홈스트롬의 이러한 규정은 1970년대 여성억압 분석을 둘러싼 여러 논쟁과 그 이후 진행된 페미니즘 이론과 정치의 산물이기도 하다. 즉, 홈스트롬이 정의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러 억압이 서로 복잡하게 맞물려 작동하며 계급이 분명 억압의 핵심을 구성하긴 하지만 성과 인종을 통한 억압이 경제적 착취로 환원되지 않는 복잡성을 포착해온, 최근 몇 십년간 페미니즘 운동과 지식생산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노력은 20세기 페미니즘의 전개는 다양한 인종출신과 비서구지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공헌에 힘입었다는 점을 뜻하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30%가 비백인여성이다).

 

홈스트롬은 1970년대 서구에서 진행된 여성억압 분석을 둘러싼 여러 논쟁을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이렇게 언급한다. 경제문제가 다시 많은 페미니스트의 의제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지금이야말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재평가하기에 딱 맞는 때이다. 세계화라는 야만적인 경제현실 덕분에 계급을 무시하기가 힘들어졌고, 페미니스트들은 1970년대에 사회적 차원에서 던졌던 커다란 질문을 이제 지구적인 차원에서 제기하고 있다”(23).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남북 아메리카 등 전지구를 아우르는 우리 시대의 문제를 거론하는 35편의 글을 편집한 홈스트롬의 목적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작동하는 상이한 형태의 억압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명징하게 분석하기 위해 “사회주의 페미니즘 기획이 가진 이론적 정치적 힘과 자원을 보여주면서”(10) “현재 진행형 기획”으로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라는 공통된 기획 안에서 토론과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달다󰡕는 여성해방은 사회주의 투쟁을 수반하며, 젠더, 인종, 계급, 국적, 성적 실천을 가로지르는 연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논증한다. 이 책은 성(섹슈얼리티, 재생산), 가족(사랑, 노동, 권력), 임금노동과 투쟁, 경제학(사회복지와 공공정책), 정치(사회변혁), 지식생산(자연, 사회, 지식)을 큰 범주로 해서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35편의 글을 다 읽어보면 실로, 저자가 주장한 대로, “우리가 사는 지구행성 자체를 파괴할 태세인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야만적 체제에 대한 대안을 이론화하고 건설할 수 있는 거대한 잠재력이” 사회주의 페미니즘 기획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29). 1부에 앞서 간략히 삽입된 <선구자들> 장은 이러한 기획에 장구한 역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간략하게 인용된 20여 편의 인용문과 짧은 설명으로 이루어진 <선구자들>장은 󰡔아름다운 외출󰡕에서 로보섬이 누락한 부분을 상당히 보충하면서도 맑스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페미니즘과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는 강렬한 예시이자 간략한 역사서같은 장이다.

 

35편의 글 중에서 가장 강렬한 글을 꼽으라면 도로시 앨리슨, 앤젤라 데이비스의 글을 꼽겠다. 이 두편의 글은 필자가 보기에 홈스트롬이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지닌 유용성과 정치적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이다. 1부 “성, 섹슈얼리티, 재생산”에 실린 앨리슨의 글, “계급에 대하여”는 자본축적이 우리의 삶의 가장 친밀한 구석구석까지 어떻게 비집고 들어오는지를 자서전적 이야기로 보여준다. 저자인 앨리슨은 가난한 백인노동계급 출신이며 소설가이자 액티비스트이자 레즈비언이다. 앨리슨의 글은 여성 자신의 이야기가 어떤 이론적 분석이나 논증보다도 강렬하고 복잡한 이론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성적 실천은 그간 주로 젠더와 더 밀접하게 논의되었던 것에 반해 이 글은 계급이 성적 실천을 구성하는 힘을 생생하게 논증한다.

 

투옥된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을 다룬 앤젤라 데이비스의 글은 가정폭력이 국가의 성폭력으로 확대되는 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격적인 연구다. 4부 “경제학, 사회복지, 공공정책”에 실린 데이비스의 글은 투옥된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을 탐구한다. 이 문제는 이제까지 거의 연구되지도 논의되지도 않은 분야이며, “오늘날 미국에서 벌어지는 여성 수감장 대한 성적 학대는 국가가 승인한 가장 극악한 인권침해”(414)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아무런 행동이 촉구되지도 않은 문제이다.

 

이론적으로 흥미로운 글은 2부 “가족: 사랑, 노동, 권력”에 실린 앤 퍼거슨의 글이다. 페미니스트 유물론을 펼치는 퍼거슨은 모성과 섹슈얼리티를 분석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다중체계 페미니즘 유물론”이라 규정한다(221). 퍼거슨은 게일 러빈의 “성/젠더 체계”를 발전시켜 “성/애정 생산”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녀는 이 용어를 가지고 이제까지 출산과 가족 네트워크 안의 인간관계를 재생산으로 정의해 온 관계를 “생산과정”으로 개념화하며, “가족과 친족 네트워크를 성/애정 생산의 중요한 물질적 토대로서 특권화”한다(223). 자본주의 경제와 관련하여 “성/애정 생산”은 “사람을 사회적 성 계급에 연결시킨다”(224). 퍼거슨의 “성/애정 생산 패러다임”은 아쉽게도 자본주의의 가족과 친족제도, 젠더 정체성 발달과정을 논의하는데서 멈추는데, 이는 “성/애정 생산” 개념이 루빈의 논의를 발전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퍼거슨의 짧은 글을 다 읽고 느껴지는 아쉬움은 고정갑희의 󰡔성이론󰡕을 만나면 풀릴 것이다. 고정갑희의 책은 퍼거슨이 멈추는 지점에서 출발해서 이 “성/애정 생산 패러다임”을 보다 자세하게 펼치는 논의를 제시한다.

 

1960년대 이후 펼쳐진 페미니즘 논의와 논쟁을 먼저 훑어보고 현재의 문제와 씨름하고 싶다면 2장을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2장은 젠더, 섹슈얼리티와 정치경제를 둘러싸고, 퀴어논쟁까지 포함하여 지난 30년간 여러 갈래의 페미니즘 논의와 논쟁을 압축적으로 정리한 글이다. 5장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재성찰한 글이다. 가족론이나 가족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근대에서 포스트모던 가족의 변화사(6장), 정통 맑스주의의 가족론(10장), 미국(7장), 인도(8장), 치카나 문화(9장), 남아프리카와 중동, 남아시아, 동아시아(12장) 에서의 상이한 가족경험을 참조할 수 있겠다.

 

또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무한경쟁 속에서 사라지는 아버지들에 대한 분석은 13장에서 제시된다. 페미니즘 이론의 수정과정과 지식생산에 관심이 있다면 6부 “자연, 사회, 지식”에 실린 글들이 도움이 될 터이다. 특히 낸시 하트삭이 입장이론을 성찰하는 대목은 페미니스트들간의 이론적 대화가 이론의 정교화와 지식생산에 얼마나 큰 원동력이 되는지를, 이론(가)의 자기성찰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월경을 둘러싼 사회적 규율에 신경이 쓰인다면 1부에 실린 에밀리 마틴의 글도 반가울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지구지역적으로 여성노동을 착취하는 방식과 여성노동자들의 대응은 주로 3부 “임금노동과 투쟁”에 실려있다. 3부는 최근 40년간 자본주의 변화 속에서 미국, 영국, 인도, 멕시코, 과테말라의 여성 노동자들이 직면한 문제와 여성노동투쟁을 기록한다. 이 글들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여성노동 상황을 간략하지만 명료하게 알게 해주는 글들이다. 3부 첫 글인 모한티의 글은 현재 상황에서 필요한 대안도 제시한다. 노동운동과 여성 노동자의 갈등관계, 계급운동의 젠더정치를 다룬 15장과 3부의 21장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갈등을 정리하면서 현재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쇠퇴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통렬하게 보여주며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여성노동 활동가라면 15장과 21장을 강렬하게 감정이입하여 단숨에 읽어낼 것이고, 자신이 생각한 방향 역시 이 저자들의 논의와 동일한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대안을 찾는다면 5부 “정치와 사회변혁”에 실린 7편의 글 한편 한편이 통찰을 줄 것이다. 5부의 글들은 정치적 선언문처럼 읽히기도 하고 정교한 정치전략서이기도 하고 동시에 정교한 이론적 글이기도 하다. 6부에 실린 글들은 5부의 정치와 액티비즘을 뒷받침하는 페미니즘 이론의 수정과 지식생산에 관한 논의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기획”이 원제목인 이 책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이론적 유용성과 정치적 힘을 보여준다.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달다󰡕는, 데이비스의 󰡔여성, 인종, 그리고 계급󰡕(1982), 패트리샤 힐 콜린스의 󰡔흑인 페미니즘 사상󰡕(1990)과 더불어, 분명코 21세기 초반부에 페미니즘 운동과 지식생산의 방향을 모색하는데 큰 영향을 줄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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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외출 - 페미니즘, 그 상상과 실천의 역사
실라 로보섬 지음, 최재인 옮김 / 삼천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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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이자 액티비스트이고 노동역사가인 실라 로보섬(Sheila Rowbotham)은 영국의 여성사 연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학자이다. 로보섬의 󰡔아름다운 외출: 페미니즘, 그 상상과 실천의 역사󰡕(Dreamers of a New Day: Women Who Invented the Twentieth Century, 2010)는 1880년대에서 192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신여성들이 제시한 급진적 존재론, 섹스, 출산, 어머니, 집안일, 소비행위, 여성노동, 노동과 정치, 일상과 민주주의를 초점으로 한 여성사 책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1880년대에서 191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진보시대”로 불린다. 산업 자본주의가 유례없이 팽창했던 이 시기는 국내외 경제규모의 확장, 대규모 생산과 대규모 소비로의 전환과 안착, 전보 등 통신기술 사용의 일상화, 급격한 도시화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다른 한편, 농촌이 급격하게 재구성되고 도시빈민이 증가하고 노동착취의 강도도 높아졌다. 전반적으로 보아 이 시기의 특징인 산업 생산력의 확대와 인구이동의 증가(미국의 경우 이주민의 증가)는 여성이 공공영역에 유의미한 숫자로 진출하기 시작했음도 의미한다. 이 시기에 일어난 유례없는 변화는 19세기 중반부와는 확연하고도 빠르게 일어나서 당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이전 시기와의 급격한 단절로 여겨질 정도였다. 영국에서 2010년에 출판된 󰡔아름다운 외출󰡕에서 저자는 이 시기에 일어난 변화의 핵심을 여성들의 활동에서 찾는다. 이 책의 원어 제목, “새 날을 꿈꾼 사람들: 20세기를 발명한 여성들”이 시사하듯, 로보섬은 이 시기에 일어난 변화들 중 20세기에 가장 크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 변화는 여성들이 실험하고 실천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로보섬은 진보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 여성들이 쓴 일기, 편지, 산문, 소설, 팜플렛, 협회기록물 등을 파고들며 이 시기 여성들의 활동을 폭넓고도 자세하게 기록한다. 실로 광범위한 문헌을 통해 여성들의 역사를 기록한 이 책을 통해서 보면, 우리가 20세기에 실험하고 경험한 것들은 이미 이 시기에 영국과 미국에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그 정치적 이론적 초석이 놓여졌다. 이 책을 예컨대 사라 에번스(Sara Evans)의 󰡔자유를 위한 탄생: 미국 여성사󰡕(조지형 옮김, 이화여대출판부, 1998), 린지 저먼(Lindsey German)이 맑스주의 페미니즘 관점에서 여성노동사를 다룬 󰡔여성과 마르크스주의󰡕(이나라 옮김, 책갈피), 앨리스 에콜스(Alice Echols)의 1960년대 급진 페미니즘 역사 연구서(Daring to Be Bad: Radical Feminism in America, 1967-1975) 등과 함께 읽는다면, 20세기 후반에 전지구적으로 일어난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을 좀 더 큰 역사적 범위에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영국에서 1880년대~1920년대는 여성 참정권 운동과 여성들이 주도한 여러 개혁운동과 정치실험이 격렬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로보섬이 이 책에서 탐구한 시기의 여성들은 공공영역에 진출하면서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해 있고 종속되어 있다는 통념에 문제를 제기했”으며, 사회복지관, 병원, 여성노도, 지역 공동체 활동, 생활협동조합, 예술협회, 정치단체, 학술연구단체 등을 결성하여 여러 형태의 “불의와 불평등에 저항”하였다(8). 사랑, 결혼, 모성과 노동에 관한 문화적 습속에도 도전하였다. 일상과 문화를 바꾸려는 시도를 한 여성들은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집단으로 이루어졌다. “미국과 영국에서 새날을 꿈꾼 이들은 서로 다른 정치문화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같은 여성이었지만 개개인으로 보자면 자유사상가,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 공산주의자, 도덕적 사회적 개혁가, 자유주의자, 혁신주의자, 노동운동가, 보헤미안들, 성 급진주의자 또는 우생학의 열렬한 지지자였다”(11). 이 다양한 집단의 여성들이 지닌 공통점은 “사회적 환경은 변화될 수 있으며, 세상을 보는 관점뿐 아니라 사는 방식도 변할 수 있다는 신념”(8)과 “상상력 넘치는 유연함”(24)이었다. 그렇지만, “몸에 대해 새롭게 접근할 것을 제안했고, 의생활과 식생활에서도 다른 대안을 추구했던”(10) 이 여성들이 꾸었던 꿈은 여러 가지 장벽과 반발에 부딪혔다. 저자는 이렇게 평가한다. “20세기 초에 급진적인 꿈을 꾼 이들은, 돌을 치우지 않은 상태에서 뿌리와 가지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했다”(30).

 

노동의 불안정화, 여성의 빈곤화, 노동운동의 쇠퇴, 변화주체의 집단적 실종 등 지금 진행중인 여러 문제를 우리가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아름다운 외출󰡕은 1장부터 반가울 터이다. 2천년 이후 진행된 여러 사정을 감안이라도 한 듯 저자는 1장부터 산업 자본주의의 확장과 더불어 일어난 노조결성 및 노동운동의 역사의 중심부에 여성들이 있었음을 기록한다. 1장 “침묵의 일상을 깨우다”는 19세기 후반부에 있었던 격렬한 노동쟁의와 노동조합 결성 과정에서 여성들 역시 주도적이었음을 여러 사례로 논증한다. 로보섬의 역사기술은 어떻게 여성노동자 운동이 노동운동의 토대가 되었다가 남성중심적 헤게모니 하에서 곧 주변화되고 망각되고, 다시 여성(학자)들의 재기억과 재발견에 의해서 지배적 역사서술이 수정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재발견의 과정은 여성학 연구방법론의 출발점이다.

 

여성노동운동은 대단위 사업장에서의 임금교섭(소위 “경제투쟁”)과 대정부 투쟁을 너머 광범위한 사회개혁운동 및 일상생활의 개혁까지 아우를 수밖에 없다. “혁명은 부엌으로부터!”가 식민지 시대 조선 신여성들의 구호이기도 했듯이,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여성 노동자와 사회개혁가들은 여성복지관을 만들고 관습에 도전하며 일상의 변화도 함께 추구했다. 로보섬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러시아 출신의 미국 여성운동가 엠마 골드만, 시카고의 빈민가에 세워진 여성복지관 헐하우스를 세운 제인 애덤스 등을 든다. 복합적이면서도 동시적인 변화의 추구인 페미니즘을 이 여성들은 이렇게 정의한다. “페미니즘은 자유를 향한 여성의 투쟁이다. 정치적으로는 투표권을 향한 열망으로 나타난다. 경제적으로는 더 이상 맞지 않게 된 관습과 표준에 대한 여성의 재평가이다. . . . . 페미니즘이 의미하는 것은 세상의 변화만이 아니다. 이는 변화된 심리, 새로운 의식의 창조를 의미한다”(60).

 

인식변화와 새로운 자아의 탄생은 길고도 장구한 과정이며 여러 딜레마를 노정하는 과정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습속과 매일 겨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것들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때로 변이와 변종을 동반한다. 이러한 씨름에서 섹슈얼리티와 재생산 문제가 그 심장부를 차지한다. 이 점은 이 시기뿐만 아니라 20세기 내내, 특히 20세기 후반 급진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거시적 미시적 차원에서 문화와 의식을 변화시키는 일은 때로 존재론적 수준의 급진화를 요구한다(2장). 이러한 급진적 움직임은 공적, 사적 영역에서 옷입기를 둘러싼 일상적 실천, 예술운동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존재론적 층위의 급진성은 여성에게는 사랑과 결혼의 딜레마, 성적인 존재로서의 관계맺기 문제로 이어지며, 섹스에 대한 금기에 대한 도전은 국가차원에서까지의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는 정치적 행위가 된다(3장). “섹스라는 샘은 권력의 원천”(142)임을 깨달은 여성들이 성적 자결권과 출산조절권을 주장함에 따라 섹스와 출산은 미시적 거시적 층위 모두에서 치열한 전쟁터였다. 1897년에 로사 그라울이 소설 󰡔힐다의 집󰡕에서 “여성이 출산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썼을 때 이 주장은 “혁명적”인 것이었다(141). 여성의 자기결정권 주장은 20세기 초 출산조절운동과, 자기결정권 행사를 위한 피임 및 성에 관한 지식공유 운동을 지지하는 강력한 무기였다. “출산파업”이라는 발상이 생긴 것도 이 시기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출산조절운동이 사회적 공포만 야기한 우생학과도 뒤얽히기도 했다는 점이다.

 

출산은 곧 모성과 아동복지 문제와도 연결된다(5장). 모성이 사회적 기능임을 역설하고 출산휴가의 도입, 정부가 육아비용을 제공하도록 하는 정책은 1920년대에 처음 도입되었다. 우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러시아 혁명 이후에 출산조절과 함께 모성을 중요한 투쟁으로 삼았으며, 영국과 미국에서 여성들끼리의 자발적 노력을 통해 모성과 육아를 위한 복지센터들이 생겨나고, 정부나 고용주가 부담하는 모성연금 운동이 일어났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것, 즉 어머니의 일이 사회적 활동이며 육아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인식은 이 시기에 모성과 아동복지를 둘러싼 여성들의 고달픈 투쟁을 통해서 천천히 조금씩 퍼지게 된다.

 

섹슈얼리티를 핵심으로 하는 남녀관계, 출산(조절), 모성문제는 성별화된 노동문제(집안일, 소비노동, 불평등한 유급노동)와도 연결된다. 6장과 8장은 이 문제들에 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대응을 보여준다. 예컨대, 가정학은 광범위한 사회문제를 접하면서 여성으로서 문제의식을 느낀 가운데 시작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에 중산층 여성들이 미혼, 기혼에 상관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의 새로운 가정생활을 창조하기 위해 집단주택을 건설하여 공동체를 매우 다양한 형태로 실험했다는 점이다. 또한, 가정의 일상생활에 젠더 불평등이 작동하는 방식을 의식하게 되면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요구하였다. 결혼이 “거래”라는 인식이 등장하였다(230). 다른 한편, 가정용품의 다양한 개발과 대량생산으로 미국에서는 가정이 소비의 중심이 되었다. 다양한 공동체 실험과 더불어, 가사노동을 집단적으로 분담하는 다양한 협동조합, 사회적 조합도 생겨났으며, 가정을 재구성하는 힘을 지닌 소가정소비재와 관련하여 소비자운동도 등장했다(7장).

 

역설적이게도 일을 통한 해방은 전쟁기간에 대규모로 가능해졌다. 1차대전 이전에 일하는 여성들은 낮은 임금이 조직화되지 못했기 때문임을 인식하고 노조를 결성하고 여성빈곤에 맞서 동일임금, 기혼여성의 노동권, 아동복지수당을 요구하였다(8장). 미국에서 여성노동조합은 여자대학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발전시키기도 했으며, “여성노동자를 조직화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자 점차 입법활동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하기도 했다(300). 두 번의 세계대전이 가정이야말로 “진정한 여성의 자리”라는 젠더화된 공적/사적영역 구분과 그에 따른 오래된 이데올로기를 뒤흔들면서 경제적 자립을 통한 여성의 해방에 일조했다. 2차대전과 더불어,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분야의 일을 여성들이 대규모로 하게 되자,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당연한 요구가 되었다. 적어도 여성노동자들에게는.

 

전시라는 긴급상황이 지나가자 이로 인한 갈등은 노동 대 자본의 대결이 아니라 노동자들간의 젠더 대결 양상을 띠었다. 남성 노동조합은 여성노동자의 요구에 거세게 반대했다. 노동운동 내에서의 젠더갈등을 다루는 8장의 마지막 절과 9장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노동운동의 쇠퇴의 원인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양차대전이 각각 끝난 시기에 여성노동은 현재의 비정규직과도 비슷한 불안정한 위치에 있으며(전쟁이 끝나고 남성이 일터로 돌아오면 일하는 여성은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노동의 불안정성과 노동조합과 같은 집단적 혜택에서의 배제는 성차별주의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아이에서부터 성인시절까지 삶의 변화를 일구려면 여성들은 가장 작은 것부터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편견과 맞서 싸워야 했고 온갖 남성중심적 장벽에 부딛쳤으며 거의 언제나 에둘러 가야했고, 약자의 입장에서 약자인 동료와 적대적 입장의 강자를 동시에 따로따로 설득해야 했다. 일상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는 10장은 1920-30년대의 대량생산, 광고 및 과학적 경영의 등장과 더불어 나타난 문제들과 이에 대한 여성들의 씨름을 기록한다. 이 장은 또한, “새 날을 꿈꾼” 개척자들이 걸어온 길이 노정한 한계를, 즉 20세기 후반부의 세대들이 반복해서 겪어야 했던 과제를 다룬다.

 

전반적으로 󰡔아름다운 외출󰡕은 19세기말 20세기 초 새로운 삶을 갈망한 신여성들의 꿈과 활동을 복합적이고 다층적으로 기록한 훌륭한 역사서이다. 비슷한 내용이나 같은 주제가 여러 장에서 종종 겹치기는 하지만, 변화에 대한 신념, 유토피아적 꿈, 직접 행동의 결심과 실행이야말로 우리가 이 시기 여성들에게서 물려받은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들려준다. 각 장에서 과거의 여성들이 직면했던 문제와 그에 대한 투쟁을 생각해 보는 것은 분명 현재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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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들 이매진 컨텍스트 42
R. W. 코넬 지음, 안상욱.현민 옮김 / 이매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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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남성성 연구의 출발점이 되는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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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0
사라 살리 지음, 김정경 옮김 / 앨피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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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명석한 요약정리를 보려면 이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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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 - 한국에서 이주자로 살아가기
김현미 지음 / 돌베개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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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향나라를 떠나 한국으로 이주해 온 이들의 일상과 삶을 상세히 보여준다.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육중한 노동을 수행하면서도 우리 사회가 “그림자”로 백안시해온 이주민의 삶과 노동을 우리 사회에서 어떤 시각에서 정치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저자의 치열한 탐구와 모색이 인상적이다. 이 책은 또한 지난 10여년간 저자가 이주민 및 다문화 현상 연구작업 중에 경험한 저자 자신의 내밀한 변화과정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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