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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식민 이성 비판 ㅣ 카이로스총서 5
가야트리 스피박 지음, 태혜숙.박미선 옮김 / 갈무리 / 2005년 6월
평점 :
전지구화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 현대이론에서 맹위를 떨쳐온 탈식민주의 담론에 대한 열광도 이제는 한풀 꺾인 것 같다. 2차 대전 종전과 더불어 서구 제국주의의 공식적 종결은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에 새로운 자유 시대를 연 것은 아니었다. 영토점령에 기반한 제국주의는 불가능해졌지만 식민주의를 경험한 여러 나라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국제적 경제질서 속에 점증적으로 종속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대략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등장한 탈식민주의는 2차 대전 이후의 외관상 탈식민적인(postcolonial) 상황에서 탈식민화(decolonization)가 왜 여전히 미완의 기획으로 남아 있는가를 질문한 담론이다. 즉, 탈식민주의 담론은 문화와 경제를 앞세운 새로운 지배 형식들이 전지구적 규모로 작동하게 되자 이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하였다.
인도 태생의 탁월한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 Spivak, 1942년생, 현재 콜럼비아 대학 비교문학과 교수)은 탈식민 상황을 국제적 틀에서 검토한 이론가이다. 즉, 스피박은 탈식민 상황을 식민주의를 경험한 나라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앞서 언급한 2차 대전 이후 전지구적 규모로 작동하는 새로운 지배 형식의 일부로 파악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스피박을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시각에서 전지구화를 분석한 이론가로 다시 읽어낼 수 있다. 첫 저작『다른 세상에서』(1987)부터『포스트식민 비평가』(1990),『교육기계안의 바깥에서』(1993),『포스트식민이성 비판』(1997),『경계선 넘기』(2003),『다른 아시아』(2007; 모두 번역출판됨)에 이르기까지 스피박은 탈식민 상황을 전지구적 자본재배치 과정에 주목하여 이론화한다.
스피박의 이론에서 주목할 점은 제1세계뿐만 아니라 제3세계의 거대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주민, 하위주체여성, 후기식민 상황에 있는 예술가, 지식인, 정치 망명객, 성공한 전문직, 초국가적 자본가 등이 여러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얽혀있다는 점을 분석하는 스피박 특유의 방식이다. 스피박이 1) 요즘이라면 글로벌 시티라 불리는 거대도시를 분석의 초점으로 삼았다는 점, 2) 자본가, 성공한 전문직, 지식인뿐만 아니라 이주민, 특히 하위주체여성을 초국가적 주체로 분석하고 있다는 점은 요즘의 전지구화 이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의 거대도시론들은 종종 제국주의의 역사를 무시한 채 전지구화 현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예컨대 사스키아 사센의 저작을 보라).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우리 시대 진행중인 전지구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스피박이야말로 요즈음 더욱 거세지는 전지구화를 역사적 시각에서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이론틀을 지닌 이론가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스피박의 이론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면 그녀의 저작은 실로 지역 경제와 전지구적 흐름을 예의주시하면서 현대의 여러 급진 이론들이 전지구적 자본 재배치 과정과 공모 관계에 있음을 꼬장꼬장하게 밝혀낸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스피박은 제3세계 여성 텍스트를 전지구적 틀에서 다시 읽어냄으로써 이러한 작업을 한다는 점이다.
스피박의 이러한 비판적 작업의 핵심에는 제3세계의 하위주체(subaltern) 여성이 있다. 전지구적 자본 재배치와 하위주체 여성을 분석틀로 하는 스피박의 작업은 크게 보아 1) 제국주의적 재현 정치에 대한 비판과 2) 제3세계 여성의 텍스트 소개 및 읽기를 통한 하위주체이론의 정립으로 정리된다. 우선,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처럼 스피박도 제1세계 텍스트에 농밀하게 배어 있는 제국주의적 무의식을 밝히는 작업을 한다(예컨대, 1985년 논문 "Three Women's Texts and a Critique of Imperialism", 『다른 세상에서』2장, 『포스트식민이성 비판』2장을 볼 것). 여기서 더 나아가 스피박은 20세기 후반 제3세계 여성의 문학작품을 영역하여 서구에 소개하면서 2차대전 이후 진행된 국제적 노동 분업과 여성 문제를 서구의 담론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논의한다. 예컨대, 스피박은 『다른 세상에서』13장과 14장에 인도의 여성작가 마하스웨타 데비의 단편소설「드라우파디」와「젖어미」, 그리고 1995년 저서 『상상의 지도들』(1995)에 「사냥」,「한없이 너그러운 두올로티」를 영역하여 싣는다. 또한 자신이 영역한 데비의 작품이 미국과 인도에서 읽히는 여러 방식을 자세히 분석하면서(『다른 세상에서』14장) 스피박은 전지구적 자본 재배치와 독립 후 인도의 상황을 하위주체여성의 경험과 시각에서 다시 볼 수 있는 틀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스피박이 의도하는 것은 여성주의와 탈식민 민족주의, 서구의 포스트-이즘들에서조차 제3세계 하위주체 여성은 여전히 배제된 타자일 뿐이며 전지구적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실이란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 즉, 스피박은 국제적 노동분업 및 전지구적 자본 재배치에서 가장 밑바닥층에 놓이는 제3세계 하위주체여성들의 입장에서 신식민화 과정과 전지구화 과정을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