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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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마주보는 것. 서로에게 깊게 닿는 것. 설령 그것이 착각이라도 이미 끝을 암시하더라도 아름답다.

주인공 `마리온`이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나쁜년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행복을 쟁취하려는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결코 소극적인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의 선택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결단이었고 그런 결단을 내린 그녀의 편에 서고 싶다.

소설 줄거리는 만남-이별-재결합 전형적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차이점이 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음미하는 게 소설을 읽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좋은 책은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발췌>
나는 그를 향해 몇 발짝 걸어갔다. 조금이라도 빨리 양탄자 위에 올라서고 싶었다.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멀어지기 위해 나는 서두르고 있었다. 뒤의 모든 것이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 웃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곧 웃음을 거두고 말았다. 베르톨트가 웃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웃을 만한 순간은 아니었다. 우리는 거의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무척 가까운 거리였다. 내가 테이블에서 일어나자마자 테이블은 곧 사라져버렸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안개구름처럼 낮게 떠올라 우리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흔들리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것은 우리가 서 있는 마룻바닥뿐이었다. 그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그때까지는 그런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중략)
 분명 그렇게 오래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일단 스쳐 지나가고 나면 계속 그리워하는 그런 순간 말이다. 다른 어떤 것도 그 순간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아니, 내가 한 말 같았다. 내 목소리가 그대로 메아리쳐 되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실이었다. 다른 말을 했다면 그것은 전부 거짓이었다. 나는 그저 ˝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그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내가 본 그의 최초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그냥 얼굴이 아니었다. 그때의 그의 얼굴은 행복할 때의 그것이었다. 그는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중략)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도, 사진으로 찍을 수도 없는 또하나의 얼굴이 었다.
(중략)
 우리뿐이었다. 우리 단둘뿐이었다.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모피코트를 벗어놓은 것이 후회됐다. 추웠다. 갑자기 스팀이라도 꺼버린 걸까?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머리는 머리대로, 옷은 옷대로······ 그들이 이쪽으로 오려 할 떄면 우리에게서 나오는 빛이 그들에게 반사되었다. 유리창 밖에서 깜짝 놀라쳐다보는 커다란 눈이 보였다. 물론 그것도 단 몇 초뿐이었다. 어쩌면 잘못 본 건지도 모른다. 금방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으니까. 우리 쪽으로 오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밖에서 나지막하게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 역시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소리다. 파도 소리거나 바람 소리거나 무슨 다른 소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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