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과학, 논술, 영어 학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세 학원에서는 각자 경쟁이라도 하듯 숙제를 쏟아냈다. 각각의 학원은 내가 학교도다니고 다른 학원도 다니는 형편을 고려해주지 않았다. 각자 자기분야가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제 겨우 시작이었는데도 벌써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이모든 걸 해내는지 곁눈질해보았지만 그들은 모두 덤덤한 일상으로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나만 놀라고 나만 겁에 질려 있었다.
학교가 끝난 후 교문 앞에서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는 자동차를보고 문득 놀랐다. 교문 앞에 차가 서 있으면 그걸 타는 수밖에 없는 거였다. 집에 갈 때지하철을 탈지, 버스를 탈지, 걸어갈지 그런작은 결정조차 할 수 없이, 아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이라는 걸뒤늦게 깨달았다. 편안함과 안락함이 차츰 목을 죄는 굴레처럼 여겨지기 시작하더니 나는 어느덧 아무 설렘 없이 무감하게 차에 오르는 아이들 중 하나가 되었다. 매일매일이 똑같았다. 시현과 내가탄 차가 어느 학원으로 향하는지, 약 50미터 안팎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 P163

사람이 일하느라 바쁠 때는 늘 그런 법이야. 주변에 사람이 많고 시간이 없지.
그러니 외롭다고 느낄 이유도 시간도 없어.
하지만 일이 끝나면 일 때문에 사람을 만날 일도 없어지고, 혼자 있는시간이 계속되지.
사람이 외롭지 않으려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단다.
사랑하는 사람은 할 일이 있어서 만나는 게 아니거든그냥 보고 싶으니까, 마음이 쓰이니까 만나게 되지.
요양원에서 비로소, 그분이 외롭다고 느낀 시간이 시작된 거야. - P196

곽은태 선생님의 반석 같은 어깨 위에서 엉덩이춤을 추며 자랐을 시현을 한없이 부러워한 시간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 두드리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부모의 어깨 위도 알고 보니 멀미나게 흔들리는 곳이었다.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어깨는 없다. 그렇게 당연한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한때 시현이 악마처럼 사악한 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 아이도 나처럼 격렬한 어지러움에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더 이상 시현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타인의 부러워하는 시선 속에서, 남들은 모르는 어깨위의 흔들림을 견뎌야 했던 시현이 나보다 더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 - P270

많은 착한 아이들이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상처받은 가족을 보듬고 어떻게든 위로할 방법이 없을까, 어린 가슴을 쥐어짤 것이다.
가족은 서로 사랑하고 지켜주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내가, 그리고 동구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은, 그 아이가 어리고 약하다는 거였다. 그리고 또 하나, 가족의 소중함보다 더 먼저, 그 아이 자신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착하고 속이 깊니! 하는 칭찬은어른들이 아이들의 고통을 계속 외면하고자 할 때 동원하는 교활한속임수일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동구의 희생과 사랑을칭송했지만 그 아이가 행복한지 아닌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않았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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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그날 도청에 남은 어린 친구들도 아마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총을 메고 창 아래 웅크려앉아 배가 고프다고 말하던 아이들, 소회의실에 남은 카스텔라와 환타를 얼른 가져와 먹어도 되느냐고 묻던 아이들이, 죽음에대해서 뭘 알고 그런 선택을 했겠습니까? - P116

오래전 동호와 은숙이 조그만 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당신은 기억한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 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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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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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헝겊 지우개를 한번 들었다가제자리에 놓았지. 언제나처럼 나에게서 멀리 이불을 펴고 누웠다가 가만가만 무릎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지. 잠든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나는 정말로 눈을 꼭 감았지. 누나가 내 이마를 한번, 뺨을 한번 쓰다듬곤 이부자리로 돌아갔어. 좀 전에 들렸던 웃음소리가 어둠속에서 다시 들렸어. 한숨처럼 낮게 한번, 잠시 뒤 소리내어 한번 더.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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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음에 담아둔 것을 내보이는 데 한없이 서투른 사람, 그렇지만 마음속에 모든 것이 다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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