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청춘과 여전히 청춘인 중년에게 전하는 공감과 위로‘라고 소개하고 있는 한기봉님의 감성에세이 「바람이 내 등을 떠미네」. 이 책은 책의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프랑스에서 특파원 근무, 퇴직 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의 공직생활,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 그리고 대학교 교수 생활 등을 통해서 그동안 쌓았던 삶의 내공을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으로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아놓고 있는데... 이외수의 글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은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로 운을 띄우고는 ’연필을 깎으며‘를 첫 글꼭지로 하여 총 65개 글꼭지를 통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65개의 글꼭지들은 하나하나가 우리가 일상에서 늘상 접할 수 있는 평범한 내용들로서 저자는 이를 넋두리라고 말하지만 저자의 그동안의 언론계 근무경력에 국제적인 감각이 더해져서인지 아님 뛰어난 필력으로 다시 탄생되어서인지 때론 직설적이고 진솔한 그 표현에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한마디로 말해 함축된 시 못지않게 맛깔스러운 수려한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하겠으며 ‘정말 참 글을 잘 쓴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다.
특히, 새로움을 느끼게 하는 생경한 글귀들이 자주 등장하는 데 예를 들어 ‘기척이자 얼룩’ ‘곡비, 숨비소리’ ‘고독과 허무의 독백’ ‘밤은 선생이요, 책은 도끼다.’ ‘잉여 독서’ ‘아포리즘(잠언)’ ‘펜스룰’ ‘러너스 하이, 리더스 하이’ ‘수다 테이블’ ‘인생은 열쇠 구멍 사이로 소리없이 빠져나가는 연기 같은 거다.’ ’꽃맹, 나무맹‘ ’우리는 모두 서로 싱클레어이자 데미안이다.‘ ’던바의 수‘ ’관태기(관계에 대한 권태기)‘ ’결혼의 보호효과‘ ’메기효과, 상어효과‘ 등등과 같은 글귀들은 이 책의 읽는 묘미를 더해 주고 있다 하겠다.
이 책은 총 다섯 개의 PART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주제를 설정하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1장 삶에 수작을 걸다에서는 ’연필을 깎으며‘ ’엄마와 어머니‘ ’How Old Is Old?‘ 등등의 글꼭지를 통해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독자에게 마치 술 한잔 건네듯 은근히 다가가 얘기를 풀어간다. 예사롭게 여겼던 것에 살며시 딴지 놓으며 낯설게 환기시키고 때로는 불편할 수 있는 무거운 주제를 자연스럽게 풀어놓으며 흥미를 끌어당긴다.
2장 아픈 청춘, 아직도 청춘에서는 ‘아모르 파티’ ‘이 시대 청년 문학, 자소설’ ‘집밥’ 등등의 글꼭지를 통해 청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았다. 이 시대의 아픈 청춘에게 건네는 위로 속에 쓴소리를 양념처럼 풀었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속에 살아 숨 쉬는 자신의 청춘을 떠올리며 써 내려갔기에 진득한 애정이 담겼다. 청춘을 지났어도 여전히 마음은 늙지 않아 슬픈 이 시대 중년과도 진솔하게 공감한다.
3장 불현듯, 새삼스럽게에서는 ‘굿바이 쌍문동’ ‘한국식 부고 유감’ ‘프렌치 시크’ 등등의 글꼭지를 통해 그동안 살아오며 느끼고 문득 깨달은 것을 털어놓는다. 대체로 쓸쓸했던 날에 찾아온 순간의 반짝이는 성찰, 무언가에 설레고 열광했던 한때, 삶과 죽음에 대한 각성, 우연히 본 기사, 운명처럼 조우한 한 줄의 시, 보도블록 틈새에서 마주친 제비꽃처럼, 그 순간들은 매우 사소하지만 메시지는 새삼스럽다.
4장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에서는 ‘노래도 늙는구나’ ‘봄날은 간다’ ‘발아, 고맙다’ 등등의 글꼭지를 통해 조지훈의 시 「낙화」에서 영감을 얻은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이다. 멈출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사라지거나 스러지는 것에 대한 연민을 담담히 풀어놓는다. 인생의 봄날은 지났지만 정신은 여전히 수선한 중년의 마음이 애잔하다. 저자가 좋아했던 영화의 대사와 노랫말과 시를 함께 보는 즐거움도 있다.
5장 혼자는 외롭고 둘은 그립다에서는 ‘밤은 선생이오, 책은 도끼다’ ‘2020년 장마, 종로에서’ ‘우리의 가장 외로운 가을’ 등등의 글꼭지를 통해 중년의 나이에 맞닥뜨리는 아주 솔직하면서도 절실한 감정을 엿볼 수 있다.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과 삶의 전환점에서 맞이한 어쩔 수 없는 변화, 그래서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이야기한다. 슬픔을 품은 담담한 어조는 읽는 이에게 차분한 위안을 전한다.
저자가 얘기하고 있는 몇 가지 맛깔스러운 글을 소개해본다.
‘엄마라는 호칭에는 “나는 당신의 새끼입니다.”라는 후렴이 붙어 있다. 어미의 눈에는 자식은 머리가 아무리 하얘져도 다 새끼다. “어머니”라고 부르면 가족의 위계질서 느낌이 있지만, “엄마”는 그저 피붙이 살붙이다. 아들과 달리 딸들은 평생을 한결같이 “엄마”라고 부른다. 자신이 ’엄마‘가 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시어머니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며느리는 못 봤다.’ ‘엄마와 어머니’라는 글꼭지로 시작되는 이 글을 읽다 보면 저자는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마력이 있다.
‘수작酬酌이란 말의 시작은 참 좋았다. 고대의 예의범절이었다. 주인과 객이 술잔을 권커니 잣거니 나누는 걸 의미했다. 두 글자의 훈訓(한자의 음을 풀이한 것)은 ’갚을 수‘ ’술 따를 작‘이다. 한시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다... ’술 따를 작酌이야말로 참 지혜로운 한자다. 지금은 사라진 작부酌婦란 단어 빼놓고는 다 좋다. 짐작斟酌은 모자라지도 않게, 흘러넘치지도 않게 가늠하며 술을 따른 걸 말했다. 앞 글자는 ‘머뭇거릴 짐斟’이다. 작정酌定은 짐작을 한 후에 따른 만큼의 술의 양을 정하는 것이다. 무작정無酌定 따르다 보면 무례한 사람이 된다.‘
’21세기 페미니즘은 2017년 10월 전과 후로 나뉜다.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 폭로가 시작된 날이다...... 프랑스의 여배우 카트린 드뇌브가 들으란 듯이 이렇게 일갈했다. “미투운동은 마녀사냥 같다.”......프랑스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사랑에 자유로우면서 치열한 사람들이다. 관습이나 평판,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사랑하면 다 쏟아붓는다. 내로남불은 없다. 톨레랑스만 있다.’ ‘책을 펴는 순간, 변화는 이미 시작된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트려 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카프카, 「변신」 저자의 말).”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단어와 문장의 껍질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 자국이 머릿속에 선명한 흔적을 남긴다. 얼어붙은 감성과 잠자는 세포가 싹을 틔워 가지를 뻗는다.’ 수려한 글솜씨를 뽐내는데 얼만큼 책을 많이 읽어야만 이렇게 수려한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자아낼 정도로 그 필력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응답하라 1988>이 드라마의 가장 큰 감동과 재미는 반짝거리는 대사들(때론 독백, 지문)이다. 멋 내지 않은, 현실을 바탕으로 한, 유치한 듯 절절한, 그래서 오글거리지 않는, 진솔하고 직설적인 명대사들이 많이 나왔다. 말에 대한 것도 하나 있는데...’
‘’딸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미국 학자가 딸 양육이 아빠의 행동변화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연구했다. 딸을 가진 남성 국회의원이나 판사들의 입법활동이나 성평등적 판결이 유의미하게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딸을 둔 남성이 CEO인 기업이 사회적 책임, 평등한 조직문화, 여성 채용비율 면에서도 높은 점수가 나왔다. 유리천장을 깨고 성공한 여성들도 대체로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 속에서 자란 것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이 책에는 문장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지혜의 폭도 넓힐 수 있는 참 좋은 책이다. 그리고 항상 옆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읽고 또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책이다. 저자는 본인의 지난 세월에 대한 삶의 내공을 ‘내 안의 끊임없는 기척이자 얼룩이고, 나를 대신해 울어 준 곡비, 숨이 차서 수면에 올라와 내뱉은 해녀의 숨비소리, 모든 유한함 앞에 마주 선 대책없는 고독과 허무의 독백, 모든 관계의 유효기간과 유통기한 앞에서 흘린 한숨과 눈물, 삶의 어느 한순간 휘몰아친 성찰과 희로애락의 고백, 세상과 세상사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투정과 시비’ 아니 그냥 넋두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정말 멋진 표현이다. 그 밖에도 아주 많은 멋진 글들이 이 책에는 곳곳에 있다. 상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이 책을 구하여 읽어보기를 권한다. 정말 참 잘 만들어진 에세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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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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