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써봤니? - 7년을 매일같이 쓰면서 시작된 능동태 라이프
김민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을 놀이처럼 접근하지 말아요. 일이 즐거워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잘 하지도 못하면서 놀듯이 건성건성 하면 성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잘 하지 못하는 일을 놀듯이 하면 직장생활이 - P8

괴로워질 수도 있어요. 차라리 놀이를 일처럼 하는 편이 쉽습니다. 놀 때 그냥 수동적으로 놀지 말고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놀아야 합니다. 놀이를 더 잘하려고 공을 들여야 합니다. 열심히 놀다 보면 놀이에서 준전문가의 영역까지 올라갈 수 있어요. 주위 애호가들 사이에서 인정도 받고 동호회에서 논객 대접도 받습니다. 그러다 어느순간 매체에서 연락이 오거나 관련 콘텐츠 기업에서 제작 의뢰가 옵니다. 노는 것이 직업이 되는 순간이 와요. 그냥 놀다고 해서 직업이 되진 않아요. 열심히 일하듯 놀아야 합니다. - P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픔의 방문
장일호 지음 / 낮은산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임신 중지와 임신 유지 사이에는 ‘선택‘과 ‘생명‘이라는 단어가 다 대표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고민과 결단이 존재한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죄‘로 다뤄 온 문화에서 성장해 온 사람에게는 특히 그렇다. 임신 사실보다 유산 사실을 먼저 알았던 날이 떠올랐다. 의사는 전체 임신에서 자연 유산 비율이 20% 정도 된다며 나에게만 일어난 불행이 아니라고 위로했다. 정작 내가 그 ‘불행‘을 무척이나 안도했다는 걸 의사는 끝내 알지 못했다.
그 일을 겪으며 나는 예상치 못했던 죄책감에 시달렸다. 죄책감이라니 가당치 않아서, 오래 괴로웠다. 고작 ‘세포‘를 보내고 눈치 없이 긴 애도를 건너는 동안 기존 사회의 통념에서 내가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사람인지 실감했다. 생명은 설명이 필요 없는 너무나 강력한 프레임이다. 이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얼마간의 망설임 앞에 반드시 서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각자가 구성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 P223

전제를 끌어안고 산다. - P224

내가 지난 몇 년간 ‘낙태죄‘ 이슈를 취재하며 들었던 가장 아름다운 말은 《배틀그라운드》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이유림 씨로부터 왔다. 낙태가 더 이상 ‘죄’가 아닌 세상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재생산권‘을 논의해야 하는 시점에 도착했다. 재생산권을 유림 씨는 이렇게 정의했다. "인간이 다음 인간을 이 세계에 데리고 오는 일이잖아요." 나는 그 말을 받아 적다가 잠시 멈췄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그 문장에 굵게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여러 차례 그렸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시작하지만 여성의 몸에서 끝나지 않는다. "재생산은 어느 사회에서든 단지 구성원을 수적으로 충원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으며,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 가치 등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결국, 재생산권이야말로 ‘낙태죄‘를 둘러싼 문제의 본질이다. 평등하게 성적 관계를 맺을 권리, 출산 여부를 결정할 권리, 자녀를 건강하게 양육할 권리 등을 포괄하고 있는 재생산권을 보장할 때만이 생명권 - P225

역시 온전히 보장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낙태를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충돌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그동안 국가가 통제해 왔던 재생산권을 되돌려 받는다는 의미로 논쟁을 가져와야 한다.
문제는 ‘앞으로‘다. "낙태가 ‘합법‘이 되는 것과 임신 중단이 여성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지는 것 사이의 거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투쟁이 필요하다." 사회경제적 사유로도 임신 중지를 가능하게 한다거나, 주수를 제한하는 방법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계속해서 여성을 처벌하고 차별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낙태죄 폐지 운동은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없애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을 새로 만들고, 기존의 법을 여성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과정을 동반해야 한다." - P226

추천의 말
책의 말이 허물어지는 자리에서
김애란


40대는 책을 버리는 시기라 생각한 적이 있다. 꼭 그때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 그런 순간을 맞는다. 지금껏 자신이 믿은 것과 기댄 것, 지킨 것의 목록 앞에서 건조하고 회의적인 얼굴로 책을 솎아 내는 순간을 40대는 그간 자신이 읽은 책에 자기 삶을 포갠 뒤 한번 더 진지하게 ‘어떻게 살 것인가?‘ 묻는 시기다. 그리고 이즈음 많은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한다.

개인적인 고백을 덧붙이자면 40대는 ‘옳은 말‘을 의심하고 싫증 내는 때이기도 하다. 그 말이 틀려서가 아 - P253

니라 ‘너무 자주 들은‘ ‘다 아는 말‘이라 여기기 쉬워서다. 그러나 그 ‘다 아는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이 들어 있는지. 그리고 그 삶 하나하나는 얼마나 구체적이고 육체적인지. 우리가 지레 빤한 말이라 치부한 그 말이 누군가에는 목숨 줄이고, 실존의 테두리임을 다시 깨닫는다. 그 선이 비단 타인뿐 아니라 나도 지켜 주는 선이었음을 깊이 수긍하면서.

그러니 많은 이들이 이미 알거나, 안다고 착각하는 이야기를 한번 더 보게 하고, 읽게 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 지난함을 알면서도 무언가 계속 발화하는 이들을 본다. 장일호도 그런 이중 하나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온전하고 무결한 화자가 아니며, 이따금 "술병 뒤에 숨는", "아픈 게 자랑인" 기자이고 여성이다. 그래서 내게는 이 책이 ‘독서‘로 한번 자기 자리를 세웠던 이가, 인생의 예기치 않은 사건 앞에서, 책 속의 말들이 다 무너지는 걸 목도하고도 ‘다시 책 앞에 선 사람의 이야기‘로 읽혔다. 책 버리기 쉬운 나 - P254

이에, 그래도 이상할 것 없는 시기에, 하나의 책을 전과 다른 방식으로 두 번 읽은 사람의 이야기로.

더불어 이 책은 사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다 아는 말‘이란 없으며, 그런 ‘앎‘은 앎이 아니라고, 그러니 이웃뿐 아니라 나자신을 위해서라도 새 말이 지나가는 길을 함께 터 주고 넓혀야 한다고 일러 준다. 가끔은 그 일을 ‘독서’라 불러도 좋다고 조용히 끄덕이면서. 그 발화가 고맙다. 한두 번이 아닌 누군가의 일생에 걸친 발화라 더 그렇다. - P2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에게, 몽골 - 몽골로 가는 39가지 이야기 당신에게 시리즈
이시백 지음, 이한구 사진 / 꿈의지도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이렇게 되어먹지 못하고, 신성모독이며, 보드카에 취하는 게 전부였던 여행이건만 이후 ‘아무 것도 볼 것 없는‘ 몽골에 깊이 함몰되고 말았다. 일부 물정 모르는 이들이 "거기 가 봐야 뭘 볼 게 있다고 한 번도 아니고 자꾸 간대?"라고 묻는다면 "볼 게 없는 거 보러 가는 겨."라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그 뒤로 여름이면 정기화물처럼 몽골항공에 몸을 싣게 되었다. - P18

고비(Gobi)에 가면 무엇을 보게 될까. 아무 것도 없다. 하릴없이 나뭇잎 뒤에 숨어서 목이 쉬도록 우는 풀벌레도 없으며, 조잘대며 흐르는 개울도 없고, 한국 사람이 제 안방보다 더 좋아한다는 노래방도 없고, 악어 쇼나 연에 매달려 타는 놀이기구도 없다.
고비는 그렇게 ‘없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럼 뭐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곳에 뭘 보러 가느냐고 묻는다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러 간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곳에 가면 무얼 하면 좋을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왜 사람은 무얼 해야 할까‘ 이런 불온한 질문이 가슴에서 뭉글거린다면 서둘러 짐을 꾸려 고비로 날아가야 한다. - P23

서두름이 없이, 그러나 게으름도 없이 터벅터벅 사막을 걷는 낙타를 보면 성지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가 연상된다. - P47

별에 관한 몽골의 설화에 이런 것이 있다.
하늘에는 엄청나게 넓은 초원이 있다. 그곳에도 양떼가 있고, 그를 지키는 목동이 있다. 밤이 되면 하늘 초원의 목동은 모닥불을 피운다. 그리고 잠을 잘 때 몸에 덮는 가죽 덮개를 펼친다. 오래된 가죽 덮개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있는데, 그 사이로 모닥불 빛이 새어나오는 것이 별빛이라고 믿었다.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별이 있을까.
광활한 태허의 천궁에 보석처럼 박힌 별들의 수는 ‘못 헤아릴 수’ 이다. 그러나 도심에서 바라보는 별은 어떠한가. 쇠약한 별빛은 고사하고, 24시간 야식 배달이니 찜질방의 네온사인 불빛에 시들어 버린다. 그마저 즐비하니 가로선 빌딩들에 가로막혀 좌면우고하기 바빠, 고개를 뒤로 꺾고 손바닥만하게 열린 밤하늘을 치켜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몽골의 하늘은 180도 반구로 펼쳐진다. 상상해 보라. 동서남북으로 끝없이 펼쳐진 반구의 하늘에 가득 들어찬 별들의 무리를 발이 닿는 땅 끝부터 반짝이는 별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탁 막힌다.
엉기히드 부근에서 만난 별들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반구의 하늘은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그야말로 검은 공간보다 반짝거리는 별들이 더 많았다. 몽골의 설화에 따르자면, 저 하늘 초원의 목동이 덮고 자는 가죽 덮개는 너무 해지거나 좀이 슬어서 온통 구멍투성이임이 틀림없었다. 그 많은 별들이 땅과 하늘이 맞닿은 지평의 시점부터 시작하여 반구를 채우고 도처에서 별똥별이 폭죽처럼 동시다발로 터지느라 미처 탄성을 내지를 틈조차 얻지 못했다. 초원의 여름밤은 구름 한 점 없이 공활하여, 진주를 빻은 듯한 별들을 검은 벨벳 위에 흩뿌렸다.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운 별들을 보 - P185

자니,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하는 되어먹지 않은 노래를 부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어느 게 누구 것인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듯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별들은 조금만 까치발이라도 디뎠다가는 쟁그랑 소리를 내며 별에 머리를 부딪칠 듯했다. 가만히 벌판에 누워 바라보자면, 온몸으로 사정없이 떨어지는 별똥들에 몸은 이내 전신 타박상을 입고, 가슴에는 영 치유될 수 없는 내상을 입고 마는 것이다. - P187

몽골 여행의 아름다움은 절반이 길에 있다.
길이 어디에 있는가 없다. 그대의 발길이 닿는 곳이 길이다. 말하자면 망망한 초원은 아무렇게나 가면 길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행하는 차들은 앞서 간 차들이 남긴 바퀴 자국들을 따라 달린다. 온통 풀로 덮인 초원에도 차들이 오가며 밟은 자리에는 흰 넥타이처럼 곧게 이어진 길이 남게 된다. 대체로 직선으로 남지만, 때로는 이리저리 구부러지기도 한다. 초록 도화지에 흰 크레용으로 한 줄 그으면 몽골의 길이다. 시력이 닿지 못할 만큼 막막하게 이어진 길을 보면 무작정 걷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지평선 끝으로 난데없는 바다가 나타난다. 점점이 떠 있는 섬이 보이고, 어촌의 풍경을 닮은 야트막한 산의 능선도 가물거린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가도 그것은 닿을 수가 없다. 지르테(신기루)이다. 초등학교 때 읽던 탐험가들의 글 속에나 읽던 신기루가 도처에 널려 있다. 물이 떨어진 채 터덜거리며 걷는 여행자라면 환장할 풍경이다.
사면팔방 아무 것도 눈을 가리는 것이 없으며, 나를 기억하거나 내가 눈치를 보아야 할 사람도 없다. 살아 있는 어떤 생명체도 없이 비어 있는 적멸의 길을 걷다보면 피아가 사라지고, 주객이 소멸한다. 직장상사며, 집에 두고 온 금붕어며, 적금통장과 주식 잔고는 잠시 내려놓기 바란다. 살면서 가슴에 못처럼 박혔던 분노와 증오와 질시와 슬픔을 지나치는 길처럼 던져 버리라. 함께 걷는 동행이 없어도 좋다. 귀에 꽂을 음악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 P221

한국을 몽골말로는 ‘솔롱고스‘라 한다.
솔롱고스라는 말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첫 번째는 몽골말의 ‘무지개‘와 관련지어, 고려를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고 예부터 불렀다는 설이다. 두 번째로는 고려시대의 ‘색동저고리‘에서 기인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족제비‘를 뜻하는 몽골말 ‘솔롱‘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심지어 ‘한단고기‘에 등장하는 ‘다물(다물)‘이 고조선과 고구려를 상징하는 말로서, 그 어원이 다섯 가지 오방색에서 기원했으며, 그것이 오색영롱한 무지개나 색동저고리의 빛깔과 이어진다는 주장까지 있다.
이처럼 다양한 설 가운데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세 번째 설이다. 몽골학의 세계적인 거장인 프랑스의 펠리오의 말에 따르자면, 몽골말의 ‘솔롱(solon)‘은 족제비과의 동물을 지칭하는데, ‘몽골비사‘에 고려를 가리키는 ‘솔롱가(Solonga)‘는 ‘족제비를 가진 사람‘이란 뜻이 된다. 솔롱고스(Solongos)는 솔롱고의 복수로 ‘족제비 가죽을 가진 부족‘이란 뜻이다. 주로 담비나 족제비 같은 모피로 몽골과 교역했던 당시 고려를 지칭한 데서 유래된 말이라 하겠다. 서역과 중앙아시아에서 부여와 발해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담비길‘이라 부른 것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 P237

그러거나 말거나 한국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나라를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고 믿고 싶어 한다. 사람은 사실을 믿기보다, 원하는 것을 믿는 법이다. 다른 민족이 제 나라를 향하여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고 칭송하는 것에 흡족해 할 뿐이다. - P240

바람에 날리는 모래와 사태가 나면서 내는 소리 때문에 홍그린 엘스는 ‘우는 모래언덕(Duut Mankhan)‘이라고 불린다.
아무 때나 우는 게 아니다. 모래 우는 소리를 들으려면 사구 꼭대기에 올라야 한다. 아래에서 보면 별 것 아닌 듯해 보여도, 막상 사구에 오르는 길은 여간 힘이 든 게 아니다. 두 걸음 오르면 한 걸음이 주르르 미끄러져 내리는 모래 때문에 가파른 사구를 오르는 일은 도로(徒勞)의 깨달음을 얻게 한다.
전날 비가 내려 모래가 단단히 굳었다면 힘이 훨씬 덜 든다. 그러나 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에 해발 800 미터급의 모래 언덕을 오르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그냥 오르는 것도 힘이 드는데, 내려올 때 미끄럼을 타겠다고 플라스틱 썰매를 기어이 들고 오르는 이들이 있다.
말리지 말라. 거북이 등 같은 썰매를 들고 올라온 여행지는 막상 정상에 - P281

도착하면 쓰러져 정신을 못 차린다. 그때 재빨리 팽개쳐진 썰매를 타고 내려오면 된다.
홍그린 엘스의 사구에 오르는 일은 놓칠 수 없는 경험이다. 숨이 턱에 차고, 뜨거운 철판처럼 달궈진 모래에 발이 익고, 그냥 미끄러져 내려가고 싶다는 유혹과 무수히 싸우면서 한 발, 한 발 딛고 올라서면 알타이를 넘어온 서늘한 바람이 그대를 맞아 줄 것이다.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는 정상에서 바람에 수시로 깎여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래톱을 딛고 서서, 망망한 사구의 바다와, 그 너머의 알타이를 바라보는 장쾌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칼날 같은 모래톱에 오를 때마다 나는 끝없이 하늘로 올라가는 몽골의 장가(오르틴도)를 즐겨 듣는다. 좋아하는 노래를 엠피 쓰리에 담아 사구에 앉아 들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바람이 이내 지우고 말 이름이지만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을 모래톱에 적어 두라. 바람이 우표 딱지도 없이 그대의 안부를 전하도록.
모든 길에는 샛길이 있다. 비스듬히 누운 모래언덕을 따라 지그재그로 오르면 덜 힘이 든다. 체력이 달려서 사구 너머의 풍경을 만날 수 없는 여행자라면 그 길로라도 오르라. 그러나 가능하면 눈치 보지 말고 정면으로 가파른 모래언덕을 향하여 올라 보라. 일직선으로 달라붙어 오르는 모래언덕의 고행이 있어야 정상에서 만나는 감동이 깊어지는 것이니.
내려올 때는 여러 명이 함께 천천히 모래를 발로 무너뜨리며 내려온다. 발에 무너진 모래들이 저 깊은 곳에서 울어대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땅이 쩡쩡 울며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묵중한 모래들의 울음소리를. - P284

따지고 보면 몽골의 초원은 그리 정갈하지가 않다. 먼지와 무엇인가가 반납해 놓은 배설물들의 분진이 켜켜이 쌓여 있다. 초원을 여행한다는 것은 먼지 닷 도와 가축들의 마른 배설물 가루를 두 되쯤 들이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초원은 질산, 인산, 칼리로 만든 비료가 없이도 비옥해지고, 풀들은 꽃들을 피우는 것이리라. - P287

지붕도 없이 돌로 삼면을 둘러싼 측간은 그야말로 전면이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었다. 아침에 그 측간에 앉아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이슬에 젖은 풀들이 모락모락 김을 내뿜는 초원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완전한 배출과 정화의 쾌감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돌 틈에서는 새가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생음악까지 들려준다. 천상의 측간이 따로 없었다. 막상 그렇게 활짝 열려 있으니 누가 그 앞에 얼쩡거리겠는가. 관음증이야 몰래 숨어서 들여다볼 구멍이 있어야 발현하는 것. 초원을 향해 활짝 열려진 측간이야말로 가장 안전하고, 상쾌한 변소였다. - P291

몽골 사람들은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텡기스라는 호수를 건너 오는 강가에 자리잡는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바타치칸이다. 몽골족은 바타치칸의 계보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늑대처럼 용맹스럽고 흰 사슴처럼 아름다운 부족이다. 몽골이라는 말은 ‘용감하다‘라는 뜻이다. - P293

내가 가장 먼저 배운 몽골말이 ‘쥬게르‘이다.
쥬게르는 두 번 붙여서 말한다.
쥬게르, 쥬게르!
괜찮아 괜찮아.
낯선 이국말이 내 귀에 익숙해질 만큼 ‘쥬게르‘는 몽골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말이다.
나는 여행 중에 몽골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했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그들은 ‘쥬게르‘를 되뇐다. 차가 빠져서 두 끼를 굶어도 쥬게르! 일행들이 기다리는 목적지까지 달리다가 캄캄한 밤길에 길을 잃어도 쥬게르! 달리던 차의 앞바퀴가 빠져서 굴러가도 쥬게르! 차축이 우지끈 부러져도 쥬게르! 100킬로미터만 가면 된다더니 200킬로미터를 가도 쥬게르…
그 당시에는 말도 안 된다는 그 여유가 막상 지나고 나면 그 말 그대로 ‘쥬게르‘였다.
이 말이 내 귀에 모래알처럼 남게 된 것은 그만큼 내가 괜찮은 일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람에 날리는 모래톱처럼 늘 안절부절 못하고, 시계의 초침보다 더 앞서 서둘러야 하고, 남들이 다한다는 재태크를 놓칠까 노심초사하며, 좌불안석 조급해 하던 생활이 몽골의 막막한 광야에서는 부질없는 노력일 뿐이다. 사교육이며, 청약통장이며, 주식투자며, 출근부나 근무평가도 없는 이 곳에는 ‘쥬게르!‘만이 있을 뿐이다. 반구로 열려져 티끌 하나 숨길래야 숨길 수 없으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에 뛰어 봐야 벼룩이니, 조금 앞서봐야 무얼 하며, 뒤처진다고 별일이 있겠는가.
쥬게르, 쥬게르! - P311

그것은 자연의 엄청난 위력을 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유목민들이 얻은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지혜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고, 때를 기다리는 것. 조드와 모래바람과 사막과 혹한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것들에는 끝이 있으며, 지나고 나면 괜찮아진다‘는 깨우침이 아니었을까. 사람의 힘을 과신하며 자연의 질서마저 좌지우지하려는 현대인들에게 ‘쥬게르‘란 말은 한 번도 부족하여, 두 번씩 겹쳐 들어야 할 말이다. - P3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진과 유진 - 개정판 이금이 청소년문학
이금이 지음 / 밤티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물 몇 해밖에 안 살았지만 삶이란 누구 때문인 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시작은 누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자신을 만드는 건 자기 자신이지. 살면서 받는 상처나 고통 같은 것을 자기 삶의 훈장으로 만드는가 누덕누덕 기운 자국으로 만드는가는 자신의 선택인 것 같아. 안 그러니?" - P195

작은유진이가 눈을 감더니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작은유진이의 춤은 그 애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 놓은 듯했다. 작은유진이는 더 이상 집에서 도망 나온 애가 아니었다. 학원 대신 춤추러 다니던 애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애도 아니었다. 그래서, 반항이든, 자학이든, 자포자기든, 그래서 춤을 추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냥 춤이 좋아서 춤을 추는 아이일 뿐이었다. 춤은 그 애를 자기 자신으로 돌려놓았다. 춤을 추는 그 애의 표정은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 애의 춤은 그 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그 애의 언어 같았다. 우리는 그 애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함께 춤을 추었다. 작은유진이에 비하면 우리의 춤은 어설픈 막춤이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몸짓으로 완벽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바람이 우리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보기 좋게 날려 주었다. - P2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왜 이렇게 웃긴가
이반지하 지음 / 이야기장수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토록 정신만이 혼자 세상을 감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반드시 육체를 적당히 혹사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함께 세상에 맞서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삶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집 근처 (꺅) 게이 스피닝과 (욱) 부치 웨이트 학원을 차례로 체험하고 나자, 절대로 이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좀더 기존 사회의 전형과 틀을 답습한, 너무 열려 있거나 전복적이지 않은 에너지였다. 대안적이지 않은 시간이 목말랐다. 그러니까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정상적인 분위기의 꽉 막힌 운동 사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 P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