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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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필요한 것, 아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타당해 보이는 선을 따라가는 삶을 상상하며 살았으면서도 어느 정도 자유를 허용하는 다른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겁니다. 수동적으로 듣는 게 아니라, 귀를 기울여야 해요.
귀를 기울인다는 건 공간과 시간과 침묵이 필요한 공동체 행위지요.
읽기는 귀 기울이기의 한 방법이고요.
읽기는 그냥 듣기나 보기처럼 수동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행동이죠. 여러분이 하는 행동, 끊이지도 않고 알아들을 수도 없이 지껄이고 외쳐 대는 매체의 돌격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속도대로 읽는 겁니다. 여러분을 압도하고 통제하기 위해 빠르고 거세고 큰 소리로 밀어붙이는 내용이 아니라, 여러분이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이고 싶은 내용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분이 어떤 당부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강매를 당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읽을 때는 보통 혼자라 해도 다른누군가의 정신과 교감하지요. 세뇌를 당하거나, 조작당하거나, 이용당하는 게 아니에요. 상상력의 현장에 함께한 거죠. - P26

문해력이 중요한 이유는 문학이야말로 사용 설명서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매뉴얼, 우리가 여행하는 ‘삶‘이라는 나라에 가장 유용한 안내서예요.

의식적으로 어떤 문제를 다루거나 어떤 특정한 결과를 끌어내려고 쓴 시나 소설은, 그 작품이 아무리 강력하거나 유익하다 해도 첫째가는 의무과 특권을 포기한 겁니다. 작품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요. 글의 제일 중요한 임무는 단순히 올바르고 진실한 형태를 주는 말을 찾아내는 거예요. 그 형태가 곧 글의 아름다움이자 글의 진실입니다.
잘 만든 토분은 그게 쓰고 버리는 테라코타든 고대 그리스항아리든 상관없이 토분일 뿐, 토분 이상도 토분 이하도 아닙니다.
제 마음속에서는 잘 만든 글도 그저 말들의 행렬이에요.
제 말들의 행렬을 쓸 때 저는 제가 생각할 때 진실하고 중요한 것들을 표현하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에세이를 쓰면서도 그러고 있죠.
하지만 표현은 계시가 아니고, 이 에세이는 쓸 때 예술성이 - P94

들어간다고 해도 예술 작품이기보다는 메시지입니다.
예술은 메시지 이상의 뭔가를 드러내죠. 소설이나 시는 쓰고 있는 저에게 진실을 드러낼 수 있어요. 제가 진실을 집어넣는 게 아니라요. 이야기를 만들면서 그 속에 든 진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독자들은 그 속에서 다른 진실을 찾을 수 있지요. 저자가 전혀 의도한 적 없는 방식으로 그 작품을 이용할 수도 있어요. - P95

전 제 내면의 교사에게 더 믿음을 갖고 있어요. 이 교사는 이해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기에 섬세하고 겸손하답니다.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고도 모순된 의견들을 담아내지요. "너희가 날 이해하든 말든 상관없어"라고 중얼대는 오만한 예술가의 자아와 "이걸 들으라고!"라며 외쳐 대는 설교자 자아 사이를 중재할 수 있어요. 진실을 선언하지 않고, 제시만 하지요. 고대 그리스 항아리를 가져다가는 이렇게 말해요. "이걸 자세히 봐요. 연구해 봐요. 연구하면 보상이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 그릇에서 찾아낸 것들을 어느 정도 말해 줄 수 있어요. 당신도 이 그릇에서 그런 걸 몇가지 찾을지 모르지요."
대부분의 예술가가 그렇듯 저도 제 예술이 제게 가르쳐 준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기 때문에, 내면의 교사가 필요해요. 하지만 그 교사조차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요. 결국 교사는 아이들에게 메시지를 기대하라고 가르친 존재니까요. 교사의 본능은 "명확"하고 명백해지는 거예요. 제 본능은 해설 없이 더욱 명쾌 - P97

하게 다가가려 노력하는 것이고요. 제 일은 의미를 완전히 작품 자체에 포함시켜서, 살아 있고 변화할 수 있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예술가가 도덕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발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선명하게 말하되, 그 말들 주변에 침묵의 영역을, 빈 공간을 남겨 두어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다른 진실, 더 나아간 진실과 통찰들이 생길 수 있게 하는 거죠. 그 공간이야말로 이런 말들이 나오는 곳이니까요. - P98

내가 왜 시애틀에 - P116

있는 게리 박물관은 틀렸다고 생각하고 왜 샌프란시스코 순수 예술의 궁전은 옳다고 생각하는지 자문하다가는, 왜 내가 임신 중단권이 옳다고 생각하는지나 고문이 틀렸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하려들 때와 똑같이 어마어마하게 힘들고 아무리 해도 만족스럽지 않은 고민에 빠져들고 만다. 그리고 나는 윤리적인 질문과 미학적인 질문 사이에 정말로 종류의 차이가 있다거나 중요성에 차이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진술을 더 파고들자면 철학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할 테고, 나에겐 철학적 이해가 없다. - P117

인쇄물을 마주하고 의식을 유지하지 못하는 데 대한 자기만족은 의심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또한 나는 우울하게든, 약간은 고소해하면서든 책이 사라져 간다는 추정에도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나는 책이 남을 거라 생각한다. 다만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책을 읽지는 않을 뿐이다. 왜 지금 우리는 모두가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인간 역사의 대부분 시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은 글을 아예 읽지 못했다. 읽고 쓰는 능력은 힘 없는 자와 힘 있는 자의 경계를 표시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힘이었다. 즐거움은 고려 대상이 - P124

아니었다. 상업 기록을 유지하고 이해하는 능력, 먼 거리에서도 암호를 써서 소통할 수 있는 능력, 신의 말씀을 지키고 스스로의 의지와 스스로의 시간에 따라서만 전도할 수 있는 능력, 이런 것들은 타인을 통제하고 스스로의 권력을 강화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모든 문자 사회는 문해력을 (남성) 지배 계층의 구조적 특권으로 삼아서 시작했다.
문해력은 아주 서서히 아래로 흘러들고, 덜 비밀스러운 만큼 덜 성스러워졌으며, 더 대중적이 될수록 직접적인 영향력이 덜해졌다. 로마인들은 결국 노예와 여자 등 일반 대중까지 읽고 쓰게 했으나, 그들을 계승한 종교 기반 사회로부터 응보를 받았다. 암흑시대, 기독교 사제는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평신도는 대부분 읽을 줄 몰랐고, 많은 여자들도 읽을 줄 몰랐다. 아니,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오늘날 무슬림 사회 몇 군데가 그러하듯, 읽기는 여자에게 부적절한 행위로 여겨졌다.
유럽에서는 중세 전체를 문자의 빛이 서서히 확장되고, 그 빛이 르네상스를 밝히고, 구텐베르크와 함께 찬란해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다음에는 어느새 노예들이 글을 읽고, 이런저런 선언문이라는 종잇조각들과 함께 혁명이 일어나고, 거친 서부 전역에서 여교사들이 총잡이들을 대신하고, 사람들이 뉴욕에 최신 소설을 싣고 온 증기선에 몰려들어서 "어린 넬이 죽었어요? 죽었어?"라고 외치고 있다. - P125

내가 ‘책의 세기 라고 불렀던 과거, 많은 사람이 소설과 시를 읽고 즐기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때라 해도, 얼마나 많은 사 - P130

람이 졸업 후까지 독서에 많은 시간을 들이거나 낼 수 있었겠는가? 그 시절엔 대부분의 미국인이 힘들게 일했고 오래 일했다.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은 늘 있었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언제나 적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그 숫자를 모르는 건, 그때는 걱정할 설문조사 결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독서에 시간을 낸다면, 그건 그게 직업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거나, 다른 매체를 바로 접할 수 없거나 다른 매체에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독서를 즐기기 때문이리라. 퍼센트에 대한 한탄은 설교조를 유도한다. 우리가 책을 읽지 않는다니 나쁜 일이다. 더 읽어야 한다, 더 읽어야만 한다? 우리는 댈러스에 사는 졸음 많은 친구에게 집중하느라 우리 동족을, 단지 읽고 싶어서 읽는 쾌락주의자들을 잊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사람들이 언제는 다수였던가?
나도 산전수전 다 겪은 와이오밍의 어느 카우보이가 30년동안 안낭 속에 『아이반호Ivanhoe』를 한 권 넣고 다녔다는 사실, 뉴잉글랜드의 여성들이 브라우닝 시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게 좋다. 아직도 그런 독서가들은 있다. 우리의 학교들은 이제 그런 사람들에게(아니 다른 누구에게도) 별로 쓸모가 없지만, 최악의 학교라 해도 책 한 권을 심장에 품고 나오는 아이들은 있다.
물론 책은 이제 "오락 매체"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실제 즐거움을 전한다는 점에서는 사소하지 않다. 경쟁을 보라. 공영 라디오가 정부의 적개심 탓에 무력해진 사이, 의회는 몇몇 기업이 민영 - P131

라디오 방송국을 사서 품질을 떨어뜨리도록 허용했다. 텔레비전은 계속 무엇이 재미있느냐에 대한 기준을 떨어뜨리다 못해,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두뇌를 마비시키거나 적극적으로 추잡한 상황에 이르렀다. 할리우드는 리메이크를 리메이크하면서 역겨움에 도전하는 가운데, 가끔씩은 획기적인 작품이 우리에게 영화를 예술로서 대할 때 무엇이 가능한지 돌이켜 준다. 그리고 인터넷은 모두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지만, 아마도 그 포괄성 때문에 웹서핑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미학적인‘ 만족감은 이상할 정도로 적다. 컴퓨터로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시나 책을 읽을 순 있겠지만, 이런 물건들은 웹으로 접근할 수 있을 뿐 웹이 창조한 것도 아니고 웹 고유의 것도 아니다. 어쩌면 블로그는 네트워킹에 창조력을 얹으려는 노력일 수도 있겠고, 블로그가 미학적인 형태를 발전시킬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성공하지 못한 게 확실하다.
게다가 읽는 사람은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수동적인 즐거움과 자신들의 즐거움을 다르게 인식한다. 일단 버튼을 눌러 켜면 TV는 계속, 계속, 계속 흘러나오고 그저 앉아서 멍하니 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독서는 능동적이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행동이고, 내내 깨어 있어야 한다. 사실상 사냥이나 채집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스스로 말하지 않기에, 책은 도전이 된다. 책은 물결치는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 줄 수도, 요란한 웃음소리나 거실에 울리는 총소리로 귀를 먹먹하게 만들 수도 없다. 책은 머릿속으로 귀 기울여야 한다. 책은 영상이나 화면처럼 눈을 움직여 주지 않는다. - P132

스스로 정신을 쏟지 않는 한 정신을 움직이지도 않고, 마음을 두지 않는 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해 주지 않는다. 단편소설 하나를 잘 읽으려면 그 글을 따라가고, 행동하고, 느끼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실상 그 글을 쓰는 것만 빼고 다 해야 한다. 읽기는 게임처럼 규칙이나 선택지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읽기는 작가의 정신과 능동적으로 협력하는 작업이다. 모두가 빠져들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책은 재미있는 물건이다. 첨단기술을 뽐내지는 않지만 복합적이고 극도로 효율적이다. 작고 경제적이며, 감상하기나 다루기나 기분 좋을 때가 많고, 수십 년이나 어쩌면 수백 년까지도 갈 수 있는 정말 뛰어난 장치다. 선을 꽂거나 활성화하거나 기계로 실행할 필요가 없다. 빛과 사람의 눈, 그리고 사람의 머리만 있으면 된다. 단 하나뿐인 무엇은 아니지만, 수명이 짧지도 않다. 책은 오래간다. 책은 믿을 수 있다. 당신이 열다섯 살 때 어떤 책이 뭔가를 말해 줬다면, 오십 살에도 같은 말을 해 줄 것이다. 정작 당신의 이해는 완전히 달라져서 아주 새로운 책을 읽는 것 같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책은 물건이라는 사실, 물리적으로 존재하며, 내구성이 있고, 무한히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가치재라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 P133

어린 아기들에게 물론 잠은 자연스러운 상태다. 아기들은 천사처럼 지조 있게 그리로 돌아가며, 배고픔이나 불편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면 우리에게 자신들의 슬픔과 분노를 알린다. 아기가 깨어 있는 시간은 드넓고 잔잔한 바다에 흩어진 작은 섬들이다. 그 섬들이 하필 부모에게 수면 욕구가 가장 절실한 곳에 끊임없이, 시끄럽게 모인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성장한다는 건 점점 더 자주 깨어 있는다는 뜻이다. 아기가 깨어 있는 시간을 나타내는 섬들은 점점 늘어나다가 이어 붙어 낮의 대륙이 되고, 우리 어른들은 목적을 가지고 그 대륙을 돌아다니고 일을 하면서 우리는 깨어(awake) 있으니 곧 자각하고(aware)있다고 확신한다.
명상을 행하는 사람들이 증언하다시피, 그 둘은 같지 않다. 하루 종일 또렷하게 깨어 있으면서 한순간도 자각하지 못할 수 있다. 다중 작업은 가장 최신이자 현재까지 가장 성공적인 자각 회피 - P142

방법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차를 몰면서 휴대폰으로 브로커와 대화하는 사람들은 결코 자각으로 통하지 못하는 좁은 분산 의식에숙달했다. 그러나 우리가 자각하든 그냥 깨어 있든 간에, 우리가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전자 기구들을 아무리 공급받는다 해도 여전히 잠의 바다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밤이면 밤마다 우리에게 불가사의한 곳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요구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잠이 들 수 있고, 그 의지가 영원히 좌절당하는 것 같은 때라도 사실 밤새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불면증은 형언할 수 없이 비참하지만, 계속 잠을 자지 않는 상태는 정신과 신체에 너무나 파멸적이기 때문에, 50시간 이상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면 끔찍한 고통을 가해야만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잠들지 않을 수도 있으나,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실패하고 만다. 아무리 의식을 붙들고 있으려 해도, 의식이 녹아내릴 때가 오면 붙잡을 도리가 없다. 의식은 그냥 꺼지고, 온 우주를 조용히 데려간다. - P143

그래서, 우리가 여자들에게 무엇을 배우느냐는 질문에 답해 볼까요? 제가 첫 번째로 내놓을 거대한 일반화는 우리가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운다는 겁니다.
지금 오리건에 이르기까지, 1000년이 넘도록 모든 사회에서 여자들은 어떻게 걷고, 말하고, 먹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다른 아이들과 놀지, 그리고 어떤 어른들을 공경해야 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사랑해야 할지에 이르는 대부분의 기초적인 지시를 제공해 왔어요. 기초 기술이자, 기본 규칙들이죠. 살아남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산다는 놀랍고도 복잡한 일 전체예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대부분의 장소에서 아기와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때로는 온전히 어머니와 할머니와 이모, 고모, 이웃, 마을 여자들, 유치원과 유아원 교사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어요. 이 전통은 지금 미국에서도 이어지죠. 아이들을 데리고 슈퍼마켓에 온 젊은 어머니를 볼 때마다, 사실은 인생 학자이며 놀랍도록 복합적인 교육 과정을 가르치는 교사를 보는 거예요. 그 사람이 잘 가르치느냐, 썩 잘 가르치진 못하느냐는 규칙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요. 거의 늘 가르치는 건 그 사람이에요.
그들이 가르치는 기초 기술들은 대개 성별이 무관해요. 남자아이도 여자아이도 배우죠. 사회적인 기술에 이르면 파란색이나 분홍색이 주어지고, 여자아이는 어른들과 있을 때 얌전하고 예의 바르게 굴라고 배우는 반면 남자아이는 소리를 지르고 성가시 - P149

게 굴도록 배운다거나, 여자아이는 머리에 꽃을 꽂고 춤을 추면 칭찬을 받지만 남자아이가 그러면 부끄러워하게 한다거나 할 순 있겠죠. 하지만 전반적으로 여자들이 가르치는 기초 기술과 예의는 성별을 아울러요. 반대로 어린아이들이 남자들에게 배우는 건 성별화될 때가 많죠.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분홍색과 파란색이 섞이지 않게 하는 데 관심이 많을 수 있어요. 아버지들은 아이들에게 성 역할을 가르칠 때가 많죠. 남자애에게는 남자다워지는 방법을, 여자애에게는 여자다워지는 방법을요. 남자들은 성장하는 남자애들의 교육은 완전히 넘겨받으면서, 여자애들에 대한 추가 교육은 무시할때도 많아요. 수천 년 동안 여자애의 교육은 거의 전적으로 집안과 여성이 맡았고, 아직도 그런 곳이 많아요. 남자들이 자기 딸이 아닌 여자애들을 가르치는 건 상당히 최근에 생긴 현상이죠. 수천 년 동안 집 밖의 법은 남성 사제들이 정했고, 집안에서는 가족 중 아버지가 그 법을 집행하면서 딸들에게는 복종밖에 가르치지 않았어요. 여섯 살쯤이 지나면 남자애들은 남자에게 배우고 여자애들은 여자에게 배우는 게 일반적인 규칙이었고, 성별 구별과 위계, 퍼다나 샤리아 법은 절대적이 될수록 더 진짜가 됐어요.
특정 나이가 지난 남자애에 한하여 남성 지식만 가르치면서 남자들은 어린아이에게 공동체의 예의와 도덕을 가르치는 중요 - P150

역할을 여자들에게 맡겼어요. 성별 무관하게 사람이 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을요. 어쩌면 여기에 변화의 기반이, 어쩌면 전복의 기반까지도 풍성하게 있을지 몰라요. - P151

공적인 남성형 가르침과 사적인 여성형 가르침은 다를 수 있고, 그 차이가 혼란스러울 수도 있어요. 슬럼가에 사는 홀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사회가 스스로를 존중하고 정직한 시민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한다고 가르치지만, 그 아이들이 길거리 지도자인 젊은 남자들에게, 또 너무 자주 교사와 경찰관에게 배우는 것은 그들이 한 가지 역할밖에 허용되지 않는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며 그 역할이란 중독자와 범죄자가 되고 쓸모없거나 그보다 더 나쁜 존재가 되는 것일 때처럼요.
아니면 어떤 가족이 아들들을 평화롭고 자비롭게 사는 이야기로 키웠는데, 남성 기관이나 군대가 그 아이들을 전쟁 이야기에 밀어 넣어, 사람을 죽이고 가차없이 잔인해지도록 내몰릴 때도 그렇지요.
아니면 어떤 어머니가 딸들을 요리와 살림 같은 전통적인 기술을 귀중하게 여기는 전통으로 키웠는데, 사업가와 정치가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이야기로 그런 일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믿게 할 때도 그렇죠. 아예 일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고 말이에요.
아주 자주 반복되는 이야기 하나는 우리에게 여자들은 타고나기를 모험심이 없고 보수적이어서 전통 가치를 잘 지킨다고 해 - P153

요. 정말 그런가요? 남자들이 스스로를 혁신가이자 거물로, 사회의 방식을 바꾸는 사람들이자, 새롭고 중요한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들로 볼 수 있게 하는 이야기는 아닐까요?
전 모르겠네요. 생각해 볼 가치는 있겠지요. - P154

내가 여자라면, 왜 난 남자들이 중심이고 우선이며 여자들은 주변에 부차적으로 나오는 책을 쓰고 있는 거지? 마치 남자가 된 것처럼?
그야 편집자들이 그러길 기대하고, 서평가들이 그러길 기대하니까죠. 하지만 무슨 권리로 그 사람들이 나에게 남장을 기대하는 거죠?
내가 진짜 자신으로, 빌려 입은 턱시도나 국부 보호대 말고 내 몸 그대로 쓰려고 한 적이 있긴 했을까? 내 몸, 내 옷을 입고 글 쓰는 방법을 알긴 할까?
아닙니다. 전 방법을 몰랐어요. 방법을 배우느라 시간이 꽤 - P155

걸렸죠. 그리고 제게 그 방법을 가르쳐 준 건 다른 여자들이었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페미니스트 작가들요. 이전 세대의 여성 저자들, 남성우월주의 문학 지배층에게 묻혔다가 『노턴 여성 작가 앤솔러지』 같은 책에서 재발견되고 찬양받고 다시 태어난 작가들요. 그리고 대부분 저보다 젊은 동료 작가들, 문학 보수파와 장르 보수파 양쪽에 저항하며 여성으로서 여성에 대해 쓰는 여성 작가들요. 전 그 작가들에게 용기를 배웠어요.
하지만 여성의 지식을 숭배하고 우리는 남자들이 모르는 걸 안다고 우쭐하고 여자들에겐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지혜가 있고 본능적으로 자연을 안다고 생각하진 않았고, 지금도 그러고 싶진 않아요. 그런 숭배는 대개 여자를 원시적이고 열등하다고 여기는 남성우월주의를 강화할 뿐이에요. 여자들의 지식은 기본적이고 원시적이고 언제나 어두운 뿌리를 따라 내려가는 반면, 남자들은 빛 속으로 자라는 꽃과 곡물을 경작하고 소유한다는 거죠.
하지만 어째서 남자들은 성장하는데 여자들은 계속 유아어를 해야 하죠? 어째서 남자들은 ‘생각하는데‘ 여자들은 무턱대고 ‘느껴야‘ 하죠?
아래는 제 소설 『테하누』에 나오는 어느 등장인물이 성별화된 지식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대목이에요. 중심인물인 테나와 테나의 친구인 늙고 가난하고 무식한 마녀 이끼가 남자 마법사들과 그들의 힘에 대해 논하죠. 테나가 여자들의 힘은 어떠냐고 묻자 이끼가 말해요. - P156

"아, 글쎄요. 여자는 완전히 다르지. 여자가 어디에서 시작하고 끝나는지 누가 알겠어요? 들어 봐요, 나에겐 뿌리가 있어. 이 섬보다 더 깊은 뿌리가 있지. 바다보다 더 깊고, 땅이 솟아오른 때보다 더 오래된 뿌리요. 난 그 어둠 속으로 돌아가요."
이끼의 눈은 불그스름한 테두리 안에서 기묘하게 번쩍였고 목소리는 악기처럼 울렸다. "어둠 속으로 돌아간다고요! 난 달보다 더 이전에 있었지. 아무도 몰라, 아무도 몰라, 아무도내가 누구인지, 여자가 무엇인지, 힘을 지닌 여자가 무엇인지, 나무뿌리보다 더 깊고 섬들의 뿌리보다 더 깊고 창조보다 더 오래됐으며 달보다 더 오래된 여자의 힘이 무엇인지 말할 수가 없어. 감히 누가 어둠에게 질문을 던질까요? 누가 어둠에게 이름을 묻겠냐고요?"
여자들은 남자들에게나 여자들에게나 거듭거듭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말을 한다고 듣고 읽어요. 실제로는 정반대 말을 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래요. 위에 인용한 연설은 그 내용에 찬성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백 번은 인용됐어요. 하지만 테나의 대답에 주목한 독자나 비평가는 하나도 못 봤네요.
"누가 어둠에게 이름을 묻겠냐고요?" 이끼가 말하죠. 아주 수사적인 질문이에요.
하지만 테나는 대답해요. 이렇게요. "내가 묻죠."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죠. "난 어둠 속에 충분히 오래 살았어요." - P157

이끼는 남성우월주의 사회가 여자들에게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고 있어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남겨 둔 유일한 영역을 자랑스럽게 자기 것으로 주장하죠. 원시와 신비, 어둠의 영역을요. 그리고 테나는 거기 한정되기를 거부해요. 테나는 이성과 지식과 사상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고, 어둠만이 아니라 자기만의 햇빛까지 차지하려 하죠.
저 대목에서 테나가 제 대신 말하고 있어요. 우린 어둠 속에 충분히 오래 살았어요. 우린 햇빛에 똑같은 권리가 있고, 이성과 과학과 예술과 나머지 모든 것을 배우고 가르칠 권리가 똑같이 있어요. 여자들이여, 지하실과 부엌과 아이 방에서 나와요. 이 집 전체가 우리 집이에요. 그리고 남자들이여, 그렇게나 무서워하는 어두운 지하실에서나 부엌과 아이 방에서 사는 방법을 익힐 때가됐어요. 그러고 나면 우리 모두가 불가에 모여서, 우리가 공유하는 집의 거실에서 이야기를 해 봅시다. 우린 서로에게 할 말도 많고, 배울 것도 많아요. - P158

나는 여자들의 소설을 문학 정전에서 한 권씩 한 권씩, 한 명씩 한 명씩 배제하는 흔한 기법이나 수법을 네 가지 알고 있다. 이 수법들은 폄하, 누락, 예외화, 그리고 실종이다. 이 넷이 쌓여 지속적으로 여자들의 글을 주변으로 밀어낸다. - P160

폄하(Denigration)
(...)
편견은 입 밖에 내지 않고 존재하며, 편향은 생략을 통해 드러난다. 비평가들은 여자들과 얽힌 장르라면 읽지도 않고 통째로 묵살할 수 있다. 미스터리나 전쟁소설이 로맨스가 흔히 겪는 경멸과 무시를 당한다면, 아니면 남성 중심적인 장르에 "칙릿" 같은 경멸스러운 딱지가 붙는다면 분개와 저항이 있을 것이다. 많은 여자들이 특정한 마초형 글쓰기를 "프릭릿"이라고 부르지만, 비평에서 그 용어를 쓰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생색내는 익살투가 여성 저자를 폄하하는 데 쓰이는 일도 많다. 여자들의 글은 매력적이다, 우아하다, 가슴 저민다, 감성적이다 같은 소리를 들을 수는 있어도 강력하다거나 선이 굵다거나 대가답다는 말을 듣는 일은 아주 드물다. 어떤 저자의 성별은 저널리즘 정신마저 지배하는 모양이며, 성별(gender)은 성적인 매력으로 읽힌다. 조지 엘리엇을 논하면서 "수수했다"는 언급이 빠지는 일은 드물다. 『가시나무새』의 저자인 콜린 매컬로의 《뉴욕 타임스》 부고에도 똑같이 외모 관련이 깊은 정보가 들어가 있었다. 남성 저자들은 살았든 죽었든 간에 못생겼다거나 매력 없는 남자였다는 언급과 함께 논하는 일이 없건만, 예쁜 얼굴이 아니라는 죄악은 죽은후까지 여자들을 따라간다. - P161

어떤 여자가 쓴 책을 다른 여자들의 작품과 비교하면서 남자들의 작품과는 비교하지 않는 것도 교묘하고 효과적인 폄하 수법이다. 그렇게 하면 서평가가 어떤 여자의 책이 어떤 남자의 책보다 낫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으면서, 여자들의 성취를 안전하게 주류에서 밀어내어 닭장에 집어넣을 수 있다.

누락(Omission)
정기 간행물들은 거의 예외 없이 남자들의 책을 여자들의 책보다 많이, 더 길게 평한다.
여자들의 책은 남자나 여자나 평하지만, 남자들의 책은 남자들이 평할 때가 훨씬 많다.
도 여자들의 책은 공동 서평에서 함께 다룰 때가 많은 반면, 남자들의 책은 개별 서평을 받는다.
가장 두드러지는 누락 기술은, 예상할지 모르겠지만 가장 대놓고 경쟁하는 분야에서 쓰인다. 문학상들이다. 심사위원들은 흔히 남자와 여자 양쪽이 들어간 최종 후보를 뽑지만, 상은 남자에게 준다.
여성 저자들에게만 한정된 상을 제외하면,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문학상 최종 후보 목록을 본 적이 없다. - P162

앤솔러지도 똑같은 젠더 불균형을 보이는 편이다. 최근 잉글랜드에서 출간된 SF 앤솔러지 하나는 여자 작가의 단편을 하나도 싣지 않았다. 소란이 일었다. 작품 선정을 맡은 남자들은 여자 작가를 하나 초청했는데 잘되지 않았으며, 어째선지 그냥 모든 단편이 남자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말로 사과했다. 정말 죄송하다고.
"어째선지" 모든 단편이 여자 작가로 구성되었다면, 눈에 띄었을 것이란 느낌이 든다.

예외화(Exception)
남자의 소설을 논하면서 저자의 성별을 언급하는 경우는 - P163

몹시 드물다. 여자의 소설은 저자의 성별과 함께 논의되는 경우가아주 잦다. 정상은 남성이다. 여성은 정상의 예외, 정상에서 배제된 존재다.
비평에서나 서평에서나 예외와 배제를 실천한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가 위대한 영국 소설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비평가는 애써 울프가 예외임을 보여 줄 수 있다. 멋진 요행이라고 말이다. 예외와 배제의 수법은 다양하다. 여자 작가는 소설의 "주류"에 속하지 않았다고 밝혀진다. 그 작가의 글은 "독특"하며 후대 작가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어떤 "컬트"의 대상이다. 그 작가는 (매력적이고, 우아하며, 가슴 저미고, 감성적인) 연약한 온실의 꽃이며 그러니 남성 소설가의 (강력하고, 선 굵고, 대가다운) 활력과 경쟁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 P164

어떤 여자 소설가가 1급 예술가라는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배제 수법은 여전히 작동한다. 제인 오스틴은 존경을 많이 받지만, 그래도 어떤 본보기로 여겨지기보다는 독특하고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우연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실종될 순 없어도, 완전히 포함되지도 않는다.
작가 생존기에 일어나는 폄하, 누락, 예외화는 작가의 죽음 이후 일어나는 실종의 준비 작업이다.

실종(Disappearance)
나는 이 말을 적극적인 의미로 쓰며, 여기에 내포된 의미를 온전히 의식하고 있다.
여자들의 글을 깎아내리는 온갖 어리석거나 교묘한 수법을 통틀어, 실종이 가장 효과적이다. 일단 작가가 힘을 잃고 조용해지면, 남성 연대가 재빨리 외부인을 상대로 똘똘 뭉친다. 여성 연대나 정의로운 본능이 그 결속을 깰 만큼 강한 경우는 드물고, 그 노력이 성공한다 해도 남성 결속은 쉽사리 다시 이루어지기 때문 - P165

에 노력을 끝없이 이어 나가야 한다.
나는 이전에도 특히 격분했던 실종 사례들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과 마거릿 올리펀트였다. 둘 다 지금까지도 종종 "미시즈(Mrs.)"로만 불리는데, 두 작가의 성별과 사회적 위치를 알리는 칭호다.("미스터 디킨스"나 "미스터 트롤럽"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개스켈과 올리펀트는 생전에 유명하고 인기 있었으며 존경받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죽고 나자 바로 사라졌다. (...)
이런 부당한 격하는 불쾌할 뿐 아니라 낭비이기도 하다. 사실 뛰어난 빅토리아 시대 소설가는 그중 두 명을 단지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내던질 수 있을 만큼 많지가 않다. 그런데 그들의 소설이 실종된 데 어떤 다른 이유를 댈 수 있나? 개스캘은 페미니스트들과 영화 덕분에 이제 상당히 잘 복귀했다. 올리펀트는 아니다. 어째서? 올리펀트와 트롤럽에게는 유사성이 많다. 한계는 명확하지만, 치명적은 아니다. 둘 다 확실히 재미있는 소설을 썼고, 심리 면에서 신중하고도 통찰력 있으며, 또한 매력적인 사회 보고서다. 하지만 올리펀트의 작품만 사라졌다. - P166

여성 비평가들, 페미니스트 작가들, 공정한 학자와 교사와 문학 애호가들이 의식적으로 계속해서 페일리의 작품이 보이도록 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읽고, 다시 찍어 내는 노력을 기울이지않으면, 그녀의 작품은 몇 년 안에 조용히 무시당할 거라는 두려움이 있다. 어쩌다 보니 절판이 될 것이고, 그보다 못한 작가들의 작품이 오직 남자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살아남는 동안 잊힐 것이다.
그러지 말자. 이렇게 계속 훌륭한 작가들이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실종당하고 묻혀 버리게 둘 수는 없다. 평화로이 썩어 가게 두어야 할 작가들은 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부활하여 비평과 커리큘럼의 좀비가 되는 판에 말이다.
나는 미인이 아니지만, 나에게 ‘그녀는 수수했다‘ 같은 묘비 - P169

는 주지 말아 달라. 나는 실제로 할머니지만, 나에게 ‘누군가의 할머니‘라는 묘비는 주지 말라. 나에게 묘비가 있다면, 내 이름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보다도 작가의 성별이 아니라 글의 우수함과 작품의 가치로 판단받는 책들에 내 이름이 박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훨씬 크다. - P170

장르를 완전히 벗어난 곳에서 유용한 본보기들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전복적이었던 버지니아 울프를 읽으면서 많이 배웠다.
『올랜도Orlando』를 읽었을 때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 나이에는 그 책이 반은 계시 같고 반은 혼란이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 - P171

다. 작가가 우리와 많이 다른 사회를, 아주 색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극적으로 살려 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엘리자베스 시대 장면들을, 템스 강이 얼어붙은 겨울을 생각하고 있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그곳에 있었고, 얼음 속에 타오르는 모닥불들을 보고 500년 전 그 순간의 경이로운 기이함을 느꼈다. ‘완전히 다른 어딘가‘로 실려 가는 진짜 설렘이 있었다.
(...)
소설 『플러시Flush』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개의 마음속으로들어가는데, 말하자면 비인간의 뇌이자 외계의 정신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대단히 SF적이다. 다시 한 번, 그 책에서 내가 배운 것은 정확하고 선명하고 고도로 선별된 세부 사항이 가진 힘이었다. - P172

내게는 사실 사람들이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읽고 쓰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는 같이 일하고 대화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좁은 방에 혼자 앉아서 종일 화면을 보며 쓰고 읽는다. 만나서든 전화하는 구두로 이루어지던 의사소통이 이제는 쓰고 읽고 이메일을 통할 때가 많다. 그래, 그 모든 게 책 읽기와 별 상관이 없는 건 맞다. 하지만 읽기를 그 어느 때보다 더 가치 있는 기술로 만든 압도적인 과학기술의 보급이 낳은 결과가 책의 죽음이 되는 까닭은 모르겠다.
은수 종말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 하지만 아이패드로 할 수있는 놀랍고도 끊임없는 다른 모든 것들과 벌이는 경쟁이 책을 죽이고 있다고요!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그 경쟁이 독자들의 안목을 더 높이기만 할 수도 있다. - P176

책의 죽음에 대한 다른 항의들은 웹에서 제공하는 직접 경쟁과 관련되어 있다. "손끝으로 켤 수 있는 오락의 세계"는 독서를 하찮게 만든다.
이때의 "책"은 대체로 문학을 가리킨다. 현재 DIY 매뉴얼과 요리책, 이런저런 안내서는 책 중에서 화면의 정보로 대체되는 일이 가장 많은 종류다. - P179

아무리 하늘이 무너진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해도 『일리아드』나 『제인 에어』나 『바가바드 기타』가 죽었다거나 죽을 거라고 믿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위대한 문학 작품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경쟁하게 된 건 맞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책이 무슨 내용인지 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책은 손끝의 오락 세계로 대체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그 작품들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읽기를 배우는 한(재정이 부족한 공립학교들에서 배울 수도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특히 읽어야 할 책을 배우고 그 책을 지적으로 읽는 방법(재정이 부족한 공립학교에서 이제는 생략해 버릴 때가 많은, 기본 기술의 확장판이다.)을 배우는 한, 그 사람들 중에 손끝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무수한 오락보다 독서를 더 좋아하는 사람은 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종이가 됐든 화면이 됐든 책을 읽을 것이고, 문학이 주는 즐거움과 존재 증대감을 누리려 문학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책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게 지키려고 할 것이다. 지속성은 문학과 지식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책은 대부분의 예술과 오락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차지한다. 수명이라는 면에서는 아마 건축과 돌 조각만이 책을 능가할 것이다. - P180

우리 손끝에 달린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 읽기를 익힌 고집스럽고 내구력 있는 소수가 오랫동안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책을 읽으리라 믿는다. 종이든 화면이든,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개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하기에, 그리고 아무리 막연하다 해도 그 공유가 중요하다고 느끼기에, 어떻게 해서든 책이 다음 세대에도 존재하도록 만들고야 말 것이다.
기술 세대가 아니라 인간 세대 말이다. 지금 기술의 한 세대는 생쥐 수명만큼 짧아질 판이고, 이러다가는 초파리 수명만큼 짧아질지도 모른다.
책의 수명은 그보다는 말이나 인간의 수명, 때로는 참나무,
심지어는 레드우드의 수명과 비슷하다. 그러니 책의 죽음을 슬퍼 - P183

하기보다는 이제 책이 살아남아 전해지고 지속될 방법이 하나가아니라 둘이 됐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게 좋겠다. - P184

모든 독자는 특정 장르를 선호하고 다른 장르는 지루해하거나 불쾌해할 거예요. 하지만 어떤 장르가 다른 모든 장르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 그 편견을 변호할 준비를 해야 하고 변호할 수 있어야 해요. 변호하려면 그 "열등한" 장르들이 실제로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특성은 무엇이며 탁월한 작품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하고요. 그러니까 읽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모든 소설 장르를 문학으로 접근한다면 리얼리즘 규칙에 따라 쓰지 않는 인기 소설가들에 대한 심술궂은 혹평과 비웃음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순수예술 석사과정에서 상상 장르 창작을 금지하는 일도, 너무나 많은 영어 교사들이 사람들이 실제 읽는 책을 가르치지 못하는 상황도, 그리고 실제로 그 책을 읽 - P187

는 사람들에게 끝도 없이 사과하는 멍청한 일도 끝날 거예요.
비평가와 교사들이 단 한 종류의 문학만이 읽을 가치가 있는 문학이라는 주장을 포기한다면 소설이 하는 다른 일들과 그 방법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더 생길 것이고, 무엇보다도 왜 모든 장르마다 특정한 책들이 다른 대부분의 책보다 읽을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고, 몇백 년간 그렇게 여겨졌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여겨질 것인지 생각할 시간이 생기겠지요.
세상엔 진짜 수수께끼가 있으니까요. 왜 어떤 책은 재미있고, 어떤 책은 실망스럽고, 또 어떤 책은 계시를 내려 주며 오래도록 즐거울까요? 작품의 질이란 뭘까요? 훌륭한 책을 훌륭하게 만들고 형편없는 책을 형편없게 만드는 건 뭘까요?
소재는 아니에요. 장르도 아니죠. 그렇다면, 뭘까요? 좋은비평은, 좋은 책 이야기는 언제나 그 문제를 다뤘어요. - P188

좋아요. 이야기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일어난 일을 말하는 이야기, 그리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말하는 이야기죠.
첫 번째 이야기에는 역사, 저널리즘, 전기, 자서전, 회고록이 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는 소설이 있죠. 지어내는 이야기들요.
우리, 미국인들은 첫 번째 종류를 더 편안해하는 편이에요. 우리는 뭔가를 지어내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사실"과 "실제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편안해하죠. 우리는 "리얼리티"에 대해 말해주는 이야기들을 원해요. 어쩌나 원하는지, 심지어는 완전히 가짜 상황을 꾸며 놓고 찍으면서 그걸 "리얼리티 TV"라고 부를 정도죠.
이 모든 것들의 문제는, 당신의 진짜는 나의 진짜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현실(리얼리티)을 같은 방식으로 인지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사실상 현실을 아예 인지하지 못하죠. 폭스 뉴스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리얼리티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한 이런 차이가 아마 우리에게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일 거예요.
‘사실(fact)‘이 우리의 공통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상식같지요. 하지만 사실, ‘사실‘은 너무나 구하기 어렵고, 너무나 관점에 달려 있으며, 너무나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차라리 소설에서나 - P190

서로 공유하는 현실을 만날 수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답니다.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었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실제 사람은 아니지만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도 있을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읽어 줌으로써 우리는 상상의 문을 열어요. 그리고 상상은 우리가 서로의 머리와 마음에 대해 알 가장 좋은 방법,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지요. - P191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소설은 사실 파악이나 거짓말이 아닌 다른 층위의 현실로 넘어가죠.
상상과 소망 충족의 차이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요, 둘 다 글쓰기에서나 삶에서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소망 충족은 현실에서 잘라 낸 생각이고, 어린아이 같을 때가 많지만 위험할 수 있는 방종이에요. 상상은 아무리 마구잡이일 때라 해도 현실과 떨어져 있죠. 상상은 현실을 알고, 현실에서 출발하고, 돌아가서 현실을풍성하게 만들어요. 돈키호테는 기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푹 빠진 나머지 현실과의 접점을 잃고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죠. 그게 소망 충족이에요. 미겔 세르반테스는 기사이고 싶어 하는 한 남자가 나오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전함으로써 우리의 웃음과 인간 이해를 크게 증대시켰어요. 그게 상상입니다. 소망 충족은 히틀러의 천년 왕국이고, 상상은 미합중국 헌법이에요.
이 차이를 알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 위험해요. 우리가 상상을 현실과 아무 관계도 없는 한갓 현실도피라 여기고, 그래서 믿지 않고 억누른다면, 상상은 손상되고 왜곡되어 침묵에 빠지거나 거짓말을 하게 될 거예요. 모든 기본적인 인간 능력이 다 그렇듯, 상상력도 어려서부터 평생 연습하고 단련하고 훈련해야 해요. - P192

인터넷이라는 멋진 신세계에서의 독서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할게요. 여기 우리 모두는 글쓰기에 대해 말하고 있고, 다들 이젠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말해요. 전문가들은 책이 죽었다고 울어대고, 사람들은 읽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읽을 생각이 없어요. 미국인들은 책을 10년에 4분의 1권 정도 읽어요. 호메로스가 어떻게 아이패드와 경쟁하겠어요? 아무도 『돈키호테』를 원하지 않아요. 트윗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면 우린 여기 글쓰기 축제에서 뭘 하는걸까요?
작가들이 언제나 했던 일이죠. 우린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 P196

쓰고, 읽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파였어요. 엘리트가 아니라, 그냥 소수파예요. 이 세상 사람들 다수는 즐거움을 위해 글을 읽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읽을 수가 없고, 어떤 사람들은 읽으려 하지 않죠.
머리를 쥐어뜯을 일이 아니에요. 세상을 구성하려면 온갖 부류가 다 있어야 해요. 남자들이 몇 시간씩 방망이로 공을 때리는 모습을 보는 건 저에게도 즐겁지 않고, 세상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즐겁지 않죠. 그렇다고 해서 야구가 - 아니면 크리켓까지도 - 죽은 건 아니에요.
우리는 바뀐 게 독서가 아니라 출판인데도 독서에 대해 괜히 허둥거리고 있어요. - P197

사람들은 읽고 싶어 해요. 가끔은 모든 사람이 쓰고만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제 말 믿으세요. 더 많은 사람들은 읽고 싶어 해요. 그리고 자본주의 기술이 만든 거대 기계의 뒷구멍과 틈 속 어딘가에서 작가들과 독자들은 언제나 그랬듯 서로를 찾아낼 거예요. - P198

헤밍웨이처럼 유명한 작가들이 오직 돈 때문에 쓸 뿐이라고 큰소리치는 것과, 무명 작가들이 일이라서 글을 쓰는 것은 다른문제다. 나는 후자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다. 생계를 위해 소설을 쓴다는 건 힘든 일이고, 거의 언제나 낮거나 불확실한 이익밖에 얻지 못하는 고도의 숙련 노동이다. 틀에서 벗어난 재능을 지닌 작가에게는 노예의 굴레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기술이 그렇듯 진지한 종사자는 그 보상으로 뭔가를 할 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걸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끝낼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내적 확신까지도 얻을 수 있다. 본서를 포함하여 딕의 최고작 여러 편에는 정직하고 겸손한 장인에 대한 딕의 깊은 존경심이 스며 있다. 작가 본인이 오랫동안 그런 존재였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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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로트라이브 - 자폐증의 잃어버린 역사와 신경다양성의 미래
스티브 실버만 지음, 강병철 옮김 / 알마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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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퍼걸 - 자폐·여자·사람을 위한 생애 안내서
루디 시몬 지음, 이윤정 옮김 / 마고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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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 별나긴 합니다만... - 아스퍼거 증후군 이야기
쥘리 다셰.마드무아젤 카롤린 지음, 양혜진 옮김 / 이숲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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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견디는 시간 ㅣ 나의 서른에게 1
이윤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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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만해서 사는 것은 어린아이도 할 일이다. 살 만하지 않아도 살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삶을 덜 부끄럽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러니까, 살 만하지 않은 때의 감각이다. 소음을 피하게 하는, 나대지 않게 하는, 고독을 수긍하게 하는, 결국엔 모든 것이 소멸한다는 이치를 얼음장처럼 일깨우는, 역설적으로 살 만하지 않은 때에 읽는 책, 듣는 음악, 만나는 사람, 잠기는 상념, 올리는 기도는 반드시 나를 죽지 않게 해준다. 살 만하지 않은 때에 이르러서야 나를 최후에 떠받치는 삶의 알맹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 P28

‘사실 엉망진창이지만, 어른이니까 멀쩡한 척하고 다닙니다‘라는 말 따위 꼭 이마에 써 붙여야 아는 건가. 안 붙이고 다녀도 서로서로 으레 그런 줄 알고 지내는 게 어른 아닌가. 제 속이 엉망진창임을 감추지 않는 인간이나, 누가 멀쩡한 척한다고 그 속이 엉망진창임을 모르는 인간이나, 다 좋은데 적어도 어른 대접 받을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다. - P65

생의 유의미한 과제들은 전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출발한다. ‘그럼‘의 기준이야 제각기겠으나 나는 적어도, 지나간 어느 깊은 밤에 "나, 이번 생은 베렸어"(황지우,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라고 두 손 들어본 이들을 신뢰하고 사랑한다. 같은 맥락에서, 제 생을 척척 통제해왔거나 앞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신뢰하기 어렵다. 이들은 삶이 두렵지 않으므로 스스로 용기를 지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용기가 있어서 용기를 낸다는 건 아이러니다. 삶을 가장 크게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가장 크게 허락되는 것이 용기일 테다.
용기는 거대하지만 용기의 흔적은 사소할 수도 있다. - P67

이번 생은 아주 베려버려서 남은 날들이 온통 무섭고 두렵기만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이를 닦고 옷을 챙겨 입을 수 있는 것이 내겐 용기다. 실의에 빠진 이에게 조금만 용기를 내보라고 말했다가 지청구를 들은 적이 있다. 너는 나를 모른다고,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면 이 상황에서 용기를 내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그는 내가 말한 용기를, 몹시 비약적이고 드라마틱한 마음가짐으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두 팔을 앞뒤로 흔들며 씩씩하게 걸어보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신발을 신고 몇 걸음만 옮겨보라는 말이었다. 물론 그 몇 걸음에도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노력은 잔인하게도 궁극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가 없다. 우리는 몹시 두려울 때 위로와 격려와 응원을 받을 수 있지만, 그 모든 힘을 그러모아 최후에 실제로 노력해야 하는 당사자는 오직 나 자신뿐이다. - P68

기회를 많이 날려버린 인간보다 기회를 아직 얻지 못한 인간을 편애하는 것은 그래서 내게는 너무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또 하나의 인간을 세상에 보태고 싶다는 욕망을 저지한다. 사는 데 필요한 건 안간힘이라고 가르쳐야 하는 슬픔을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 - P90

SNS를 두고 검열된 자아를 전시한다는 둥 피상적인 관계를 양산한다는 둥의 비평을 ‘아직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오히려 놀랍다. 오프라인에서는 자신을 전혀 검열하지 않나? 오프라인의 관계는 전혀 피상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오프라인에는 온라인 세계보다 부조리한 인간의 비율이 낮나?
개인적으로 ‘나쁜 놈‘보다 ‘상상력이 누더기인 놈‘을 더 견디지 못한다. 상상력이 누더기인 자가 대체로 나쁜 결과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그 둘을 구별하는 것도 의미없지만, SNS를 정성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장난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성심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가식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비즈니스가 목적일 수도, 연애가 목적일 수도 있다. 운동movement이 목적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겸사겸사 목적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금전적인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온라인에서 아예 다 - P123

른 인격체로 살아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상상력 누더기스트‘들은 바로 그 빈곤한 상상력 탓에 저마다의 이유로 온라인에 모인 사람들을 일요일 저녁 리모컨 돌리듯 재단한다. 저이는 맨날 음식 사진만 올니까 먹보, 저이는 맨날 해외여행 사진만 올리니까 부르주아, 저이는 맨날 셀카만 올리니까 관종, 저이는 맨날 욕만올리니까 분노조절장애, 저이는 맨날 문학 얘기만 하니까 감성충, 저이는 맨날 일 얘기만 하니까 워커홀릭, 저이는 맨날 페미니즘 이슈만 올리니까 꼴페미.
물론 이 또한 구경꾼의 자유다. 멋대로 재단할 자유도, 당연히 있다. 다만 그 자유는 머릿속에서 누렸으면 한다. 티는 내지 말고. 누더기를 걸치고 밖에 나갈 수밖에 없다면 대충 깁는 성의라도 보여야 할 게 아닌가. 거래처와 신경전을 벌이고 나서 우울한 기분을 좀 떨치려고 지난 주말 데이트 중에 밝게 웃으며 찍었던 셀카를 올리자마자 "윤주 씨, 오늘 뭐 좋은 일 있어?"와 같은 질문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대답을 하기도 안 하기도 구차한그 마음을.
나는 고통에 실체를 입히려고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언어로 바꾸면, 눈에 보인다. 눈에 보이면, 대책이 (상대적으로) 보인다. 기쁨도 마찬가지다. 잡아두려는 것이다. 잡아 - P124

두면 잡아둔 만큼은 더 머무니까. 그런 나의 ‘독백‘에 희한하게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들이 나지막한 신뢰를 보내주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내가 나를 위로하려 쓴 글에 재밌다거나 슬프다거나 이해한다거나 심지어 고맙다는 댓글을 단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민망하다가 살짝 도취되기도 했지만, 그 마음을 곧 이해하게 되었다. 나 또한 생면부지의 타인이 스스로를 다독일 요량으로 쓴 글에 위안을 얻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때때로 자기 본위에서 출발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이타에 닿을 때가 있다. 징징거릴 데가 없어서 일기장에 쏟아내듯 끄적인 글에는 애초에 누구를 위로하겠다는 목적이 없었으나, 글이란 쓴 사람이 의도하지 않은 풍경을 제가 도착한 곳에서 스스로 그려내기도 한다. SNS를 떠도는 활자들 가운에 몇몇 글들이 바로 그렇다.
나는 그 힘이 ‘물리적인 공간을 공유하지는 않으면서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는‘ SNS의 특징에 있다고 생각한다. 얼굴 부딪히는 사람에게는 차마 하지 못할 말이 있다. 괜히 꺼냈다가 더 피곤해질 게 뻔하거나, 털어놓아 봤자 이해받지 못해 어차피 실망으로 돌아올 말들, 그럴 때 SNS는 혼자 중얼거려도 혼자가 아닌 시간을 제공한다. - P125

어릴 때 엄마가 습관처럼, 사람 마음이 한번 좁아지기 시작하면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이 없다는 말을 종종 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을 때부터 ‘마음‘과 ‘바늘‘이라는 단어가 한 문장에 있는 것만으로 뭔가 콕 찌르는 통증이 연상되어서인지, 엄마가 저 말을 꺼내는 순간에 반복되는 분위기가 무엇인지 조금 일찍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은 코나 발가락과는 다르게,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기도 하는 부위였다. 마음이 언제나 ‘마음 주인‘의 말을 듣는 것은 아니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고 사랑하고 싸우고 심지어 죽기도 한다는 - P137

것은 조금 나중에 알았지만,
심리학 용어 중에 파국화破局化라는 것이 있다. 예사로 겪을 수 있는 작은 일을 건건이 ‘재앙‘의 징조로 여기는 오류다. 이를테면 흔히 지나가는 질병에서 곧장 죽음을 우려한다든지, 하나의 실수로 일 전체를 망칠 거라고 예감하는 것이다. 마음이 (제 주인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날뜀으로써 결국 주인을 시험에 빠뜨리는 비극이다. - P138

위로는 위로고, 그래도 인생은 제멋대로 흘러갔다. 졸업하고 취직하고 (남들 보기에) 앞가림을 한다고 해서,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재앙을 염려하는 버릇을 완전히 떨쳤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내 몸 하나 씻겨 옷 입히는 것조차 힘든 날이 있고, 그럴 때마다 ‘아직도 한참 남은‘ 생을 과연 이 따위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한참 남은 생이라니, 우주가 들을까 부끄럽다. 우주에게 부끄러워지는 순간, 나의 마음도 우주만큼 부푼다.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이 없었는데 거짓말처럼 팽창한다. 궂은 날씨, 클라이언트의 갑질, 분실된 택배, 유쾌하지 않은 이메일, 오해와 음해는 나의 무한한 우주에 티끌조차 남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잠시 우주에 다녀와도, 물론 공과금 고지서는 날아와 있고 어김없이 어디선가 악다구니가 들려오며 나는 읍소하는 이메일을 마저 써야 한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엑설런트 없이도, 내가 해바라기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 - P141

어떤 사람들에게 책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 두 가지 의미. 어떤 사람들은 책 없이도 충분히 훌륭하다. 그들은 특별한 의도 없이, 자신이 지나온 공간과 시간 속에서 삶에 필요한 거의 모든 지혜를 익힌다. 자신을 낳고 길러준 이들로부터 약한 존재를 거두어 보호하는 법을 배우고, 제 이익을 두고 싸움을 벌이는 이들로부터 권리와 사욕의 경계가 어디쯤인지를 배운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들로부터 좌절을 배우지만, 애쓰지 않아도 어김없이 돌아오는 계절로부터 겸허를 배운다. 이들은 애초에 특별한 의도가 없었기에 자신이 훌륭한지 훌륭 - P142

하지 않은지에 별 관심이 없으며 따라서 치명적인 결핍을 느끼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의 결핍은 타고난 마음의 근력으로 곧잘 회복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타고나지 못했든, 자연스럽게 나아지지 못했든, 어느 시점부터 ‘훌륭하지 않게‘ 되어버린 사람들에게도 책은 무용하다. 일단 책을 잡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어쩌다 책을 잡아도 (바로 그 훌륭하지 않음 때문에)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한다. 이미 잘못되어버린 독단의 신념을 강화하는 데 책이 이용되는 셈이다. 상당한 다독가 중에도 이런 사람을 제법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이미 본인에게 ‘다독‘이라는 뒷배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삶 본연이 주는 배움을 쉬이 무시하기도 한다. 한술 더 떠서, 삶이(또는 사랑이, 배신이, 만남이, 이별이) 두려워 책에 숨는다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있는데, 좋은 책이라면 독자를 마냥 은신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그가 읽었다는 다섯 수레의 책이 통째로 오독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어떤 책을 두고,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책이라는 식의 판단 또한 허황한 일이다. 없어도 잘 살고, 있어도 잘 못 사는 이들이 어차피 있으니까. 다만 ‘누군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책이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들을, 책은 분명히 돕는다. 왜냐하면 그게 나니까. 책을 읽지 - P143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훨씬‘ 아픈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는 데 나의 전 재산인 전세보증금 절반(절반은 남편 몫이라치고)을 걸 수 있다. 철학자 강유원은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책과 세계》)고 말했고, 여성학자 정희진은 누군가 자신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아파서요. 책을 읽으면 좀 덜 아프거든요."(《정희진처럼 읽기》)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픈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정확히는, 아픈데 내가 아픈 것을 아는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아픈데, 아픈 채 죽고 싶지는 않은 사람. 속물인데, 속물로 죽고 싶지는 않은 사람. 그러니까 저절로 훌륭하게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싶고, 그때 책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걸 한두 번은 경험해본 사람. 아플 때 책을 찾고, 많이 아플 때 더 많이 읽는다. 안 그래도 못났는데, 요즘 못난 짓이 좀 너무 잦다 싶을 때, 하는 수 없이 기어가서 책을 든다. 그렇다고 (생각만큼) 다독가도 아니고, (생각만큼) 고급독자도 아니지만, 무엇 때문에 밥을 먹고 말을 하며 똥오줌을 가리고 숨을 쉬어야 하는지 모르겠을 때, 책을 붙드는 것 말고는 다른 뾰족한 수를 나는 알지 못한다. 늘 하던 밥벌이가 문득 고되게 느껴져서 곰곰 생각해보면 일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일하다 죽게 생겼다 싶고, 그나 - P144

마 이 알량한 노동력이 언제까지 쓰일 수 있을지 덜컥 불안이 밀려오는데 세상 어디에도 나의 생존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비관에 휩싸이기라도 해서 이윽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자신감도 사라질 때, 나는 권정생의 소설 《몽실 언니》를 떠올린다. 주인공 몽실은 말했다. "누구라도, 누구라도 배고프면 화냥년도 되고, 양공주도 되는 거여요." 몽실에게 죽비로 등짝을 딱 맞고 나면, 기운이 난다. 생에 기대거나 기대하지 않고, 화냥년이나 양공주로서 나와 삶을 지탱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중한 사람을 언제 어떻게 잃을지 모르며,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때는 롤랑 바르트가 《애도 일기》에서 했던 말, 자신은 어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삶 동안 내내) 어머니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는데, "어머니가 떠나가면서, 마지막 선물처럼, 나의 가장 나쁜 부분, 나의 노이로제를 함께 가져가버렸다"는 문장을 떠올린다.
도무지 납득도 해석도 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을 때는 제임스 설터의 단편 〈어젯밤〉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 게 좋다(반전 자체가 작품의 메시지라 언급할 수 없지만, 믿어보시라, 당신은 반드시 위로받는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경멸스럽기 그지없는 인간들의 시대가 오 - P145

고 있다‘는 니체의 말은 자괴에 빠져 자학을 그칠 수 없는 날 도움이 된다. 무어라도 붙잡고 싶은데, 아무것도 붙잡을 게 없을 때는 "기도는 당신과 창조주 사이의 개인적인 일이다"라는 라코타족 인디언의 말이 약이 된다.
생전에는 주목받지 못한 포르투갈의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소설 《불안의 서》도 나의 죽비요, 약이다(이 책은 심지어 800쪽이 넘어서, 쉽게 바닥나지도 않는다). 명예, 성공, 편리함, 소음과 번잡함 등이 인정받는 시대에 역행하는 어둠, 모호함, 실패, 곤경, 침묵 등에 사로잡힌 화자 소아레스는 리스본의 작은 사무실에서 매일같이 회계장부에 수치를 채우고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하며, 특별한 친구나 연인도 없이 일상을 부지한다. 그는 "삶이란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양말을 뜨는 것"이라면서도 "운명이 나에게 준 것은 몇 권의 회계장부와 꿈꾸는 능력, 단 두 가지뿐"이라며 그 누구도 사랑해주거나 칭송해주지 않는 자신의 일상을 다음과 같이 드높인다.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어제 느낀 것처럼 오늘도 똑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느낌이 불가능해졌다는 의미다. 어제처럼 오늘도 같은 느낌이라면, 그것은 느낀 것이 아니라 어제 느꼈던 것을 오늘 기억해 - P146

낸 것이며, 어제는 살아 있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음을 의미한다. (중략) 하루의 모든 내용을 칠판에서 지워내는 일, 우리 감정의 처녀성을 반복해서 부활시키는 일, 오직 그것만이 존재와 소유의 가치가 있다. 지금 밝아오는 이아침은 이 세상 최초의 아침이다."

굳이, "감정의 처녀성을 반복해서 부활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매일을 새 존재로서 맞이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몽실이가 생쌀을 꼭꼭 씹어 끓인 암죽을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은 갓난아기에게 떠먹이는 장면을 굳이 자꾸 떠올리지 않아도, 저절로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사람들이분명히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몽실과 소아레스가 있어야, 롤랑 바르트와 니체를 잊지 않아야 나는 겨우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양말을 신을 수가 있다. 다음 생에는 책이 없어도 책이 없는 줄도 모르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통증이 있는데 약이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 P147

자아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재주를 타고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책을 읽는 것은 어쩌면 현실세계에서 상대적으로 편히 살기 불리한 그들이 그나마 생존하도록 설계된, 일종의 방편일 것이다. 예컨대 탁월한 자기애 빼고는 뭐 하나가진 것 없는 L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적절한‘ 규모의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곧잘 해결하는 일들에도 수시로 자아에 깔리느라 버둥거린다. 이런 그가 만일 책조차 읽지 않으면 그는 세계의 보편적 슬픔에 연대하지 못하며, 자기 비극의 절대성에 압사할지 모른다. ‘세상에 당신보다 불쌍한 사람 많다‘는 종류의 언설은 둔탁하고 무례하지만, 그것이 문학의 입으로 말해질 때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세상의 무궁한 비극에 ‘자기성애자‘들은 꾸준히 노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태양 아래 새로운 것 없듯 태양 아래 새로운 비극 없으며, 태양 아래 모든 일은 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그나마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 P148

나는 돈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물욕이 생겼다거나 숫자에 밝아졌다는 게 아니라 ‘내가 나 살 돈을 벌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살게 해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공포에 비로소 사로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섹스할 수 있는 장소에 당당히 출입하고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노동하기 시작하여 그걸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거대한 우울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비로소 사람 구실 할 수 있게 된 것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 그냥 존재하는 것만 - P151

으로는 전혀 기특하지 않다는 것도,
남들 다 아는데 나만 몰랐던 그 각성이 공포로 다가왔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내가 노동해야 하고, 노동은 그래서 존재에 우선하며, 그러니까 나의 청순한 영혼 따위 탈탈 털리든 말든 ‘내가 버는 돈‘이 오직 나를 추동한다는 점. 그리고 나는 남들 다 하는, 아니 남들보다 훨씬 편한(?) 일조차 숨이 턱까지 차도록 발악하지 않으면 따라가지 못하고, 하루에 열두 시간을 수면해야 나머지 깨어 있는 시간에 간신히 남들 하는 몫을흉내 내는 수준의 인간이라는 점. - P152

삶의 ‘당위‘를 말하는 사람들과 나는 가까워질 수가 없다. 샛길 없는 인생, 정확히는 샛길 없는 인생을 도모하는 인생, 더 정확히는 새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그 인생의 주인들과 나는 잘 맞지 않는다. 실제로 샜느냐 안 샜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누가 누가 더 많이 새봤나, ‘불행 배틀‘이야말로 유치의 극치다. 다만 나와 잘 맞지 않았던 ‘인생의 에프엠‘들은 내가 앞으로 200년쯤 더 산다고 해도 끝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단어들, 이를테면 정의, 선, 도덕, 명예, 진실과 같은 말을 신뢰하며 그것들을 신뢰하지 않으면 인생이, 심지어 세상이 샛길로 빠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정의는 누굴 위한 것이며 도덕은 무엇을 엄호하는가. 명예는 어디에서 하릴없이 굴러떨어지는 것인가. 정말 몰라서, 모르겠어서 그런다. 그리고 진실은, 인생의 에프엠들이 말하는 진실은, 이를테면 일주일에 6일을 ‘갑질‘하다가 일요일 오전 교회에 들러 말끔한 얼굴로 회개하기를 반복하는 이들의 새하얀 셔츠에 침을 뱉고 싶은 것, 이런 것도 포함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칭송하는 사람이라면 일단 싫어지는 것, 모두가 입을 모아 욕하는 사람이라면 슬그머니 그의 편에 서고 싶은 것, 아직도 많이 남은 생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늘 멍청한 것, 삶을 꽃 - P157

밭같이 지극정성 가꾸는 사람들이 언제나 의아한 것, 지구도 모자라 달에까지 금 긋고 침 뱉기 시작했다는 인류 따위 그냥 멸망해도 되지 않나 싶은 것도?
다만 다람쥐처럼은 살고 싶은 것, 돌멩이 넘으며 도토리 주워 물고 나무 타고 그늘 찾아 틈틈이 조는 것, 무리는 안 짓고 외로움도 안 타고 자살도 안 하는데 슬프지도 않은 것, 난다 긴다 지랄해도 어차피 인간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제 인생밖에 모르는 것, 내가 아는 진실이라곤오직 그것뿐인 것도? - P158

"발목을 삐었는지 걷기가 너무힘들다"고 말한 남자에게 여자는 "발목이 삐었으면 아예 걷지를 못한다. 멀쩡히 걸어 다니면서 뭘 그러냐. 내가 예전에 발목 삐었을 때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라는 식으로 남자의 말문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때 남자가 폭발했다.
"네가 가져본 것은 네 발목뿐이잖아!"
그 말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에세이 익명 낭독‘ 사건 이후로 여자 앞에서 순순히 슬픔의 지분을 포기했던 나에게 기묘한 희열이 쏟아졌다. 동시에 한동안 영문도 모른 채 은폐됐던 슬픔이 깨어났다. 슬픔이 깨어났는데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팔이 어깨 아래에 있고 허파 아래 횡격막이 있듯 슬픔도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었다.
여자와는 당연히 수업 이후 연락할 일이 없었다. 돌아보면 여자의 슬픔은 딱한 면이 있었다. 수술실에서 개복되어 꺼내지는 장기처럼, 자꾸만 밖으로 호출되는 슬픔의 운명이란 얼마나 피로한가. 늑골에 심장이 보호되, 자기 안에 내밀히 보존돼야 할 슬픔이 시도 때도 없이 타인의 것과 견주어지는 일은 얼마나 소모적인가. - P162

중요한 것은 슬픔의 경중이 아니라 슬픔을 다루는 방식이라고 나는 믿게 되었다. 슬픔은 굳이 전시될 필요도 없지만 꼭 폐기될 필요도 없다. 내밀히 숨 쉬는 슬픔의 소리를 나는 가끔 집중해서 듣는다. 무릎이 아프면 무릎이 아프다고 말할 수 있듯이, 때로 슬픔의 소리를 타인에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 많이 얘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타인의 슬픔과 나의 슬픔 모두에게 예의가 아니다. 아무나 내 무릎을 수술할 수 없듯이, 아무에게나 내 슬픔을 어찌해달라고 응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타인의 무릎도 대체로 성치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성치 않은지는 영원히 알 수 없고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다만 은밀히 공감할 뿐이다. 그리고 다만, 무릎이 아프다고 무릎을 없애버릴 수 없듯 슬픔이 고통스럽다고 슬픔을 소거할 수 없을 뿐이다. - P163

우울은 제가 몸담기 쉬운 방향을 찾기 위해 쉬지 않고 두리번거린다. 우울에게는 악의가 있지 않다. 그 또한 그렇게 생겨먹었을 뿐. 우리가 할 일은 ‘녀석이 또 나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는 일‘이다. 일종의 메타인지를 놓치지 않는것. ‘하, 이 새끼가 이번엔 거기 꽂히시겠다고 슬슬 국민체조를 하고 자빠졌네!‘ 하는 마음 같은 것, 그것이 너무 꼭 맞는 둥지를 찾아 곧장 몸집을 불리기 전에. - P165

한 사람이 온 세상의 비극을 겪을 수 없어서 문학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훌륭한 문학은 독자를 자기연민의 우물 밖으로 꺼내준다. 제 손톱 밑 가시에 절절매며 살아온 사람에게, 이렇게 넓고 깊은 진창이 세상에 많으니 엄살은 조금만 떨라며. 말귀 밝은 이들이 개떡을 찰떡처럼 알아듣는 건 말 한마디를 천 개의 결로 헤아리기 때문 - P167

이다. 이들은 마담 보바리의 생과 그리스인 조르바의 생을 함께 살면서 휘트먼의 생과 네루다의 생도 건너본다. 그러고도 아직 못 살아본 생을 계속 궁금해한다. 궁금하니까 헤아리려 하고 자주 헤아리다 보니, 잘 헤아리게 된다.
그들은 비극을 알되 비극에 잡아먹히지 않는 사람들이다. 눈치를 능히 보지만 자신을 폐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점점 귀해진다. 오늘날 눈치 보는 태도는 그다지 미덕이 아니며, 자기 비극만 막대한 사람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비극을 딛고 당당해지라는 자기계발서는 호황이고생의 명암을 시퍼렇게 비추는 문학은 불황인 걸까, 그래서. - P168

1물론 누구나 ‘아무 말‘로 잔치를 할 수 있듯이 당연히 글도 쓰고 책도 낼 수 있다. 내게 심란함을 주는 것은 그런 솔직한 고백들을 향한 강 같은 ‘공감‘들이다. 나는 공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특히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는 방식에 대하여. 남의 상처에 얼마나 이입하느냐를 놓고 소위 공감력이 있네 없네 하는 ‘모종의 분위기‘에 대하여..
그 분위기란 자신이 경험한 종류의 상처에만 과몰입하는 형태를 공감이라고 부르는 어떤 흐름이다. 가난의 상처는 가난에만, 배신의 상처는 배신에만, 질병의 상처는 질병에만, 학력의 상처는 학력에만, 군대의 상처는 군대에만, 희롱의 상처는 희롱에만, 이를테면 실연의 상처가 있는 A는 타인의 실연에 ‘몹시‘ 공감한다. 함께 울고 분노하고 - P183

심지어 전율할 수도 있다. 그러나 A는 ‘그러느라‘ 한겨울 난방이 가능한 방 안에서 잠들 수 있다는 조건에는 무심할 수도 있다. 아니, 무심하기 쉽다.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서 잠들어야 하는 누군가에게 공감할 여력을 실연에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실연당한 자에게 A가 느꼈던 것은 공감인가. 까놓고, 자위 아닌가. 아니, 자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쯤에서 차라리 꼰대가 되기를 선택하는 게 나으려나. 동병상련은 진짜 동병에만 상련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어머, 저건 딱 내 얘기야!‘라고 인지하는 데는 어떤 품도 들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어떤 품도 들지 않는 일은 자신을 조금도 ‘낫게‘ 하지 않습니다. 꼰대는 모름지기 ‘나아지려는‘ 사람이니까요.
실연에 쓸 에너지를 줄여서, 난방 못 하는 집에 갖다 붓도록 하는 것이 좋은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감은 양이 아니라 넓이로 하는 것일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나를 넓히는 책을 읽는 데는 필연적으로 품이 든다. 그런 책은 ‘어머, 딱 내 얘기!‘라고 호들갑 떨 기쁨을 주지 않는다. 그런 책은 절대로 ‘나‘의 소중한 상처에 맞장구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책은 말한다.
너의 상처는 너에게나 성역이라고. - P184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치자. 굳이 질문하지 않는 사람과 자주 질문하는 사람, 묻는다는 건 모른다는 결핍을 인지하는 데서 비롯된다. 거기에 모르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보태지면 질문이 태어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자주 질문한다고 해서 자주 답을 구할 수 있지는 않다. 질문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부류가 알고자 하는 것은 수학 문제가 아니다. 나 같은 건 왜 태어났는가? 죽은 자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왜 너를 사랑해서 이 고생인가? 근데 저 인간은 도대체 왜 저러는가? 세상은 왜 늘 이 모양인가? 왜 나는 ‘너‘가 아니고 하필 나인가…? 보통 중학교 2학년 - P186

때 여드름과 함께 솟아나기 시작하는 이런 물음을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들을 ‘질문중독자‘라고 나는 불렀다. 물론 나 또한 어쩌다 내가 질문에 중독되었는지 모른다.
질문중독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문과대학이다. 역사나 철학도 있지만 문학이야말로 답이 없는, 어쩌면 질문 자체가 목적인 학문이므로 나는 기꺼이 끌려들어 갔다.
‘문송한‘ 나의 학우들은 무엇 하나 편히 지나치지 못했다. 자신이 삶이 스스로 설득되지 않아 자꾸 ‘왜?‘를 붙들었다. 물론 ‘왜‘를 붙잡는다고 해서 꼭 누가 대답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뭐 하나 뾰족하게 설명되지 않는 세계에 순응하는 대신 ‘왜‘의 소용돌이, 즉 자신만의 우주에 머무는 편을 택했다. 보통의 사람들이 지니는 사회적 목적이 없으므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적극적으로 거절했다. 그것이 바로 (밖에서 봤을 때) 그들이 인생을 ‘탕탕‘ 탕진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요인이다. 허약하고 불안하며 자기 자신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하루치의 에너지가 바닥나는 사람들. 두말할 것 없이 마음 한구석을 다자이 오사무‘의 방으로 할애한 사람들. 나는 이들이 좋았다. 적어도 이들은 내게 "그런 걸 뭐하러 궁금해해?"라고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 P187

어차피 자신 안에 존재했기 때문에 일상의 사소한 자극으로도 그들은 우주를 창조할 수 있었다. 지구가 태양을 돌듯 나는 그들을 공전했다. 그러다 친구나 연인이 되기도 했다. 그들의 삶에 끼어드는 순간 그들은 나를 ‘우주적으로‘ 찬미해주었다. 시를 써주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비루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그보다 황홀한 일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현실에 다치기 싫어 서로를 껴안고, 세상에 지기 싫어 속물들을 비웃었다.
그러나 우주를 창조할 수 있는 에너지는 우주를 파괴할 수 있는 에너지로도 쉽게 치환되었다. 그들은 우연히자신의 우주가 훼손되는 사고를 당할 때마다 우주 자체를 맹렬히 부정해버렸다. 마치 붓질 한번 엇나가면 그림을 꽉쫙 찢어버리는 화가처럼. 물론 내게도 그런 면이 있었다. 망친 상태에서 덧칠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주변에 온통 완성 못 한 그림들이 찢겨 나뒹굴었다. 친구, 연인으로 묶였던 우주들이 조각났다. 그러다 A를 만났다.
질문중독자의 입장에서 A는 충분한 속물이었다. 삶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멈춰 질문하지 않았고 따라서창조하지 않았다. 내적 우주의 절대자 같은 건, 될 생각도없어 보였다. 눈을 뜨면 하루를 살았고 이튿날 또 하루가생기면 다시 꾸준히 일상을 운전하는 사람이었다. 길이 굽 - P188

으면 회전을 했고 오르막이 보이면 액셀을 밟았다. 졸음을 쫓기 위해 껌을 씹고 길고양이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 브레이크를 밟았다. 조금 더 싼 주유소를 찾아가 기름을 넣었고 이따금 세차를 한 뒤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와 나 사이에는 명백한 벽이 실재했다. 그는 나를 우주적으로 찬미해준 적도, 시를 써주거나 노래를 불러준 적도 없었다. 내가 또다시 나를, 나로 태어남을, 나로 살아감을 자책할 때 그는 공감하지 못했다.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할 뿐이었다. 나는 쏘아붙였다. "넌 내가 오늘 밤 죽어도 내일 출근은 하고 나서 장례식에올 거야."
다른 운전자들과 조화를 이루어 운전하는 것이 나를 태우고 들판을 질주하는 것보다 그에게는 중요했다. "운전은 너무 지겨워, 난 태양이 녹아드는 벼랑 끝으로 차를 몰 거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함부로 일상을 내던지려는 나를 옆에 두고도 그는 바르게 주차했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 운전했다. 그는 결정적으로, 교통사고가 나도 절망하지 않았다. 보험사를 부르고 몇 가지 번거로운 일을 처리한 뒤 오늘은 재수가 없다고 잠깐 속상해하면 되었다. 차가 긁히면 차를 부수어야만 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왔던 나는, 그의 ‘아무렇지도 않음‘에 매혹되기 시작했다. - P189

없던 길을 내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떤 길이든 완주할수 있는 사람만의 아름다움이었다. 비포장도로에서 차가 흙먼지에 휩싸여도, 극심한 교통체증으로 시내 한복판에서 몇 시간을 꼼짝 못 해도 그는 스스로를 궁지에 몰지 않았다. 길에 침을 뱉지도, 가로수를 들이받지도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살면서 단 한 번도 죽고 싶었던 적이 없을 수가 있어?" 도무지 동요하지 않는 그에게 와락 짜증이 나서 물었을 때 그는 웃고 넘겼지만 나는 상상하곤 한다. 그는 아마 속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어차피 다 한 번씩 죽는데뭐하러 미리."
여전히 나는 질문중독자들을 사랑한다. 아직도 마음 한쪽에서 다자이 오사무가 방을 빼지 않은 것을 이제는 티도 못 내고, 꾸역꾸역 어른 행세를 하며 걸어가는 그들은 여전히 나의 징글맞고 애틋한 친구다. 다만 나는 그들이 또다시 화폭을 찢어발기려 할 때, 나를 사로잡았던 A의 모습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들려주고 싶다. 나는 그동안 A를 닮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왔는데 너도 한번 해보겠느냐고, 성과가 있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제 적어도 하나의 엇나간 붓질 때문에 그림을 찢어버리지는 않게 되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공허한 질문에 괴로워질 때면 일단 오늘 하루만 천천히 운전해보기로 한다. 대단한 애를 - P190

쓰지 않아도 그 조용한 관성이 이튿날 눈을 떠 또다시 시동을 거는 힘이 된다. 그렇게 많은 하루가 쌓인 어느 무심한 날에 나는 아주 오랜만에 나에게 물어볼 것이다. 이제 드디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살 수 있겠느냐고. - P191

책임감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제가 그 일에 나서야 할까요?"라는 물음에 오랫동안 신뢰해온 분이 말씀하셨다. "나서서 해결할 자신이 있나요?"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왜 나서려고 하나요?" 나는 망설이다가 해결은 못하더라도 나서야 할 책임이 내게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분이 다시 말씀하셨다. "나서지 않으면 우리나라 법에 위반되나요?
물론 그렇지 않다. 내가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세금을 내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하지 않는다고 경찰이 출동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단지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스스로 책임감이 강한 편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요사이 인생을 통째로 돌아보는 중이다. 나는 책임져 왔던 게 아니라 ‘면책의 위로‘를 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 P192

서사를 상상하는 버릇. 놀이터 그네에 앉아 발부리로 모래를 긁으며, 나는 뭔가 좀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멸치나 당근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자꾸자꾸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멸치나 당근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멸치나 당근은 그 일들에 맞서 무엇을 해야 할 의무나 의지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그래서 나는, 그래서 저기 저 언니와 오빠는, 선생님과 아줌마는, 망태할아버지와 가수와 과학자는, 매일매일 생기는 일에 ‘대항‘하여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하고, 그 행동에 따라 또 이튿날에 다른 일이 생겨나며 그렇게 하루하루 달라지는 이야기를 평생 쌓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평생, 예고편도 없이.
무언가 지나치게 거대하다는 느낌과 몹시 귀찮다는 느낌, 별로 자신이 없다는 느낌이 뒤섞였다. 물론 울고 쫓기는 이야기만 있으란 법 없고, 웃기고 신나는 이야기도 있다는 걸 함께 짐작할 수 있었지만 중요한 건 ‘쌓인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사람은 매일 아침 챙기는 책가방처럼, 자기가 살아온 시간만큼의 이야기를 주렁주렁 메고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 멸치나 당근과는 달랐다. 무거워서 어떻게 살지?‘ 근심이 찾아왔다. 나는 아직 어린이라 많이 쌓이지 않아서 그럭저럭 견딜 만하지만 저기 저 언니와 오 - P204

빠는, 선생님과 아줌마는, 망태할아버지와 가수와 과학자는? 도대체 다들 어떻게 사는 거지? 엄청 무거울 텐데?
무겁더라. 무겁긴 무겁다. 어린아이였던 그때보다는 확실히 많은 이야기들이 더해졌다. 어떻게 살아왔느냐를 떠나, 일단 ‘살아‘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노인들이 괜히, 내 인생을 책으로 쓰면 몇십 권이여, 가슴을 탕탕 치는 게 아니다. 인생이라는 서사에 주인공을 덜컥 맡아서, 단 하루도 미리 도착한 적 없는 시나리오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느라 무겁고 또 무겁다. 다만 무거워도 죽지 않을수 있는 이유를 이제는 안다. 자기 이야기를 ‘편집‘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근심했던 것처럼 그냥 막무가내로 쌓이는이야기에 깔려 죽는 것이 아니다.
시나리오는 비록 왜 미리 안 주는지 모르겠고 누가 썼길래 이 따위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편집권은 ‘어느 정도‘ 나에게 있다. 누구나 자신의 (무거운) 서사 속에 살되, 그것의 편집본 속에 산다. 10년 전의 편집본에 기대어 5년 전의 편집본이 만들어졌고, 그 5년 전의 편집본을 토대로 2019년의 편집본을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가위질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로 무거워서 부담스러운 것은 서사 자체가 아니다. 나의 에디터십이다. 쌓여온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편집할 것인가. - P205

누구는 저에게 유리했던 부분만 뽑아 기괴한 정신승리의 자기계발서를 만들어내고, 누구는 저에게 불리했던 부분만 뽑아 기괴하게 피로한 신파극을 만들어낸다. 전자든 후자든 재미없는 이야기임은 분명한데, 이야기와 이야기가 충돌하며 빚어지는 게 인간관계이다 보니, 에디터십이 현저히 부족한 사람은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고통을 주기도 한다. 형편없이 편집된 이야기를 누가 읽고 싶겠는가. 근데 막 읽으란다. 날 사랑하면 읽어줘야지! 읽어보면 재밌어!
울창한 서사를 명민하게 편집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면, 그래서 덩달아 나도 계속 살아가고 싶어진다. 저이에게 도착한 시나리오와 내 시나리오가 생판 다르겠지만 저이의 에디터십을 배우면 내 각본도 좀 나아지겠지, 생각한다. 무례한 자기계발서나 퇴행적 신파극의 유혹을 떨치고 그래도 읽을 만한, 쓰레기는 아닌 이야기로 당신에게 가닿을 수 있겠지. 그래서 ‘우리‘는 조금은 덜 두려워하며 남은 이야기들도 의젓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 그러고 보면 자기 인생의 유능한 에디터들은 타인까지 살리는 셈이다. 에디터십에 축복을. - P206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충만했던 순간이 결혼에 있었고 가장 구차했던 순간이 결혼에 있었다. 가장 크게 웃었던 순간, 가장 크게 울었던 순간도 결혼하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이었다. 결혼은 ‘좋을 때는‘ 파트너와 나를 두르고 있는 담장이 너무 아늑하고 미더워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상태이고, 별로 좋지 않을 때는 이 담장 안에서 일어난 심란한 역사를 도무지 담장 밖으로 설명할 길이 없어서 세상 무력한 상태다. 그러니 결혼은 내가 저 인간을 천국에보낼지 지옥에 보낼지 알 길 없음은 물론이요, 나 또한 저 인간으로 하여금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영문을 모르겠는 상태이기도 하다. - P209

다만 일단은 괴로움을 선택한 친구에게, 아직 내 담장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 하나는 들려줄 수 있다. 내가 도려내지는 순간 나는 함께 떨어지는 상대의 살점을 줍는다. 우리가 속절없이 서로를 벨 때, 나의 살점은 그가 앓고 그의 살점은 내가 앓는다. 아마 그게 우리가 외로움 대신, 담장 안에서 함께 울기를 선택한 이유일 것 같다. - P210

나는 스칼릿 같은 훌륭한 사냥꾼이 아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꼭 훌륭한 사냥꾼만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억척스럽지 않은 사람에게는 삶의 여러 과제들이 훌륭한 사냥꾼이 목격하는 것보다 훨씬 위압적으로 느껴지므로, 그 언젠가의 위압에 나자빠지지 않고 살아남은 것 자체가 이미 억척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종류는 다를지언정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믿는다면 위험한 분이거나 바보, 둘 중 하나겠지. 폰테인 할머니가 해준 말처럼 나의 두려움을 남겨두고 자학하지 말기로 한다. 조금씩이라도, 나 스스로를 먹이기 위해 참고 일어나 참고 출근하며 참고 파란불에 건너가는 나의 억척스러움을 가끔 인정해주기로 한다. - P221

그는 결국 영화를 그만하기로 했다. 파티션 안에서 일하는사람, 월급 받는 사람, 자유롭지 않은 사람, 재능을 묻어두는 사람, 노출되지 않는 사람, 창조하지 않고 사랑은 나에게만 받는 사람, 그러니까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되었다고는 하지만 언제나 힘들어했고, 그건 내가 회사 다니기 힘들어하는 차원과는 또 좀 달랐다. 그는 영화, 또는 자기 과거의 코어core’와 헤어지는 중이었다. 나는 그 헤어짐을 속수무책 바라봤다. 그는 외로웠고, 나는 그가 외로워 외로웠다. 얼마 전 김영민 교수의 책을 읽다가 "배우자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외로운 싸움을 혼자 수행 중일지도 모 - P230

른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주길"(《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바란다는 구절을 보았다. 그와 나는 함께 있었지만 ‘각자‘ 싸워야 했다. 그렇다고 ‘서로‘ 싸우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다.
그의 긴 싸움이 지금 어디를 통과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가장 가까이서 가능한 한 헤아리려 노력할 뿐, 그의 가슴속 어디쯤에서 옛사랑이 이따금 전화를 걸어오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가 전화를 받는지, 무시하는지, 아니면 혹시 전화선을 뽑아놨는지도 나는 모른다. 다만 나는 한때 ‘예술‘을 품었던 사람의 퇴근길이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너무 많이 고단하지는 않기를 매일매일 소망한다. 사랑은 다만 흘러가는 게 아니라, 사랑을 품었던 이에게 자신의 풍요를 어떤 방식으로든 내어주고 지나가는법이니까. 그것이 진짜 사랑이었다면. - P231

남편과 매 주말 집을 보러 다니면서 과연 인류는 왜 존속되는지 다시 한번 회의가 폭발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집이 필요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집 자체가 불로의 근거가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집 자체가 야근의 목적이 된다.
이렇게 말은 해도 사실 마음에 드는 집을 구했으므로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새로 들어갈 집은 (이전 집과 마 - P235

찬가지로) 지상에 있고, 물이 샌 흔적도 없고, 거실과 주방과 방과 화장실과 세탁실이 있다. 집은 본래 지상에 있는 것이 맞고, 물이 새지 않는 것이 좋으며, 분리된 공간이 있으면 편리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한 층만 더 높았으면 했다. 맞바람이 치는 구조였으면 했다. 붙박이장이 있었으면 했고, 베란다가 있었으면 했다. 이런 나의 욕망과, 대리석 바닥과 정원과 수영장 같은 것을 바라는 욕망의 층위는 정말로 다른가. 거실 깊숙이 들어오는 햇빛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냉장고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미간을 찌푸리는 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말든지 짜증을 내지 말든지 둘 중 하나만 해야 할 것이다. - P236

세계를 나아가게 하는 건 야심 자체보다는 야심과 야심 사이를 지나가는 어떤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이를테면 낯선 장소에서 내게 길을 가르쳐주는 이를 진심으로 드높이는 마음, 군중 사이에서 불룩한 배낭을 가슴 앞으로 돌려 메는 마음, 이면지를 모으는 마음, 날카로운 물건은 손잡이를 상대방 쪽으로 건네는 마음, 대접받지 않으려는 마음, 그러나 대접하려는 마음, 그런 마음가짐들의 합合에 가까운 것.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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