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견디는 시간 나의 서른에게 1
이윤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살 만해서 사는 것은 어린아이도 할 일이다. 살 만하지 않아도 살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삶을 덜 부끄럽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러니까, 살 만하지 않은 때의 감각이다. 소음을 피하게 하는, 나대지 않게 하는, 고독을 수긍하게 하는, 결국엔 모든 것이 소멸한다는 이치를 얼음장처럼 일깨우는, 역설적으로 살 만하지 않은 때에 읽는 책, 듣는 음악, 만나는 사람, 잠기는 상념, 올리는 기도는 반드시 나를 죽지 않게 해준다. 살 만하지 않은 때에 이르러서야 나를 최후에 떠받치는 삶의 알맹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 P28

‘사실 엉망진창이지만, 어른이니까 멀쩡한 척하고 다닙니다‘라는 말 따위 꼭 이마에 써 붙여야 아는 건가. 안 붙이고 다녀도 서로서로 으레 그런 줄 알고 지내는 게 어른 아닌가. 제 속이 엉망진창임을 감추지 않는 인간이나, 누가 멀쩡한 척한다고 그 속이 엉망진창임을 모르는 인간이나, 다 좋은데 적어도 어른 대접 받을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다. - P65

생의 유의미한 과제들은 전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출발한다. ‘그럼‘의 기준이야 제각기겠으나 나는 적어도, 지나간 어느 깊은 밤에 "나, 이번 생은 베렸어"(황지우,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라고 두 손 들어본 이들을 신뢰하고 사랑한다. 같은 맥락에서, 제 생을 척척 통제해왔거나 앞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신뢰하기 어렵다. 이들은 삶이 두렵지 않으므로 스스로 용기를 지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용기가 있어서 용기를 낸다는 건 아이러니다. 삶을 가장 크게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가장 크게 허락되는 것이 용기일 테다.
용기는 거대하지만 용기의 흔적은 사소할 수도 있다. - P67

이번 생은 아주 베려버려서 남은 날들이 온통 무섭고 두렵기만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이를 닦고 옷을 챙겨 입을 수 있는 것이 내겐 용기다. 실의에 빠진 이에게 조금만 용기를 내보라고 말했다가 지청구를 들은 적이 있다. 너는 나를 모른다고,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면 이 상황에서 용기를 내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그는 내가 말한 용기를, 몹시 비약적이고 드라마틱한 마음가짐으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두 팔을 앞뒤로 흔들며 씩씩하게 걸어보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신발을 신고 몇 걸음만 옮겨보라는 말이었다. 물론 그 몇 걸음에도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노력은 잔인하게도 궁극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가 없다. 우리는 몹시 두려울 때 위로와 격려와 응원을 받을 수 있지만, 그 모든 힘을 그러모아 최후에 실제로 노력해야 하는 당사자는 오직 나 자신뿐이다. - P68

기회를 많이 날려버린 인간보다 기회를 아직 얻지 못한 인간을 편애하는 것은 그래서 내게는 너무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또 하나의 인간을 세상에 보태고 싶다는 욕망을 저지한다. 사는 데 필요한 건 안간힘이라고 가르쳐야 하는 슬픔을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 - P90

SNS를 두고 검열된 자아를 전시한다는 둥 피상적인 관계를 양산한다는 둥의 비평을 ‘아직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오히려 놀랍다. 오프라인에서는 자신을 전혀 검열하지 않나? 오프라인의 관계는 전혀 피상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오프라인에는 온라인 세계보다 부조리한 인간의 비율이 낮나?
개인적으로 ‘나쁜 놈‘보다 ‘상상력이 누더기인 놈‘을 더 견디지 못한다. 상상력이 누더기인 자가 대체로 나쁜 결과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그 둘을 구별하는 것도 의미없지만, SNS를 정성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장난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성심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가식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비즈니스가 목적일 수도, 연애가 목적일 수도 있다. 운동movement이 목적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겸사겸사 목적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금전적인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온라인에서 아예 다 - P123

른 인격체로 살아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상상력 누더기스트‘들은 바로 그 빈곤한 상상력 탓에 저마다의 이유로 온라인에 모인 사람들을 일요일 저녁 리모컨 돌리듯 재단한다. 저이는 맨날 음식 사진만 올니까 먹보, 저이는 맨날 해외여행 사진만 올리니까 부르주아, 저이는 맨날 셀카만 올리니까 관종, 저이는 맨날 욕만올리니까 분노조절장애, 저이는 맨날 문학 얘기만 하니까 감성충, 저이는 맨날 일 얘기만 하니까 워커홀릭, 저이는 맨날 페미니즘 이슈만 올리니까 꼴페미.
물론 이 또한 구경꾼의 자유다. 멋대로 재단할 자유도, 당연히 있다. 다만 그 자유는 머릿속에서 누렸으면 한다. 티는 내지 말고. 누더기를 걸치고 밖에 나갈 수밖에 없다면 대충 깁는 성의라도 보여야 할 게 아닌가. 거래처와 신경전을 벌이고 나서 우울한 기분을 좀 떨치려고 지난 주말 데이트 중에 밝게 웃으며 찍었던 셀카를 올리자마자 "윤주 씨, 오늘 뭐 좋은 일 있어?"와 같은 질문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대답을 하기도 안 하기도 구차한그 마음을.
나는 고통에 실체를 입히려고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언어로 바꾸면, 눈에 보인다. 눈에 보이면, 대책이 (상대적으로) 보인다. 기쁨도 마찬가지다. 잡아두려는 것이다. 잡아 - P124

두면 잡아둔 만큼은 더 머무니까. 그런 나의 ‘독백‘에 희한하게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들이 나지막한 신뢰를 보내주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내가 나를 위로하려 쓴 글에 재밌다거나 슬프다거나 이해한다거나 심지어 고맙다는 댓글을 단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민망하다가 살짝 도취되기도 했지만, 그 마음을 곧 이해하게 되었다. 나 또한 생면부지의 타인이 스스로를 다독일 요량으로 쓴 글에 위안을 얻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때때로 자기 본위에서 출발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이타에 닿을 때가 있다. 징징거릴 데가 없어서 일기장에 쏟아내듯 끄적인 글에는 애초에 누구를 위로하겠다는 목적이 없었으나, 글이란 쓴 사람이 의도하지 않은 풍경을 제가 도착한 곳에서 스스로 그려내기도 한다. SNS를 떠도는 활자들 가운에 몇몇 글들이 바로 그렇다.
나는 그 힘이 ‘물리적인 공간을 공유하지는 않으면서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는‘ SNS의 특징에 있다고 생각한다. 얼굴 부딪히는 사람에게는 차마 하지 못할 말이 있다. 괜히 꺼냈다가 더 피곤해질 게 뻔하거나, 털어놓아 봤자 이해받지 못해 어차피 실망으로 돌아올 말들, 그럴 때 SNS는 혼자 중얼거려도 혼자가 아닌 시간을 제공한다. - P125

어릴 때 엄마가 습관처럼, 사람 마음이 한번 좁아지기 시작하면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이 없다는 말을 종종 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을 때부터 ‘마음‘과 ‘바늘‘이라는 단어가 한 문장에 있는 것만으로 뭔가 콕 찌르는 통증이 연상되어서인지, 엄마가 저 말을 꺼내는 순간에 반복되는 분위기가 무엇인지 조금 일찍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은 코나 발가락과는 다르게,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기도 하는 부위였다. 마음이 언제나 ‘마음 주인‘의 말을 듣는 것은 아니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고 사랑하고 싸우고 심지어 죽기도 한다는 - P137

것은 조금 나중에 알았지만,
심리학 용어 중에 파국화破局化라는 것이 있다. 예사로 겪을 수 있는 작은 일을 건건이 ‘재앙‘의 징조로 여기는 오류다. 이를테면 흔히 지나가는 질병에서 곧장 죽음을 우려한다든지, 하나의 실수로 일 전체를 망칠 거라고 예감하는 것이다. 마음이 (제 주인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날뜀으로써 결국 주인을 시험에 빠뜨리는 비극이다. - P138

위로는 위로고, 그래도 인생은 제멋대로 흘러갔다. 졸업하고 취직하고 (남들 보기에) 앞가림을 한다고 해서,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재앙을 염려하는 버릇을 완전히 떨쳤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내 몸 하나 씻겨 옷 입히는 것조차 힘든 날이 있고, 그럴 때마다 ‘아직도 한참 남은‘ 생을 과연 이 따위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한참 남은 생이라니, 우주가 들을까 부끄럽다. 우주에게 부끄러워지는 순간, 나의 마음도 우주만큼 부푼다.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이 없었는데 거짓말처럼 팽창한다. 궂은 날씨, 클라이언트의 갑질, 분실된 택배, 유쾌하지 않은 이메일, 오해와 음해는 나의 무한한 우주에 티끌조차 남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잠시 우주에 다녀와도, 물론 공과금 고지서는 날아와 있고 어김없이 어디선가 악다구니가 들려오며 나는 읍소하는 이메일을 마저 써야 한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엑설런트 없이도, 내가 해바라기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 - P141

어떤 사람들에게 책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 두 가지 의미. 어떤 사람들은 책 없이도 충분히 훌륭하다. 그들은 특별한 의도 없이, 자신이 지나온 공간과 시간 속에서 삶에 필요한 거의 모든 지혜를 익힌다. 자신을 낳고 길러준 이들로부터 약한 존재를 거두어 보호하는 법을 배우고, 제 이익을 두고 싸움을 벌이는 이들로부터 권리와 사욕의 경계가 어디쯤인지를 배운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들로부터 좌절을 배우지만, 애쓰지 않아도 어김없이 돌아오는 계절로부터 겸허를 배운다. 이들은 애초에 특별한 의도가 없었기에 자신이 훌륭한지 훌륭 - P142

하지 않은지에 별 관심이 없으며 따라서 치명적인 결핍을 느끼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의 결핍은 타고난 마음의 근력으로 곧잘 회복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타고나지 못했든, 자연스럽게 나아지지 못했든, 어느 시점부터 ‘훌륭하지 않게‘ 되어버린 사람들에게도 책은 무용하다. 일단 책을 잡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어쩌다 책을 잡아도 (바로 그 훌륭하지 않음 때문에)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한다. 이미 잘못되어버린 독단의 신념을 강화하는 데 책이 이용되는 셈이다. 상당한 다독가 중에도 이런 사람을 제법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이미 본인에게 ‘다독‘이라는 뒷배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삶 본연이 주는 배움을 쉬이 무시하기도 한다. 한술 더 떠서, 삶이(또는 사랑이, 배신이, 만남이, 이별이) 두려워 책에 숨는다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있는데, 좋은 책이라면 독자를 마냥 은신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그가 읽었다는 다섯 수레의 책이 통째로 오독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어떤 책을 두고,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책이라는 식의 판단 또한 허황한 일이다. 없어도 잘 살고, 있어도 잘 못 사는 이들이 어차피 있으니까. 다만 ‘누군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책이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들을, 책은 분명히 돕는다. 왜냐하면 그게 나니까. 책을 읽지 - P143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훨씬‘ 아픈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는 데 나의 전 재산인 전세보증금 절반(절반은 남편 몫이라치고)을 걸 수 있다. 철학자 강유원은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책과 세계》)고 말했고, 여성학자 정희진은 누군가 자신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아파서요. 책을 읽으면 좀 덜 아프거든요."(《정희진처럼 읽기》)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픈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정확히는, 아픈데 내가 아픈 것을 아는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아픈데, 아픈 채 죽고 싶지는 않은 사람. 속물인데, 속물로 죽고 싶지는 않은 사람. 그러니까 저절로 훌륭하게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싶고, 그때 책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걸 한두 번은 경험해본 사람. 아플 때 책을 찾고, 많이 아플 때 더 많이 읽는다. 안 그래도 못났는데, 요즘 못난 짓이 좀 너무 잦다 싶을 때, 하는 수 없이 기어가서 책을 든다. 그렇다고 (생각만큼) 다독가도 아니고, (생각만큼) 고급독자도 아니지만, 무엇 때문에 밥을 먹고 말을 하며 똥오줌을 가리고 숨을 쉬어야 하는지 모르겠을 때, 책을 붙드는 것 말고는 다른 뾰족한 수를 나는 알지 못한다. 늘 하던 밥벌이가 문득 고되게 느껴져서 곰곰 생각해보면 일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일하다 죽게 생겼다 싶고, 그나 - P144

마 이 알량한 노동력이 언제까지 쓰일 수 있을지 덜컥 불안이 밀려오는데 세상 어디에도 나의 생존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비관에 휩싸이기라도 해서 이윽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자신감도 사라질 때, 나는 권정생의 소설 《몽실 언니》를 떠올린다. 주인공 몽실은 말했다. "누구라도, 누구라도 배고프면 화냥년도 되고, 양공주도 되는 거여요." 몽실에게 죽비로 등짝을 딱 맞고 나면, 기운이 난다. 생에 기대거나 기대하지 않고, 화냥년이나 양공주로서 나와 삶을 지탱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중한 사람을 언제 어떻게 잃을지 모르며,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때는 롤랑 바르트가 《애도 일기》에서 했던 말, 자신은 어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삶 동안 내내) 어머니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는데, "어머니가 떠나가면서, 마지막 선물처럼, 나의 가장 나쁜 부분, 나의 노이로제를 함께 가져가버렸다"는 문장을 떠올린다.
도무지 납득도 해석도 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을 때는 제임스 설터의 단편 〈어젯밤〉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 게 좋다(반전 자체가 작품의 메시지라 언급할 수 없지만, 믿어보시라, 당신은 반드시 위로받는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경멸스럽기 그지없는 인간들의 시대가 오 - P145

고 있다‘는 니체의 말은 자괴에 빠져 자학을 그칠 수 없는 날 도움이 된다. 무어라도 붙잡고 싶은데, 아무것도 붙잡을 게 없을 때는 "기도는 당신과 창조주 사이의 개인적인 일이다"라는 라코타족 인디언의 말이 약이 된다.
생전에는 주목받지 못한 포르투갈의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소설 《불안의 서》도 나의 죽비요, 약이다(이 책은 심지어 800쪽이 넘어서, 쉽게 바닥나지도 않는다). 명예, 성공, 편리함, 소음과 번잡함 등이 인정받는 시대에 역행하는 어둠, 모호함, 실패, 곤경, 침묵 등에 사로잡힌 화자 소아레스는 리스본의 작은 사무실에서 매일같이 회계장부에 수치를 채우고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하며, 특별한 친구나 연인도 없이 일상을 부지한다. 그는 "삶이란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양말을 뜨는 것"이라면서도 "운명이 나에게 준 것은 몇 권의 회계장부와 꿈꾸는 능력, 단 두 가지뿐"이라며 그 누구도 사랑해주거나 칭송해주지 않는 자신의 일상을 다음과 같이 드높인다.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어제 느낀 것처럼 오늘도 똑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느낌이 불가능해졌다는 의미다. 어제처럼 오늘도 같은 느낌이라면, 그것은 느낀 것이 아니라 어제 느꼈던 것을 오늘 기억해 - P146

낸 것이며, 어제는 살아 있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음을 의미한다. (중략) 하루의 모든 내용을 칠판에서 지워내는 일, 우리 감정의 처녀성을 반복해서 부활시키는 일, 오직 그것만이 존재와 소유의 가치가 있다. 지금 밝아오는 이아침은 이 세상 최초의 아침이다."

굳이, "감정의 처녀성을 반복해서 부활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매일을 새 존재로서 맞이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몽실이가 생쌀을 꼭꼭 씹어 끓인 암죽을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은 갓난아기에게 떠먹이는 장면을 굳이 자꾸 떠올리지 않아도, 저절로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사람들이분명히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몽실과 소아레스가 있어야, 롤랑 바르트와 니체를 잊지 않아야 나는 겨우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양말을 신을 수가 있다. 다음 생에는 책이 없어도 책이 없는 줄도 모르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통증이 있는데 약이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 P147

자아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재주를 타고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책을 읽는 것은 어쩌면 현실세계에서 상대적으로 편히 살기 불리한 그들이 그나마 생존하도록 설계된, 일종의 방편일 것이다. 예컨대 탁월한 자기애 빼고는 뭐 하나가진 것 없는 L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적절한‘ 규모의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곧잘 해결하는 일들에도 수시로 자아에 깔리느라 버둥거린다. 이런 그가 만일 책조차 읽지 않으면 그는 세계의 보편적 슬픔에 연대하지 못하며, 자기 비극의 절대성에 압사할지 모른다. ‘세상에 당신보다 불쌍한 사람 많다‘는 종류의 언설은 둔탁하고 무례하지만, 그것이 문학의 입으로 말해질 때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세상의 무궁한 비극에 ‘자기성애자‘들은 꾸준히 노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태양 아래 새로운 것 없듯 태양 아래 새로운 비극 없으며, 태양 아래 모든 일은 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그나마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 P148

나는 돈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물욕이 생겼다거나 숫자에 밝아졌다는 게 아니라 ‘내가 나 살 돈을 벌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살게 해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공포에 비로소 사로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섹스할 수 있는 장소에 당당히 출입하고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노동하기 시작하여 그걸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거대한 우울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비로소 사람 구실 할 수 있게 된 것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 그냥 존재하는 것만 - P151

으로는 전혀 기특하지 않다는 것도,
남들 다 아는데 나만 몰랐던 그 각성이 공포로 다가왔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내가 노동해야 하고, 노동은 그래서 존재에 우선하며, 그러니까 나의 청순한 영혼 따위 탈탈 털리든 말든 ‘내가 버는 돈‘이 오직 나를 추동한다는 점. 그리고 나는 남들 다 하는, 아니 남들보다 훨씬 편한(?) 일조차 숨이 턱까지 차도록 발악하지 않으면 따라가지 못하고, 하루에 열두 시간을 수면해야 나머지 깨어 있는 시간에 간신히 남들 하는 몫을흉내 내는 수준의 인간이라는 점. - P152

삶의 ‘당위‘를 말하는 사람들과 나는 가까워질 수가 없다. 샛길 없는 인생, 정확히는 샛길 없는 인생을 도모하는 인생, 더 정확히는 새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그 인생의 주인들과 나는 잘 맞지 않는다. 실제로 샜느냐 안 샜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누가 누가 더 많이 새봤나, ‘불행 배틀‘이야말로 유치의 극치다. 다만 나와 잘 맞지 않았던 ‘인생의 에프엠‘들은 내가 앞으로 200년쯤 더 산다고 해도 끝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단어들, 이를테면 정의, 선, 도덕, 명예, 진실과 같은 말을 신뢰하며 그것들을 신뢰하지 않으면 인생이, 심지어 세상이 샛길로 빠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정의는 누굴 위한 것이며 도덕은 무엇을 엄호하는가. 명예는 어디에서 하릴없이 굴러떨어지는 것인가. 정말 몰라서, 모르겠어서 그런다. 그리고 진실은, 인생의 에프엠들이 말하는 진실은, 이를테면 일주일에 6일을 ‘갑질‘하다가 일요일 오전 교회에 들러 말끔한 얼굴로 회개하기를 반복하는 이들의 새하얀 셔츠에 침을 뱉고 싶은 것, 이런 것도 포함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칭송하는 사람이라면 일단 싫어지는 것, 모두가 입을 모아 욕하는 사람이라면 슬그머니 그의 편에 서고 싶은 것, 아직도 많이 남은 생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늘 멍청한 것, 삶을 꽃 - P157

밭같이 지극정성 가꾸는 사람들이 언제나 의아한 것, 지구도 모자라 달에까지 금 긋고 침 뱉기 시작했다는 인류 따위 그냥 멸망해도 되지 않나 싶은 것도?
다만 다람쥐처럼은 살고 싶은 것, 돌멩이 넘으며 도토리 주워 물고 나무 타고 그늘 찾아 틈틈이 조는 것, 무리는 안 짓고 외로움도 안 타고 자살도 안 하는데 슬프지도 않은 것, 난다 긴다 지랄해도 어차피 인간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제 인생밖에 모르는 것, 내가 아는 진실이라곤오직 그것뿐인 것도? - P158

"발목을 삐었는지 걷기가 너무힘들다"고 말한 남자에게 여자는 "발목이 삐었으면 아예 걷지를 못한다. 멀쩡히 걸어 다니면서 뭘 그러냐. 내가 예전에 발목 삐었을 때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라는 식으로 남자의 말문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때 남자가 폭발했다.
"네가 가져본 것은 네 발목뿐이잖아!"
그 말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에세이 익명 낭독‘ 사건 이후로 여자 앞에서 순순히 슬픔의 지분을 포기했던 나에게 기묘한 희열이 쏟아졌다. 동시에 한동안 영문도 모른 채 은폐됐던 슬픔이 깨어났다. 슬픔이 깨어났는데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팔이 어깨 아래에 있고 허파 아래 횡격막이 있듯 슬픔도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었다.
여자와는 당연히 수업 이후 연락할 일이 없었다. 돌아보면 여자의 슬픔은 딱한 면이 있었다. 수술실에서 개복되어 꺼내지는 장기처럼, 자꾸만 밖으로 호출되는 슬픔의 운명이란 얼마나 피로한가. 늑골에 심장이 보호되, 자기 안에 내밀히 보존돼야 할 슬픔이 시도 때도 없이 타인의 것과 견주어지는 일은 얼마나 소모적인가. - P162

중요한 것은 슬픔의 경중이 아니라 슬픔을 다루는 방식이라고 나는 믿게 되었다. 슬픔은 굳이 전시될 필요도 없지만 꼭 폐기될 필요도 없다. 내밀히 숨 쉬는 슬픔의 소리를 나는 가끔 집중해서 듣는다. 무릎이 아프면 무릎이 아프다고 말할 수 있듯이, 때로 슬픔의 소리를 타인에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 많이 얘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타인의 슬픔과 나의 슬픔 모두에게 예의가 아니다. 아무나 내 무릎을 수술할 수 없듯이, 아무에게나 내 슬픔을 어찌해달라고 응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타인의 무릎도 대체로 성치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성치 않은지는 영원히 알 수 없고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다만 은밀히 공감할 뿐이다. 그리고 다만, 무릎이 아프다고 무릎을 없애버릴 수 없듯 슬픔이 고통스럽다고 슬픔을 소거할 수 없을 뿐이다. - P163

우울은 제가 몸담기 쉬운 방향을 찾기 위해 쉬지 않고 두리번거린다. 우울에게는 악의가 있지 않다. 그 또한 그렇게 생겨먹었을 뿐. 우리가 할 일은 ‘녀석이 또 나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는 일‘이다. 일종의 메타인지를 놓치지 않는것. ‘하, 이 새끼가 이번엔 거기 꽂히시겠다고 슬슬 국민체조를 하고 자빠졌네!‘ 하는 마음 같은 것, 그것이 너무 꼭 맞는 둥지를 찾아 곧장 몸집을 불리기 전에. - P165

한 사람이 온 세상의 비극을 겪을 수 없어서 문학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훌륭한 문학은 독자를 자기연민의 우물 밖으로 꺼내준다. 제 손톱 밑 가시에 절절매며 살아온 사람에게, 이렇게 넓고 깊은 진창이 세상에 많으니 엄살은 조금만 떨라며. 말귀 밝은 이들이 개떡을 찰떡처럼 알아듣는 건 말 한마디를 천 개의 결로 헤아리기 때문 - P167

이다. 이들은 마담 보바리의 생과 그리스인 조르바의 생을 함께 살면서 휘트먼의 생과 네루다의 생도 건너본다. 그러고도 아직 못 살아본 생을 계속 궁금해한다. 궁금하니까 헤아리려 하고 자주 헤아리다 보니, 잘 헤아리게 된다.
그들은 비극을 알되 비극에 잡아먹히지 않는 사람들이다. 눈치를 능히 보지만 자신을 폐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점점 귀해진다. 오늘날 눈치 보는 태도는 그다지 미덕이 아니며, 자기 비극만 막대한 사람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비극을 딛고 당당해지라는 자기계발서는 호황이고생의 명암을 시퍼렇게 비추는 문학은 불황인 걸까, 그래서. - P168

1물론 누구나 ‘아무 말‘로 잔치를 할 수 있듯이 당연히 글도 쓰고 책도 낼 수 있다. 내게 심란함을 주는 것은 그런 솔직한 고백들을 향한 강 같은 ‘공감‘들이다. 나는 공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특히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는 방식에 대하여. 남의 상처에 얼마나 이입하느냐를 놓고 소위 공감력이 있네 없네 하는 ‘모종의 분위기‘에 대하여..
그 분위기란 자신이 경험한 종류의 상처에만 과몰입하는 형태를 공감이라고 부르는 어떤 흐름이다. 가난의 상처는 가난에만, 배신의 상처는 배신에만, 질병의 상처는 질병에만, 학력의 상처는 학력에만, 군대의 상처는 군대에만, 희롱의 상처는 희롱에만, 이를테면 실연의 상처가 있는 A는 타인의 실연에 ‘몹시‘ 공감한다. 함께 울고 분노하고 - P183

심지어 전율할 수도 있다. 그러나 A는 ‘그러느라‘ 한겨울 난방이 가능한 방 안에서 잠들 수 있다는 조건에는 무심할 수도 있다. 아니, 무심하기 쉽다.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서 잠들어야 하는 누군가에게 공감할 여력을 실연에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실연당한 자에게 A가 느꼈던 것은 공감인가. 까놓고, 자위 아닌가. 아니, 자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쯤에서 차라리 꼰대가 되기를 선택하는 게 나으려나. 동병상련은 진짜 동병에만 상련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어머, 저건 딱 내 얘기야!‘라고 인지하는 데는 어떤 품도 들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어떤 품도 들지 않는 일은 자신을 조금도 ‘낫게‘ 하지 않습니다. 꼰대는 모름지기 ‘나아지려는‘ 사람이니까요.
실연에 쓸 에너지를 줄여서, 난방 못 하는 집에 갖다 붓도록 하는 것이 좋은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감은 양이 아니라 넓이로 하는 것일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나를 넓히는 책을 읽는 데는 필연적으로 품이 든다. 그런 책은 ‘어머, 딱 내 얘기!‘라고 호들갑 떨 기쁨을 주지 않는다. 그런 책은 절대로 ‘나‘의 소중한 상처에 맞장구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책은 말한다.
너의 상처는 너에게나 성역이라고. - P184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치자. 굳이 질문하지 않는 사람과 자주 질문하는 사람, 묻는다는 건 모른다는 결핍을 인지하는 데서 비롯된다. 거기에 모르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보태지면 질문이 태어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자주 질문한다고 해서 자주 답을 구할 수 있지는 않다. 질문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부류가 알고자 하는 것은 수학 문제가 아니다. 나 같은 건 왜 태어났는가? 죽은 자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왜 너를 사랑해서 이 고생인가? 근데 저 인간은 도대체 왜 저러는가? 세상은 왜 늘 이 모양인가? 왜 나는 ‘너‘가 아니고 하필 나인가…? 보통 중학교 2학년 - P186

때 여드름과 함께 솟아나기 시작하는 이런 물음을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들을 ‘질문중독자‘라고 나는 불렀다. 물론 나 또한 어쩌다 내가 질문에 중독되었는지 모른다.
질문중독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문과대학이다. 역사나 철학도 있지만 문학이야말로 답이 없는, 어쩌면 질문 자체가 목적인 학문이므로 나는 기꺼이 끌려들어 갔다.
‘문송한‘ 나의 학우들은 무엇 하나 편히 지나치지 못했다. 자신이 삶이 스스로 설득되지 않아 자꾸 ‘왜?‘를 붙들었다. 물론 ‘왜‘를 붙잡는다고 해서 꼭 누가 대답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뭐 하나 뾰족하게 설명되지 않는 세계에 순응하는 대신 ‘왜‘의 소용돌이, 즉 자신만의 우주에 머무는 편을 택했다. 보통의 사람들이 지니는 사회적 목적이 없으므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적극적으로 거절했다. 그것이 바로 (밖에서 봤을 때) 그들이 인생을 ‘탕탕‘ 탕진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요인이다. 허약하고 불안하며 자기 자신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하루치의 에너지가 바닥나는 사람들. 두말할 것 없이 마음 한구석을 다자이 오사무‘의 방으로 할애한 사람들. 나는 이들이 좋았다. 적어도 이들은 내게 "그런 걸 뭐하러 궁금해해?"라고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 P187

어차피 자신 안에 존재했기 때문에 일상의 사소한 자극으로도 그들은 우주를 창조할 수 있었다. 지구가 태양을 돌듯 나는 그들을 공전했다. 그러다 친구나 연인이 되기도 했다. 그들의 삶에 끼어드는 순간 그들은 나를 ‘우주적으로‘ 찬미해주었다. 시를 써주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비루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그보다 황홀한 일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현실에 다치기 싫어 서로를 껴안고, 세상에 지기 싫어 속물들을 비웃었다.
그러나 우주를 창조할 수 있는 에너지는 우주를 파괴할 수 있는 에너지로도 쉽게 치환되었다. 그들은 우연히자신의 우주가 훼손되는 사고를 당할 때마다 우주 자체를 맹렬히 부정해버렸다. 마치 붓질 한번 엇나가면 그림을 꽉쫙 찢어버리는 화가처럼. 물론 내게도 그런 면이 있었다. 망친 상태에서 덧칠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주변에 온통 완성 못 한 그림들이 찢겨 나뒹굴었다. 친구, 연인으로 묶였던 우주들이 조각났다. 그러다 A를 만났다.
질문중독자의 입장에서 A는 충분한 속물이었다. 삶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멈춰 질문하지 않았고 따라서창조하지 않았다. 내적 우주의 절대자 같은 건, 될 생각도없어 보였다. 눈을 뜨면 하루를 살았고 이튿날 또 하루가생기면 다시 꾸준히 일상을 운전하는 사람이었다. 길이 굽 - P188

으면 회전을 했고 오르막이 보이면 액셀을 밟았다. 졸음을 쫓기 위해 껌을 씹고 길고양이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 브레이크를 밟았다. 조금 더 싼 주유소를 찾아가 기름을 넣었고 이따금 세차를 한 뒤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와 나 사이에는 명백한 벽이 실재했다. 그는 나를 우주적으로 찬미해준 적도, 시를 써주거나 노래를 불러준 적도 없었다. 내가 또다시 나를, 나로 태어남을, 나로 살아감을 자책할 때 그는 공감하지 못했다.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할 뿐이었다. 나는 쏘아붙였다. "넌 내가 오늘 밤 죽어도 내일 출근은 하고 나서 장례식에올 거야."
다른 운전자들과 조화를 이루어 운전하는 것이 나를 태우고 들판을 질주하는 것보다 그에게는 중요했다. "운전은 너무 지겨워, 난 태양이 녹아드는 벼랑 끝으로 차를 몰 거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함부로 일상을 내던지려는 나를 옆에 두고도 그는 바르게 주차했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 운전했다. 그는 결정적으로, 교통사고가 나도 절망하지 않았다. 보험사를 부르고 몇 가지 번거로운 일을 처리한 뒤 오늘은 재수가 없다고 잠깐 속상해하면 되었다. 차가 긁히면 차를 부수어야만 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왔던 나는, 그의 ‘아무렇지도 않음‘에 매혹되기 시작했다. - P189

없던 길을 내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떤 길이든 완주할수 있는 사람만의 아름다움이었다. 비포장도로에서 차가 흙먼지에 휩싸여도, 극심한 교통체증으로 시내 한복판에서 몇 시간을 꼼짝 못 해도 그는 스스로를 궁지에 몰지 않았다. 길에 침을 뱉지도, 가로수를 들이받지도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살면서 단 한 번도 죽고 싶었던 적이 없을 수가 있어?" 도무지 동요하지 않는 그에게 와락 짜증이 나서 물었을 때 그는 웃고 넘겼지만 나는 상상하곤 한다. 그는 아마 속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어차피 다 한 번씩 죽는데뭐하러 미리."
여전히 나는 질문중독자들을 사랑한다. 아직도 마음 한쪽에서 다자이 오사무가 방을 빼지 않은 것을 이제는 티도 못 내고, 꾸역꾸역 어른 행세를 하며 걸어가는 그들은 여전히 나의 징글맞고 애틋한 친구다. 다만 나는 그들이 또다시 화폭을 찢어발기려 할 때, 나를 사로잡았던 A의 모습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들려주고 싶다. 나는 그동안 A를 닮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왔는데 너도 한번 해보겠느냐고, 성과가 있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제 적어도 하나의 엇나간 붓질 때문에 그림을 찢어버리지는 않게 되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공허한 질문에 괴로워질 때면 일단 오늘 하루만 천천히 운전해보기로 한다. 대단한 애를 - P190

쓰지 않아도 그 조용한 관성이 이튿날 눈을 떠 또다시 시동을 거는 힘이 된다. 그렇게 많은 하루가 쌓인 어느 무심한 날에 나는 아주 오랜만에 나에게 물어볼 것이다. 이제 드디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살 수 있겠느냐고. - P191

책임감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제가 그 일에 나서야 할까요?"라는 물음에 오랫동안 신뢰해온 분이 말씀하셨다. "나서서 해결할 자신이 있나요?"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왜 나서려고 하나요?" 나는 망설이다가 해결은 못하더라도 나서야 할 책임이 내게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분이 다시 말씀하셨다. "나서지 않으면 우리나라 법에 위반되나요?
물론 그렇지 않다. 내가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세금을 내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하지 않는다고 경찰이 출동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단지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스스로 책임감이 강한 편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요사이 인생을 통째로 돌아보는 중이다. 나는 책임져 왔던 게 아니라 ‘면책의 위로‘를 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 P192

서사를 상상하는 버릇. 놀이터 그네에 앉아 발부리로 모래를 긁으며, 나는 뭔가 좀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멸치나 당근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자꾸자꾸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멸치나 당근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멸치나 당근은 그 일들에 맞서 무엇을 해야 할 의무나 의지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그래서 나는, 그래서 저기 저 언니와 오빠는, 선생님과 아줌마는, 망태할아버지와 가수와 과학자는, 매일매일 생기는 일에 ‘대항‘하여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하고, 그 행동에 따라 또 이튿날에 다른 일이 생겨나며 그렇게 하루하루 달라지는 이야기를 평생 쌓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평생, 예고편도 없이.
무언가 지나치게 거대하다는 느낌과 몹시 귀찮다는 느낌, 별로 자신이 없다는 느낌이 뒤섞였다. 물론 울고 쫓기는 이야기만 있으란 법 없고, 웃기고 신나는 이야기도 있다는 걸 함께 짐작할 수 있었지만 중요한 건 ‘쌓인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사람은 매일 아침 챙기는 책가방처럼, 자기가 살아온 시간만큼의 이야기를 주렁주렁 메고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 멸치나 당근과는 달랐다. 무거워서 어떻게 살지?‘ 근심이 찾아왔다. 나는 아직 어린이라 많이 쌓이지 않아서 그럭저럭 견딜 만하지만 저기 저 언니와 오 - P204

빠는, 선생님과 아줌마는, 망태할아버지와 가수와 과학자는? 도대체 다들 어떻게 사는 거지? 엄청 무거울 텐데?
무겁더라. 무겁긴 무겁다. 어린아이였던 그때보다는 확실히 많은 이야기들이 더해졌다. 어떻게 살아왔느냐를 떠나, 일단 ‘살아‘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노인들이 괜히, 내 인생을 책으로 쓰면 몇십 권이여, 가슴을 탕탕 치는 게 아니다. 인생이라는 서사에 주인공을 덜컥 맡아서, 단 하루도 미리 도착한 적 없는 시나리오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느라 무겁고 또 무겁다. 다만 무거워도 죽지 않을수 있는 이유를 이제는 안다. 자기 이야기를 ‘편집‘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근심했던 것처럼 그냥 막무가내로 쌓이는이야기에 깔려 죽는 것이 아니다.
시나리오는 비록 왜 미리 안 주는지 모르겠고 누가 썼길래 이 따위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편집권은 ‘어느 정도‘ 나에게 있다. 누구나 자신의 (무거운) 서사 속에 살되, 그것의 편집본 속에 산다. 10년 전의 편집본에 기대어 5년 전의 편집본이 만들어졌고, 그 5년 전의 편집본을 토대로 2019년의 편집본을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가위질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로 무거워서 부담스러운 것은 서사 자체가 아니다. 나의 에디터십이다. 쌓여온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편집할 것인가. - P205

누구는 저에게 유리했던 부분만 뽑아 기괴한 정신승리의 자기계발서를 만들어내고, 누구는 저에게 불리했던 부분만 뽑아 기괴하게 피로한 신파극을 만들어낸다. 전자든 후자든 재미없는 이야기임은 분명한데, 이야기와 이야기가 충돌하며 빚어지는 게 인간관계이다 보니, 에디터십이 현저히 부족한 사람은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고통을 주기도 한다. 형편없이 편집된 이야기를 누가 읽고 싶겠는가. 근데 막 읽으란다. 날 사랑하면 읽어줘야지! 읽어보면 재밌어!
울창한 서사를 명민하게 편집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면, 그래서 덩달아 나도 계속 살아가고 싶어진다. 저이에게 도착한 시나리오와 내 시나리오가 생판 다르겠지만 저이의 에디터십을 배우면 내 각본도 좀 나아지겠지, 생각한다. 무례한 자기계발서나 퇴행적 신파극의 유혹을 떨치고 그래도 읽을 만한, 쓰레기는 아닌 이야기로 당신에게 가닿을 수 있겠지. 그래서 ‘우리‘는 조금은 덜 두려워하며 남은 이야기들도 의젓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 그러고 보면 자기 인생의 유능한 에디터들은 타인까지 살리는 셈이다. 에디터십에 축복을. - P206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충만했던 순간이 결혼에 있었고 가장 구차했던 순간이 결혼에 있었다. 가장 크게 웃었던 순간, 가장 크게 울었던 순간도 결혼하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이었다. 결혼은 ‘좋을 때는‘ 파트너와 나를 두르고 있는 담장이 너무 아늑하고 미더워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상태이고, 별로 좋지 않을 때는 이 담장 안에서 일어난 심란한 역사를 도무지 담장 밖으로 설명할 길이 없어서 세상 무력한 상태다. 그러니 결혼은 내가 저 인간을 천국에보낼지 지옥에 보낼지 알 길 없음은 물론이요, 나 또한 저 인간으로 하여금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영문을 모르겠는 상태이기도 하다. - P209

다만 일단은 괴로움을 선택한 친구에게, 아직 내 담장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 하나는 들려줄 수 있다. 내가 도려내지는 순간 나는 함께 떨어지는 상대의 살점을 줍는다. 우리가 속절없이 서로를 벨 때, 나의 살점은 그가 앓고 그의 살점은 내가 앓는다. 아마 그게 우리가 외로움 대신, 담장 안에서 함께 울기를 선택한 이유일 것 같다. - P210

나는 스칼릿 같은 훌륭한 사냥꾼이 아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꼭 훌륭한 사냥꾼만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억척스럽지 않은 사람에게는 삶의 여러 과제들이 훌륭한 사냥꾼이 목격하는 것보다 훨씬 위압적으로 느껴지므로, 그 언젠가의 위압에 나자빠지지 않고 살아남은 것 자체가 이미 억척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종류는 다를지언정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믿는다면 위험한 분이거나 바보, 둘 중 하나겠지. 폰테인 할머니가 해준 말처럼 나의 두려움을 남겨두고 자학하지 말기로 한다. 조금씩이라도, 나 스스로를 먹이기 위해 참고 일어나 참고 출근하며 참고 파란불에 건너가는 나의 억척스러움을 가끔 인정해주기로 한다. - P221

그는 결국 영화를 그만하기로 했다. 파티션 안에서 일하는사람, 월급 받는 사람, 자유롭지 않은 사람, 재능을 묻어두는 사람, 노출되지 않는 사람, 창조하지 않고 사랑은 나에게만 받는 사람, 그러니까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되었다고는 하지만 언제나 힘들어했고, 그건 내가 회사 다니기 힘들어하는 차원과는 또 좀 달랐다. 그는 영화, 또는 자기 과거의 코어core’와 헤어지는 중이었다. 나는 그 헤어짐을 속수무책 바라봤다. 그는 외로웠고, 나는 그가 외로워 외로웠다. 얼마 전 김영민 교수의 책을 읽다가 "배우자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외로운 싸움을 혼자 수행 중일지도 모 - P230

른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주길"(《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바란다는 구절을 보았다. 그와 나는 함께 있었지만 ‘각자‘ 싸워야 했다. 그렇다고 ‘서로‘ 싸우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다.
그의 긴 싸움이 지금 어디를 통과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가장 가까이서 가능한 한 헤아리려 노력할 뿐, 그의 가슴속 어디쯤에서 옛사랑이 이따금 전화를 걸어오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가 전화를 받는지, 무시하는지, 아니면 혹시 전화선을 뽑아놨는지도 나는 모른다. 다만 나는 한때 ‘예술‘을 품었던 사람의 퇴근길이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너무 많이 고단하지는 않기를 매일매일 소망한다. 사랑은 다만 흘러가는 게 아니라, 사랑을 품었던 이에게 자신의 풍요를 어떤 방식으로든 내어주고 지나가는법이니까. 그것이 진짜 사랑이었다면. - P231

남편과 매 주말 집을 보러 다니면서 과연 인류는 왜 존속되는지 다시 한번 회의가 폭발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집이 필요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집 자체가 불로의 근거가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집 자체가 야근의 목적이 된다.
이렇게 말은 해도 사실 마음에 드는 집을 구했으므로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새로 들어갈 집은 (이전 집과 마 - P235

찬가지로) 지상에 있고, 물이 샌 흔적도 없고, 거실과 주방과 방과 화장실과 세탁실이 있다. 집은 본래 지상에 있는 것이 맞고, 물이 새지 않는 것이 좋으며, 분리된 공간이 있으면 편리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한 층만 더 높았으면 했다. 맞바람이 치는 구조였으면 했다. 붙박이장이 있었으면 했고, 베란다가 있었으면 했다. 이런 나의 욕망과, 대리석 바닥과 정원과 수영장 같은 것을 바라는 욕망의 층위는 정말로 다른가. 거실 깊숙이 들어오는 햇빛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냉장고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미간을 찌푸리는 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말든지 짜증을 내지 말든지 둘 중 하나만 해야 할 것이다. - P236

세계를 나아가게 하는 건 야심 자체보다는 야심과 야심 사이를 지나가는 어떤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이를테면 낯선 장소에서 내게 길을 가르쳐주는 이를 진심으로 드높이는 마음, 군중 사이에서 불룩한 배낭을 가슴 앞으로 돌려 메는 마음, 이면지를 모으는 마음, 날카로운 물건은 손잡이를 상대방 쪽으로 건네는 마음, 대접받지 않으려는 마음, 그러나 대접하려는 마음, 그런 마음가짐들의 합合에 가까운 것.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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