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산 - 이제는 안다. 힘들어서 좋았다는 걸 아무튼 시리즈 29
장보영 지음 / 코난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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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두 시간이면 오를 수 있겠다고 생각한 봉우리였는데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어처구니없게도 낯선 마을로 떨어진 적도 있다.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대피소였는데 낮 시간을 다 보내고 석양이 지기까지 능선 위를 헤맨 적도 있다. ‘할 수 있다‘는 전제가 ‘할 수 없다‘는 결말로 이어질 때마다 말할 수 없는 허탈함을 느꼈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산은 나를 낮췄다.
그동안 수많은 계획 아래 내가 가진 능력치와 한계치를 가늠하며 리스크가 적은 쪽에, 가능성이 좀 더 기우는 쪽에, 좀 더 안전한 쪽에 패를 던지고 살아왔다. 그러나 산이라는 공간에서는 그러한 저울질이 무의미하다.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것, 모든 일들이 예측한 대로 이뤄지지만은 않는 것, 그래서 좌절하고 실패하는 것이 산에서는 훨씬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을 수 있지만 계획 이상의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 모든 일이 예측한 대로 이뤄지지만은 않지만 내 예측보다 더 놀 - P58

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 성취와 성공보다 더 멋지고 감동적인 좌절과 실패가 있을 수 있는 것 또한 산에서 배웠다. 무엇보다 산은 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줬다. - P59

가끔 생각한다. 나는 왜 산을 달릴까. 사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산 앞에서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싶다. 그저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을 뿐이다. 동틀 무렵 태양의 붉은 빛을 받으며 달아오르는 대지 위를 달리던 새벽, 가쁜 숨을 고르며 끝없이 이어지는 나무 계단을 치고 올라 이윽고 당도한 능선 위를 바람처럼 달리던 아침, 이글거리는 뙤약볕 아래 잔뜩 뜨거워진 아스팔트길을 헉헉거리며 걷고 뛰던 정오, 그렇게 맞닥뜨린 서늘한 골짜기로 새어 들어오는 석양 사이를 쏜살같이 내리꽂던 오후.
달과 별이 빛나는 밤의 황홀은 또 어떤가. 세상의 모든 것이 까맣게 지워지고 산속에 오직 어둠과 나만이 존재하는 순간. 그 고요함 속을 달리다가 헤드램프 빛에 반사된 야생동물의 번득이는 눈동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줄행랑친 순간을 생각하면 언제라도 웃음이 난다. 그럼에도 밤의 산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오직 어둠과 나만이 존재하는 데서 느껴지는 정제된 기분 때문이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아스라한 야경은 내가 돌아갈 삶을 다시 한번 긍정하게 한다. - P79

경사가 거셀수록, 노면이 험할수록, 고도가 높을수록 심장은 빠른 속도로 뛰고 다리는 추를 단 것처럼 무거워진다. 그에 따라 얼굴은 달아오르고 호 - P82

흡은 거칠어진다. 산을 달릴 때 중요한 건 속도만이 아니다. 시작한 곳에서 끝까지 얼마나 지치지 않고 달렸는지도 중요하다. 당장이라도 이 질주를 멈추고 싶다. 중력을 거슬러 산을 달리는 건 아무래도 힘든일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멈출 수 없다. 이제는 안다. 힘들어서 좋았다는 걸. 쉽지 않아서 좋았다는 걸. 힘들어도, 쉽지 않아도, 멈추지 않고 조금씩 오르고 오르다 보면 산등성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고, 모든 것을 용서할 멋진 풍경도 펼쳐질 것이고, 지나온 길들을 돌아보면서 뿌듯해할 것이고, 그러다 길게 잘 뻗은 내리막이라도 만난다면 다시 모든 걸 잊고 달려볼 거란 걸. 힘들고 지겹고 그만하고 싶기도 하지만 결국 나한테는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걸. - P83

‘문제는 고도(altitude)가 아니라 태도(attitude)‘라고 말한 앨버트 머메리. 그의 이름에서 유래하는 - P91

머메리즘이란 등정주의를 가리키는 알피니즘이 아니라 보다 어렵고 다양한 루트로 오르는 것을 중시하는 등로주의를 뜻한다. 그는 산행의 본질은 정상을 오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다고 했다. - P92

정상을 향한 마음만으로는 산에 오를 수 없다. 그렇게 절박하게 오른 산에서 내려와야만 우리는 다음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래야 자신이 경험한 산의 시간을 세상에 전하며 무채색의 일상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또렷한 희망과 용기를 건넬 수 있다. 할 수 없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삶을 말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산행은 ‘From Home To Home (집에서 집으로)‘이라는 말이 있다. 살아 있는 동안 늘 산과 함께할 수 있는 삶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삶이 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삶이 아닐까.
그런 마음을 알기에 우리는 산에 올라가고 내려오며 서로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전 처음 본 사람, 곧 스쳐 지나갈 사람이라도 마치 서로를 알아보는 것처럼.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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