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나의 글씨를 손가락으로 만져보면서 내가 이미 오래전에 유나에 대한 분노와 유나에게 받은 상처를 버렸다는 걸 - P30
알았다. 나는 그 시절 유나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유나의 말을 단 한 번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었다. 유나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유나와 함께 있을 때 자연스러워질 수가 없었다. 나는 유나가 나를 더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고 생각했지만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보니 먼저 다가온 쪽은 언제나 유나였다. 친구가 되자고 했던 것도, 도서관에 가자고 했던 것도, 좋아한다고, 더 가깝게 지내고 싶다고 표현한 것도 언제나 유나였다. 유나가 무슨 마음으로 내 비밀을 퍼뜨렸는지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유나가 겉과 속이 달라서, 교활해서, 내게 상처를 주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다고 단정짓고 싶지는 않다.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유나가 내게 악감정을 지녔었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때 우리는 사랑과 증오를, 선망과 열등감을, 순간과 영원을 얼마든지 뒤바꿔 느끼곤 했으니까. 심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다는 마음이 모순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 P31
영원히 용서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유나에 대한 나의 마음은 그게 어떤 모습이든 늘 과하고 넘친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이제 애쓰지 않아도 유나를 별다른 감정 없이 기억할 수 있다. 아마 영원히 그 애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알고 싶다. 유나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 애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 P32
윤이는 정민의 얼굴을 바라보며 애써 웃어 보였다.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건 아니었지만, 꿈에서 윤이를 만난 건 지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도, 금덕이도 꿈에서 만났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정민은 이해했다. 의식적으로는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더 깊은 마음속에서는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위로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었다는 것을. - P68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가고 우리 가족이 쫓겨나듯 한국으로 갈 수도 있다는 말을 나는 차마 너에게 할 수가 없었어. 핀란드어가 기적적으로 늘지도 않은 상황에서 언어의 장벽은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높게 느껴지고, 내 삶의 뿌리를 영구적으로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도 말할 수 없었지. 너에게 그런 말을 하기가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아. 그 대신 나는 한국에 소중한 사람들이 많아서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거짓말을 했어. 너는 상기된 얼굴로 그 소중한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었고 나는 되는 대로 있지도 않은 친구들을 만들어내서 너에게 말했지. 마치 네가 그 많은 친구 중 하나일 뿐이라는 뉘앙스를 깔고 말이야. 그게 너에게 상처가 될 걸 알아서 그렇게 말했어. 20년이 지나서야 너에게 나의 진실을 말한다면, 너는 영원히 - P81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호 너는 북반구부터 남반구까지, 이 세상의 서쪽에서 동쪽까지 통틀어서 유일한 나의 친구였어. 한국에서 내가 얼마나 겉돌았는지 나는 너에게 말하지 않았지.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솔직함도 마음이 강한 사람이 지닐 수 있는 태도인 것 같아. 내가 강한 사람이었다면 너의 눈을 보고 말했을 거야. 지호야, 너는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한 친구야. 너는 나를 판단하지 않았어. 너와 함께 있으면 온전해지는 기분이 들었어. 나도 너와 함께 헬싱키로 가고 싶지만 우리 식구들은 곧 쫓겨나듯 한국으로 가야 할 거고 나는 홀로 이 나라에 남아서 모든 일을 잘 해결할 자신이 없어. 이곳은 2년 가까운 시간을 살아도 내게 가까워지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너를 잃는 것이 아파. 나의 무능력과 약함 때문에 이곳에 홀로 설 수 없는 내가 밉고 부끄러워.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마치 한국이 이곳보다 내게 훨씬 더 좋은 곳이고, 너 정도는 대체할 친구들이 많다는 식으로 허세를 부렸어. 그리고 다시 겨울이 시작되던 때에 우리 - P82
가족의 한국행이 정해졌지. 막막하고 답답했지만 그때는 그게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변화를 거부하며 사는 것이 겁이 많고 불안이 많은 나에게는 안전한 선택지였으니까. 지호야, 나는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어느 시점까지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었어. 큰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덜 상처받고, 덜 위험한 길만을 골라서 갔지. 그리고 그건 언제나 내 마음속 욕구와는 다른 길이었던 것 같아. 계속 그런 식으로만 살다 보니 나중에는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게 되더라. - P83
한참을 헤맸어, 지호야. 어디선가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서, 나는 그 소리에 기대어 걸음을 옮겼어. 그리고 그곳에 숲의 끝이 있었지.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아이들 틈에서 너의 얼굴을 봤어. 나를 발견해서 안심하는 아이들의 모습과는 달리 너는 화가 나 보였어. 너는 볼일을 보고 내가 기다리는 자리에 갔지만 그곳에 내가 없었다고 했지. 내가, 너와의 약속을 어기고 먼저 숲을 떠나려 한 거 아니냐고 했어. 그래도 넌 내가 걱정되어 오두막으로 와서 다른 아이들에게 나를 같이 찾아 나서자고 말했다고 했지. "난 그 자리에 있었어." - P86
넌 고개를 저으며 옅게 웃었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그치지 않더라. 너의 얼굴은 나의 그런 거짓말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어. 나는 네가 상처받았다는 걸 알았지. 하지만 내가 하지 않은 일을 어떻게 했다고 말할 수 있겠어.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너를 기다렸어." 그 말만 되풀이하는 나를 너는 믿어주지 않았어. 나는 너를 끝까지 믿었어. 네가 나를 그 자리에 버려두고 먼저 떠났다고 믿지 않았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 안에서는 그날의 일에 대한 의문이 싹텄지. 어째서 그때의 나는 네가 나를 버리고 갔으리라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걸까. 네가 나를 바로 의심한 것과는 다르게. 어쩌면 모든 건 숲의 일이었는지도 모르지. 해가 지기 시작한 숲은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우니까 우리는 그저 서로 어긋났던 것뿐일 거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궁금해. 그날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 P87
그 어두운 곳에 앉아 유진은 자기가 마지막으로 울어봤던 때가 언제였는지 어림해봤다. 잘 기억나지 않았다. 유진의 친구들은 종종 유진을 감정이 없는 인간이라고 평가하곤 했다.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남들처럼 분명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끔은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았고, 가끔은 머릿속이 따끔거리기도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마음이란 건 하도 걸어 물집투성이가 된 발바닥 같았다. 예쁜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이 아니라. - P104
해주의 가족은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배울 만큼 배운 애가 왜 종교를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고,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그런 곳에 다닐 시간이 있으면 운동을 하든지 책을 읽든지 뭔가 자기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 P106
활동을 하라고 충고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해주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자신의 부모가 자신의 믿음만큼은 건드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해주는 자기 뜻대로 중요한 결정을 해본 일이 별로 없었다. 부모가 다니라는 학원을 다녔고 읽으라는 책을 읽었고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부모의 바람대로 교대에 갔다. 앞으로의 일들도 뻔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남자와 결혼을 해서 아이는 둘 정도를 낳을 것이었다. 그 또한 부모가 세운 계획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내면만큼은 그분들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다는 걸 해주는 믿음을 얻으며 알게 되었다. 자신에게도 내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곳에서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해주는 조용한 성전에 앉아서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채반 같은 마음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기를 인정하게 된 것도. 아무리 바가지로 물을 떠서 담으려고 해도 채반 같은 마음에는 조금의 물도 머무를 수 없었다. 신을 받아들였다는 건・・・・・・ 무려 신의 사랑을 체험했다는 건 채반에 더는 물을 붓지 않고 깊은 물속에 채반을 던지는 일 - P107
같았다. 그건 입을 열어서 누구와 나누고 싶지 않은 혼자만의 소중한 경험이었다. 설명할 수도, 묘사할 수도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적어도 해주에게 믿음이라는 건 누군가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은 가장 사적인 영역이었다. - P108
코너를 돌자 눈앞에 지하철 출입구가 보였다. 연희는 문득 문동이 자신의 뜻을 끝까지 오해하리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문동이 한국에서 중국인을 혐오하는 교사를 만났다는 기억을 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저 너의 노력을 돕고 싶었던 마음뿐이었다고, 사실 너는 그 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학생이었다는 진심을 말하고 싶었다. 왜 - P131
좋은 마음이 언제나 좋은 결과가 될 수 없는지 연희는 초조한 슬픔을 느꼈다. "있잖아. 나도 조사 틀려. 은는이랑 이가는 나도 헷갈려서......." "다 왔네요." "잠시 커피라도 할래? 저기서?" "이제 가봐야 해요." "주소라도 줄래? 책 보내줄게." "아니에요. 집에 있어요. 오늘 까먹고 안 들고 와서." "읽었구나." 문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동은 연희가 다른 말을 할 새도 없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뒤를 돌아 걸어갔다. 연희는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문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동의 이름을 부르고, 전화번호라도 묻고 싶었지만 문동에게는 모두 변명조의 제스처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코너를 돌아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문동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문동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연희는 누군가를 기다리 - P134
는 사람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기다리는 사람처럼. - P135
내가 대답하는 동안 서경 언니는 민성이 아주머니가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듯이 무시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야, 내려와. 언니는 내게 소리쳤고 나는 아주머니의 당황한 표정을 보며 인사를 하고 언니를 따라갔다. 그런 일이 그 후에도 여러 번 있었다. 언니는 민성 아주머니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언니에게 말을 걸었다. 언니 왜 그래? 어느 날 참지 못하고 언니에게 묻자 언니가 답했다. 엄마 아빠가 조심하라고 했어. 뭘. 전라도 사람 조심하라고 했다고. 저 아줌마도 전라도 사람이래. 언니는 대수롭지 않게 그 말을 하고서 화제를 돌렸다. 나는 엄마 아빠와 서경 언니의 부모님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전라도가, 전라도가, 그렇게 시작하는 말들을. 나는 전라도가 우 - P142
리나라의 어느 부분인지도 몰랐고 세상 사람들이 태어난 지역에 의해서 구별될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내게는 작은 우리 동네가 내 세계의 전부였기에 어른들의 그런 말들은 기본적인 수준에서부터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른들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어른들이 조심하라고 하는 사람은 조심하고 봐야 했다. 나는 그다음부터 민성 아주머니를 마주치면 피하거나, 가까운 거리에서 보게 되면 얼굴을 보지 않고 작게 묵례만 했다. 그런 행동을 하면서 나는 작은 죄책감을 느꼈지만 어른들이 민성이 아주머니를 꺼리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아파트에서 그 이후로도 10년을 더 살았다. 민성이 아주머니네가 언제 그곳을 떠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아파트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나를 보며 애써 웃어주는 민성이 아주머니를 멀뚱히 바라보며 지나갈 때, 나는 힘이 있는 어른들의 세계에 속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까지 했다. - P143
아저씨는 우리를 도와준 고마운 분이었다. 그 사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여러 번 사업을 부도낸 아버지에게 돈을 꿔주기도 했고, 열두 살의 내가 빙판길에 미끄러져서 깁스를 하고 입원했을 때 선뜻 병원비를 내주기도 했다. 엄마는 이번 통화에서도 내가 입원했을 때의 일을 이야기했다. 엄마에게는 감동이었을 그때가 내게는 지우고 싶은 순간이었다는 걸 엄마는 끝내 이해할 수 없겠지. 나는 상기되어 이야기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입원해 있을 때 서경 언니 가족이 문병을 왔다. 아저씨는 자기가 보약을 가지고 왔다고 보온병을 내밀었고 아주머니는 스테인리스 대접에 보온병에 담긴 음식을 쏟아냈다. 우리 한별이, 이거 먹고 금방 낫자. 아저씨는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이 크게 웃으며 내게 대접을 - P150
건넸다. 그 대접에는 붉은 기름이 둥둥 뜬 고깃국이 담겨 있었다. 처음 맡아보는 냄새에 구역질이 났다. 아주머니가 그 고깃국에 도시락에 담아온 밥을 말고 숟가락을 내게 건넸다. 개장국이야. 약 된다 생각하고 먹어.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저씨가 너 생각해서 사 오신 거야.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야지. 엄마가 숟가락을 내 손에 쥐여주면서 내 등을 두드렸다. 꼭 아저씨가 보는 앞에서 먹어야 한다는 무언의 재촉이었다. 나는 엄마와 아빠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개장국을 숟가락으로 떠먹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며 소리 내어 웃던 아저씨,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던 서경 언니와 혹여나 내가 이 일에 실패할까봐 전전긍긍하던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날, 나는 그 한 그릇을 다 먹으면서도 울지 않았다.
그때 참 살기 좋지 않았니? 엄마의 질문에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P151
점장님, 기억나세요? 처음 제가 당신에게 모나게 대했던 날. 제가 아르바이트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던 것 같아요. 어떤 중년 남자가 저에게 야, 너, 하며 저를 부르고 반말로 주문을 했었죠. 저는 입술을 깨물고 난감하게 서서 그 상황을 견디고 있었어요. 대답 큰 소리로 못 하나,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당신이 제 뒤에서 나타나서 웃는 얼굴로 말했어요. 손님, 제가 주문 받겠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당신은 저를 보고 자리를 피하라는 표정을 지었어요. 저는 시뻘게진 얼굴로 자리를 떠났고 당신은 내내 상냥한 표정으로 남자의 말에 응대했어요. 마감할 시간이 되어서, 당신이 제게 다가와 말했죠. 미나 씨, 아까 당황했죠. 우리 아르바이트생들도 누군가의 귀한 딸이고 아들인데. 다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인데 손님이 그러면 안 되지. 그런 사람 많지 않고 간혹 있는데 오늘 운이 없었어. 어딜 남의 집 귀한 자식한테. 저 귀한 자식 아닌데요. 저는 퉁명스럽게 당신의 말에 대꾸했어요.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그렇게 말이 나와버렸어요. 처음부터 저는 당 - P155
신의 그 상냥함이, 저를 향한 친절함이 불편하게 느껴졌어요. 그냥 제가 견디고 지나가면 될 일을 굳이 와서 도와주는 것도 고맙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절 도와준 일에 대해 생색이라도 내듯이 와서 제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던 거죠. 귀한 자식이니 귀하게 대해야 한다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할 근거가 가정에서 받는 대우에 있다면, 그럼 저는 누구보다도 함부로 대해져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점장님, 저는 그 말이 싫었어요. 귀한 딸, 귀한 아들.
우리는 일을 마치고 같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갔어요. 언제였는지…… 3호선과 환승 구간이 짧아서 우리가 자주 타곤 하던 3-4번 플랫폼 앞에 그런 공익광고가 붙었잖아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요. 얼굴에 상처가 난 아이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어요.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고요. 그 아이의 얼굴 아래로 ‘지금 맞는 아이가 자라서 폭력 어른이 됩니다‘라는 광고 문구가 쓰여 있었지요. 저는 그 광고를 보면 기분이 가라앉아 당신에게 다른 플랫폼 쪽으로 걸어가자고 이야기하 - P156
곤 했어요. 어느 날인가 1-1 쪽으로 가자고 이야기하는 저에게 당신이 물었어요. 미나 씨, 피곤해요. 거기로 가면 환승할 때 더 걸어야 하는데. 왜 자꾸 그쪽으로 가자고 해요. 저는 손가락으로 광고를 가리키며 그 광고를 보고 있기가 힘들어서 다른 쪽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수긍했고, 그 광고가 없어질 때까지 제가 요구하지 않아도 1-1 쪽으로 걸어갔어요. 우리는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이었어요. 하루 종일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 일이 끝나고 나면 서로 말을 하지 않고 같이 지하철을 타는 날도 많았어요. 그 광고판을 가리키며 보기가 힘들어 더 걷자고 했던 건 무리한 요구였죠. 우리는 그 광고에 대해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사실 어떤 이야기를 나눈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그 광고를 만든 사람의 순진한 마음에 대해 저는 생각했어요. 그런 광고로 아동학대를 막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의 마음요. 그 불성실하고 게으른 아이디어요. 아동학대 가해자들에게 그런 식의 말로 어떤 성찰이나 반성을 불러올 수 있 - P157
으리라고 믿는 안일함을요. 저는 그 광고를 보면서 학대받는 아이들 중 대체 몇 명이나 그 광고를 보았을까 싶어 마음이 내려앉았어요. 학대하는 어른들은 학대의 이유를 아이에게 돌리죠. 너 때문이라고, 네가 이렇게 폭언을 듣고 매 맞는 이유는 다 너 때문이라고 말해요. 자신이 비열한 인간이어서 아이를 때린다고 말하는 학대자는 없을 테죠. 자기 잘못 때문에 학대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그 광고를 보았을 때 어떤 마음일지, 광고 문구를 만들고 게시한 사람들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그 광고를 보며 너의 미래는 지옥의 연장일 거라고 장담하는 어떤 목소리가 지하철 역사 안에서 울리는 것 같았어요. 너는 어른들에게 학대당하고 있어. 그런 너의 미래야 뻔하지. 넌나중에 그 어른들 같은 사람이 될 거야. 그런 메시지를 공익광고라고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세상. 가해자들에게 온전한 벌을 내릴 수도, 아이를 보호할 수도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천하에 광고하는 세상. - P158
맞고 자란 애들이 나중에 자기 자식 때린다더라. 그 말은 내가 오래도록 느낀 두려움이었죠. 나는 사는 게 무서웠어요. - P159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계피 사탕 같은 것을 건네는 모습을 떠올려봤어요. 그 무리에 끼기 위해서 틈을 찾으려 노력하는 할머니의 모습을요. 그게 잘되지 않아 낙담하고, 낙담한 채로도 멀어지지 못한 채 그 무리를 곁눈질했을 할머니의 모습을요. 할머니 왜 그래. 왜 그러고 살아.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아. 짜증이 나서 소리치는 저를 할머니는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바라봤어요. 사람의 마음은 좀처럼 지치지를 않나봐요. 자꾸만 노력하려 하고, 다가가려 해요. 나에게도 그 마음이 살아 있어요.
오늘 마감을 하고, 레스토랑의 셔터를 내리면서 당신 생각을 했어요. 쫓겨나듯 서울을 빠져나가야 했던 당신의 사정에 대해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을 때,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너무 쉽게 당신 탓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이에요. 나도 그랬어요. 맞아도 웃고, 오히려 나를 때린 사람의 눈치를 보고, 그 사람의 마음을 걱정해주기도 했었어요. 심지어 그로부터 위로를 받기를 원하기도 했지요. 그래서 저는 입을 열 수 없 - P163
었어요. 저는 제가 겪은 일들을 증언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내 고통은 사람들의 눈에 명백하고 순수하게 보이지 않을 테니까. 덜 아프고 싶어 몸부림친 일들이 내 고통이 타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의 증거가 될 테니까. - P164
부모는 꾸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유난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꾸꾸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농담거리로 삼았다. 닭에게 이름을 붙이고 항상 쓰다듬어줬다고, 그런 이유로 이제 닭고기도 먹지 않는다고. 대체 어떤 부분이 그렇게 웃긴 것인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에 상처를 받느니 꾸꾸에대한 이야기를 비밀에 부치는 편이 나으리라고 판단했다. - P184
현주는 비밀스럽게 작업했지만 남자 친구에게는 자기 작품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았다. 현주는 미리에게 남자 친구가 객관적인 시각으로 조언을 해준다고 했다. 미술에 대해 아는 것이 많고 그림을 많이 봐온 사람이어서 믿을 만하다고 했다. 그 믿을 만한 비평이라는 것이 현주가 지닌 장점을 깎아내리고비틀어 모멸감을 주는 것인지 그때의 미리는 알지 못했다. 미리는 애초에 그 남자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주와 만나고 있으면 쉴 새 없이 현주에게 전화를 해서 누구와 어디에 있는지 묻는 것도 싫었고 미리 앞에서 농담조로 현주를 깎 - P204
아내리듯이 말할 때는 표정 관리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농담인 것처럼, 가벼운 이야기인 것처럼 현주의 그림을 보며 말한다고 했다. 이런 그림을 너만 그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이 정도 수준의 작품들이야 찾아보려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 당장에 팔리기야 하겠지. 근데 그 이상이 있어? 현주가 아르바이트를 관두고 전업 작가가 되었을 때 그는 미소 지으며 자주 이렇게 말했다. 현주 너는 운이 참 좋은 것 같아. 현주는 그게 별일이 아닌 것처럼 미리에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는 현주에게 의부증 기질이 있다고, 현주가 자신에게 집착하고 자신을 통제한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리는 왜 그가 현주에 대한 거짓 소문을 지어 퍼뜨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현주 너는 복잡하고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고, 넌 그저 그런 여자라고, 아니, 그저 그런 여자여야 한다고. 현주의 모든 역사를 지우고, 개성을 지우고, 그녀만의 특별함을 지우려는 말. 그 - P205
는 ‘남자 하나에 목매는 여자‘라는 전형적인 이미지로 현주의 특별함을 가리려 한 것이었다. 그가 퍼트린 가십으로 덧칠된 현주는 더 이상 고유한 한 인간도, 작가도 아니었다. - P206
현주의 그림에서는 언제나 현주라는 사람이 보였다. 현주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그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으로 그런 마음이 들게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미리는 빈 캔버스 앞에 초조하게 앉아 있던 시간을 떠올렸다. 미리는 그 초조함과 막막함을 극복할 수 없었다. 대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미리는 그림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기말 작품 준비를 하던 날 중 하루였다. 한참을 그림 그리는 데 집중하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지고 있었고 - P209
고가도로에 차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라디에이터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왔고 복도에서 웃으면서 신발을 끌고 걸어가는 남자애들의 소리가 들렸다. 미리는 그것이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더는 그 상태를 견딜 수 없었고 억지로 애쓰고 싶지도 않았다. 관두기로 마음먹자 오랜 시간 자기 가슴을 단단하게 죄어오던 사슬에서 풀려나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도 미리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학교를 졸업해야 했으므로 그렸고, 미술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으므로 그렸다. 심심할 때 드로잉북에 크로키를 하기도 했다. 승무원이 되고 난 다음에도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미리는 살면서 가장 사랑했던 일을 소중하게 남겨둘 수 있었다. - P210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미리는 장례식에만 잠시 들렀다 두바이로 돌아왔다. 그 일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떤 말로 자기 감정을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미리는 어머니의 죽음을 한동안 현주에게 전하지 않았었다. 두 달쯤 지나서 지나가듯이 어머니의 부고를 전하자 현주는 미리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어떻게 그 시간 동안 자신에게 그 소식을 전하지 않았는지, 어떻게 별일 아닌 것처럼 그 일을 말할 수 있는지 자기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주는 거기서 더 나아가서 미리가 요양원에 있던 미리의 어머니를 고작 1년에 한 번 방문했던 것도 잔인한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래도 너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분이야. 받은 건 생각하지 않고 나쁜 기억만 골라서 어머니를 판단하는 거, 어른 - P211
스럽지 않은 일이야. 냉정하게 말하는 현주를 보면서 미리는 현주를 공격하고 싶어졌고 현주의 남자 친구에 대해, 현주의 자신감 없는 작업 태도에 대해 빈정거렸다. 미리가 그렇듯이 현주 역시 누구보다도 미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싸움은 더 번질 수도 있었지만 현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 P212
미리는 늘 자신의 문제로부터 도망쳤고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자신의 분노로부터, 불안으로부터, 슬픔으로부터 도망쳤고 최대한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 대신 미리는 일에 몰두했다. 동료들은 그녀가 일중독자에 가깝다고 말했는데 그건 일견 사실이었다. 일이 좋기도 했지만 일을 하지 않을 때면 공허함을 느꼈고 불안해졌으니까. 하지만 현주와 그렇게 싸운 이후에는 일에 몰입할 수가 없었고 자주 악몽을 꿨다.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누가 차가운 칼을 꽂은 것처럼 머리와 눈이 자주 아팠다. 실컷 도망쳤는데 그 끝에 다다라서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 것 같았다. - P213
넌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그건 마법의 문장이었다.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마음속에 서러움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 너처럼 유복한 생활을 하는 애는 절대 알 수 없다. 어머니 - P214
에게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미리가 밥을 먹을 때,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잠에서 깨어날 때 미리를 골똘히 지켜보던 어머니의 눈빛이 있었다. 어쩌면 다정하게까지 들릴 수 있는 말투로 어머니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누가 너 같은 애를 좋아하겠어. - P215
아프지 않았을 때의 어머니는 미리에 대한 적의를 세련되게 가공하여 보여줬다. 집요한 괴롭힘이었지만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로 어머니는 미리에게 다정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자신의 사회적 자아를 잃어버리고, 의식을 놓아버리자 어머니는 더는 그 감정을 미리에게 숨기지 않을 수 있었다. 미리에 대한 어머니의 염오는 그토록 순수한 것이었다. 그 모습이 미리의 눈에는 차라리 자유로워 보였다. - P216
대학교 2학년 때, 미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자신과 어머니의 관계에 대해서 현주에게 말했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지만 현주에게 마음이 열려서 그랬다. 어떤 엄마가 자기 자식을 싫어하겠니. 현주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미리는 말문이 막혀서, 웃으면서 자기가 애초에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듯이 자기 말을 수습하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현주가 말을 이었다. 네가 어머니 진심을 어떻게 알겠어. 성격이 안 맞을 수도 있고, 어머니가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 수는 있지. 그래도 미리야,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어. 그래. - P219
미리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현주처럼 말했고 그 말들의 합창은 미리를 예민한 사람이 되게 했다. 미리는 어머니의 말투, 표정, 몸짓에서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는 그 당연한 진실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주인의 식탁 밑에서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개처럼 노력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작은 증거라도 찾으면 그 자그마한 것을 잡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게라도 그런 믿음의 공동체에 속하고 싶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사랑조차 받지 못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습관이 되어서 그녀는 사람들의 말투나 표정에 민감한 어른이 됐다. 미리는 현주를 만나고 나서야 사랑은 엄연히 드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은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네발로 기면서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일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어렵게 받을 수 있는 보상도 아니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 모든 사실을 알려준 건 현주 - P220
였다. 현주와 함께 있을 때면 미리는 안전함을 느꼈다. 현주는 미리에게 미리의 존재 이외의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현주가 미리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니까. 무엇보다도 현주는 미리가 조건 없이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기에 미리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을 넘어서 불쾌함까지 느끼는 것 같았다. 현주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미리는 벽에 부딪힌 기분을 느꼈다. 왜 자신의 마음을 현주가 정확히 알아주기를 바랐던 걸까. 왜 그토록 현주에게 이해받고 싶었던 걸까. 그러면서도 미리는 한 번씩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고 현주는 그런 미리의 이야기를 어린애의 투정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서 미리는 어느 순간현주로부터 자신의 한 부분을 이해받는 것을 포기했다. 최악의 인정 욕구는 자기 아픔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일지도 몰랐다. - P221
어머니를 보러 마지막으로 요양원에 갔던 날, 미리는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그린 그림 세 장을 가져갔다. 평소에 어머니는 미리의 그림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미리는 그것이 어머니가 자신을 인정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라 - P226
도 어머니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미리는 요양보호사에게 그림을 건네고 병실 앞 복도에서 어머니가 자기 그림을 보는 모습을 바라봤다. 어머니는 침대에 구부정하게 앉아서 그림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더니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그 그림을 가로로 한 번, 세로로 한 번 찢어 구겨버리고 바닥에 던져서 발로 밟았다. 자신의 모습을 찢고 구기고 발로 밟는 어머니. 그것이 미리가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미리를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한 건 어머니의 자유의지였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만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미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미리는 어머니를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때로는 어머니가 죽기를 바라면서도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삶은 선택할 수 없었다. 이런 삶이 자신의 것이었을까. 미리는 쉽게 답할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미리는 자기 의지로 그림을 그린 적이 없었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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