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전고운 외 지음 / 유선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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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됐고, 딱 두 가지 목표만 세웠다. 잠에서 깨면 30분 요가 하기, 그리고 무조건 많이 쓰기. 그게 편지든 일기든 시나리오든 반성문이든 많이 쓰고 볼 것. - P30

이런 나의 생각이 문제다. 쉬운 것은 인정하지 않는 생각. 어려운 것만 진짜라고 여기는 생각. 결핍과 고통에서 빚어진게 아닌 글들은 가치 없다고 여기는 생각. 이 생각은 언 - P39

제부터라고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나를 지배해 왔다. 얼핏 보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 너무 쉽게만 느껴진다. 죽음을 쉽게 위로하고, 타인의 가치를 쉽게 폄하하고, 쉽게 우상화하고, 쉽게 욕한다. 쉽게 쓰일 내 글 역시도 쓰기도 전에 가치 없이 느껴지니 쓰고 싶다는 욕망은 태어나지도 못하고 사라진다. 쉬운 것에 대한 경멸 자체가 일차원적인 태도다. 들여다보면 계란말이 하나 김치찌개 하나 어느 것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데, 그 너머를 보지 않고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해 버리니 냉소적이게 된다. 냉소적인 태도는 모든 창작을 갉아먹는다. 냉소적이기만 했다면 그나마 좀 나았을 텐데, 나는 뜨겁기도 하고 냉소적이기도 해서 타버리거나 추위에 덜덜 떨거나 냉탕과 열탕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에너지가 증발해 버렸다. 두 상태 다 난처한데 차라리 뜨거운 게 그나마 생산적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쉬운 것에 대한 혐오 자체는 아직도 세상에 대한 기대가 높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했던 글과 영화는 거대했기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는 한없이 작고 초라해진다. 사람은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자신을 - P40

작아지게 만드는 존재는 결국 피하게 된다. 연인이든 친구든 부모든. 그렇다면 본질을 바꿔야 한다. 글과 영화에 대한 거대 판타지를 없애야만 내가 살 수 있다. 계속 사랑을 하려면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인정하고 없애야만 하는 것처럼. 어떤 존재나 가치도 절대적으로 아름다울 수 없다. 기존에 나를 동기화하던 가치관이 효력이 다하였다면 폐기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고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거라면 과감히 모든 것을 관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내가 남들보다는 조금은 더 비범한 줄 착각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슬프게도 그저 평범한 나는 둘 중 하나도 못하고 멈춰 서 있다. 결국은 포기할 것을 포기하지 못해 나를 포기하고 사는 내가 정말 의미 없이 낭만적이고, 모순적이다. 결과만 볼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만, 이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아직은 더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할 시간이 혹은 미련을 버릴 시간이. 그때까지는 가짜라도 쓰고 싶다. 가짜인지 진짜인지도 써봐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내가 가 - P41

장 믿는 것은 글이기 때문이다. 도달할 수 없을지라도 그곳을 향해 사는 것 말고는 현재로서는 다른 방법을 모르겠다. - P42

생각해 보면 어릴 적의 행복이 기쁨과 설렘, 재미 같은 것들이었다면 어른을 행복하게 하는 요소는 감사함과 안도감이 아닐는지. 아이들이 재미와 즐거움을 찾아 세상을 헤맬 때 어른들은 그저 걱정, 불안, 고통이 없는 상태, 그러니까 자기 전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는 날들을 바라며 추구하는 것이 그들의 행복이 아닐는지.

일찍 일어나 새벽에 내린 눈을 보며 덩달아 눈처럼 가라앉은 내 고요한 마음이 가능한 오래 지속되길 바라고, 시간이 흘러서 이제는 아무도 밉지 않고, 누군가를 떠올려도 죽지 않을 만큼만 그리워 다행이라 여기는, 그런 어른의 삶. - P52

블로그에 허랑방탕한 글을 잔뜩 썼기 때문에 글이 주는 재미를 알았지 싶다. 쓰고 싶어서 쓰는 글, 닉네임으로 쓰는 글. 가격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글. 그 덕에 ‘잘 써야 한다‘에서 ‘쓰고 싶다‘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 P87

나도 내 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내게는 실현하지 못한 기획을 담은 메모가 한가 - P91

득 있다. 내가 읽고 싶어서 쓰고 싶은 이야기가 내게도 있다. 쓰지 않은 글을 쓴 글보다 사랑하기는 쉽다. 쓰지 않은 글은 아직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쓰지 않은 글의 매력이란 숫자에 0을 곱하는 일과 같다. 아무리 큰 숫자를 가져다 대도 셈의 결과는 0 말고는 없다. 뭐든 써야 뭐든 된다. - P92

그렇게나 쓰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메모장에는 쓰는 것이 모순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건 봉인의 한 과정이다. 속 썩이는 온갖 것들을 적은 후금고안에 넣어버리는 것이다. 그럼 그 감정들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다. 봉인된 것이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것들을 무쇠 안에 구 - P127

겨 넣음으로써 내일은 좀 더 산뜻해질 것이다.

산뜻해지기 위해서는 쓸 수밖에 없다. 모순이지만 어쩔 수 없다. - P129

"창작은 전부 아니면 전무라고 하잖아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물이 끓어서 기체가 되는 것처럼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은 창작물은 아무도 모르는 거 같아요. 중요한 건 계속 끓고 있다는 거죠. 물론 마감일을 정하고 관리하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있으면 편집자도 있는 것처럼요." - P189

사장님은 창작이 전무와 전부라고 했고 내게 창작은 무리하기와 마무리하기다. 잘 쓰지 못할까 봐,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 쓰기를 미루는 나를 채찍질하며 에너지를 무리하게 소진하고 거기서 오는 불안을 에너지 삼아 결국 마무리해 내는 것.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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