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김비.박조건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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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질문 속에 권력이 존재한다는 걸 잘 모른다. 누구에게는 자신의 사소한 궁금증을 풀려는 질문이, 누군가에는 자신의 존재를 설명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수십 번 수백 번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장선생님은 학생에게 편하게 아무렇게나 질문을 하지만, 학생은 교장선생님에게 그렇게 질문하기가 힘들다. 위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질문은 서로 신뢰와 관계가 - P110

쌓인 뒤에 조심스럽게 천천히 할 수 있는 것이지 초면에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기혼자(다수)들이 쉽게 비혼자(소수)들에게 왜 결혼을 안 하는지 질문하곤 한다.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비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에 명료하게 설명을 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나름의 신중한 결정에 답을 요구받는 그 자체가 때론 무례한 일이기도 하다. - P111

삶이란 포기해버리면 정말 그 순간 끝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는 마음가짐 하나만 붙들고 있어도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사실 그 마음을 스물네 시간 아등바등 붙들고 있을 필요도 없다. 어떤 때는 힘을 뺐다가, 장난감처럼 굴렸다가, 뒹굴뒹굴 끌어안고 늘어졌다가, 그렇게 지내면 된다.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 어떤 꼴이더라도, 어떤 형편없는 나 자신이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삶이 된다. 그 누구의 삶보다 더욱 귀한 삶이 된다. - P120

내가 온 생애를 걸었던 어떤 결정이 완벽한 어리석음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나를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 삶 속에서 나는 비로소 가장 큰 안정감을 찾았고, 나에게 주어진 자리를 찾았다고 확신한다. 비트랜스젠더 여성이나 남성이 기본값으로 갖고 태어나 혼란을 느낄 필요가 없었던 정도의 안정감에는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내 삶에서 가장 최대치의 평온을 여기 이 자리에서 비로소 획득했다고 확신한다. - P128

2020 년 올해로 딱 오십이 되던 첫날, 나는 일어나자마 - P152

자 신랑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우와 오십이다!" 두 손 번쩍 들어 외쳤다. 신랑은 나의 오십에 박수를 쳐주었다. 누군가에게 50은 쓸쓸한 숫자인지 모르지만 나에게 오십은 트로피였다. 대단한 걸 이뤄서가 아니다. 온전히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트로피였다.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오십을 꿈꾸어본 적이 없었다. 마흔까지는 아등바등 살지 않을까 추측하며 ‘트랜스젠더의 늙은 몸‘이 어떤 것일지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알 수 없으니 두려운 것일 뿐이었다. 혼자든 누군가 곁에 있든 고립되거나 자학하지 않고 오십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나는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 P153

휘어진 내 삶을 가만히 만져본다. 매끄럽지 않고 우둘투둘 돋아난 돌기로 가득한 모서리를 손바닥에 문질러본다. 날카로운 통증에 비명 지르지 않고 조용히 생각한다. 나를 아프게 했던 것들을 생각한다. 이름 없는 것들을 생각한다. 빼앗겼거나 지워졌거나, 모호하고 흐릿한 이름을 지닌 모두를 생각한다. 버티고 살아남은 그 안간힘을 위해 소리 없는 찬사를 마음속에 되뇌어본다. - P154

첫날 첫 수업에 나는 아무것도 들고 가지 않았다. 수강생에게 내 이야기부터 했다. 그리곤 지금까지 내가 한 수다가 바로 우리가 써 내려갈 글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글자가 틀려도 상관없고 문장이 틀어져도 괜찮다고 했다. 마음에 얹힌 것들을 마음껏 쏟아내달라고 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흘러나오는 모든 것을 풀어놓고, 같이 울어보자고. - P171

나는 아직도 내가 문학이라는 돌 하나로 무얼 할 수 있을지 잘 모른다. 돈도 안 되는 걸 왜 그리 오래 붙잡고 있냐고, 어서 내다 버리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이번 생은 그 돌을 계속 만지작거리며 살게 될 것 같다. 돈이 안 되고 걸작을 남기진 못하더라도, 울고 싶은 이들의 쪼그린 발 아래 집어 던질 수 있는 돌 하나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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