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H마트에만 가면 운다. H마트는 아시아 식재료를 전문으로 파는 슈퍼마켓 체인이다. H는 한아름의 줄임말로, 대충 번역하자면 "두 팔로 감싸안을 만큼"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 조기 유학 온 아이들은 고국에서 먹던 갖가지 인스턴트 라면을 사러, 한인 가족들은 설날에 해 먹을 떡국 떡을 사러 이곳에 온다. 큼직한 통에 담긴 깐마늘도 여기서만 살 수 있다. 한국 음식을 해 먹는 데 마늘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를 제대로 알아주는 곳은 이곳뿐이라는 말이다. H마트는 일반 슈퍼마켓 매대 중 달랑 한 칸을 차지하는 ‘세계 전통 식품‘ 코너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이곳에서 - P9
는 스리라차 소스 병 옆에 고야 통조림을 쌓아두지 않는다. 대신 오만 가지 반찬이 있는 냉장식품 코너도 있고, 만두피를 구비해놓은 냉동식품 코너도 있다. 그 앞에서 나는 엄마의 계란 장조림과 동치미 맛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치다가, 엄마와 둘이서 식탁에 앉아 얇은 만두피에 다진 돼지고기와 부추 소를 넣고 만두를 빚으며 보낸 그 모든 시간을 떠올리면서 만두피 한 덩이를 집어든다. 그러다가 건조식품 코너에서 훌쩍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제 전화를 걸어, 우리가 사 먹던 김이 어디 거였냐고 물어볼 사람도 없는데, 내가 여전히 한국인이긴 할까? - P10
나의 슬픔은 뜬금없는 순간에 들이닥치기 일쑤다. 나는 욕조에 엄마의 머리카락이 허다하게 남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어떤 기분인지에 대해서는, 5주 동안 날마다 병원에서 밤을 지새운 일에 대해서는 태연한 얼굴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H마트에서 낯모르는 아이가 뻥튀기를 담은 비닐봉지를 양손에 하나씩 집어드는 모습에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린다. 원반 모양의 그 앙증맞은 쌀과자는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엄마가 내 곁에 있고, 방과후에 둘이서 동글납작한 스티로폼처럼 생긴 과자를 한입 크기로 입에 넣고 아작아작 - P12
씹으면 그것이 혀 위에서 설탕처럼 사르르 녹아버리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식당가에서 어느 할머니가 해물 짬뽕을 먹다가 새우 머리와 홍합 껍데기를 자기 딸 밥뚜껑에 건져내는 모습을 보면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머리카락은 곱슬곱슬한 반백이고, 양쪽 광대뼈는 복숭아마냥 볼록 솟았고, 눈썹에는 오래된 문신 자국이 푸르스름하게 남아 있는 얼굴. 나는 70대의 엄마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한국 여자들이 할머니가 되면 정해진 수순처럼 따르는 그 똑같은 파마머리 대열에 엄마도 동참했을지도, 엄마가 팔짱을 끼고 아담한 몸을 내게 기댄 채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식당가로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우리는 둘 다 엄마가 ‘뉴욕 스타일‘이라고 말한 올 블랙 차림일 것이다. 엄마가 생각하는 뉴욕 이미지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유행하던 시절에 영영 머물러 있었으니까. 엄마는 이태원 뒷골목에서 구입한 짝퉁 핸드백이 아니라 평생 그리도 갖고 싶어하던 샤넬 누빔 가죽 진품 핸드백을 들었을 것이다. 손과 얼굴은 QVC 홈쇼핑 채널에서 산 노화 방지 크림 때문에 살짝 끈적일 테고, 내가 이상하게 생겼다고 사지 말라 했던 하이톱 운동화를 신었을 것이다. "미셸, 요즘 한국에서는 연예인들이 다 이걸 신고 다닌단다." 엄마는 내 코트에 생긴 보풀을 - P13
뜯어내면서 잔소리를 해대겠지만―어깨가 굽었다는 등, 신발좀 새로 사라는 등, 자기가 사준 아르간 오일 트리트먼트를 대체 왜 안 쓰냐는 둥―어쨌든 우리는 함께 있을 터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부아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 내가 생판 알지도 못하는 이 한국 노인에게 짜증이 난다. 이 여인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엄마는 그렇지 않단 사실에 화가 치밀어오른다. 마치 생면부지의 이 여인이 살아남은 것이 내가 엄마를 잃은 것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것처럼, 누군가는 우리 엄마 나이에도 자기 엄마를 곁에 둘 수 있다는 사실에 골이 난다. 저 노인은 여기서 이렇게 매운 짬뽕을 후루룩거리며 먹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 엄마는 그렇지 않은거지? 분명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을까. 인생은 불공평하고, 때로는 분별없이 남 탓을 해보는 게 아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때도 있으니까. - P14
나는 지난 5년 사이 이모와 엄마를 모두 암으로 잃었다. 그러니 내가 H마트에 가는 것은 갑오징어나 세 단에 1달러짜리 파를 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두 분에 대한 추억을 찾으려고 가는 것이기도 하다. 두 분이 돌아가셨어도, 내 정체성의 절반인 한국인이 죽어버린 건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려는 것이다. - P22
그런 내게 H마트는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기억,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뼈만 남은 엄마의 몸과 하이드로코돈 복용량을 기록하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대신 두 분이 그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떠올리게 해준다. 아름답고 활기찬 모습, 고리 모양의 달콤한 짱구 과자를 열 손가락에 끼고 흔들어대던 모습, 한국 포도를 먹을 때 껍질에서 알맹이만 쪽 빨아먹고 씨를 훅 뱉는 법을 내게 가르쳐주던 모습을. - P23
나는 한글학교 밖에서는 한국인 친구가 없었다. 저녁식사시간이면 겉도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30분 동안 쉬는 시간마다 우리 놀이터가 되어준 주차장만 뱅뱅 돌았다. 농구대도 하나 있었는데 거긴 늘 나이 많은 남자아이들 차지였다. 나머지 아이들은 연석 위에 앉아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애썼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가 다 한국인이었다. 나는 그들이 두 이민자의 합동작전으로 갖추게 되었을 순종 - P140
이라는 덕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들은 자기 엄마가 사준 선캡 모자를 군말 없이 쓰고 다녔고,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갔다. 기독교는 좁은 한국 지역사회에서 사실상 구심점 역할을 했지만, 엄마는 일찌감치 교회에서 빠져나왔다. 십중팔구 내가 혼혈아로 태어나 자란 탓이었을 텐데, 어쨌든 나는 자꾸만 내 자신이 나쁜 아이처럼 느껴져 더 말썽을 피웠던 것 같다. - P141
그날 밤 엄마 옆에 누워 있으려니 어렸을 때 차가운 발을 녹이려고 엄마 넓적다리 사이에 슬며시 발을 끼워넣던 일이 떠올랐다. 엄마는 부르르 떨면서 속삭였다. 널 편안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엄마는 어떤 고통도 감수할 거라고, 그게 바로 상대가 너를 진짜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그 부츠가 떠올랐다. 내가 발이 까지지 않고 편안하게 신을 수 있도록 엄마가 미리 신어 길들여놓은 부츠가. 나는 이제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바랐다. 부디 내가 대신 고통받을 방법이 있기를, 내가얼마나 엄마를 사랑하는지 엄마에게 증명할 수 있기를, 엄마의 병상에 기어들어가 엄마에게 바짝 몸을 밀착시키기만 하 - P149
면 그 무거운 짐을 내가 송두리째 흡수해버릴 수 있기를, 인생. 이 공평하려면 자식 된 도리를 다할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 같았다. 엄마가 나를 자기 안에 품고 다닌 몇 달 동안 엄마의 온 뱃속 장기들이 나라는 존재에 밀려나 한덩어리로 뭉쳐 있었고,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동안 엄마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그 고통을 보상하려면 지금 내가 이 고통을 대신 짊어져야 마땅했다. 그것이 외동딸에게 주어진 의례가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가까이에 누워 있는 것밖에 없었다. 엄마의 지원군이 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규칙적으로 느리게 울리는 기계 신호음과 나지막이 쌔근거리는 엄마 숨소리를 들으면서. - P150
나는 아빠의 팔을 획 뿌리치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연민이든 공감이든, 동지애든 동정심이든 하여간 그 비슷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원망하는 마음만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빠는 리스크가 크고 승산이 희박한 게임에서 전혀 달갑 - P154
지 않은 파트너였다. 이 사람은 내 아빠였고 나는 아빠가 침착하게 나를 안심시켜주기를 바랐다. 나를 들들 볶아대서 이 절망스러운 길을 외롭게 걸어가도록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아빠 앞에서 울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아빠는 분명 내 슬픔에 자기 슬픔을 얹을 터였다. 누가 엄마를 더 사랑하는지, 누가 더 상실감이 클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호소하면서. 게다가 아빠는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까지 집이 떠나가라 말해서 내 속을 있는 대로 뒤집어놓았다. 엄마가 이 병을 이겨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어쩌면 이제 엄마 없이 우리 둘만 달랑 남게 될 수도 있다고. - P155
엄마는 주저앉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머리에 대고 죽 훑어내리더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전신 거울 앞에서, 나는 내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 동안 엄마가 포즈 취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똑같은 거울 앞에서 엄마가 흠잡을 데 없는 팽팽한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 크림을 바르고 또 바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똑같은 거울 앞에서 엄마는 이 옷 저 옷을 입어보고, 모델처럼 완벽한 자세로 패션쇼를 하고, 자부심에 가득차서 자기 모습을 점검하고, 새 핸드백을 들거나 가죽 재킷을친 채 포즈를 취했다. 그 거울 앞에서 엄마는 한껏 허영에 들떠 한참을 머물렀다. 그런 거울 속에, 이제는 알아볼 수도 마음대로 통제할 수도 없는 사람이 있었다. 하나도 달갑지 않은 - P157
낯선 사람이. 엄마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엄마 옆에 쭈그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는 엄마를 감싸안았다. 나 또한 몰라볼 정도인 거울 속 모습에, 우리 인생에 들어온 이 거대한 악마의 물리적 현현에, 나도 엄마와 같이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러는 대신 나는 몸이 뻣뻣해지고, 심장이 단단해지며, 감정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내 안의 목소리가 명령했다. ‘울면 안 돼. 네가 울면 지금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아. 네가 울면 엄마는 울음을 멈추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나는 울음을 삼키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의의 거짓말로 엄마를 달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진심으로 그걸 믿게 하려고. "그냥 머리카락이잖아, 엄마. 금방 다시 자랄 거야." - P158
사춘기란 그런 것이었다. 중학교라는 사회화 훈련 시설에서 시작되는 하나의 거대한 자학적인 농담. 중학교는 아이들이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민감한 3년이라는 시간을 견디 - P163
는 곳이다. 이미 D컵 브라를 입을 정도로 가슴이 커지고 오럴 섹스를 아는 여자아이들이, 갭에서 산 어린이 브라를 입고 아직도 만화 캐릭터와 사랑에 빠져 있는 여자아이들 옆에 앉아있는 곳이다. 우리의 독특한 부분은, 다수가 생각하는 전형적이고 일반적인 아름다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부분은 고통스러운 마맛자국이 되어 자기부정이 유일한 치료법이 되는 때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화장실에 있었을 때, 달리기의 은총을 받지 못한 수치심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향해 반 친구가 다가오더니, 나중에 지겹도록 듣게 될 질문을 했다. "너 중국인이니?" "아니." "그럼 일본인이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음, 넌 그럼 뭐야?" 나는 그 아이에게 아시아 대륙에는 두 나라만 있는 게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 대답도 못했다. 내 얼굴에, 원래 살던 곳에서 추방된 존재로 읽어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마치 내가 무슨 외계인이나 이국적인 과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넌 그럼 뭐야?"는 열두 - P164
살인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 말은 내가 눈에 띄는 사람이고, 존재를 식별할 수 없는 사람이고,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임을 기정사실화하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늘 내 절반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이진 갑자기 그것이 내 본질적 특징이 될까봐 두려워져 그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제 더는 점심 도시락을 싸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인기 있는 아이들 무리에 끼어 학교 밖 가게에서 식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언젠가 나는 커피숍에 같이 간 아이가 내가 주문한 음식으로 나를 판단할까봐 그 아이와 똑같은 음식을 주문한 적도 있었다. 플레인 베이글과 크림치즈 그리고 너무 달지 않은 코코아. 정말이지 밍밍함 그 자체였다. 나 혼자였다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조합이었다. 이제 사진을 찍을 때 손가락으로 V 자를 만들지도 않았다. 아시아 관광객처럼 보일까봐 두려워서였다. 친구들이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나는 콤플렉스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는 건 죄다 아시아인 성애 때문이며,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게 혹시 우리 반 남자애들이 하는 지저분한 농담, 이를테면 아시아 여자는 모로 누운 성기를 가졌고 한번 사귀면 떨어져나갈 생각을 안 한다는 이야기 때문이 아닌지 의심하면서 스스로를 고 - P165
문했다. 최악은 내가 ‘정미‘라는, 엄마의 이름을 딴 미들 네임이 없는 척했다는 점이다. 미셸 자우너 같은 이름은 서류상으로 보면 전혀 튀지 않는다. 나는 그 생략이 세련되고 현대적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극단적인 상황이라도 피하려는 듯이, 이를테면 사람들이 실수로 정미를 ‘차우멘‘이라고 발음하기라도 하면 또다시 느끼게 될 굴욕감을 피하려는 듯이.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냥 한국인이 되는 게 곤혹스러워진 것이었다. "학교에서 달랑 나 혼자 한국 사람이라는 게 어떤 기분인지 엄마는 몰라." 나는 엄마한테 불평을 쏟아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근데 너는 한국 사람이 아니야. 너는 미국 사람이잖아." - P166
아주머니는 우리가 아무리 설득해도 휴식을 거부하고 엄마와 온종일 같이 시간을 보냈다. 엄마의 발을 주무르고, 엄마한테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뭐든지 다 해 바쳤다. 내가 잠깐 엄마와 단둘이 있고 싶다는 눈치를 내비칠 때도 엄마 곁을 떠날 생각을 안 했다. 아주머니가 그럴수록 나는 죄책감만 더 들었다. 운동하러 가느라 한 시간만 집밖에 있어도 마음이 불편했다. 두 분은 한 몸처럼 움직였고, 그래서 아주머니에게 빚진 기분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쩐지 조금씩 내 자리에서 밀려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는에 대한 공포를 내 마음속 가장 먼 곳으로 밀어내고 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 한편에서는 지금 이 시간이 엄마와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으리란 걸 알았고, 아직 뭐든 할 수 있을 때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을 정말 소중하게 보내고 싶었다. - P174
"뭐라고 쓰여 있어?" 아빠가 물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계속 읽어내려갔다. 약기운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불편해하고 있단 걸 눈치챘을 테지만, 당시 엄마의 상태로는 우리 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냥 우리끼리 하는 얘기예요." 아주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이분은 왜 여기 있는 거지? 남편이 그립지도 않은가? 60대 여자가 조지아에 있는 집을 두고 여기 와서 아무 보상도 없이 한 달이 넘도록 우리와 같이 사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아주머니에게 내가 모르는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그냥 망상에 빠진 건지 그보다 더 나쁘게는 이 여인이 나보다 엄마를 더 잘 보살펴서 질투심에 사로잡힌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아, 그처럼 사심 없이 돕겠다고 나선 사람을 그리도 못마땅해했다니, 나란 사람은 대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던 건지. 갈수록 약이 독해지면서 엄마는 시종일관 졸고 더 둔감해져서 소통하기가 날로 어려워졌다. 엄마는 이제 슬금슬금 모국어로 말을 해서 특히 아빠를 더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30년 동안 능숙한 영어로 말해온 엄마이기에, 엄마가 영어로 바꿔 - P181
말하는 걸 까먹기 시작해 우리가 소외되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시시때때로 아주머니가 영어로 통역해달라는 아빠의 말을 무시하고 한국말로 대답할 때면 아주머니가 그 상황을 이용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 P182
"정말 그렇게 드셔도 괜찮을까요?" 내가 물었다. 나는 원래 노른자가 주르륵 흐르게 조리한 계란을 좋아했지만 그때는 엄마의 병 때문에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우리에게 식중독은 더는 연례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는 도박이었다. 아주머니는 내 말을 무시하고 자기 계란을 깨는 데만 집중했다. "그냥 걱정돼서 그래요. 지금 면역력이 너무 약한 상태라." 내가 덧붙였다. "엄마가 배탈이라도 나면 안 되니까요." 아주머니는 마시던 물잔에서 작은 이물질이라도 발견한 양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한국에서는 다들 이렇게 먹어." 아주머니가 말했다. 엄마는 꼭 말 잘 듣는 반려동 - P184
물처럼 아주머니 옆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엄마가 나를 편드는 말을 해주길 바랐지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희뿌옇게 된 자기 계란만 양손으로 꼭 붙들고 있었다. 나는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어서,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꾹꾹 눌러 간신히 참았다. 한때 어떻게든 미국 교외의 또래 사이에 섞이려 안간힘을 쓰며 청소년기를 보냈고, 내 소속을 증명해야 할 무언가로 느끼면서 성인이 되었다. 내가 어느 편에 설지, 누구에게 동조할지 결정하는 일은 번번이 남의 손에 맡겨졌지 내 스스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두 세계 중 어느 세계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었다. 노상 반만 인정받고 반은 이방인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나보다 그 세계의 지분이 더 많은 누군가가, 온전하고 완전한 누군가가 자기 멋대로 날 쫓아낼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오랫동안 미국이라는 나라에 속하려고 별짓을 다 했다. 정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바랐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내가 바란 것은 오직, 나를 밀어낸 두 사람에게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우리 세상 사람이 아니야. 네가 아무리 애써본들 네 엄마한테 필요한 게 뭔지 결코 제대로 알지 못할 거야. - P185
아빠와 나는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고 엄마는 서울에 남았다. 은미 이모의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버스가 도시를 빠져나가면서 불현듯 서울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 어린 시절의 목가적인 유토피아가 뭔가 다른 곳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이제 더는 할머니와 은미 이모가 없는 그곳은 내가 속한 곳이라는 느낌이 조금 희미해졌다. - P194
엄마는 처음으로 우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아마도 이제 더는 자신 격언을 들먹일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이제야말로 내가 그동안 참고 참아온 눈물을 터뜨려도 될 때가 됐으니까.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말했다. 내게 너무도 익숙한 한국말. 내가 평생 들어온 그 다정한 속삭임. 어떤 아픔도 결국은 다 지나갈 거라고 내게 장담하는 말.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위로했다. 엄마의 모성이, 엄마가 느꼈을 테지만 능숙하게 숨겼을 무진장한 공포를 제압해버린 것이다. 엄마는 무슨 일이든 어찌어찌 잘 풀릴 거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난파선이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담담히 지켜보고 있는 태풍의 눈과도 같았다. - P203
그때까지 나는 살아가기와 죽어가기는 명백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나는 식물인간으로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 - P214
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본 터였다.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이미 찢겨나간 육체적 자율성의 조각들은 하루하루 누더기 꼴이 되어갔고, 이제 살아가는 일과 죽어가는 일은 그 차이를 분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엄마는 병상에 묶여 혼자 걸을 수도 없었고 각종 장기도 더는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음식도 팔에 연결된 수액 주머니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로 섭취하다가 이제는 기계의 도움 없이는 숨도 혼자 못 쉬는 지경에 이르렀다.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 모습에서 하루가 다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 P215
사실 유일하게 확신한 것은, 혹시 내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된다면 결혼 준비를 빈틈없이 해줄수 있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을 거란 사실이었다. 만일 엄마가 그 자리에 없다면 틀림없이 나는 엄마라면 어떻게 계획했을지 궁금해하면서 하루를 다 보낼 것 같았다. 상차림이 싸구려로 보이진 않는지, 꽃 장식이 그저 그렇진 않은지, 화장이 너 - P218
무 진하진 않은지, 드레스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닌지 온종일 궁금해하겠지. 엄마의 승인을 받지 않는다면 절대로 내가 예쁘다고 느끼지 못할 텐데. 엄마가 그 자리에 없다면 보나마나 나는 쓸쓸한 신부가 될 것이다. - P219
나미 이모와 성용 오빠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결혼식 전에 엄마가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 너무 아파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면 또 어떡하고? 이미 어수선한 분위기에 중압감을 더하는 것은 확실히 위험했다. 하지만 내게는 결혼식이 암울한 상황에 한줄기 빛이 되어줄 신의 한 수처럼 느껴졌다. 이제 혈전 용해제와 펜타닐 대 - P220
신 키아바리 의자와 마카롱과 예식 구두를 가지고 갑론을박을 벌일 수 있다. 욕창과 오줌줄 대신 배색과 올림머리와 새우 칵테일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 결혼식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지켜내야 할 무엇이자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될 축하 행사였다. - P221
엄마라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을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운 사이로 새롭게 태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뻔뻔할 정도로 공포에 떨었다. 내게서 좀 떨어져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놓고 겁을 냈다. 어떻게든 이 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쳤고, 종내는 나를 두고 혼자 어디로 가버릴 게 불 보듯 - P257
‘사랑스럽다‘는 말은 엄마가 굉장히 좋아하는 형용사였다. 엄마는 나를 딱 한 단어로만 표현해야 한다면 ‘사랑스럽다‘는 말을 고를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엄마에게는 그 단어가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열정을 아우르는 말처럼 느껴졌나보다. 그것은 엄마의 묘비명에 새겨넣기에도 딱 알맞은 단어였다. 자애로운loving 엄마는 남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지만 사랑스러운lovely 엄마는 온전히 자신만의 매력을 지닌 사람이니까. - P268
"이제 우리가 서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게 돼서 너무 좋지 않아?" 대학생 때 언젠가 집에 와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때는 내가 10대이던 시절에 서로에게 입힌 어마어마한 상처가 어느정도 가라앉은 뒤였다. "좋아." 엄마가 말했다. "내가 뭘 깨달았는지 알아? 너 같은 사람은 여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는 거야." - P284
엄마의 사랑은 엄한 사랑 그 이상이었다. 무자비하고 단단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나약함이 설 자리는 털끝만큼도 내주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랑이었다. 제 아이한테 가장 좋은 게 뭔지 열 발짝 앞서서 보는 사랑, 그 과정에서 아이가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개의치 않는 사랑이었다. 내가 다쳤을 때 엄마는 자신이 다친 것처럼 내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고, 다만 과잉보호에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단언컨대 이 세상 누구도 우리 엄마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나는 그 - P34
사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울긴 왜 울어! 네 엄마가 죽은 것도 아닌데." 우리집에선 이 표현을 자주 썼다. 엄마는 미국 격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으므로 자기만의 것을 몇 가지 만들어냈다. "오직 엄마만이 너한테 진실을 말해줄 수 있어. 왜냐면 진짜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뿐이니까 같은 말들을. 엄마가 일찌감치 나에게 가르쳤던 것 중에 지금 생각나는 말은 이런 거다. "너의 10퍼센트는 따로 남겨두어라." 누군가를 아무리 깊이 사랑하더라도, 혹은 깊이 사랑받는다고 믿더라도 절대 네 전부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 항상 10퍼센트는 남겨두어라. 네 자신이 언제든 기댈 곳이 있도록, "나도 네 아빠한테 내 맘을 온전히 다 내어주진 않는단다." 엄마는 이렇게 덧붙였다. - P35
"나 있어! 나 쌍꺼풀 있다고!" "한국 여자들 중에 그걸 가지려고 수술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엄마가 말했다. "은미 이모랑 나미 이모도 했지. 근데 이모들한테 내가 이 말 했단 말은 하지 마."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깨닫지 못했지만, 엄마가 알려준 그 이야기는 엄마가 왜 그렇게 외모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는지, 왜 그토록 브랜드를 애호하고 피부 관리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는지 설명해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간의 행동이 엄마라는 사람의 얄팍한 불평과 변덕 탓이라기보다 엄연한 문화적 차이 때문이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음식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 역시 엄마 나라 문화의 핵심 요소였다. 지금 한국은 성형수술 하는 사람의 비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 20대 여자 세 명 중 한 명이 성형 시술 또는 수술을 받고, 그런 환경의 씨앗이 언어며 다른 문화 곳곳에 깊숙이 파묻혀 있다. 내가 잘 먹거나 어른들에게 제대로 인사하면 친척들은 - P59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예뻐." 예쁘다는 말이 착하다, 예의바르다는 말과 동의어로까지 사용되는 곳이다. 이렇게 도덕과 미학을 뒤섞어놓은 말은, 아름다움을 가치 있게 여기고 소비하는 문화로 일찌감치 자리잡았다. 사실 그때 당시 내 안에서는 백인이 되고 싶다는 복잡한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 스스로 의문을 제기해보게끔 해줄 도구가 없었다. 유진에서 나는 그저 학교에서 몇 안 되는 다인종 아이 중 하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아시아인으로 생각했다. 나는 뭔가 다르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처럼 느껴졌고, 내 외모를 칭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서울에서는, 내 옆에 있는 엄마의 모습을 내게서 설핏 찾아내고 고개를 끄덕이기 전까지는 대부분 내가 백인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내 ‘이국적인‘ 외모가 칭송할 만한 무언가가 된 것이다. - P60
때를 다 밀고 나서 엄마는 나와 함께 집에 가는 길에 H마트에 들러서 장을 보고 가자고 했다. 갈비를 좀 재워놓고 가면 엄마가 유진으로 돌아간 뒤에도 한동안은 고향의 맛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을 거라면서. 나는 엄마가 다 쓰러져가는 우리집에 들어오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엄마가 우리집의 온갖 누추함을 조목조목 집어내어 비판하거나 내가 해고됐을 때 그랬듯 신랄하 - P82
기 짝이 없는 직언을 날리면 받아들일 준비를 하면서. 하지만 엄마는 일언반구 평가의 말도 없이 그냥 부엌으로 갔다. 엄마는 벽에 기대어둔 자전거 컬렉션을 건드리지도 않고 좁은 통로를 용케 빠져나가고, 심지어 부엌 뒷벽에 뻥 뚫린 구멍을 못 본 체하는 아량까지 베풀었다. 그 구멍은 집주인이 자기 딴에는 꽁꽁 언 파이프를 녹인답시고 벽을 망치로 부수는 바람에 생겨난 것으로, 그때 분홍 단열재 솜을 뜯어내어 휑뎅그렁한 상태 그대로였다. 엄마는 부엌 찬장이 저마다 따로 놀고, 그릇은 하나같이 중고 할인점에서 구입한 것들 아니면 내 룸메이트 부모님 집에서 안 쓰는 걸 가져온 것들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아무 논평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가 내게 선물한 물건들―오렌지색 락앤락 통, 캘파론 팬―을 찾아냈고, 바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H마트에서 사온 고기를 도마 위에 펼친 다음 조리용 망치로 콩콩 두드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내게 뭐라 중얼거릴지 계속 기다렸다. 허름한 가구와 구석구석 쌓인 먼지와 이가 나가고 짝이 하나도 안 맞는 접시 외에도 엄마는 분명 내 눈에 들어온 것 이상을 보았을 텐데, 예전에 내 몸무게와 얼굴 주름과 자세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꿰뚫어보며 낱낱이 평가하고 지적하던 엄마니까. - P83
엄마는 내가 딱 이렇게 살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느라 평생토록 안간힘을 써왔다. 그랬던 엄마가 지금은 그냥 미소 띤 얼굴로 부엌을 왔다갔다하고 있는 것이다. 파를 썰고, 믹싱 볼에 사이다와 간장을 콸콸 붓고, 손가락으로 콕 찍어 맛을 보면서, 싱크대에 줄줄이 붙여놓은 바퀴벌레 덫에도 냉장고 손자국에도 별로 신경이 안 쓰이는 듯, 그저 집밥의 맛을 남기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어쩌면 엄마는 그동안 내가 원치 않는 무언가로 나를 만들어보려 한 자신의 노력이 결국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더이상 노력하기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차피 내가 이런 식으론 1년도 더 못 버티고 결국 엄마가 옳았다고 생각할 거라 믿고 전략을 더 세련된 걸로 바꿨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사이에 벌어진 5천 킬로미터라는 거리 때문에 그저 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나만의 길을 개척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찾았음을 비로소 받아들이고, 마침내 내가 어떻게든 잘해낼 거라고 믿게 된 건지도 모른다. - P84
"내가 거기 있고 싶다고." 나는 우겼다. "엄만 네가 오면 둘이 싸우게 될까봐 그런 거야." 아빠가 나중에 털어놓았다. "어찌됐든 지금은 오로지 병을 낫게 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하니까." 내가 집을 떠나 살아온 7년이라는 세월이 우리가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모두 치유해주었으리라고, 내 10대 시절을 짓누르던 엄마의 중압감을 깡그리 잊게 해주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엄마는 유진과 필라델피아 사이의 5천 킬로미터라는 거리에서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을 충분한 공간을 찾아냈고, 나 역시 줄기찬 비판의 목소리에서 벗어나 원 없이 창작 욕구를 발 - P87
산한 덕분에 그간 엄마가 한 모든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결국 그 수고의 끝은 엄마가 없는 곳에서야 뚜렷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됐건만 아빠의 고백은, 그럼에도 엄마에겐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는 기억이 있음을 내비쳤다. - P88
그렇게 콜레트 아주머니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니 엄마의 꿈이 궁금해졌다. 아무 목적도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가 갈수록 이상해 보이고 미심쩍고 심지어 반페미니스트로까지 보였다. 그때 나는 엄마 인생의 주축이던, 나를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으면서 그저 엄마를 매도하기 바빴다. 그 보이지 않는 고된 노동을, 자신만의 열정에 헌신하지도 않고 실용적인 기술 개발도 소홀히 한 전업주부가 남 뒷바라지나 하는 것이라고 폄하했다. 가정을 이룬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내가 그 속에서 받은 보살핌을 그동안 얼마나 당연하게 여겼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때는 집을 떠나 대학에 가고서 몇 년이 지난 뒤였다. - P92
꼭 나처럼 생긴 가수 캐런 오는 내가 숭배한 음악 세계의 첫 아이콘이었다. 캐런 오는 절반은 한국인 절반은 백인으로, 유순한 아시아인이라는 고정관념을 깡그리 잊게 만드는 독보적인 쇼맨십을 선보였다. 캐런은 거칠고 익살스러운 무대 매너로 유명 - P96
했다. 허공으로 물을 내뿜거나 껑충껑충 뛰어서 무대 양끝을 오가는가 하면, 마이크를 입안에 쑥 집어넣었다가 다시 빼서 마이크 줄을 길게 잡고 머리 위로 휙 던져 올렸다. 그런 모습에 입이 떡 벌어졌지만 묘한 양가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처음 든 생각은 내가 저렇게 할 수 있을까였고, 두번째로 든 생각은 이런 걸 하는 아시아 여자가 이미 있으니 내가 설 자리는 이제 없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소수자 정서가 뭔지 몰랐다. 음악계에서 대표성을 둘러싼 토론은 이제 막 시작되던 참이었다. 나는 음악을 하는 다른 여자들은 잘 몰랐기에, 실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똑같은 문제로 씨름하는 여자들이 제법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 같은 처지의 백인 남자는 어떨지 상상해 유추해볼 능력도 없었다. 그 남자가 이를테면 스투지스의 라이브 공연 DVD를 보면서, 이미 이기 팝이 있는데 음악계에 또다른 백인 남자가 설 자리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 P97
"나는 너 낳고 낙태까지 했어. 네가 너무 속을 썩여서!" 엄마는 손에 힘을 빼고 벌떡 일어서더니 방을 나가버렸다. 그러면서 문득 수치심이 밀려온 듯 혀를 쯧 하고 찼다. 마치 - P115
아름답게 지어진 건물이 다 허물어져가는 꼴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그랬다. 그렇게 굉장한 비밀을 여태 숨기고 있다가 하필 이럴 때 밝히다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낙태 자체에 대해서 내가 뭐라 할 게 못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별의별 악랄한 짓을 다 해서 엄마를 마음 아프게 했듯이 엄마가 그저 나를 마음 아프게 하려고 그 이야기를 꺼냈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엄마가 그토록 중대한 사실을 숨겨왔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엄마가 어떤 문제를 그처럼 오랫동안 숨기고 살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내가 지키려 했던 비밀은 모두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기만 했다. 하지만 엄마는 비밀을 지키는 데 희한한 재주가 있었다. 심지어 나한테까지도. 엄마는 아무도 필요치 않았다. 엄마는 자신에게 내가 얼마나 필요치 않은지를 보여주어 나를 충격에 빠뜨릴 수 있었다. 자기가 그러듯 항상 나만의 10퍼센트를 따로 남겨두라고 평생을 내게 가르쳐온 엄마지만, 그게 나한테까지 따로 남겨둔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으리라고는 그때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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