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아포칼립스 - 사랑과 혐오의 정치학
시우 지음 / 현실문화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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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없다. 사랑을 담은 혐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그들, 주체와 타자, 반퀴어 집단과 퀴어 집단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퀴어 변화가 실현하는 것은 보다 진정한 사랑이나 더 많은 관용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평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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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퀴어 집단은 이른바 객관적인 정보, 과학적인 진실, 구체적인 경험에 기대어 퀴어 변화에 대항하는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대중을 형성한다. 또한 퀴어 집단에 대한 적대와 혐오를 통해 주체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이원젠더체계와 이성애규범의 헤게모니를 승인한다. 반퀴어 운동에 맞서는 일은 퀴어 이슈에 대한 선정적인 재현과 왜곡된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인지적인 차원과 적대감·위협감·혐오감에 개입하는 감정적인 차원을 아울러야 한다. 사랑의 이름을 내건 반퀴어 운동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일 역시 의미 투쟁의 중요한 장소가 된다.
페미니스트 연구자 신시아 버락Cynthia Burack은 반퀴어 운동을 - P200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반퀴어 집단이 유포하는 지식과 정보가 진짜인지를 놓고 다투는 일보다 반퀴어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신념과 동기, 가치체계와 세계관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버락에 의하면, 반퀴어 감정의 문화정치학을 이해하는 작업은 반퀴어 집단을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무리가 아니라 나름의 목표와 전략을 지닌 동료 시민으로 생각하는 일을 포함한다. 반퀴어 운동을 시대착오적인 움직임으로 치부해버리기 전에 우선 반퀴어 집단을 진지하게 마주하는 일부터 시작하자는 제안이다.
버락의 논의는 반퀴어 담론에 동의해야 한다거나 반퀴어 집단과 똑같은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반퀴어 담론을 익힘으로써 (반)퀴어 이슈에 대한 더 나은 번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에 가깝다. 다양한 퀴어 현상을 창조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들, 지배적인 담론을 거슬러 읽을 수 있는 이들, 퀴어 집단에 드리워진 부정적인 감정을 끌어안을 수 있는 이들이 반퀴어 감정의 회로를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퀴어 집단이 일으키는 도덕적 공황에 주눅 들지 않고 새로운 감정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더 나은, 더 많은 번역이 절실하다. - P201

퀴어 커뮤니티는 퀴어 당사자들이 모인 인구 집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퀴어 당사자는 커뮤니티에 참여함으로써 외부 세계에서 얻기 어려운 소속감과 편안함을 얻는다. 이성애규범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드러내기 어려운 동성 간 친밀성의 기쁨, 젠더를 단속하는 사회에서 규범을 거슬러 자신을 표현하는 자유로움, 먼저 떠나보낸 이들을 그리워하고 함께하는 이들을 돌보는 연결감, 불평등한 사회를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고통 등은 퀴어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문화적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퀴 - P207

어 커뮤니티는 과거의 경험과 역사가 축적되고 미래를 향한 열망과 기대가 녹아든 장소로서, 퀴어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익히고 실천하는 현장이다.
퀴어 커뮤니티는 정동적인 경험을 통해 공적인 문화를 만든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 연구자 앤 크베트코비치Ann Cverkovich가 이야기한 ‘느낌의 아카이브an archive of feelings‘를 만들어나간다. 퀴어 느낌의 아카이브에는 다양한 자료가 담겨 있다. 이를 책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즐거움의 책, 설렘의 책, 고마움의 책이 있는가 하면, 슬픔의 책, 트라우마의 책, 절망의 책도 존재한다. 다른 사람이 남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결을 지닌 책을 접하면서 차이를 이해하는 통찰을 얻기도 하며, 때로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 P208

공간 연구자 김현철은 퀴어퍼레이드를 ‘축제적 저항‘으로 설명하면서 퍼레이드 참가자를 ‘거리를 향유하는 능동적 주체‘로 해석한다. 퍼레이드 참가자는 이성애 가족질서에 기초한 공간 규범, 투자자와 소비자에게만 장소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 자본주의 체제, 행정 처분과 사법질서가 규율하는 공적 영역에 도전하면서 공간을 퀴어하게 바꾸어나간다. 김현철의 해석에 따르면, 퍼레이드를 막아서는 반퀴어 집단은 축제적 저항이 가져오는 즐거움을 빼앗고, 공간을 지배하는 규범에 순응하도록 요구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 P211

참가자들이 느끼는 뿌듯함은 퀴어 당사자 혹은 지지자로서 느끼는 자긍심이라기보다 함께 역경을 이겨내며 쌓아 올린 동료의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밀도 높은 감정적 경험은 참가자들을 연결시키고 커뮤니티를 튼튼하게 만드는 자원이 된다. 퍼레이드를 지켜냈다는 자부심은 참가자들로 하여금 다른 상황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돕는다.
물론 퀴어 당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매번 달뜬 감정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퀴어 당사자는 몇몇 도시에서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퀴어문화축제보다 주거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소규모 모임이나 상업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하위문화를 더욱 자주 경험한다. 오프라인 공간을 매개하지 않고 인터넷 커뮤니티, 온라인 데이트 앱, SNS를 통해 퀴어 만남을 이어가기도 한다. 퀴어문화축제와 같은 대규모 퀴어 행사에 참가하는 일은 개인에게 큰 흔적을 남기기는 하지만, 퀴어 운동과 퀴어 커뮤니티 안팎에서 펼쳐지는 일상적 - P212

인 경험과 관계, 실험과 탐색에 주목하는 작업 역시 중요하다.
또한 퀴어문화축제가 언제나 저항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하기는어렵다.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이들이 어떠한 열망을 지니는지, 축제의 기획과 방향성이 어떻게 설정되는지, 퀴어문화축제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맥락 속에 놓이는지에 따라서 축제는 해방적이고 위반적일 수도, 억압적이고 순응적일 수도 있다. 북미와 서유럽의 대도시에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가 백인·중산층·비장애인·동성애자·남성의 특권을 재확인하는 행사가 되었다는 비판이나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하는 자율적인 활동은 뒷전으로 밀려난 채 기업의 후원 상품만 넘쳐나는 행사로 전락했다는 지적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퀴어문화축제가 규범과 정상성이 구축하는 현 체제에 도전하는 저항의 현장이 될지, 퀴어 집단이 ‘새로운 정상‘임을 선언하는 보수적인 행사가 될지 앞으로 지켜볼 필요가 있다. - P213

퀴어 커뮤니티는 느낌의 아카이브를 구성해나가면서 적대와 - P216

혐오에 맞서는 퀴어 연결감을 확장시키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친밀한 만남은 퀴어 연구자 로렌 벌랜트Lauren Berlant와 마이클 워너Michael Warner가 이야기한 ‘대항공중 counterpublic‘의 한 형태라고 할 수있다. ‘대항공중‘은 다른 세계를 만들기 위한 집합적인 활동에서 이루어지는 정동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이들은 지배적인 서사를 거슬러 읽어내고, 기존의 언어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금지된 즐거움을 기꺼이 누린다. 이원젠더체계, 이성애 가족질서, 자본주의 체제, 내셔널리즘 등이 통치하는 현 체제를 뛰어넘기 위한 여러 실험과 도전은 새로운 ‘우리‘를 창조해내는 힘을 갖고 있다. - P217

물리적인 방해와 종교적인 비난이 가해지는 상황을 긍정적인 정서를 갖고 마주하는 일은 위협적인 순간을 재치 있게 돌파하고 다툼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전략이 될 수 있다. 반퀴어 집단과 직접 대면하기보다 상대의 공격을 빗나가게 만듦으로써 권력과 자원을 적게 지닌 상태에서도 쉽게 압도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퀴어한 삶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 앞에서 밝고 경쾌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하나의 투쟁이 된다. - P218

퀴어 적대와 혐오가 조직화되는 상황에서 퀴어 집단은 사랑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무지개농성 참가자들은 변화를 기대하는 마음을 담아서 ‘우리는 원한다, 헌장을!‘ ‘우리는 원한다, 광장을!‘ 같은 구호를 외치곤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는 원한다, 사랑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 P225

참가자들이 많았다. 여기에는 2014년 서울퀴어문화축제 슬로건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의 영향도 있었다. 이 슬로건은 2013년 러시아에서 동성애 선전 금지법이 제정되고 퀴어 집단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지는 상황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2014년 슬로건은 사랑과 혐오를 대비시키고 차별에 저항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점에서 2015년 슬로건 ‘사랑하라, 저항하라, 퀴어 레볼루션!’과 더불어 호평을 받았다.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활동에서 연대를 촉구하거나 승리를 다짐하는 일은 흔히 나타나지만 사랑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일은 드문편이다. 흥미로운 점은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퀴어 집단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차별과 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조금씩 생기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랑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사랑은 그 자체로 완전한 의미체계를 갖춘 감정이 아니며 정치적 맥락에 따라서 다양한 뜻을 지닌다. 반퀴어 집단이 내세우는 사랑이 실질적으로는 위계질서를 정당화했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퀴어 집단이 주목하는 사랑의 가치 역시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퀴어 집단이 사랑에 집중하는 이유 중 하나는 퀴어 적대와 혐오가 동성 간 친밀성을 부정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퀴어 사랑의 정치학은 동성 간 관계를 탈성애화하거나 지나치게 성애화하는 것 모두에 반대하면서 동성 간 성적·감정적·정치적 - P226

친밀성을 의미 있는 삶의 양식으로 긍정한다. 이성애가 다양한 성적 지향 중 하나가 아니라 제도화된 규범으로 자리 잡은 사회에서 동성 간 친밀성을 정치적 의제로 삼는 일은 대항적 효과를 지닐 수 있다. 퀴어 집단은 사랑의 정치학을 통해 사랑이 사적 관계에 귀속된 것이 아니라 공적 주제라는 점을 환기시키고 이성 간 관계를 친밀성의 모판으로 삼는 지배규범에 도전한다.
그러나 사랑을 둘러싼 문제는 ‘사랑은 사랑일 뿐love is love‘ ‘사랑이 이긴다love wins‘와 같은 선언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랑이 제한적인 문법과 촘촘한 규율 속에 위치되기에 사랑의 정치학은 누구의 사랑이 인정받을 수 있는지, 어떠한 사랑이 괜찮은 것인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등의 질문을 촉발한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진보운동은 사랑이 현 체제를 거스르기도, 떠받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사랑, 섹스, 결혼을 임의적으로 일치시킨 근대 부르주아 가족체계가 여성의 종속 및 자본과 노동력의 재생산에 핵심적인 기제가 된다고 주장했고,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사랑의 낭만화가 여성 억압의 중추를 이룬다고 해석했다. 사랑의 정치학을 탐문하는 이들은 사랑이 구성되는 복잡한 맥락을 드러내면서 사랑이 보장하는 행복, 안정감, 낙관주의에 도전한다.
현재 한국 퀴어 커뮤니티에서 통용되는 사랑은 비판적 함의를지녔다고 보기 어렵다. 퀴어 집단은 차별과 폭력에 대항하는 하나의 전략으로 사랑에 주목하고 있지만, 사랑과 관련한 의미를 재조 - P227

직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동성에 대한 성적 끌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면, 동성 간 친밀성이 법적 보호와 문화적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기호가 놓인 물적 토대와 문화적 의미체계에 개입하지 않았을 때, 사랑에 대한 강조는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사생활 보호 담론에 머무르기 쉽다.
기초적인 차원에서 ‘동성이든 이성이든 서로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는 동성 간 성적 친밀성을 처벌하는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함의를 지닐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사랑을 정치적 의제로 삼는 일이 사랑을 낭만화하고 자연화하는 수사와 결합하는 경우, 사랑을 다시금 정치와는 무관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랑이 약속하는 행복한 미래에 퀴어 집단, 특히 동성애자 ‘역시‘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해야 한다고 내세우는 방식은 사랑이 근거한 위계구조를 옹호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퀴어 활동가 하윤은 퀴어 논쟁을 ‘사랑싸움‘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때 떠오르는 건 말 그대로 아름다운 사랑이잖아요.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 학생에 대한 선생님의 사랑, 오랫동안 사귀는 연인의 사랑 같은 거요. 아직까지 LGBT 운동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사랑도 그런 모습이죠. 우리가 얼마나 서로 - P228

를 아껴주고 지지하는지, 어떤 면에서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걸 보여주는 거죠. 그런데 ‘사랑해서 반대합니다‘라는 문구가 나왔을 때, 부딪히는 지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 문구에는 앞에서 말한 사랑의 의미가 담겨 있잖아요. ‘우리는 서로 보살피면서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고 있는데 여러분을 보고 있기가 안타깝다. 그래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해주겠다. 힘든 걸 토닥여주면서 같이 가겠다.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되지 않느냐? 우리의 레퍼토리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이 얘기를 넘어설 수 있는 지점이 안 생길 거라고 봐요. - <하윤>

하윤은 퀴어 운동이 규범적 사랑의 의미를 되묻지 않은 채 동성 간 관계의 아름다움을 증명하는 방식을 채택했을 때, 반퀴어 집단이 기대는 사랑의 언어를 넘어서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사랑의 약속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을 때, 사랑을 둘러싼 지배 서사에서 이미 탈락한 퀴어 집단이 쟁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승리는 관용이다. 이원젠더체계에 순응하기, 성실한 소비자로 살아가기, 일대일의 배타적이고 낭만적인 관계를 지향하기, 이성애 가족질서에 권위를 부여하기 등으로 가능해지는 사랑은 누구도 불쾌하게 만들지 않고 어떤 것에도 맞서지 않는다. 이는 퀴어 집단이 반드시 무언가를 위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규범과 정상성, 안정적인 토대에 도전하는 퀴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나아 - P229

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퀴어 연구자 게일 루빈Gayle Rubin은 성을 둘러싼 권력의 작동을 분석하면서 섹슈얼리티 위계 개념을 제안한 바 있다. 좋은 성과 나쁜 성을 구분하는 섹슈얼리티 위계는 비규범적 섹슈얼리티 내부에도 격차를 만들어낸다. 재생산을 목표로 하는, 일대일 결혼 관계에 놓인 이성 간 관계를 닮을수록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동성 연인 관계는 얼마간 용인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좋은 성과 나쁜 성을 가르는 기준선이 조금 넉넉하게 바뀐다고 해서 기준선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루빈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이해가 상대를 어떻게 대했는지, 서로의 합의는 충분했는지, 위협이나 억압적인 행동은 없었는지, 관계에서 누린 즐거움의 양과 질은 어떠했는지에 집중하는 윤리적이고 민주적인 접근에 기초해야 한다고 힘주어 이야기했다.
퀴어 정치학이 동성 간 사랑의 정당성과 진정성을 확인받는 데서 멈추게 될 때, 2015년 서울퀴어문화축제 슬로건에 새겨진 ‘사랑과 저항을 통한 퀴어 혁명‘은 불가능한 일로 남게 된다. 퀴어 이슈를 동성 파트너십의 인정과 동성 간 성적 친밀성의 존중으로 제한하는 방식은 섹슈얼리티, 친밀성, 관계를 둘러싼 위계를 묵인하고, 가족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또 다른 타자를 배제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에 여러 퀴어 연구자는 성적인 영역을 직조하는 소비 자본주의, 군사주의, 인종차별, 성차별, 비장애인 중심주의 등 교차하는 - P230

지배의 축에 저항하는 일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퀴어 논쟁이 동성애자의 성적 친밀성 이슈를 중심으로 발생하면서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 무성애 이슈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도 나타난다. 아름답고 행복한 동성 간 관계가 퀴어 집단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재현되기 때문에 이성에 대한 성적 끌림을 연상시키는 바이섹슈얼, 성적 지향 이슈와는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 성적 지향 개념만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무성애자는 퀴어 논쟁에서 주변화되기 쉽다. 일례로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이 차별금지 사유로 명시된 서울시민 인권헌장 관련 다툼에서도 성적 지향, 더 구체적으로는 동성애만이 언급되었다. 무지개농성장에서 만난 한 트랜스젠더 활동가는 "함께 싸우러 왔다가 졸지에 연대하게 되었다"며 씁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물론 제도적 기반이 취약하고 권력과 자원의 분배 과정에서 소외된 소수자 집단이 그간 배제되었던 영역에 참여하는 일은 의미 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규범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정치학은 존재하기 어려우며, 규범과의 공모는 새로운 정치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지점이 될 수 있다. 퀴어 적대가 조직화되는 상황에서 성적 자유에 대한 요구는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하는 정치적 주장이며, 적대에 맞서는 여러 방법을 탐색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미래에대한 어떠한 기획이 본질적으로 진보적이라거나 보수적이라는 설명 - P231

은 적절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
핵심은 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고 의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방법론과 인식론을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치열한 논쟁이 보다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적대와 혐오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정교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랑의 정치학을 비롯한 퀴어 집단의 전략을 가다듬고 정치적 비전을 견주어보는 자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문화 연구자 수수가 통찰했듯이, 퀴어 집단이 마주한싸움은 혐오에 맞서 사랑으로 승리하는 일이 아니라 동시대적 시간감각과 공감각을 느끼는 몸을 만드는 일, 자율적이고 해방적인 관계를 구성할 자유를 획득하는 일,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인 만남을 이루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퀴어 논쟁과 투쟁의 경험은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동료를 찾아나선 이들에게 커뮤니티를 만나는 순간과 사회적 현실을 독해하는 힘을 선사한다. 퀴어 운동은 정치적 의사표현과 감정적 결속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지배규범에 저항하는 삶을 꾸려나가고 서로의 경험을 참조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일은 퀴어 현장을 친밀성과 배움의 장소가 되게 한다. 퀴어 이슈를 둘러싼 여러 갈등을 다채로운 이야기로 빚어가고 커뮤니티에 흐르는 갈등과 긴장을창조적으로 풀어나가게 될 때, ‘퀴어 느낌의 아카이브‘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 P232

퀴어 연구자 한주희는 퀴어문화축제 행사장을 에워싼 폴리스라인이 반퀴어 집단을 막은 것인지, 아니면 특정 공간에 퀴어 당사자와 지지자를 몰아넣은 것인지 질문했다." 서울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가 개최된 일은 퀴어 운동이 성장하고 퀴어 커뮤니티가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한주희가 지적한 것처럼, ‘경찰이 지켜주는 경계선을 보충하고 감시하며 참가자들의 출입을 관리하는 국경 통제의 방식‘은 경계를 흐리게 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퀴어 정치학과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 P239

신열은 광장을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폴리스라인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폴리스라인을 해체한 후 생길 수 있는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폴리스라인이 자유를 한정하는 동시에 참가자를 보호하는 장치인 만큼 폴리스라인을 거두는 일이 다양한 장면을 펼쳐낼 것이기 때문이다. 폴리스라인으로 나타난 경계에 대해서 사유하는 일은 폴리스라인을 설치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논의를 넘어서, 퀴어 운동과 퀴어 커뮤니티가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어떻게, 얼마만큼 자율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지 고민하도록 이끈다. 이는 자연스럽게 퀴어 집단이 어떤 미래를 기대하고 누구와 함께 싸워가며 무엇을 실현할 수 있는지 살피는 작업과도 연결된다. - P240

보수 개신교 신앙에 기초한 탈동성애 단체에서 현장연구를 진행한 타냐 얼즌Tanya Erzen은 탈동성애 운동을 반동성애 운동과 완전히 동일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얼즌에 따르면, 탈동성애 단체를 찾는 퀴어 그리스도인은 적대적인 분위기의 교회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과 위안을 경험하는데, 이들에게 탈동성애 단체는 은둔과 소외,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으로 다가온다. 얼즌이 만난 탈동성애자들은 탈동성애가 동성애와 마찬가지로 안정적인 정체성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욕망과 행동 면에서 탈동성애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 역시 인정한다.
얼즌은 탈동성애 운동을 퀴어 적대와 혐오의 세련된 버전이라고 공박하거나 탈동성애자를 퀴어 자긍심을 가지지 못한 이들로 비난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퀴어‘가 규범적인 것에 도전하고 고정된 정체성을 거부한다는 뜻이라면, 또한 탈동성애자가 여러 정체성, 정치적 소속, 성적 배치를 오가면서 성적 지향·행동·욕망의 변화 가능성을 모색한다면, 이들의 경험을 ‘퀴어 회심queer conversion‘으로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얼즌의 제안은 탈동성애 운동이 지닌 위험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탈동성애를 단지 보수적인 종교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 더가깝다. - P250

탈동성애 단체는 동성에 대한 성적 욕망을 없애거나 동성애를 죄로 선언하는 일보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성서의 가르침에 맞추어 조율하는 일에 중점을 둔다. 얼즌이 만난 단체 회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탈동성애자의 목표는 "이성애가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쏟고 순종하는 데 있다." 절대 다수의 경우, 탈동성애자의 퀴어 회심이 성적 지향의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더욱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탈동성애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고민하면서 발견한 하나의 선택지일 뿐, 모든 이들이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혹은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퀴어 디아스포라처럼 탈동성애자 역시 퀴어 집단과 반퀴어 집단 모두에 맞닿아 있다. 한편으로 탈동성애자는 퀴어 집단을 겨냥한 차별과 폭력으로 인해 고통을 겪은 적이 있다는 점에서 노골적인 혐오를 조장하는 반동성애 운동을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탈동성애 경험을 일종의 성공 사례로 도구화하는 반동성애 운동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동성애자로서의 문화적 양식을 포기해야 한다고 믿는다. ‘좋은 그리스도인은 가족을 꾸리는 이성애자라는 신앙의 테두리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즉 종교적·성적 탐색을 긍정하고 적대와 혐오에 반대한다는 면에서는 퀴어 집단과 친화성을 갖지만, 이성애 가족질서를 승인한다는 면에서 - P251

는 보수 개신교회의 입장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탈동성애자의 존재는 보수 개신교회와 퀴어 집단 사이의 경계 구분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의 탈동성애 운동은 반퀴어 정치학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의 탈동성애 활동가는 탈동성애가 마치 중독, 일탈, 결핍, 비정상을 극복하는 해결책인 것처럼 내세운다. 겉으로는 퀴어 당사자의 실존적인 고민을 경청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적인 금욕생활을 요구하고 퀴어 당사자로서 살아온 개인의 역사를 폄하하며 퀴어 커뮤니티와의 철저한 단절을 강조할 뿐이다. 탈동성애는 인간의 성적인 여정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알려주는 하나의 예시임에도, 이성애가 유일하게 올바른 성적 지향이라는 믿음 속에서 퀴어 집단을 공격하는 무기로 쓰이고 있다.
탈동성애 운동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음을 강조하는 보수 개신교회의 서사를 반영한다. ‘새가 머리 위에 날아다니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새가 머리 위에 앉아 둥지를 트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마르틴 루터의 경구가 보여주듯이 보수 개신교회는 죄에 맞서 싸우는 적극적인 의지를 중요시해왔다. 마찬가지로 탈동성애 운동에서도 동성에 대한 성적 끌림은 어쩔 수 없지만(혹은 초자연적인개입 없이는 ‘해결‘되기 어렵지만), 성적 실천은 삼가야 한다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언뜻 불가능하고 무의미해보이는 노력이 탈동성애자에게 가치 있는 이유는 구원이 우리의 밖에서extra nos, 우리를 위 - P251

해서pro nobis 온다는 기쁜 소식福音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장 25절)라는 메시지는 탈동성애자에게 변화를 소망하도록 한다.
하지만 죄와 구원의 문제는 성적 지향 논의와 다른 차원에 속해 있다. 보수 개신교회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넘어선 천국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규범과 제도로서의 이성애에는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애가 정상, 보편, 일반, 규범, 더 나아가 세계 그 자체가 될 때, 이성애의 외부는 인식 가능성의 영역 밖을 의미한다. 세상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경륜(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장 21절)은 신비로 불리지만, 규범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퀴어한 존재는 인간 범주 밖으로 내몰릴 뿐이다. 이성애규범을 가로질러 퀴어한 존재 밖에서, 퀴어한 존재를 위해서 성육신한 구원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성애를 영접하는 기도는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이 지배와 억압의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해방과 변화의 사건이라면, 구원은 탈동성애가 아니라 이성애규범의 종식을 뜻한다.
보수 개신교회의 관점에서 퀴어 그리스도인이 불가능한 존재라면 탈동성애자 그리스도인은 미달된 존재다. (적어도 아직) 이성애자가 되지 못한 탈동성애자는 변화를 위한 부단한 노력을 보였을 때 - P253

만 개신교회의 성원권을 얻을 수 있다. 제한적인 성원권을 지닌 탈동성애자는 간증 집회에 초대받을 수는 있지만 신앙의 동역자로 환대받기는 어렵다. 이른바 ‘100% 이성애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동성애자 출신 이성애자‘가 머물 수 있는 자리는 없다. 직선적 시간성을 기초로 작동하는 이성애규범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을 때까지 오로지 이성애자로 사는 이들에게만 완전한 시민권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보수 개신교회는 퀴어 집단은 물론이고 탈동성애자와 공존하기에도 지나치게 경직되고 위계적인 곳이다.
탈동성애자 그리스도인이 퀴어 디아스포라로서 빛나기 위해서는 어떠한 변화가 필요할까? 무엇보다 탈동성애자를 인간의 다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 이들은 종교적인 영역과 성적인 영역에 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 모두가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에 반해 ‘동성애자의 양심고백‘과 같은 반퀴어 텍스트는 탈동성애자의풍성하고 복합적인 경험을 납작하고 병리적으로 만드는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물론 탈동성애자가 도전하지 않는 보수 그리스도교 신앙, 이원젠더체계, 이성애규범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작업 역시수반되어야 한다. ‘거의 동일하지만 아주 똑같지는 않은, 차이를 지닌 주체‘로서 탈동성애자가 놓인 삶의 자리는 창조적 불안을 일으키며 퀴어 이슈를 마주하는 이들의 고민을 더욱 깊고 정교하게 만들고 있다. - P254

퀴어 적대가 지배적인 한국사회에서 퀴어 이슈는 부정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주제라기보다 논의 자체를 꺼리는 주제에 더 가깝다. 한편으로는 논의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치부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논쟁적이라고 여겨지기에, 퀴어 이슈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마련되지 않는다. 더욱이 퀴어 집단이 병리적이고 반사회적인 모습으로 표상될 때, 퀴어 집단은 질병과 오염을 일으키는 존재로 간주된다. 퀴어 집단과 접촉하는 것은 물론이고 퀴어 이슈에 대해 말하거나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병균과 유해물질이 옮겨 붙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퀴어 이슈는 침묵을 통해 위생 처리된다. 결과적으로 퀴어 당사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은 "또 다른 커밍아웃과 벽장과 아웃팅"을 경험하게 된다. - P261

퀴어 논쟁은 크고 작은 감정적집단을 만들어내면서 집단 사이의 경계를 가시화한다. 퀴어 논쟁에 참여하는 이들은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때로는 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 단속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퀴어 검문소와 같은 임시적인 장치가 마련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복잡다단한 현실은 깔끔한 경계선으로 마름질되지 않는다. 이분법적인 배치를 거부하고 경계를 넘나드는 퀴어 디아스포라는 퀴어 이슈를 마주하는 평면적인 인식론과 경직된 방법론에 도전한다. 퀴어 논의가 확장 - P263

되기 위해서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다채로운 만남이 활성화되고 퀴어한 접촉의 경험이 풍성해질 필요가 있다.
치카나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안잘두아Gloria Anzaldúa는 ‘사이공간‘으로서의 경계지대borderland/la frontera가 지닌 창조적 잠재성에 주목한다. 안잘두아는 경계지대를 두 가지 이상의 문화가 함께 나타나는 곳, 서로 다른 인종이 같은 영토를 점유하는 곳,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부대끼는 곳,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친밀성으로 얽히는 곳으로 설명한다. 이 경계지대는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멕시코와 미국 사이의 국경을 가리키는 동시에 ‘정상적인 것‘을 둘러싼 제한된 영역을 횡단하거나 돌파하는 존재들, 즉 가로지르는 이들los atravesados이 머무는 곳을 의미한다. 경계지대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삶의 모순과 양가성을 받아들이고 여러 문화를 저글링하는 혼종적 인격mestiza consciousness을 갖게 된다.
서로 경합하는 집단의 문화를 자신의 삶에 녹여내고 딱딱한 벽과 뚜렷한 경계가 감당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퀴어 디아스포라는 안잘두아가 말한 가로지르는 이들이자 혼종적 인격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퀴어 디아스포라는 경계를 둘러싸고 나타나는 모순을 화해시키기보다 독특한 조합으로 바꾸어내고, 규범의 악보에 그려지지 않은 선율을 즉흥적인 양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퀴어 정치학이 ‘우리‘와 ‘그들‘ 사이의 구분을 흐트러뜨리고 본질주의적인 정체성에 대해 질문한다고 할 때, 퀴어 검문소를 해체하고 - P264

퀴어 디아스포라의 연주를 느끼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지금 여기에서 가능하게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간절히 기다리고 기도하던 새로운 세계 말이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떨고 있는 우리
병에 걸릴 수도, 죽음을 맞이할 수도, 강한 적을 만날 수도
우리가 갖고 있는 두려움에 맞서 춤을 출 수 있기를
-<글로리아 안잘두아>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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