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2007년 차별금지법 투쟁을 전후로 한국사회에서 퀴어 집단과 반퀴어 집단 사이의 대결 구도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퀴어 이슈는 흔히 동성애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따지는 문제로 치부되거나, 보수적인 교리를 수호하는 개신교회와 사랑할 권리를 주장하는 동성애자 사이의 갈등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퀴어는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 아니며, 퀴어 집단이 목표하는 사회 변화는 동성 간 친밀성의 제도화 그 이상이다. 무엇보다 퀴어 이슈는 특정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 또는 이해관계 당사자 사이의 다툼으로 환원될 수 없다. 퀴어 이슈는 우리가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수 있는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온 규범적인 질서는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이를 통해 한국사회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등에 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 P17
반퀴어 집단은 퀴어문화축제를 ‘동성애광란축제‘로 부르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종교차별법으로 명명하면서 퀴어 집단에 낙인을 찍고 사회적 공포를 조장하는 데 매진한다. 사회학자 스탠리 코언Stanley Cohen은 특정한 상황, 사건, 인물, 집단을 사회적 위협으로 지목하고, 이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도덕적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보수 정치학을 가리켜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이라고 설명한다. 도덕적 공황은 간단히 말해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와 같은 감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불안과 분노를 먹고 자라는 도덕적 공황은 다음과 같은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대낮에 동성연애자들이 서울광장에서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춤을 췄단 말이야?" "들었어? 우리 동네에 청소년 성소수자 상담소가 만들어진대. 집값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몰 - P50
라" "성도 여러분,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한국교회는 다 죽습니다!" 도덕적 공황이 불어닥치는 시대에는 사회적 위기에 대처한다는 명분에 기대어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집단에 대한 공격과 처벌이 정당화된다. 이들이 기준에 미달된 존재, 보호할 가치가 없는 존재, 오염된 존재이자 사회를 오염시키는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보수 개신교회의 반퀴어 운동은 도덕적 공황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회는 가족, 국가, 군대, 학교와 같은 근대사회의 공적 기구가 비정통적인 신학, 반사회적인 집단, 비규범적인 문화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다는 담론을 유포한다. 이 담론에 의하면, 가족의 가치가 위협받는 이유, 국가 안보와 군대 기강이 흔들리는이유, 학교 폭력과 청소년 자살이 늘어나는 이유, 교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모두 퀴어 집단 때문이다. 개신교회는 사회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확산시키면서 개신교인이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흥미롭게도 반퀴어 운동은 퀴어 집단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보다 퀴어 집단이 사회 변화를 요구하도록 방관한 개신교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데 더욱 집중하고 있다. ‘미리 막아낼 수 있었을 텐데‘라는 죄책감은 반퀴어 운동을 추동하는 주요한 연료로 쓰인다. 퀴어 변화를 막아야 하는 책임을 갖는다는 점에서 개신교인은 문제 해결의 당사자가 되고, 막아낼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 P51
개신교회의 권력은 문제 해결의 도구가 된다. 비록 지금까지는 개신교인이 퀴어 변화를 대항해야 하는 문제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영적인 분별력을 갖추어서 퀴어 집단의 음모를 파악한다면 퀴어 변화를 막을 수 있다는 논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반퀴어 운동은 각성된 주체, 다시 말해서 더 이상 가만있지 않겠다고 결단한 주체를 만들어낸다. 이들은 퀴어 집단과 관련이 있는 국내 정책을 찾아내 담당 기관에 항의하는 일부터 외국에서 전개되는 반퀴어 운동의 전략을 참조하는 일까지 퀴어 변화에 대응하는 다양한 활동을 진행한다. 또한 퀴어 이슈를 개신교회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인권과 다양성의 문제로 여기는 사람들을 설득하면서 퀴어 집단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종교적 사명감과 정치적 행동력이 서로 맞물리면서 반퀴어 운동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반퀴어 담론을 전파하는 예배와 기도회는 반퀴어 운동이 가진 종교적 특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예배와 기도회라는 형식은 퀴어 이슈를 정치와 구별되는 종교의 영역에 위치시킨다. 또한 종교 행사는 교단, 나이, 성별, 소속, 지위 등과 무관하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여의 문턱을 낮추는 효과 역시 가져온다. 집회나 시위 현장이 부담스럽거나 건조한 분위기의 기자회견장이 낯선 개신교인에게 예배와 기도회라는 형식은 심리적 거리감과 감정적 불편함을 줄여준다. 결과적으로 어디까지가 정치적인 것이고 - P52
어디까지가 종교적인 것인지 구분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 P53
반퀴어 운동은 개신교회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기획으로 채택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교회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많은 개신교인은 성찰과 식별, 대화와 토론의 부재 속에서 반퀴어 흐름에 휩쓸리고 있고, 보수 개신교회 내부에서 비판적 운동을 펼쳐온 복음주의권은 퀴어 이슈에 침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반퀴어 운동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반퀴어 운동을 전개하는 단체들은 종교적 입장과 경제적 이해관계의 차이로 인해 따로 또 같이 행동하고, 퀴어 집단과 연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면서 힘든 시기를 살아내고 있다. 이 다채로운 움직임이 어떻게 귀결될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퀴어 이슈에 대한 입장과 - P96
태도를 전면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보수 개신교회의 구조적 위기는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 P97
현재 제시된 미래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먼저 보수 개신교회를 배경으로 하는 반퀴어 집단은 한국의 미래를 미국의 현재에서 찾으면서, 퀴어 가시성이 높아지고 동성결혼 법제화가 이루어진 미국을 부정적인 사례로 해석하고 있다. 시간적 관점에서 볼 때, 반퀴어 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으로 대표되는 위대한 과거와 미국교회의 패배로 대표되는 비참한 미래 사이에서 ‘대안적인‘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반퀴어 집단은 미국을 반면교사로 삼아 퀴어 변화를 막아내고 거룩한 통일한국을 건국함으로써 ‘더 나은 미국‘ 혹은 ‘새로운 미국이 되고 싶어 한다. 둘째로 국가기관의 경우, 퀴어 이슈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는 변화를 감지하면서도 퀴어 이슈를 미래에 다루어야 할 주제로 치부하고 정책 결정을 유예한다. 퀴어 집단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제도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는 일이 지금 감당해야 하는 정치적 책임이 아니라 나중에 다른 누군가가 처리할 행정 업무로 연기되는 것이다. 국가기관은 ‘퀴어 이슈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를 대면서 퀴어 집단의 요구를 외면한다. 결과적으로 국가기관은 차별과 폭력을 영속화하려는 반퀴어 집단과 공모 관계를 맺게 된다. 마지막으로 퀴어 집단은 반퀴어 집단의 공격과 국가기관의 무 - P103
책임한 태도에 맞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한쪽에서는 변화를 기대하는 열망이 모이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퀴어 집단이 겪는 열악한 현실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퀴어 활동가들은 변화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분투한다. 이들은 퀴어 이슈를 공적인 의제로 만들어가면서 시민사회 영역에서 연대를 확장하고 커뮤니티 역량을 강화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을 포함한 외국의 퀴어 상황과 한국의 다른 소수자 운동은 중요한 참조가 된다. - P104
바성연은 경제적 풍요가 "성적 타락"을 일으키고 "왜곡된 성문화"를 확산시켜 국가를 "패망의 길"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바성연은 경제적 풍요 자체를 거부하기보다 이를 지속적으로 누리는 방법을 모색한다. "성적 타락이 망국적 수준"에 이른 미국과 유럽을 닮지 않고 "윤리적 가치"를 지켜낼 수 있다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경제적인 축복"을 즐기는 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퀴어 집단이 제기하는 세속적 가치에 대한 비판은 양적 팽창에 몰두해온 한국 개신교회의 성장주의를 긍정하고, "동성애를 정상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강하고 튼튼한 국가를 이상화함으로써 반퀴어 내셔널리즘을 강화한다. 여기서도 미국과 유럽은 한국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사례로 제시된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10년 넘게 무산되고 동성 간 성적 실천을 처벌하는 형법이 존재하는 한국의 현실은 무시하고 미국과 유럽의 특정한 퀴어 상황을 강조하는 것은 보수 개신교인의 위기의식을 고취시키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한국에서 제도적 차 - P117
원의 변화가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미국과 유럽처럼 한국 역시 언제든지 성적 타락에 빠질 수 있다‘는 주장은 보수 개신교인을 체제와 규범을 수호하는 파수꾼으로 호명한다. 세속주의에 대한 비판이 성장주의를 촉진시키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퀴어 집단은 공공의 적으로 지목된다. - P118
반퀴어 집단이 퀴어 집단을 반사회성, 성적 비규범성, 통제 불가능성과 연결시키는 경향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퀴어 당사자의 불행이 예정되어 있다는 메시지다. 퀴어함이 건강, 행복, 존경과 같은 가치의 반대편에 놓이면서, 불행했기 때문에 퀴어 당사자가 되었고 퀴어 당사자이기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순환논리가 만들어진다. 다른 하나는 퀴어 집단을 관용하는 사회는 곧 붕괴될 것이라는 메시지다. 이는 더 나은 사회, 더 밝은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서 퀴어 집단을 제거해야 함을 시사한다. 여기서는 이 두 가지 메시지를 ‘퀴어 불행 예정설‘과 ‘사회 종말 예정설‘로부르려고 한다. 먼저 퀴어 집단을 지독한 불행에 시달리는 존재로 정의하는 ‘퀴어 불행 예정설‘부터 살펴보자. 한국성과학연구협회는 동성애자의 삶이 불행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선전문을 배포했다. 선전문에 따르면, (남성) 동성애자는 "불결한" 항문섹스를 하기 때문에 "일반인이 걸리지 않는 질병"에 걸리기 쉽다. 동성애자가 알 - P120
코올의존증 상태에 처할 확률은 일반인에 비해 2배, 자살률은 3배, HIV 감염 확률은 180배가 높고 수명은 25년에서 30년가량 짧다. 젊은 시절부터 질병으로 고통받는 동성애자는 "하루에도 열 번 이상 화장실을 가고 기저귀를 차야" 하는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를 과학적 사실인 듯 소개하는 반퀴어 텍스트는 꾸준히 유통되고 있다. 반퀴어 집단은 동성애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야말로 선전문의 제목처럼 ‘동성애자들이 절대 말하지 않는 동성애의 불편한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불행이 예정된 동성애를 옹호하고 미화하는 것은 동성애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기에 동성애를 정상이라고 인정하면 안 된다는 논리다. 퀴어 집단의 불행한 미래를 예언하고 해결책으로 탈동성애를 제시하는 것은 보수 개신교회의 전통적인 구원 서사와 유사하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동성애자)은 지옥(HIV 감염, 알코올의존증, 자살, 단명, 끔찍한 노년)에 갈 수밖에없지만, 예수(탈동성애)를 통해 천국(이성애규범)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서사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더 이상 동성애자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탈동성애자의 선언은 ‘나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듭난born-again 개신교인의 고백과 겹쳐진다. ‘퀴어 불행 예정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동성애가 불행의 원인인 동시에 결과가 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동성애자의 불행을 강조하는 이들은 주로 동성에 대한 성적 끌림이 환경적 요인에 - P121
의해서 후천적으로 생긴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성애자인데, 불행하게도 일련의 부정적인 상황을 겪은 사람들이 자신을 동성애자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 부모와의 부적절한 유대 관계, 부모의 무관심과 같은 역기능적 가족 환경 (2) 우울증, 결혼에 대한 두려움처럼 부정적인 심리 상태 (3) 성적 학대, 언어폭력, 따돌림과 같은 피해 경험 등이 모두 동성애의 잠재적 원인으로 지목된다. 동성애의 후천성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동성애가 안정적이고 중립적인 성적 지향이 아니라 열악한 삶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병리적 현상임을 전제로 한다. 불행한 환경에서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든 동성애자로 살면서 불행하게 되는 것이든 동성애자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바람직한 삶에 대한 기준이 이성애규범에 근거해서 구성된 사회에서는 오직 이성애만이 행복의 가능성을 약속한다. 이로 인해 퀴어 연구자 우주현과 김순남이 지적한 것처럼 동성애자를 이성애자로 ‘되돌리려는‘ 일은 그로 하여금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윤리적 실천으로 의미화된다. 퀴어 집단에게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는 일도, 오물을 투척하는 일도, 물리적 폭력을 서슴지 않는 일도 불행한 ‘그들‘로 하여금 행복한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이타적 행동이 되는 것이다. 반퀴어 집단의 ‘퀴어 불행 예정설‘에 맞서기 위해서는 퀴어 당사자의 다채로운 생애 서사가 보다 널리 알려져야 한다. 끝없는 불 - P122
행과 고독한 죽음으로 점철된 반퀴어 서사는 퀴어 당사자의 복잡다단한 삶의 이야기를 왜곡한다. 퀴어 당사자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실패로 인해 절망하기도하고 때로는 원하던 바를 성취해서 기뻐하기도 한다. 소소하게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 사랑하는 이들과 즐거워하는 모습, 고통에 아파하고 상실에 슬퍼하는 모습, 사회를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등 소박하고 친근한 삶의 모습에 주목하는 일이야말로 퀴어 생애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시작이 될 것이다. 다만 퀴어 집단 ‘또한‘ 여느 누구 못지않게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은 또 다른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다. 오히려 왜 특정한 위치에 놓인 이들의 생애 경험이 행복한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젊고 건강한 신체, 삶에 대한 굳은 의지와 높은 수준의 자긍심, 낭만적이고 안정적인 파트너십, 원가족原家族과 주변 친구들로부터의 폭넓은 지지, 튼튼한 물적 토대 등 까다롭고 제한적인 조건을 갖춘 소수의 퀴어 당사자에게만 행복할 권리와 자격을 부여하고, 가난하고 늙고 아프고 외로운 대다수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행복의 정치학에 속지 말아야 한다. ‘퀴어 불행 예정설‘에 저항하는 일은 퀴어 불행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퀴어 당사자가 존재하며 이따금 불행을 기꺼이 선택하는 이들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 - P123
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퀴어 연구자 헤더 러브Heather Love는 동성 간 관계를 비극적으로 재현하는 지배 서사에 맞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강조하는 방식을 ‘감정적 순응주의emotional conformism’라고 비판한 바 있다. 차별과 폭력이 심각한 사회에서 퀴어한 존재로 살아가면서 불행을 겪는 일이 예외적이지 않다면, 불행한 삶을 산다는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려주는 ‘나쁜 역할 모델‘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헤더의 표현을 빌리자면, 반퀴어 운동이 금지한 것은 행복할 권리가 아니라 ‘불행해질 수 있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 P124
보수 개신교회는 퀴어 논쟁 이전에도 도덕적 공황을 정치적 방법론으로 삼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대중문화에 대한 강력한 비난을 꼽을 수 있다. 대중문화를 사탄의 계략으로 규정하면서 청소년들을 영적 타락에서 구해내야 한다고 주장한 1990년대의 책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습니다』는 당시 개신교회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영향으로 뉴에이지, 록, 헤비메탈 장르의 음반을 버리거나 소각하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가깝게는 2011년 서울에서 미국의 아티스트 레이디 가가의 콘서트가 개최되었을 때, - P125
공연장 앞에서 방언으로 대적 기도를 하는 개신교인들도 있었다. 가별의 이야기는 보수 개신교회가 선악 이분법에 근거해서 반복적으로 문화전쟁을 일으켜왔음을 알려준다. (...) 가별은 록 음악에 대한 경계심과 동성애에 대한 적대감 사이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개신교회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새로운 문화가 가져오는 창조적 불안을 ‘사탄의 역사‘로 해석하면서 개신교인으로 하여금 보수적인 신앙으로 무장할 것을 요청한다. 개신교회는 불안과 두려움을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한편, 이를 해소하는 방법을 함께 제공하는 이중 전략을 구사한다. 가별은 록 음악에 대한 불안보다 성적 타락에 대한 두려움이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음악 장르에 대한 선호보다 이성애규범을 뒷받침하는 물적 토대와 문화적 의미체계가 더욱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 개신교회는 스스로를 성윤리의 수호자로 내세우 - P126
면서 젠더와 섹슈얼리티 이슈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자임해왔다. 그러나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풍성한 영역을 올바른 성과 그릇된 성으로 단순하게 구분하면서, 성을 경유해서 발생하는 차별과 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성적 다양성을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보수 개신교회가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주목하게 된 데는 사람들이 교회 공간에 정기적으로 모인다는 점도 반영되어 있다. 사람들이 어울리는 과정에서 성적인 교류 또한 활성화되기에 교회는 보수적인 신학의 테두리 내에서 성적인 역동을 관리하려고 한다. 이에 이성연애 특강, 결혼 예비학교, 부부 상담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제도화된 이성애 관계는 지지하는 한편, 성적 실험, 임신중지, 퀴어 친밀성 등에 대해서는 거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앞서 살펴본 동성애조장 중단촉구 교단연합예배 및 국민대회에서도 이분법적 대비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부에서 3부까지 퀴어 적대를 공식화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된 것과는 달리 4부에서는 ‘거룩한 자녀, 효도하는 삶, 행복한 가정‘을 추구하는 ‘생명-가정-효 페스티벌‘이 진행되었다. 4부는 임신중지 반대 캠페인(‘생명 토크‘)과 이성애 핵가족의 화목함을 강조하는 순서(‘가정, 기묘자의 전략‘)로 채워졌다. ‘동성애를 이기는 길은 건강한 가족의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것‘이라는 취지에서였다. 이 행사는 퀴어 집단이 야기하는 문제(1~3부)가 이원젠더체계와 이성애규범의 재확인(4부)을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 P127
하지만 행복한 결혼생활, 아이 양육, 어르신 공경은 동성 간 관계에서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성애의 독점적 지위를 완벽하게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퀴어 연구자 루인이 지적한 것처럼, 규범은 규범적 존재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지향점으로서 규범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을 요청한다. 규범적 존재는 비규범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지배규범을 학습하고 모방한다. 이 과정에서 지배규범을 비틀고 다르게 반복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지배규범을 체화하는 규범적 존재의 노동이 은폐되면서 규범적 존재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규범을 몸에 익힌 것처럼 오인된다. 규범적 존재 역시 지배규범을 나름의 방식으로 수행함에도 규범적 존재의 수행은 유일하게 적법한 원본으로 간주되어 권위를 획득하는 것이다. 비규범적인 존재가 지배규범을 자신의 방식대로 수행했을 때 규범적 존재가 불안과 위협감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규범적 존재의 수행 자체가 기괴하고 이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규범적 존재의 수행이 지닌 원본으로서의 권위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규범을 번역해내고 있다면 특정한 존재의 수행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2013년 김승환-김조광수 공개 동성결혼식에 대한 반퀴어 집단의 거센 비난은 동성결혼이 이성 간의 결합만을 인정하는 지배규범의 임의성을 폭로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감정적·성적·경제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노동이 여성과 - P128
남성 사이에서만 가치를 발생시킨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물었을 때, 반퀴어 집단은 "남자 며느리 NO! 여자 사위 NO!" 정도의 답변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반퀴어 집단은 퀴어 집단을 몰상식함, 반사회성, 부도덕, 비위생과 같은 기호와 연결시키면서 퀴어 집단이 규범을 체현할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퀴어 집단이 차별받아 마땅하다고 이야기하기보다 보호할 만한 소수자 집단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퀴어 집단을 비인간·비시민의 영역으로 추방시킨다. 퀴어 집단이 사회적 소수자라는 주장은 "자신을 약자로 둔갑시켜 부도덕한 성행위를 보장받으려는 ‘소수자 전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반퀴어 집단은 존엄한 삶을 열망하는 퀴어 집단이 보편적 인간이자 적법한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갖췄는지 심사하는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들은 군인의 성적 자기결정권, 동성 간 성매매, 퀴어문화축제 신체노출, HIV/AIDS 등을 문제 삼으면서 퀴어 집단에게 성적 낙인을 찍는다. 규범성과 관련하여 반퀴어 집단이 만들어내는 이분법적 구도는 표 2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반퀴어 집단이 퀴어 집단을 비규범적인 종species으로 분류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퀴어 집단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효과적인 저항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반퀴어 집단이 규범을 둘러싼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규범적 가치를 체현한 퀴어 당사자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규범에 도달하는 데 실패한 특정 퀴 - P129
어 당사자를 공격하는 것을 통해서 규범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다. 이원젠더체계와 이성애규범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라면, 규범으로부터 가까이 있는지 멀리 있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퀴어 집단은 본질적으로 부족한 존재로 규정된다. 퀴어 활동가 하윤은 퀴어 집단이 비규범성으로 인해 공격받는시기일수록 퀴어 커뮤니티에 오가는 여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반퀴어 집단이 퀴어 생애에 대해 추문을 만들고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한다면, 퀴어 운동은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를 토대로 대항 논의를 이끌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윤은 퀴어 논쟁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퀴어 비규범성을 우회하기보다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상대가 구사하던 공격의 레퍼토리를 우리의 이야기로 가져오는 일"이 퀴어 운동 - P130
의 중요한 과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퀴어 비규범성을 정치적 자원으로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지배규범이 지닌 매력과 통치력은 상당하다. 또한 사회적 소수자는 스스로를 존중하고 커뮤니티를 긍정하는 언어를 갖기 어려우며 열악한 물적 토대 위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지배규범을 따르지 않았을 때 가해지는 처벌과 제재에 취약하다. 이에 지배규범을 거스르는 전략보다 지배규범에 의존하는 방식이 사회 변화를 이루는 데 현실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현재 퀴어 커뮤니티 구성원들은 퀴어 특유의 문화와 삶의 양식을 만들어나가는 것(42.2%)보다 기존의 문화와 제도에 포함되는 것(57.8%)을 통한 평등의 실현을 선호한다. - P131
재환은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가는 일의 중요성과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재환이 말한 것처럼, 반퀴어 집단은 "약한 고리‘를 문제 삼는 것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쉽게 헤게모니를 장악한다. 비규범성에 대한 비판은 사회 구성원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호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퀴어 정치학을 추구하는 이들은 차별과 폭력에 맞서는 직접적인 대응방법을 마련하는 일과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규범적 전제에 질문을 던지고 이를 새롭게 구성하는 일을 동시에 요청받는다. 자유와 평등, 인간 존엄성과 같은 근대적 이상에 기대어 퀴어 집단 ‘또한‘ 보편적 인권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일과 이원젠더체계나 이성애규범과 같이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구획하는 근대 사회의 규범적 질서에 도전하는 일을 같이 해내야 하는 것이다. 각각의 과제도 만만치 않지만 서로 다른 과제를 함께 풀어나가는 과정은 더욱 고되다. 퀴어 연구자 리 에델만Lee Edelman은 규범과 비규범의 이분법을 뛰어넘고 지배적 프레임에서 이탈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규범과 비규범의 대립을 급진화하는 기획을 제안한다. 퀴어 집단이 미래를 파괴한다는 주장에 반박하기보다 이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현체제에 복무하지 않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반퀴어 집단은 이 - P132
성애 가족질서를 세계의 근본으로 설정하고 퀴어 집단의 위협으로부터 미래를 수호하는 역할을 자처하고는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아이the Child‘다. 에델만에 따르면, 아이는 사회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바람이 표상된 기호다. 지배규범과 사회질서의 영속성을 뜻하는 아이의 반대편에 퀴어the queer가 놓여 있다. 퀴어는 아이가 약속하는 미래를 멈추는 이들, 재생산을 통해서 미래가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reproductive futurism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다. 퀴어 집단을 반사회적 존재로 재현하는 반퀴어 정치학과 미래없음을 노래하는 에델만의 논의는 언뜻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전자가 퀴어 변화로 인한 공포와 불안을 조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현체제를 긍정한다면, 후자는 아이가 가리키는 미래를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가능성을 조명한다. 퀴어한 존재들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질서를 갖춘 미래, 통제 불가능한 것도 예측 불가능한것도 없는 미래, ‘그래, 이게 사람 사는 거지‘를 되뇌게 만드는 미래를 거부한다. ‘특권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만을 보호하기 위해 구축된 시공간‘에서 벗어나서, 무례하고 갑작스러우며 거칠고 대담한 변화를 일으키는 퀴어 잠재력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반퀴어 집단이 예견하는 세계의 종말은 퀴어한 존재들에게 짐작하지 못했던 기회가 될 수 있다. 행복한 가정이 참을 수 없이 지루한 이들, 계보가 없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이들, 욕망을 내일로 - P133
유예하지 않는 이들, 내키는 대로 붙어먹는 이들, 태어난 대로 살지 않는 이들, 못생기고 뚱뚱하고 ‘팔리지 않는‘ 이들, 수치심과 죄책감에 절어 사는 이들, 생존 회로를 떠도는 이들에게 퀴어 아포칼립스는 퀴어 유토피아로 향하는 창조적인 모험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모른다. 불행이 예정된 존재, 종말이 예정된 사회, 승리가 예정된 규범이라는 반복된 예언에 더 이상 속을 이유는 없다. 퀴어 차별과 폭력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퀴어함으로 인해 파괴되는 현 체제와 결별하고 퀴어함이 창조하는 새로운 세계에 주목해야 한다. - P134
커밍아웃은 자신의 모습에 대해 고민하고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익히며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탐색해나가는 자기성장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과 비슷한 삶의 궤적을 지닌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를 새로이 만들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 커밍아웃은 심리적 안정감과 정치적 연결감을 제공하는 커뮤니티를 만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개인의 커밍아웃이 커뮤니티 경험으로 이어질 때,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집합적인 고민이 형성되고, 이는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운동의 출발점이 된다. 이처럼 공통의 서사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정체성 정치에 있어 커밍아웃은 중요한 조건이 된다. 다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커밍아웃을 통해 결집한 ‘우리‘ - P164
가 역사, 문화, 권력관계 등에 따라서 바뀌어간다는 점이다. 정체성 범주는 자아의 본질을 투명하게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나-우리‘를 얼마간 유효하게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는 문화적 발명품이다. 여기서 ‘우리‘는 똑같은 경험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집단이 아니라 특정한 시공간을 살아가는 이들이 소속감을 느끼는 정동적 장소이자 때로는 정치적 투쟁의 기초가 되는 상황적 커뮤니티라고 할 수 있다. 정체성 범주는 우리가 스스로를 어떠한 존재로 받아들이는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은지 알려줄 뿐, 진정한 자아를 서술하는 안내서가 될 수 없다. 정리하자면, ‘필요한 허구necessary fictions‘로서 기능하는 정체성 범주는 정체성 정치를 담보하지 않는다. 특히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고 오프라인을 경유하지 않는 만남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개인의 커밍아웃은 퀴어 운동이나 퀴어 커뮤니티로 확장되지 않기도 한다. 더욱이 대도시에 거주하지 않거나 퀴어 친화적인 준거집단이 부재한 퀴어 당사자에게 커밍아웃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 내지는 소규모의 자족적인 집단을 형성하는 일을 넘어서기 어렵다. 퀴어 운동이 권리보호와 반차별 주장을 넘어서 불평등한 세계를 떠받치는 물적 토대와 의미체계를 재조직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체성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긍정하는 커밍아웃,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모임, 편하 - P165
게 의지할 수 있는 커뮤니티,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운동은 ‘나중에‘ 담론에 맞서 퀴어 변화를 실현하는 데 저마다의 모습으로 기여한다. 그러나 동시에 퀴어 당사자-커뮤니티-운동 사이의 우연한 관계를 살피는 일, 퀴어 집단의 다채로운 문화적·정치적 실천을 의미화하는 일, 연대를 확장하고 교차의 지점을 인식하는 일, 급진적 퀴어 비전을 힘 있게 풀어내는 일 또한 중요하다. "변화는 시작됐다.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2017년 두 번째 성소수자 촛불문화제 슬로건)고 선언한 퀴어 집단이 어떠한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지켜보아야 한다. - P166
사회적 소수자가 정치적으로 대표되고 의사결정 과정에 진입하는 변화는 소수자 집단이 배제되어온 고통의 역사를 치유하는 회복의 사건이자 정의롭고 평화로운 미래에 조금 더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진보의 사건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를 둘러싼 - P167
지배적인 문법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이를 마냥 환영하기는 어렵다. 다양성을 반영하겠다는 명목으로 매우 적은 수의 사회적 소수자를 포섭하는 일은 주류와 비주류,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우리‘와 ‘그들‘을 분할하는 위계질서를 가리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핵심은 예외적인 사례를 늘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권력관계를 재배치하고 지배질서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퀴어 활동가들은 퀴어 집단의 가시성과 대표성을 제고하기 위한 노력과 주류화·규범화·제도화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고민을 동시에 하고 있다. 의찬은 퀴어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른 시민운동의 역사를 참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P168
의찬은 퀴어 당사자 개인의 성취를 퀴어 변화로 해석하는 입장을 경계하면서 논의의 무게중심을 대표성 확보에서 소수자 관점의 반영으로 옮긴다. 소수자 위치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할 때, 퀴어 정치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소수자 관점에 기초해서 모든 사람을 위한 평등을 실현하는 일이다. 이때 퀴어 정치인은 이원젠더체계, 이성애규범, 비장애인 중심주의, 인종차별, 자본주의 등 다양한 억압체계가 직조한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퀴어 정치인은 퀴어 운동의 성장을 상징하고 퀴어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존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지배규범에 대한 비판적 인식 없이 퀴어 당사자의 성공을 기대하고 경축하는 일은 퀴어 의제를 정치적 영역에서 배제해온 현 체제를 재생산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 P169
핑크워싱은 퀴어 집단의 취약한 삶을 보수적이고 폭력적인 체제를 긍정하는 명분으로 활용하는 전략이다. 퀴어 친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일은 포용적인 이미지를 획득할 뿐 아니라 퀴어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을 개척한다는 점에서 자본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한다. 한국의 퀴어 집단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는 상황에서 핑크워싱은 다소 멀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퀴어 운동이 성장하고 권력과 자원의 유입이 활성화될수록 보수적인 정치학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높아진다. 성실하고 바람직한 소비자, 상냥하고 규범적인 시민, 건강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이웃 주민이 될 때만 성원권과 시민권이 주어지는 비극은 이미 여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준 반퀴어 집단의 차별과 폭력이 거세지고 국가기관의 정치적 무책임이 지속되는 한국사회에서는 퀴어 미래에 대해 어떠한 기대가 모아지고 있을까? 퀴어함이 만드는 세계, 퀴어함으로 인해 새로워지는 세계는 어떠한 모습일까? 퀴어 미래를 실현하는 역량은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 ‘고통과 수치심으로 가득 찬 과거를 - P170
극복하고 적대와 혐오가 거센 현재를 지나 아름답고 행복한 미래로 향한다‘는 직선적 시간 인식은 퀴어 미래를 이해하는 데 있어 거칠고 투박한 도구인지도 모른다. 북미와 서유럽의 퀴어 역사가 정해진 미래가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참조라고 한다면, 퀴어 변화의 좌표를 부여하고 퀴어 미래를 입체적으로 설계하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고민과 구체적인 지역성이 담긴 이야기를 길어 올릴 필요가 있다. 퀴어 미래를 그리는 작업은 우리 모두가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점을 시사한다. 종말과 파국의 미래, 예정된 수순으로서의 미래, 설렘과 불안의 미래를 마주하면서 퀴어 현재는 더욱 풍성한 의미를갖게 된다. 어떠한 시나리오가 펼쳐질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여기에서 포섭되지 않는 퀴어 가능성을 누리는 일, 포함과 배제의 논리를 뛰어넘어서 실질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질서를 형성하는 일, 구색 맞추기 식의 소수자 배치가 아니라 지배적인 문법을 바꾸는 일을 통해서 퀴어 미래를 ‘기억‘할 뿐이다. 이 세계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렇게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 P171
반퀴어 감정의 정치학은 보수 개신교회의 감정 체제emotional regime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보수 개신교회는 적대의 대상을 설정하고 이에 대항하는 감정 체제를 구성해왔다. 신학자 김진호는 이를 ‘반공주의‘와 ‘성장주의‘라는 두 가지 축으로 설명한다. 먼저 ‘반공주의‘는 1950년대 월남자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응축된 공산주의자에 대한 증오를 가리킨다. 반공주의로 무장한 개신교회는 전후 시기에 대중이 겪던 고통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면서 북한 정권을 무찌르고 공산주의자를 절멸함으로써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을 신뢰한 개신교인들은 정치적 상대를 ‘빨갱이‘로 몰아서 처단하는 테러리즘을 저질렀고, 제주 4·3 당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성장주의‘는 1970년대 오순절 성령 운동에서 강조한 축복과 번영에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 공산주의자를 향한 증오를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전환시켜서 국가 발전에 매진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성장주의에 경도된 보수 개신교회는 박정희 군부독재정권과의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군부독재정권을 비판하며 활발한 사회참여 운동을 전개했던 진보 개신교회와 천주교회가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 - P176
을 받았던 것과는 뚜렷이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일례로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여러 진보 그리스도인이 목숨을 잃었을 때, 보수 개신교회는 그로부터 고작 4개월 후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서울의 5·16광장(현 여의도공원)에서 대대적인 전도 집회인 엑스플로74를 치르기도 했다. 김진호는 반공주의와 성장주의를 각각 ‘파괴적 증오‘와 ‘생산적증오‘로 명명한다. 이 두 가지 증오는 북한 정권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배경으로 나타났다. ‘우리‘를 위협하는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파괴적 증오와 ‘현재의 우리‘가 ‘과거의 우리‘보다 잘 살아야 한다는 생산적 증오는 보수 개신교회를 통해 증폭되었다. 보수 개신교회와 미국의 가까운 관계는 증오 정치학에 있어 핵심이 되는데, 미국이 북한 정권과의 대결에서 가장 든든한 아군이자 언젠가 한국도 이루어낼 경제적 풍요를 상징하는 나라로 표상되었기 때문이다. 반공주의, 군사주의, 내셔널리즘, 친미주의, 자본주의가 연동되고 이것이 개신교 신앙과 결합하면서 보수 개신교회는 현 체제를 사랑하고 불온한 존재를 증오하는 감정 양식을 발전시켜왔다. 보수 개신교회를 배경으로 하는 반퀴어 집단은 반공주의와 성장주의라는 유산을 충실하게 계승했다. 2013년 차별금지법 제정논쟁에서 처음 등장한 ‘종북 게이‘라는 표현은 반퀴어 운동의 반공주의 성향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이 표현에는 성별 정체성 및 성 - P177
적 지향에 근거한 차별을 금지하는 일이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키고 군 전투력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북한 정권을 이롭게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종북 게이 낙인은 그동안 노동 운동,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 등에 참여해온 이들을 ‘빨갱이‘로 판정하고 공격해온 역사를 반영한다. 반퀴어 운동은 성장주의와도 친화적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반퀴어 운동은 내셔널리즘을 근간으로 선진 한국, 통일 한국, 거룩한 대한민국을 이룩하자는 비전을 제시한다. 2016년 서울퀴어문화축제 반대 집회에 참여한 어떤 청년 신학생은 "호국선열이 피땀으로 지켜온 나라, 건국과 산업화의 기적을 이룬 나라를 지켜야한다"고 소리 높여 기도했다. 그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건국사를 지닌 한국을 퀴어 집단이 파괴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때 퀴어 집단은 자유를 함부로 남용하고 성적 욕망에 빠져서 삶을 낭비하는 이기적인 존재, 다시 말해서 한국이 발전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 부도덕한 존재로 규정된다. HIV 감염인에 대한 공적 지원을 세금 낭비라고 비난하는 수사 역시 성장주의와 맞닿아 있다. 성장주의는 존엄과 인권의 가치가 아니라 비용 대비 산출의 논리를 따른다. HIV 감염인을 취약한 위치에 놓인 사회적 소수자가 아니라 세금을 축내는 도둑으로 폄하하는 것이다. 세금 폭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관련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 HIV 감염인이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국가기관 - P178
에 등록해야 한다는 점, 의료 현장에서 차별이 발생해도 도움을 받기 어렵다는 점, 비밀 보장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시민의 건강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는다. 국가가 HIV 감염인 때문에 상처를 입고 허약해진다는 상상 속에서 HIV 감염인은 국가 이상을 해치는 존재로 간주된다. - P179
그러나 반퀴어 감정의 정치학에 있어서 이 모든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반퀴어 집단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 감정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반퀴어 담론은 ‘이 세계에서 무언가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를 막아내지 못했을 경우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는 위기의식, 불안, 두려움을 실어 나른다. 이와 같은 메시지가 전국 단위의 기도회, 서명 운동, 예배를 통해 확산되면서 반퀴어 대중이 형성된다. 실제로는 반퀴어 집단이 퀴어 집단에게 차별과 폭력을 가하고 있음에도 마치 퀴어 집단이 반퀴어 집단과 같은 순수한 시민을 위협하는 것처럼 오인되면서, 퀴어 집단은 보호받아야 하는 사회적 소수자나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동료 시민이 아니라 제거해야 하는 사악한 악마로 의미화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적 인식이 맹목적 신념이나 비합리적 판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자 재니스 M. 어바인Janice M. Irvine은 감정이 의미, 규범, 동기, 사회적 반응의 체계를 아우르는 사회적인 수행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감정이 비이성적인 영역에 속한다는 일반적인 해석을 따를 때, 도덕적 공황의 시기에 조직되는 대중은 정신없이 모인 군중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바인은 주변화된 집단을 사악한 악마로 지목하는 담론이 강력한 감정을 촉발시키면서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결속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감정적·도덕적 대 - P180
중이 출현한다고 보았다. 사악한 악마를 공격하며 ‘항의하는 즐거움the pleasures of protest‘을 누리는 일은 대중의 결속력을 높이고 정당성을 강화한다. 이처럼 정치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감정은 투명한 주체가 표현하는 개인적 느낌이 아니라 구조, 체계, 역사, 문화, 권력관계 등이 매개된 사회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반퀴어 운동의 핵심은 보수적인 교리가 아니라 감정을 움직이는 문화정치학에 있다. 어바인의 논의에 비추어볼 때, 반퀴어 집단은 퀴어 적대를 생산하는 것을 통해서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대중을 결집시키고 있다. 이들은 복잡한 사회적 맥락을 선과 악의 이분법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풀어내어 퀴어 변화를 해석할 수 있는 나름의 준거체계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빠른 속도로 반퀴어 운동에 합류시킨다. 반퀴어 대중은 퀴어 집단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가감 없이 쏟아내면서도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심리적 만족감과 도덕적 우월감을 획득한다. 교회개혁 시기의 개신교인들은 교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면서 ‘항의하는 자들Protestants‘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교회개혁 500주년을 맞이했던 한국 개신교인들은 퀴어 변화에 항의하는 자들로 불리고 있다. 목할 것은 반퀴어 집전 - P181
흥미로운 사실은 여러 이유로 인해서 개신교회를 떠났거나 더 이상 개신교인으로 정체화하지 않는 이들은 ‘탈개신교인‘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개신교인들이 말해주지 않는 개신교회에 대한 비밀‘을 폭로하는 내부 고발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개신교회를 다닌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축적되어 있기에 탈개신교회경험이 여러 사례 중 하나로 받아들여진다는 데 있다. 탈개신교인은 저마다 사연을 지닌 개별적인 존재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 P188
경험을 서술한다. 이에 반해 탈동성애자의 수기에 그려진 동성애자는 얼굴을 지닌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에 가깝다. 따라서 동성애자 한 명, 심지어 과거에 동성애자였다고 밝힌 한 명의 경험이 모든 동성애자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개신교회가 집을 상징한다는 데 있다. 개신교, 회에서 탈개신교인은 잠시 개신교회를 떠난 사람으로 이해된다. 탈개신교인이 개신교회와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했다고 하더라도 마치 돌아온 탕자(루가의 복음서 15장 11~32절)처럼 언젠가 복귀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님을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난다‘는 말이 통용되는 개신교회에서 탈개신교인은 주체적인 선택을 내린 개인이 아니라 방황하는 주님의 자녀로 간주된다. 지독한 낙관주의로 무장한 개신교회에서 탈개신교인의 양심고백은 오직 과거 시제로만 표현될 수 있다. ‘예전에 교회를 떠난 적이 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는 흔한 간증은 탈개신교회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사실을 시사한다. 개신교회가 마침내 되돌아올 집을 상징한다는 점은 반퀴어 운동이 동성애를 정의하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반퀴어 운동은 동성애를 이성애에서 벗어난 비정상적 상태로 규정하고 동성애자에게 이이자로 돌아올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동성애는 안정적이고 중립적인 성적 지향이 아니라 일시적 일탈, 인지적 착각, 성적 중독으로 - P189
의미화된다. 반퀴어 담론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이성애자로 태어나기에 우연적이고 예외적으로 일어난 동성 간 성적 실천이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들이 집(이성애 가족질서)으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고 지옥(퀴어 커뮤니티)에 머물기를 원할 때 발생한다. 마치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교만함이 죄악의 근본으로 여겨지듯이, 지배규범을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주장하는 퀴어 집단의 자긍심은 타락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반퀴어 집단은 퀴어 집단을 집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한 안타까운 이들로 묘사하지만, 퀴어 연구자 사라 아메드Sara Ahmed는 길을 잃는 경험disorientation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 희망을 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은 어지러움과 혼란을 일으키고 때로는 상실의 아픔을 가져오기도 한다. 낯선 곳에서 풍겨 나오는 위화감, 딛고 설 수 있는 기반이 없다는 불안감,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때문에 서둘러 집으로 되돌아가거나 정반대로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멈춰서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길을 잃는 경험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것을 느끼는 우연한 순간을 만들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황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퀴어‘는 이원젠더체계, 이성애규범, 남성 지배, 신자유주의, 백인우월주의 등의 지배 서사가 촘촘하게 설계한 각본을 떠나 길을잃는 것을 불안과 위기로 이해하지 않는다. 퀴어는 과거부터 미래로 - P190
이어지는 선형적인 시간을 비틀고, 똑바른 직선과 명확한 좌표로 이루어진 공간을 구부러뜨린다. 퀴어가 대단한 의지를 갖거나 급진적인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다. 아메드의 표현을 변주하자면, 퀴어가 모든 것에는 제자리가 있다고 말하는 세계에서 주어진 것과 어긋난 각도를 맞추며 살기 때문이다. 퀴어는 돌아갈 집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고통스러우면서도 즐거운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들이다. 퀴어가 하는 양심고백이 있다면, 아무것도 사과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다짐일 것이다. - P191
임요한 목사는 ‘혐오, 폭력, 차별‘과 같은 부정적인 명명을 거부하면서 반퀴어 운동의 정당성을 ‘사랑‘에서 찾는다. 실제로 그는 농성장에 모인 이들에게 혐오발언을 쏟아내고 높은 데시벨의 설교와 찬양으로 농성을 방해했지만, 농성 참가자에게 물리적 폭력을 감행하려는 이들을 막아서며 "사랑으로 해야지!"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그가 퀴어 집단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모습은 박원순 시장을 ‘소 - P194
돔과 고모라 시장‘ ‘나라 망치는 동성애 홍보대사 ‘집회방해 일삼는 꼼수의 달인‘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모습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반퀴어 집단이 혐오를 사랑으로 바꾸어 부르면서 자신의 활동을 "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역사"로 설명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젊은이들‘을 통해서 자신이 지향하는 미래가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어둠의 영‘과 ‘사망의 권세‘의 지배를 받는 젊은이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자신들에게 "혐오, 폭력, 차별을 멈추라"고 이야기할 뿐이다. 그럼에도 반퀴어 집단은 하나님을 떠나서 ‘행복‘하고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젊은이들이 회심하기를 ‘사랑‘과 ‘축복‘의 마음을 담아서 기도한다. 다시 말해서 젊은이들로 표현되는 퀴어 집단은 나라를 파괴하고 민족을 멸망시키는 죄인이기 때문에 반퀴어 집단의 사랑을 받는다. 사라 아메드의 논의는 이 사랑의 역설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된다. 영국의 다문화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아메드는 타자를 향한 사랑을 강조하는 일이 실제로는 타자에 대한 배제로 이어질수 있다고 지적한다. 나와는 다르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주체가 가지고 있는 특권이다. 주체(자국민, 백인, 남성, 이성애자, 시스젠더, 비장애인, 그리스도교 신자 등)는 타자(이주자, 비백인, 여성, 퀴어, 장애인, 비그리스도교 신자, 무종 - P195
교인 등)를 관용할 수 있지만 타자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다. 타자는 오직 주체에 의해서 사랑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남겨질 뿐이다. 타자가 주체의 사랑에 응답하기를 거부하거나 주체와의 동등한 관계를 요구할 때, 타자는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존재로 낙인찍힌다. 타자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다문화주의는 사랑받을 만한 타자와 사랑스럽지 않은 타자를 구분한다. 주체의 문화를 익히고 주체의 언어를 구사하며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는 타자, 즉 ‘자신이 갖고 있는 차이를 국가에 되돌리는 타자‘는 주체가 관용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한국의 경우,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도우며 아이를 양육하는 결혼이주여성이나 개신교로 개종한 이주노동자는 훌륭하고 모범적인 이주자로 소개된다. 그러나 노동조합을 조직해서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투쟁하는 이주자, 출신 지역의 언어와 전통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이주자, 한국의 가부장제·소비 자본주의·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이주자는 불온한 존재로 간주된다. 다문화주의는 ‘사랑에 대한 사랑‘, 즉 주체가 베푸는 사랑에 대한 타자의 사랑을 근간으로 주체와 티자, 사랑받을 만한 타자와 사랑스럽지 않은 타자를 구분하는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메드의 논의에 비추어볼 때, 주체의 위치를 차지한 반퀴어집단은 사랑스럽지 않은 타자인 퀴어 집단에게 사랑받을 만한 타자 - P196
가 되라고 요구하고 있다.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성별에 따라서 살아가기, 이성에 대한 배타적인 성적 끌림을 고백하기, 이성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족을 꾸리기, 예수를 믿고 구원받기 등의 조건을 충족해야만 퀴어 집단을 동료 시민으로, 인간다운 인간으로 인정해주겠다는 것이다. 개신교 전파가 130여 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반퀴어 집단은 이른바 ‘퀴어 청정국‘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퀴어 집단에게는 반퀴어 집단이 쏟아붓는 사랑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이원젠더체계와 이성애규범에 기초한 사회질서를 따름으로써 사랑받을 만한 타자가 되든지, 아니면 변실금, 정신질환, HIV 감염으로 고통받다가 결국 쓸쓸하게 고독사하는, 사랑스럽지 않은 타자로 남을 것인지 선택해야 할 따름이다. 반퀴어 집단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퀴어 집단이 아니라 퀴어 집단의 변화 가능성이다. 언젠가 ‘우리‘처럼 변하게 될 퀴어 집단에게 사랑을 투자하는 것이다. 반퀴어 집단이 전환치료를 강조하는 이유도 퀴어 집단을 ‘우리‘와 비슷한 모습으로 바꾸려는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물론 퀴어 집단이 주체가 제시하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지배규범을 거부한 ‘전과‘가 있는 퀴어 집단은 주체의 위치에 머물 수 없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위계적인 관계가 재구성되지 않는 한, 타자가 주체의 위치에 조금 더 가까이 간다고 해서 주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타자에게 주체를 닮 - P197
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일은 타자를 ‘사랑받을 만한 타자‘로 만들 뿐이다. 반퀴어 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수의 보수 개신교인은 퀴어 집단의 변화 가능성을 확신한다.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비참한 죄인으로 살았지만 구주를 영접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는 회심 서사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보수 개신교인 본인이 종교적으로 회심했듯이 퀴어 집단도 성적인 회심을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전환치료가 비과학적이고 비윤리적이라고 하더라도, 퀴어 당사자가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더라도 ‘나‘를 변화시키신 주님이 ‘당신‘도 변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변화 가능성 혹은 변화의 의무는 퀴어 집단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반퀴어 보수 개신교인의 믿음을 통해서 발명된다. 반퀴어 집단이 사랑과 관용을 주장하는 것은 보수 개신교의 맥락에서 높은 수용성을 지닌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 는 구호는 개신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인식을 환기시킴으로써 사회적 소수자를 괴롭히는 주류 종교 집단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탈색하는 데 도움을 준다. 더불어 미워해야 하는 죄와 사랑해야 하는 죄인을 구별하는 것을 통해 겉으로는 퀴어 집단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죄와 싸워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적대와 혐오를 용인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반퀴어 신념은 그대로 놔둔 채 반퀴어 운동이 전개되는 방식을 온화하고 다정하게 바꾸는 일종의 - P198
마케팅 전략인 셈이다. 그러나 조건을 붙이고 자격을 따져 묻는 퀴어 관용은 신학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은 모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8~9절, 디도에게 보낸 편지 3장 5절). 교회의 역사는 하느님의 선물을 받은 이들이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루어내는 과정이었다. 성서는 타자를 관용하는 주체의 아량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이 되는 방법을 제안한다. 이웃이 되는 것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돌보고 위로하는 일이자 상대를 조건 없이 환대하는 일을 의미한다(루가의 복음서 10장 25~37절). 이웃되기의 윤리학은 사랑받을 만한 존재는 받아들이고 사랑스럽지 않은 존재는 배제하는 반퀴어 운동과 정반대를 지향한다. 반퀴어 운동은 사랑을 부정하는 독선적 배타주의가 아니라 관용을 통해서 위계를 정당화하는 ‘사랑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연구자 재닛 R. 제이콥슨Janet R. Jakobsen과 앤 펠레그리니Ann Pellegrini는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미워하는 것(죄)과 사랑하는 것(죄인) 사이에 임의적이고 모순적인 경계를 설정하면서 자유와 정의가 아니라 사랑과 관용을 추구하는 점을 강하게 비판한다. 사랑을 내세우는 일은 원색적인 적대나 공격적인 혐오보다 긍정적인 함의를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그들을 관용한다는 식의 위계질서를 묵인한다는 점에서 별다른 차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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