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지음 / 파람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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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저절로 펼쳐져서 처음부터 이러하고, 시간은 땅 위에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고 초()나라 시원기(始原記)의 첫머리에 적혀 있다.”


시작과 끝이 하나임에 틀림없고 소설의 첫 머리가 곧 이 이야기의 끝을 말하기도 한다.

간결하면서 무게감 있는 표현들로 문장들을 채우는 김훈 작가님의 새로운 소설이 나왔다.

역사소설에서 느꼈던 그 진지하고 날카로운 문장들이 판타지적 요소들과 만나 작가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판타지 소설이라는 장르를 완성하였다. 사실 상상을 기반으로 한 소설의 시간과 공간을 따지기는 무의미하지만 이 소설은 始原의 어느 한 지점에서 시작이 된다. 인간이 말의 등에 처음 올라탄 무렵으로 그려지나 신화적 요소와 상상력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마치 태초의 인간의 모습이 이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나하(奈河)라는 강이 대륙을 초()와 단()으로 나누고 있고 각 부족의 생활풍습, 문화, 성격이 전혀 달라 같은 땅위에 사는 인간이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체처럼 살아간다.

()는 유목 집단으로 문명을 멀리하고 야생적인 삶을 추구하는 반면 단()은 문자를 숭상하며 건물을 세워 정착하는 삶을 산다. 이들에게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고 그 끝의 죽음과 침묵은 필연으로 다가온다. 인간 이야기의 중심에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말이 중심인지 사람이 중심인지 구분이 모호하다. 초승달을 향해 밤새도록 달리던 신월마(新月馬)혈통의 토하(吐霞)와 달릴 때 핏줄이 터져 피보라를 일으키는 비혈마(飛血馬 )혈통의 야백(夜白)이 주연이라면 총총(驄驄)과 청적(靑赤), 유생(流生)은 그것들의 조연이다.


자유롭고 바람과 같은 삶을 살던 야백(夜白)과 토하(吐霞)에게 인간은 재갈을 물리고 그들을 통제하고 길들이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에게 부림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저항한다. 인간의 욕망은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을 소멸시키고 그들 자신 또한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짐승의 눈에 비춰진 야만적인 인간의 삶은 이해를 받을 수 없고 그것들에겐 중요치 않다. 문명과 야만이 공존하는 세계를 그리며 판타지가 아닌 리얼리티즘이 담겨있는 것 같다. ()와 단()의 전쟁은 둘 중 하나만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고 존재의 이유가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인 듯 서로를 파멸로 이끌고 간다.


목의 차남이고 표의 동생인 연()과 추의 딸 요()는 무당을 통해 인간의 세계와 초자연적인 세계를 잇고 죽은 뒤에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샤머니즘적 성격이 강하고 원시신앙이 띄고 있는 자연물이나 자연현상 등이 무심한 듯 세심한 문체를 통해 주변의 풀꽃 하나까지도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름답게만 표현하기는 쉽다. 온갖 수려한 표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그러나 작가의 특유의 담백하고 진지한 문체는 그대로 살리며 이야기의 구성과 흐름이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나가고 작중 인물들의 감정은 크게 흔들림과 동요가 없이 무심한 듯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의 진정성과 그에 담긴 의미들이 더 심오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확실치 않고 시원기단사가 전하는 것 또한 명확성이 떨어진다는 말을 말미에 붙이며 모호함과 혼돈을 자아낸다.


작가 김훈은 건강 문제로 입원한 상태에서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안타깝기도 했고 존경스럽다는 생각도 했다. 작가의 오랜 팬으로 그가 글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는지 알기에 더욱 마음이 아렸다. 소설은 소설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몸소 체험하고 느껴야 만이 살아있는 문장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그의 글은 더욱 치밀하고 탄탄하며 아름다운 것 같다. 십여 년 전 미국 인디언 마을에서 마주했던 수백 마리의 말무리에서 받았던 영감을 이번 소설에서 적극 투영했다고 한다. 말들의 습성과 행동들의 묘사가 아주 디테일하게 되어있어 사실감을 더해준다. 개인적으로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지만 지금까지 접했던 소설들과는 차원이 다른 분위기다. 일반적으로 판타지 소설이라 하면 화려한 배경의 아름다움을 그리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독특한 소재들을 골라 잘 짜 맞추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김훈 작가의 판타지 소설은 기존의 접근법으로 다가가면 진정한 감동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잔잔한 물이 흐르듯 천천히 그리고 유연하게 다가가길 바란다. 판타지라면 젊은 작가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틀을 깨고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김훈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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