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 국가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과 문화
니시카와 나가오 지음, 윤해동 외 옮김 / 역사비평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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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적인 제목에 눈이 끌려 구입하게 된 책.
실은 일본 학자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거의 없거니와, 당시 자이니치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있던 터라 구입했다.

하지만 여느 자극적인 제목의 책들이 그러하듯이,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터. 그러나 의외로 책 내용이 상당히 좋았다.

 

저자는 '문명'과 '문화'라는 개념과 단어가 어떤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으며, 이것들이 또 어떻게 이용되는가에 주목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서양에서 '문명'과 '문화'라는 (오늘날의) 개념은 근대적인 것이며, 그 둘은 상충하는 면이 있다.

문명은 제1세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프랑스에서 강조되었고, 문화는 후발주자를 대표하는 독일에서 강조되었다.

문명은 보편적인 것, 특히 물질적인 것을 강조하는데 비해, 문화는 특수한 것, 특히 정신적인 것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좀 더 검증을 해봐야하는 것이지만, 꽤 재미있는 주장이다.)

 

  다양한 국가이익을 둘러싼 다툼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은 이렇게 해서 '문명'과 '문화'의 투쟁이라는 형태를 취했던 것이다. 2차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의 전범이 '문명'의 이름으로 심판받았던 것이 기억에 새롭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명과 문화는 근대국가와 국민의 창출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문명과 문화라는 두 개념이 사실과 달리 마치 국가와는 인연이 없는 지고의 가치를 지닌 것처럼 보였다는 바로 그 점이 두 개념의 허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명화론자가 식민주의자로 전락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론자는 제국주의자로 변질되어갔다.

 

이런 저자의 분석은 오늘날의 한국에도 잘 들어맞지 않은가?

 

실제로 '국민 특유의 문화'라는 발상에는 순수한 문화를 희구하고(배타성) 나아가 그것을 과거의 오랜 시대와 전통에서 찾는 바람(복고적 성격)이 감추어져 있고, 극히 자연스런 추세로서 국민적 통일의 구심력이 되는 존재(황제나 천황)을 불러내는 일이 고려되기 때문이다. 또 '국민 특유의 문화'라는 발상은 특히 강력한 국민적 통일이 필요한 위기상황에서 국민적인 자랑과 자부를 요구하며, 그것은 자국 문화의 우월함과 타국 문화에 대한 멸시의 감정으로 쉽게 전화되기 때문이다.

 

결국 '문명'과 '문화'의 대결이었던 2차대전이 종결된 뒤에도, ''문화'나 '문화국가' 슬로건의 기만성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화는 교묘하게 탈정치의 탈을 쓰고 정치적 행보를 꾸준히 밟아나갔던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조선일보'의 '문화면'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자본력, 정치력을 바탕으로한 풍부한 컨텐츠와 물량공세. 그를 통해 매우 적절한 프로파간다를 수행하는 조선일보의 문화면.

'문명/문화가 국가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국가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이 간파되지 않을 필요가 있다.'

마치 조선일보 문화면에 기고하는 지식인들의 변명처럼.

 

어쨌거나.

'내셔널리즘은 '민족'으로부터 도주하여 '문화' 속에 몸을 감췄'는데, 그렇다면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민족은 허구라는 저자의 주장이 수긍은 가지만, 논리적으로 허구라고 해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즉, '허구로서 존재한다'라는 괴상망측한 모순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그래서 제3의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솔직히 답한다. 잘 모르겠다고.

국제적 연대에 대해서도 '국가는 국가이고 국가로 기능하기 때문에 국가 간에 영속적이고 진정한 연대는 있을 수 없다'고도 말한다.

어찌보면 대안이라고 할 것이 제시되지 않아 허망할 수도 있지만, 도발적인 질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저자는 소수를 배제하지 말자는 논리가 더 넓고 강력한 국민통합을 실현하여

'국가의 유지를 원하는 이들에게 경사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거꾸로 국민국가로부터 소외된 여성이나 대중, 외국인이 비판의 관점을 이어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이야기하면서

또 다시 도발적인 질문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계속 '국민'으로 살고 싶은가, 아니면 '국민'을 그만두고 다른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가?

 

어떤 면에서는 이번에 강의를 들었던 자이니치 윤건차 선생님의 논조와도 비슷한 면이 있어 보인다.

(선생님께 메일을 드려 니시카와 나가오에 대한 질문 몇 가지를 해봐야 겠다.)

 

어쨌거나 굉장히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함께, 뛰어난 표현들에 감탄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역시 아무리 학문적인 글이라 할지라도, 그 표현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다.

 

  이번에 <다케우치 요시미 평론집>을 다시 읽어보니 꺼저가는 불을 되살리는 듯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무참한 인상이 남았다. 역사는 두려운 것이다. 역사는 일찍히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허위임을 말없이 폭로하고, 심금을 울리던 명문을 송장처럼 매장해버린다. …… 그러나 시대적 이데올로기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시대의 눈부신 광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똑바로 볼 수 없다. 시대적 이데올로기는 시대의 맹점이기도 하다.

 

또 저자가 인용하는 루소의 표현을 보라.

 

정부와 법이 집단으로서의 인간의 안전, 행복에 필요한 것을 주는 데 비해, 학문 · 문학 · 예술은 그만큼 전제적이지는 않지만 아마 훨씬 강력한 것이고, 인간이 묶여 있는 쇠사슬을 꽃장식으로 가려서 인간이 그 때문에 태어났다고 생각되는 근원적인 자유의 감정을 억압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노예상태를 좋아하게 만들어 이른바 세련된 국민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어떤 한 사람의 출신성분 같은 것이 한 사람의 인생관, 사상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고 믿는 편이다.

저자가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가 1934년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라는 점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을 해보지 않게되는 존재들. 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호기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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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問 라이브러리 5
강수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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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나무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인문교양시리즈, '問라이브러리'. 하지만 생각보다 실적은 좋지 않은 듯 하다.

어쨌거나 이 시리즈가 나온지 꽤 지났는데 한 권도 구입하고 있지 않다가 이번에 두 권을 구입. 이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 시리즈가 타 출판사의 문고 시리즈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적어도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저자 때문일지도.

저자는 고려대의 경영학부 교수이기도 하지만, 신안1리 마을 이장이라는 '간판'을 내세운다.

그만큼 저자가 생각하는 대안은 마을 공동체, 작은 단위에서 시작하는 연대인 것이다.

 

제목에 비해 내용이 다소 산만하게 흩어져 있고, 그 내용도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원론적이라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주장에는 거의 동감할만하다. 문제는 그 주장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인가하는 것.

저자의 말처럼 ''대안'은 만들어가는 것이지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 부분에 있어서 저자는 너무 낙관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세계자본이 추동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은 범지구적 파괴와 '바닥을 향한 경주(race to the bottom)'를 조장한 결과, 세계민중의 삶을 바닥으로 수렴시키고 생존의 위기감을 공유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이제 '세계자본과 세계민중이 직접 충돌'하는 지점들이 증가하는 것이다. …… 한마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저항의 세계화'를 동반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직접충돌하는 지점이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자체로 저항의 세계화 즉 연대의 세계화를 동반한다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아직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선 지극히 회의적이다.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는 민중에 대한 혹은 정의에 대한 순진한 믿음은 회의주의보다도 더 위험하다.

 

그래서일까, 저자의 관점 중 제일 덜 낙관적인 것들에 눈길이 갔다.

 

  그렇다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한편으로 사회적 압력의 일정한 성취물이기도 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결국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기업들이 자본주의시스템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매우 주요한 매개변수(parameter)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대안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만들 것인가? 남을 설득하기 이전에,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영원한 숙제다.

내 삶을 행복한 것으로 만들어갈 때만이,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그래서 저자의 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그런 면에서 '연대'에 대한 다음의 일화는 꽤나 인상적이다.

 

  한편, 이러한 '연대'가 단순한 '도움'과는 질적으로 다름을 보여주는 좋은 일화가 있다. 1994년에 캐나다, 미국, 멕시코 사이에 북미자유협정(NAFTA)이 체결됨과 동시에 멕시코에서는 사파티스타 농민군이 출범했다. 자본과 권력의 일방적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여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 뒤 사파티스타 농민군이 전 세계 양심세력들의 집결을 호소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농민군을 지지하러 멕시코로 몰려들었다. 이때 한 농민군 여성이 외쳤다.

  "만약 당신들이 우리를 도와주러 왔다면 그냥 돌아가시오. 그러나 만약 당신의 문제와 우리의 문제가 뿌리가 같다고 보고 함께 해결하자고 한다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이 단호한 목소리만큼 분명하게 '생동하는 연대'의 의미를 밝히는 논리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연대는, 동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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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나무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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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나무> - 김진숙

 

잎사귀도 없이 꽃만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황금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아침 조회 시간에 사람들이 '나래비'를 죽 서있으면 그들의 등짝엔 허연 소금꽃이 만개하곤 했다.

내 뒤에 선 누군가는 내 등짝을 또 그렇게 보며

"'화이바' 똑바로 써라. 안전화 끄내끼 단디 매라. 작업복 단추 매매 채아라."

그 지엄하신 훈시를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을 게다.

이른 봄 피어나기 시작해서 늦가을이 되어서야 서러이 지는 꽃.

 

이 책을 읽으려고 꺼내들었던 것이 2달 전이었던가. 그리 분량이 많지도 않은 책인데 읽는데 참 오래도 걸렸다.

책이 좋지 않아서, 재미가 없어서,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생각없이 새벽 3시에 책을 집어들었다가 30분을 읽고 잠을 이루지 못한 밤도 있었으며,

이 책이 주는 무거움을 감당할 자신이 생기지 않아서 다시 쉽게 책을 손에 쥐지 못한 탓이다.

그러다가 울산으로 가는 심야열차에 몸을 싣고는 책을 다 읽은 후, 들어가 한숨을 몇 번 내쉬고는 책 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것이 왜 이다지도 힘든 일인 건가.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여성 최초의 용접공. 20년이 넘도록 복직 투쟁을 하고 있는 해고 노동자.

이런 경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녀의 삶, 노동자의 삶이 이 책에 녹아들어가 있다. 혹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 사람 나가고 다시 그 사람들. 생각 좀 해봤나? 기억이 나제? 우리도 니한테 이라고 싶겠나? 말해야 뭐하노? 조지는 김에 확 조져 삐야 된다니까. 골수 뻘개이들도 첨엔 다 모린다 카지. 조지야 아이구 할배요 카제.

  그 눈빛들. 스무개 가까이 되는 눈들은 각자 다른 눈이었지만 같은 빛깔로 번득이고 있었다. 묘한 비웃음을 담고 붉게 번들거리든 그 눈빛들. 그들은 또한 씨발년과 김진숙 씨의 절묘한 차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지옥과 천당의 차이를.

  씨발년이었던 어느 시점에선가 오줌을 쌌다. 이 씨발년, 드럽게 오줌을 싸고 지랄이고. 재수없는 년, 골고리 지랄벵하네. XX를 확 잡아 째버릴라. 어디 뻘개이 년은 XX도 빨간가 함 보자. 내가 오줌을 쌌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들 중엔 껌도 씹었고, 자기 딸 얘기도 했고, 지리한 대원사 계곡에서 좃 내놓고 미역 감은 얘기도 했다. 처음엔 그게 위안 같기도 하고 구원 같기도 하고 그랬다. 그들도 사람이라는 사실이, 같은 인간끼리니까 어쩌면 통할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입에서 나는 김치 냄새조차 절망이 되어 갔다. 저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인간이 인간한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그 몸서리쳐지는 사실이, 무엇보다 내가 여기에 온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는 절망이었다.

 

중간에는 집회장에서 직접 외쳤던 김진숙의 추모사를 모아놓았다.

그 중 2003년(1983년이 아니고 2003년이다!) 노동자 배달호 씨의 노제 뒤의 짦은 추신은 또 다시 책을 덮게 만들었다.

 

<추신> 박창수의 무덤이 빤히 바라뵈는 곳에 배달호 열사를 묻고 와서 이빨까지 빠지는 듯한 심한 몸살에 시달렸습니다. 난 언제까지 이런 추모사를 쓰며 살아야 하나......

 

모르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 이라고 하기엔 우린 너무 비겁하다. 조금만 관심만 가지만 알 수 있을 일들이다.

우린 그저 불편하다는 이유로 시선을 돌린다. 알아서 뭐하냐고 할 수도 있으리라. 내가 아직 어리다라고 비난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지인들이여. 당신이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당할 때, 내가 그렇게 이야기해서야 되겠는가.

강사로 길고 긴 시간을 보낸 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었던 이가 나라면, 당신이 그렇게 이야기하겠는가.

힘든 일인 것, 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 고통스러운 현실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당장 그들과 함께 비를 맞으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냉소를 보내지 말자. 하다 못해 술자리에서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자.

내 일이 아니라고 백안시하는 순간, 다음 타겟은 내가 될지도 모른다.

저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여전이 이 글은 유효하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잡아 갔을때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민주의자들을 가두었을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체포했을때

나는 항의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대인을 잡아갔을때

나는 방관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나를 잡아 갔을때는

항의할 수 있는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불편한 책이고 힘든 책이다. '그러니' 일독을 권한다.

그것이 유서를 꾹꾹 몸에다 눌러 쓸 수 밖에 없었던 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권미경이라는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열세 살때부터 홀어머니와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오빠와 어린 동생 둘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글재주가 유난했던 영민한 아이였습니다. 똑똑하면 안 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똑똑하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혹시 아십니까?

  미싱만 잘 밟으면 되는 공순이가 그림 잘 그리는 저주를 받아 초등학교 6년 내내 게시판에 걸렸던 그림을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혹시 상상해 보셨습니까? 미경이의 글재주는 작업 시간에 빵 먹었다고 조장한테 터지고 온 날, 구비구비 서러운 일기를 써 내려가는 데 밖엔 써먹을 데가 없었습니다. 매일매일이 유서 같았던 일기장을 몇 권이나 남겨 놓고 공장 옥상에서 고단하기만 했던 스물두 살의 몸뚱이를 끝내 날렸던 미경이의 유서는 그러나 막상 짧기만 했습니다. "......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라고 왼쪽 팔뚝에 볼펜으로 비명처럼 새겨넣고 갔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억압의 땅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 깊은 곳에 묻어 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말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_권미경의 왼손 팔뚝에 쓰인 유서

 

남의 일.. 이라고? 우리 어머니는 서울 어느 공단에서 저 또래보다 더 어릴 때 미싱을 배웠다.

어머니의 언니는 버스 안내양을 하기도 했다. 내 아버지는 한 회사의 노조 부위원장이었다.

 

그들은 김진숙 씨가 써내려간 일들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랬을 거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나는 차마 묻지 못했다. 세월 속에 묻어두었을 수도 있을 그들의 상처가 다시 드러날까봐.

이미 흑백이 되어버린 그들의 상처가 울긋불긋 컬러가 되어버릴까봐.

그리고 나는, 그들의 상처와 비슷한 상처들이 곳곳에서 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비록 지금 그 때 그 사람들이 되려 보수적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상처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불편하다고 고개돌리기엔, 고개 돌릴 곳이 마땅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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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 - 노동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상품으로 만드는가
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이가람 옮김 / 이매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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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다. 이럴 경우 십중팔구... 역시 그렇다.



- 안녕하세요, 고객님. 그동안 저희 〇〇카드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하구요, 이렇게 전화를 드린 것은 이번 행사 기간 동안 우수고객님들께만 특별한 혜택을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한 달에 2만원이면 각종 재해, 질병, 사고 등에......
- 아, 저 관심 없습니다.
- 고객님, 많은 분들이 처음엔 관심 없다고 하십니다만......



하아. 이럴 때는 가장 잘 먹히는 카드를 꺼내는 수밖에.



- 아, 네. 제가 지금 학생이라서요, 그럴 형편이 안됩니다.

끈질긴 경우엔 이렇게 얘길해도 요샌 학생도 많이들 한다는 식의 말을 하지만, 한두 번만 더 거절하면 웬만해선 통화가 끝나곤 했다. 하지만 그날의 통화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 아... 학생이세요? ... 고객님, 죄송한데... 잠시만 저하고 통화해주시면 안될까요?



그녀의 명랑하던 하이톤의 목소리가 갑자기 너무나 지친 목소리로 바뀌었다. 순간 나는 ‘아, 내가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구나’ 싶었다.



- 네?
- 고객님, 제가 더 이상 홍보는 하지 않을게요. 제가 오늘 좀 많이 힘들어서... 그래서 그러니까 저하고 잠시만 통화해주시면 안될까요? 긴 시간 뺐지는 않겠습니다.
- 아... 네.



그렇게 해서, 그녀와 10분 정도 통화를 했던 것 같다. 그녀는 나보다 4살이 더 많았고, 현재의 직장에서 대리였으며, 지방 출신이었다. 나에게 대학원생이냐고 물었고, 앞으로도 계속 공부할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나에게 부럽다고도 했다. 오늘 이상하게도 너무 힘든데 전화는 계속해야하고, 그래서 고객님 붙잡고 통화 잠깐만 해달라고 한 거라고 했다. 너무나 지쳐있던 그녀의 목소리는, 통화가 끝나갈 무렵 다시 처음의 밝고 명랑한 하이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더 이상 경고등이 깜빡거리지 않는, 주유소를 떠나는 자동차처럼.



- 네, 고객님. 통화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구요, 하시는 공부도 잘되시길 빌겠습니다.
- 네, 힘내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 때 시간이 오후 4시쯤이었나. 아마도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을 것이다. 성질이 더러운 과장에게 호되게 지적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어제 약혼자와 심하게 다투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자동응답기가 아닌 지쳐있는 한 인간이었고, 생면부지의 나에게 ‘힘들다’라고 감정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지금 그 일을 회상하는 나나, 그녀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이나, 그녀를 통제하고 있던 회사나, 이 일이 일반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 기대를 벗어난 일인 것이다. 친절하되 감정을 표현하지 말 것. 어찌 보면 이 모순에 가득 찬 요구를 우리들은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2.
책의 저자, 혹실드는 감정이 막연히 억제해야할 그 무엇, 비합리적인 그 무엇이 아님을 때론 지나칠 정도로 꼼꼼히 설명해 나간다.



그러나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는 경보체계도 없고, 보이는 것, 기억, 꿈꾸는 것의 자기 타당성을 검증할 만한 기준도 없다. 느낌이 없는 사람이 불 속에 손을 집어넣는 것처럼, 감정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기가 힘들어진다.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상태다. 사실, 감정은 ‘합리적 사고’를 위한 잠재적 통로다. 게다가 감정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알려줄 수도 있다. (49쪽)



<랜덤하우스 영어사전>에 따르면 ‘객관적objective’이라는 단어는 ‘개인의 감정에서 자유로운’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외부의 ‘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판단을 내리려면 감정이 필요하다. (50쪽)



문제는 감정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이 아니라, 이성에 비해 천대받는 감정을 차가운 자본주의가 잘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활용이지만, 감정의 주체 입장에서는 그것을 착취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리고 감정의 통제는 육체노동, 정신노동에 대한 통제보다도 훨씬 가공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가 인간이기 때문에.



감정이 행위에 선행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감정에 대한 규약이나 도덕적인 거리를 설정하는 것은 문화가 행위를 통제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된다. (81쪽)



SF 영화 ‘가타카’나 ‘아바타’, ‘블레이드 러너’에서 등장인물들이 전환적 행위를 하는 중요한 원인이 바로 감정이었음을 생각보라. 심지어 영화 ‘이퀄리브리엄’에서는 아예 모든 사람들이 감정을 없애는 약을 먹고, 감정을 느끼는 자들은 처단 받는다.


하지만 현실은 ‘이퀄리브리엄’ 속의 사회보다 더 가혹할런지도 모른다. 사회와 자본은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교묘히 책임을 떠민다. 너의 미소가 회사와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며, 네가 느끼는 분노와 미움 같은 감정들은 모두 ‘잘못된 감정’ 혹은 ‘느낄 필요가 없는 감정’이라고. 그러면서도 감정이라는 자원을 바닥까지 캐내고 있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법칙에 예외가 되는, 고객과 노동자, 노동자와 기업 사이의 특별한 감정법칙을 만들어가면서(사실 나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은 문화 속에도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낸다).


이 ‘감정법칙’이라는 개념도 저자는 또 다시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설명한다(이런 꼼꼼함이 이 책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우리가 특수한 상황에서 특정한 감정을 느끼는 것을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것, 그것이 감정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스쳐지나가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을 때 느끼는 나의 황당함과 곧이어 치밀어 오르는 화. 이런 감정은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감정법칙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감정의 정도가 있기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게 그 정도로 좋아할 일이야?”, “꼭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니, 이게?”라는 말을 할 수가 있다. 장례식장에 가서 크게 웃어서는 안되고, 결혼식장에 가서 아무리 우울해도 통곡하듯이 울어서는 안된다.


문제는 자본과 기업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감정법칙을 생산해내고, 약자인 노동자들에게 그것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화가 나도 고객은 잘못한 것이 아니다’, ‘고객한테는 절대로 화내서는 안된다’, ‘고객을 아이라고 생각해라’ 등. 기업이 생산한 감정법칙인 단순히 감정 노동자에 대한 착취로 끝나지 않는다. 고객은 기업이 만들어낸 그 법칙을 인지하고는, 감정 노동자들에게 좀 더 막대할 수 있다. “저 사람들은 친절해야 돼. 그게 저 사람들 직업이니까!” 반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감정에서 소외된다. 자기가 느끼는 감정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고, 감정을 회피하는 과정에서 ‘진짜 나의 감정’이 무엇인지 헛갈리기도 한다. 기업은 감정 노동자들에게 단순히 ‘웃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심으로 웃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이 문제에 있어 혹실드는 승무원과 추심원이라는 상반되는 직업을 매우 영리하게 잡아내어 유의미한 분석을 이끌어 내고 있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간다. 사실 맛있는 밥을 먹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일부 레스토랑에선 유니폼을 입은 서버들이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어느 정도 돈을 냈으면, 그 정도는 기본이라고도 생각한다.



#3.
이 감정노동은 젠더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남자가 화를 내면 그것은 ‘합리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분노이자, 성격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깊은 신념을 드러내는 분노로 여겨진다. 여성이 남성과 비슷한 정도로 화를 낼 경우, 그것은 개인적인 불안의 상징으로 해석되기 쉽다. 여성은 더 감정적이라는 믿음이 있고, 이런 믿음은 여성들의 감정을 무효로 만드는 데 사용된다. 즉 여성의 감정은 실제 사건에 맞선 대응이 아니라 ‘감정적인’ 여성 자신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219쪽)



이것은 굉장히 ‘보편적’인 인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조선시대에 남성 자살자와 여성 자살자에 대한 인식차를 보면 굉장히 비슷한 맥락 속에 있다). 하지만 이 논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게 아니다.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적 자원을 가지고 있지 못한 여성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상품으로 내놓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 상품화는 여성들에게 ‘섹시한 모성’을 기대하는 사회의 요구와 맞물려 더 가속화된다. 때문에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이 남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다. 그녀들은 가정 안에서나 사회에서나 감정적 불구자인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요구받기 때문에, 소외될 수밖에 없다. 분노한 어머니, 증오하는 어머니, 아이를 던져버리고 싶은 어머니, 좌절한 어머니. 우리는 이런 것에 얼마나 익숙한가? 실제로 많은 현대 여성들이 산후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사회적 모성이 만들어내는 죄책감 때문이다.


여성들에 대한 이러한 요구와 더불어, 여성을 좀 더 만만하게 보는 인식이 노동사회 내부에서 또 다른 위계를 생산하고 있다는 지적도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여자 승무원의 말은 죽어라고 듣지 않던 승객이 남성 승무원의 한 마디엔 고분고분 따르기 때문에, 오히려 경력도 미천하고 직위도 낮은 남성 승무원이 권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객들은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다면, 남성 승무원이 그들 중 리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때로는 좀 더 쉽게 일하려는 지친 여성노동자들이 그것을 이용하기도 한다(하지만 게이 승무원에 대한 언급은, 오히려 전체 논지와 맞지 않는다. 여자의 천성이 서비스업과 잘 어울린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이 부분이야말로 혹실드의 한계다. 한 집단 안에서의 계급 및 지위와 젠더라는 변수를 명확하게 구분 짓지못하고 있다. 즉, 그것이 직위 때문인가, 젠더 때문인가에 대한 확실한 답을 내지 못한다).





#4.
그래서 결론은? 사실 내 생각보다 이 책은 지나치게 ‘이성적’이다. 역자의 말대로, 저자는 ‘시장과 기업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감정’이 매우 미묘한 지점이니만큼 감정노동자와 그 결과물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감정 그 자체에서 소외되는 일은 없도록 기업과 조직의 원리에 따라 관리되고 상품화된 감정과 그렇지 않은 인간 본연의 감정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너무 온건하다, 라는 나의 생각이 좀 과격한가? 감정노동에 이런 문제들이 있으니, 소비자와 노동자가 스스로 소외되지 않도록 감정들을 구별해야 한다? 구별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는가, 소외되지 않도록 어떠한 조치를 하고 있는가, 임계점에 다다를 정도로 노동강도를 높이고 있지는 않는가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시점에서, 저자는 한 발짝 물러서 ‘개인’을 이야기한다. 마치 신자유주의의 책임론처럼. 취직이 되지 않으면 ‘스펙’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게으르기 때문에.



앞에서 나와 통화를 했던 텔레마케터를 생각해보자. 그녀는 매우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었고, 더 이상 계속 일을 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고객에게 통화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라고? 이건 노동조건을 몰라서 하는 말일 뿐이다. 텔레마케터들은 업무시간 동안 계속 감시를 받는다. 계속 통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감시. ‘그래서’ 그녀도 나에게 다른 주제로 통화를 하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비행사처럼) 더 교묘한 방식으로 회사가 감시를 하고 통제를 한다면? 통화내용까지 다 녹음하여(이미 많은 회사가 녹음을 하고 있다) 그 내용을 분석한다면? 그녀는 ‘힘들고 우울하다’고 자신의 감정을 느꼈다. 즉 ‘인간 본연의 감정을 구별’해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이 노동자에겐 어떤 말을 해줄텐가? 일은 일이니까 신경 끄라고? 이건 혹실드가 이미 지적한 소외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


또한 감정과 직업에 대한 문제가 더 복잡하다는 생각도 든다. 의사를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의사는 간호사에 비해 감정노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더 나은 지위를 보장받는 직종으로 등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의사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만약 사람의 장기 하나하나를 보는 차가운 의사가 아니라 그 치료과정과 치료결과 하나하나에 모든 감정을 쏟는다면, 과연 그가 의사로서의 직업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그가, 버틸 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인간적인 의사를 옹호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인간적인 것을 요구하려면 그 사람에게만 계속 당신이 인간임을 잊지 말라는 것을 외칠 것이 아니라 구조를 인간적으로 변화시킬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이 부분은 복지 정책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한 개인의 동정심에만 기댄다면 과연 무엇이 바뀔 것인가?). 혹실드의 문제제기는 굉장히 재미있지만, 그 문제제기에 대한 대답은 좀 심하게 말해서 무성의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추신.

기업 내부에 들어가서 필드워크를 진행했기 때문에, 역시나 한계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혹실드 자신의 성향이 그러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기업의 협조를 받아 연구를 진행했기에 기업에 대해 심각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는 않다. 이는 연구자들이 심각하게 고려해봐야할 문제다. 연구조건을 지원 받는 조건으로 자신의 결과물을 얼마나 양보할 것인가, 하는.



내가 생각하는 '노동'의 범주와 혹실드가 설정하는 '노동'의 범주가 달라서, 이 책에서 기대했던 것에 비해 만족도가 그리 높진 못하다. 그리고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보이는 등, 번역도 썩 좋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한 번 감정노동이라는 개념을 머릿속에 넣어보고 싶다면, 한 번쯤 읽어볼만 하다. 단, 이해가 가지 않거나 지루한 부분이 나오면 과감히 책장을 넘기며 읽는 속도를 늦추지 말 것. 이 책을 완독하려면 그런 태도가 좀 필요하다. 난 각주, 미주를 다 챙겨가며 읽었는데 에너지 소모가 만만치 않은 반면, 남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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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2 - 항우와 유방 - 제국의 붕괴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2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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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가 돌아왔다, 한나라 이야기를 들고!! 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느꼈던 감정은 반가움이 아니었다.

'아니 이 양반이 장난하나'라는 생각부터 들었을 뿐.

그도 그럴 것이 십자군 이야기 3권이 안나온지 몇 년이 지났는데, 다른 책 작업만 하고 출간이 되는 건지 마는 건지 그러던 와중.

뜬금 없이 한나라 이야기를 들고 나왔으니 그럴 수 밖에.

뭔가 따지는 기분으로 홈페이지를 가보니 다행히 3권이 올해 안에 나온다고 한다(근데 1, 2권 리뉴얼은 왜.. ㅠ.ㅜ).

 

김태권 특유의 익살과 산만함(-_-)이 이 만화책엔 거의 빠져 있다. 그 대신 복식 같은 것들의 고증을 철저하게 한 티가 팍팍 난다.

다만 스토리와 무관한 각종 문양 같은 것들이 치밀한 고증을 거칠만큼 중요한 것들인지 조금 의문이 들긴 한다.

그 문양들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하면 할 말은 없다만.

 

내용 면에서도 아쉬운 점이 있는데, 김태권 자신만의 톡특한 역사 읽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평소에도 굉장한 독서력을 자랑하는 작가인만큼 학계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고는 있는데,

왠지 책의 내용이 '사기'나 '자치통감' 쉽게 읽기 정도에 그치는 것 같다. 3권부터는 뭔가 작가만의 역사읽기가 드러났으면 좋겠다.

작가의 서문에 비하면 내용 면에서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는 듯하다.

 

왜 한나라 이야기인가? 우선, 동아시아를 이해하는 열쇠가 한나라에 있다고 나는 말씀드리겠다. 서양 문명에서 로마 제국에 해당하는 것이 동아시아에서는 한나라다. 로마가 서양 역사에서 하나의 전범이듯, 한나라 역시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그러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역성혁명을 준비하며 <한서> '곽광전'을 돌려 읽었다. 김종직은 단종을 죽인 수양과 의제를 죽인 항우를 빗대 '조의제문'을 썼고,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는 이 글 때문에 일어났다. 오늘도 우리는 장기를 두고, 뉴스에서 '토사구팽'이란 말을 만난다. 동아시아 문화에 속한 우리의 마음속에서 항우와 한신, 관우는 2천 년 내내 무수히 다시 살고 다시 죽었다. 책을 불태웠던 진시황제는 죽었지만 분서의 공포는 후세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유방의 제국은 사라졌지만 평민 출신도 천자가 된다는 그 판타지는 살아남았다. 이것이 독자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객관적인 이유다.

 

물론 워낙 마니아층이 많은 시대라 여러가지 논쟁이 오가겠지만, 차라리 논쟁의 중심에 서는 것도 나쁘지 않을듯.

 

3권은 십자군 이야기처럼 되지 않기만을 빈다. -_-... 작가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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