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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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20세기 디스토피아 소설의 효시'

 

출판사 측에서 뽑아낸 카피다. 이 소설은 1927년에 쓰여졌고, 조지 오웰도 '자유와 행복'이라는 서평에서 이 책을 호평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SF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암울한 미래'에 대한 익숙함 때문에 이 책의 설정이 다소 진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에,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자축하던(실제와는 상관없이) 그 상황에 이 소설이 나왔다는 건 놀랍다.

실제로 이 소설은 러시아에서 발표되지 못했고, 그에겐 '반혁명', '반동분자'라는 낙인이 하사되었다.

 

소설 속 가상의 미래사회에선 개인시간과 성생활까지 통제하는 국가에서, 자유의 소멸은 그 자체로 행복이 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다.

그리고 주인공D-503은 수학자이자 그 사회에 대한 철저한 신봉자다.

 

  철저하게 솔직히 말하면, 우리에겐 아직도 행복의 과제에 대한 절대적으로 정확한 해결책이 없다. 하루에 두 번 16시에서 17시까지, 21시에서 22시까지 저 강력한 단일 조직체는 개별적인 세포로 분해된다. 그것을 우리는 시간 율법표에 의해 지정된 <개인시간>이라 부른다. …… 그러나 나는 굳게 확신한다. 나를 이상주의자 혹은 몽상가라고 불러도 좋다. 나는 우리가 조만간에 보편적 공식 안에서 이 개인시간을 위한 자리를 찾을 것임을, 언젠가는 86,000초 전부가 시간 율법표 속으로 수용될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국가(그것은 자신을 감히 국가라고 불렀다!)가 성생활에 대해 그 어떤 통제도 가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로 부조리한 일이 아닌가. 누구나 언제라도, 마음 내키는 대로……. 마치 짐승들처럼, 완전히 비과학적으로. 그리고 그들은 짐승처럼 맹목적으로 번식했다. 원예, 양계, 양어를 알았으되(우리에겐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정확한 자료가 있다), 그 같은 논리의 사닥다리인 맨 마지막 계단까지, 즉 육아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우스운 일 아닌가? 우리의 <모성 기준>, <부성 기준>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지정대상이 아닌 사람에게 느끼는 '사랑'은 위험한 것이며 불쾌한 것이다.

 

  I-330……. 이 I라는 여성은 나를 성가시게 하고 뭔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거의 위협적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나는 <네>라고 대답했다.

 

재미있는 건, (오웰이 지적한 것처럼) 이 '유토피아'에서도 감정이 존재할 수 밖에 없음이 이 소설에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불쾌함', '혐오감'도 결국 감정이니까. 그리고 이 부분이야말로, 올더스 헉슬리와 가장 구별이 되는 지점이다.

(헉슬리의 소설에는 정치의식이 거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오웰은 자먀찐의 소설이 더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어쨌거나 '자유와 행복', '진보의 정체'라는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다.

물론 결국 배드엔딩으로 끝나고 말기에, 자먀찐이 단순히 문제제기에서 끝내지 않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러니 망명을 택할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인류의 역사는 선회하며 위로 진행한다. 마치 아에로처럼. 그리고 그것이 그리는 원의 색깔은 황금빛, 핏빛 등 다양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동일하게 360도로 나눠진다. 0에서 전진하여 10도, 20도, 200도, 360도, 그리고 다시 0으로 돌아온다. 그렇다. 우리는 0으로 돌아왔다. 그렇다. 그러나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나의 이성에게는 그 0이 완전히 다른, 새로운 0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0에서 시작하여 오른쪽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왼쪽에서부터 0으로 되돌아왔다. 따라서 +0대신 우리에겐 -0이 있다. 이해하겠는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에요! 어리석은 짓이에요! 당신들이 계획하고 있는 게 혁명이란 걸 모른단 말입니까?"

  "그래요, 혁명이에요! 어째서 그것이 어리석죠?"

  "어리석어요. 왜냐하면 혁명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 당신이 말하는 우리가 아니고 나의 우리 - 혁명이 마지막 혁명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 이후에는 어떤 혁명도 있을 수 없어요.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죠……."

  조롱하는 듯한 날카로운 삼각형의 눈썹.

  "사랑스러운 분! 당신은 수학자죠. 아니, 그 이상이죠. 철학자며 수학자예요. 그러면 이제 제게 마지막 숫자를 불러 보세요."

  "그게 무슨 얘기죠? 나……나는 이해를 못하겠어요. 마지막이라니 그게 어떤 숫자죠?"

  "음. 마지막의, 가장 높은, 가장 큰 숫자 말이에요."

  "그렇지만 I, 그건 말이 안돼요. 숫자란 무한한 거예요. 도대체 어떤 마지막 수를 원하는 겁니까?"

  "당신은 그럼 도대체 어떤 마지막 혁명을 원하는 거죠? 마지막이란 없어요. 혁명이란 무한한 거예요. 마지막 혁명이란 어린아이들을 위한 얘기죠. 아이들은 무한성에 겁을 집어먹죠. 따라서 그 애들이 밤에 편히 자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러나 도대체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은혜로운 분>을 위해서 말해 줘요. 일단 모두가 다 행복해졌는데 그럴 필요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만일…… 아니 좋아요. 그렇다고 쳐요. 그러고 나선 어떻게 되죠?"

  "우습군요! 완전히 어린애 같은 질문이에요. 아이들에게 무언가 끝까지 다 얘길 해주지요. 그러면 아이들은 꼭 이렇게 묻지요. 그리고 어떻게 됐어? 그래서?"

  "아이들은 유일하게 용감한 철학자들이에요. 그리고 용감한 철학자는 반드시 어린이들이고요.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언제나 <그리고 어떻게 됐어?>가 필요해요."

  "그러고 나서는 끝이에요! 마침표. 전 우주에 균등하게, 도처에 분포되어 있는 것은……"

  "아하! 균등하게, 도처에! 바로 그것이 엔트로피, 심리적 엔트로피예요. 당신은 철학자니까 분명히 아시겠죠. 다양성만이, 체온의 다양성, 열량의 대비만이 생명을 구성한다는 걸요. 만일 우주 도처에 동일하게 차갑거나 동일하게 뜨거운 것만이 있다면 그것은 없어져야만 해요. 불과 폭발과 지옥을 위해서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제거할 수 있어요."

  "그러나 I, 생각해봐요. 2백년 전쟁 중에 우리의 선조가 했던 게 바로 그거예요……."

  "오, 그리고 그들은 옳았어요. 천번 만번 옳았지요. 그들의 실수는 단 한 가지, 즉 얼마 후에 자신들이 바로 마지막 숫자라고 확신했던 거예요. 자연계에는 있을 수도 없는 마지막 숫자라고요. 그들의 실수는 갈릴레오의 실수였지요. 갈릴레오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믿었던 것은 옳아요. 그러나 그는 태양계 전체가 다른 어떤 중심의 주위를 돈다는 것은 몰랐죠. 지구의 진정하고 절대적인 궤도는 단순한 원이 결코 아니라는 걸 몰랐죠."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그 단어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나? 당신은 그것의 껍질을 벗기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살펴본 적이 있나? 그럼 내가 이제부터 보여주지. 기억하시오. 푸른 언덕, 십자가, 군중. 군중의 몇몇은 위에서 피로 범벅이 된 채 한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소. 몇몇은 아래에서 눈물로 범벅이 되어 그걸 구경하고 있소. 당신은 위에 있는 인간들의 역할이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나?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그처럼 장엄한 비극이 상연될 수 있었겠는가? 몽매한 군중은 그들에게 야유를 퍼부었지. 그런 사실 바로 그 때문에 비극의 작가, 즉 신은 그들에게 더욱 후한 보상을 해야하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신, 인간에 대한 연민이 가장 깊은 신,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지옥 불에서 서서히 태우는 신, 그 신이야말로 형리 아닌가? 그리고 그리스도교인이 불태운 인간의 수가 불태워진 그리스도교인의 수보다 더 많지 않은가? 그럼에도 - 이 지점이 중요한 것인데 - 그럼에도 그 신은 수세기 동안 사랑의 신으로 찬미받았지. 말도 안된다고? 아니, 그 반대요. 그것은 피로 새겨진, 불멸의 인간 지혜에 대한 특허장이오. 그때에도 야만적인, 털북숭이 인간들은 알고 있었소. 인류에 대한 진정하고 대수학적인 사랑은 반드시 비인간적이라는 것, 진리에 대한 불가피한 표현은 잔인성이라는 것 등을. 마치 불의 불가피한 표현은 그것이 물체를 태운다는 사실인 것처럼. 당신은 끔찍하지 않은 불을 제시할 수 있나? 자, 증명해보시오. 반박해 보시오!"

 

가상의 세계에 대한 자세한 설정이란 면에서는 분명 헛점이 많이 보이지만, 그 시대에 이런 문제제기가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꽤나 현대적인 서술, 의식의 흐름과 같은 서술 덕에 술술 읽을 수는 없었지만 아직 읽지 못한 '1984'에 대한 선행 독서로 충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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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말년 씨리즈 - 슈퍼스타 조선쌍놈과 우주대도 방숙이 이말년 씨리즈 1
이말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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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 병맛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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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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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책 또한 목록에서는 줄기차게 보아왔으나 정작 읽히지는 않은 책들 중 하나로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고등학생, 대학신입생 필독서로 빠지지 않는 책이기도 하지만,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그 또래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건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다. 막무가내로 '필독서' 목록에 이 책 저 책 다 밀어넣은 사람들의 탓.

물론, 이 책은 '필독서'라 할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는 책이다. 그러나 모든 학생들이 읽을 수 있을만큼 쉽지 않다.

대학교 1학년 때, 과제 때문에 이 책을 속독으로 읽고 말았는데, 지금 다시 읽으니 그 때의 속독이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깨닫는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만으로 이 책을 이야기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그 말도 중요하지만 카는 그 말을 하기 위해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앞서 내가 언급한 그 유명한 구절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면, 당신은 매우 날카로운 사람이다.

'그의 사실'. 그렇다. 국내에 번역된 수많은 판본들은 'his facts'라는 부분을 그냥 사실로 번역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이야말로 직역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직역이야말로 의역이 되는 그런 부분이랄까.

카는 '과거의 사실이 말하게끔'해야한다거나, 과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만을 규명하면 된다는 태도를 비판했다.

 

우리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할 때, 우리의 대답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 자신의 시대적 위치를 반영하게 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더욱 폭넓은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가 된다.

 

어떤 역사가를 정확하다는 이유로 칭찬하는 것은 어떤 건축가를 잘 말린 목재나 적절하게 혼합된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집을 짓는다는 이유로 칭찬하는 것과 같다.

 

사실은 역사가가 허락할 때에만 이야기 한다.

 

역사가의 진정한 관심은 특수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에 있는 일반적인 것에 있다.

 

따라서 카는 역사만을 혹은 그 역사책만을 봐서는 안되며(실은 그게 가능하지도 않지만), 역사가를 보아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특수한 것에 있는 일반적인 것'을 찾아내고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역사가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역사가를 사회적 맥락을 통해 바라보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역사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책을 읽을 경우 항상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음치이거나 아니면 여러분의 역사가가 말을 못 하는 멍청이일 것이다.

 

결국 '역사가는 역사책을 쓰기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역사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과 역사가의 관계에 대해 카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다. 자신의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한 것이다.

 

사회로부터 유리되고 역사로부터 유리된 추상적인 기준이나 가치는 추상적인 개인만큼이나 일종의 환상이다. 진정한 역사가란 모든 가치의 성격이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이지,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야말로 역사를 초월하는 객관성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실 저 첫문장은 그 유명한 구절의 바로 앞구절인데, 오히려 이 부분이 더 카의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구절을 저 유명한 구절과 함께 읽어보라. 'his'의 누락이 얼마나 큰 왜곡 혹은 텅빈 공간을 남겨놓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카 또한 그 시대의 역사가. 그 또한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에게서 그의 시대와 그 한계를 읽는다.

준비로만 끝난 2판의 서문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이성과 진보에 대한 굳건한 신념을 가진 '근대인'이었다.

 

  나의 결론은 파괴와 쇠퇴 이외에는 아무것도 내다보지 않으면서 진보에 대한 모든 신념과 인류에 대한 더 나은 진보에 대한 모든 전망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배제해버리는 오늘날의 회의주의와 절망의 조류는 엘리트주의의 한 형태 - 위기에 의해서 자신들의 안전과 자신들의 특권을 가장 현저하게 침식당해온 엘리트 사회집단의 산물, 그리고 한동안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확실한 지배권을 박탈당해버린 엘리트 국가들의 산물 - 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역사의 이해를 '교훈'과도 직접 연결지었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또한 현재도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많은 역사가들도 '역사의 교훈'을 이야기하지만, 역사의 의미를 '교훈'에서만 찾지는 않는다.

표현상의 문제라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다른 역사가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역사의 이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카는 스스로 '완전한 객관성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을 역사가의 능력이라고 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객관성을 완전히 포기하지도 못했다. '미래의 이해에 다가설 때에만 객관성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전이 늘 그러하듯, 오늘날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큰 서술도 찾을 수 있었다.

 

특권이 없는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보수(保守)의 대가는 빼앗긴 자들에게 부과되는 혁신의 대가만큼이나 무거운 것이다. 누군가의 행복은 다른 누군가의 재난을 정당화한다는 명제는 모든 통치형태에 잠재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급진적인 것만큼이나 보수적인 교리이다.

 

중국혁명이 어떤 영광이나 이익을 가져다주었든지 간에, 그것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서양인이 소유한 개항장의 공장에서 또는 남아프리카의 광산에서 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에서 일했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들이 이익을 거두어들이는 경우란 거의 없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는 카도 "그래도 역사는 중요한 일을 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일종의 편견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크리켓을 예로 들며 크리켓의 역사에 '한 점도 못 올렸거나 실격당한 사람들의 이름'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역사 속,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에서 '점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시작부터 이야기했지만,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게다가 뒷부분으로 갈수록 책의 난이도는 더 높아진다.

어렵고도 진지한 질문들을 계속 던지는 카를 마주하다 보면, 오히려 그 수많은 질문들의 바닥엔 확고한 '신념'이 있었음을 느끼게 된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긴한데, 카가 '역사가도 시대의 산물'이라고 했던만큼 지금 이 시대의 역사가들은 또 입장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가지 이유로(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제 '그'가 쓴 역사를 보고 '그'를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가 된 것이다.

적절치 않은 비유기는 하지만, 모 역사가가 좌파라고 해서 그의 저작이 좌파적 시각을 가진다는 보장도 없고

반대로 그의 저작이 우파적 성향을 보인다고 해서 그 역사가가 우파라고 진단할 근거가 희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자본주의'를 들먹이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비극'을 '자본주의'에게만 떠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역사'와 '역사가'의 관계가 이렇게 뒤틀려버린 것은, 자본주의에 '굴복'했다기 보다는 '안주', 더 심하게 말하면 '투항'했기 때문이니까.

 

이제와서 카의 말이 다 진리라고 믿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쓰는 글과 나 자신이 비슷한 결을 드러내는 길을 가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려운 책이지만,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용기를 내서 도전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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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cord Collector's Edition Vol.2 : 30 Concord Jazz Originals (The Rarities) [30CD] 재즈 명반 박스세트 8
게리 버튼 (Gary Burton) 외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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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눈드면 박스셋이 새로 나오네요.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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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광고하다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의 창의성과 소통의 기술
박웅현, 강창래 지음 / 알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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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가 조금은 부담스러울 수 있는 책이지만(ㅋㅋ), 굳이 광고계이 있지 않은 사람이 읽어도 재미있을 책이다.

음.. 뭐랄까, 제목에서 느낀 이상한 반감이 책을 읽고 나니 완전히 사라진 느낌이랄까 그렇다.

(이 '반감'은 아마도 인문학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사람의 이상한 열패감이란 걸 나도 안다.)

 

수많은 광고를 만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강조하는 것은 인문학적 소양이며, 그것이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

 

  "아리스토톨레스는 틀렸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통은 '발신자→메시지→수진사'라는 경로를 거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히려 '수신자→메시지→발신자'라는 경로가 옳습니다.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발신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되질 않습니다. 수신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소통이 쉬워집니다."

  그렇다. 소통은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오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귀가 열리는 법이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수신자에게 다녀와야 한다.

 

뭐, 학자들은 수신자를 감안해서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또 그렇게만 무시하고 넘어갈 부분만은 아니다.

그게 아니라면 인문학 전문서적은 책이 안나간다고 투덜대지나 말던가.

 

여튼 인용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 책에서 놀라운 점은 '창의성과 소통의 기술'을 이야기하는 책이 그 모범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인터뷰' 시리즈로 나와있는데, 형식은 전혀 인터뷰 책이 아니다.

그런데도 두 저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된 소통을 통해 녹아들어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어떤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도 아닌, 그런.

인터뷰 대상자인 박웅현도 대단하지만, 그를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 성실히 준비한 것 같은 강창래도 대단하다.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는 시쳇말이 실감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기 반성의 의미에서도.

 

광고의 역할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약간은 '아전인수'인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 '아전인수'를 포장하는 것도 능력.

어쨌거나 재미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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