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상사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 한국과 독일 일상사의 새로운 만남
이상록 외 지음 / 책과함께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음악에서 장르를 굳이 구분하는 것처럼 역사학 내에도 수많은 분류가 존재한다. 지역이나 국가, 또는 시대를 구분의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겠고, 그 역사가 다루는 분야가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미시, 거시 경제학처럼 보는 관점의 차이를 두고 분류를 하는 경우도 있다. 원래 이런 분류라는 것이 그렇기는 하지만, '일상사'야 말로 이런 구분의 애매함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일상사'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무엇인가가 쉽게 잡힐 것만 같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어떻게', '무엇을', '왜'라는 의문들이 꼬리를 이으며, 잡힐 것만 같았던 일상사는 휙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일상사'를 두고 많은 오해과 부작용이 생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굳이 부작용이라고 비난조의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 좀 지나칠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많은 일반 독자들에게 '일상사'하면 가볍고 신변잡기적, 흥미위주의 역사라는 인상을 주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일상사를 하는 연구자들은 "일상을 연구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관점으로 보"고 있다. (20쪽)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일상사 연구는 시대가 규정하는 구조의 틀 속에서 사람들이 체제의 요구에 어떻게 적응하고, 어떻게 저항하며, 무엇을 수용하고 무엇을 거부하는가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동시에 일상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행위들은 체제와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며 구성한다. 이런 역관계를 읽어냄으로써 사회구조와 지배의 성격을 새롭게 해명하려는 기획이기도 하다. 그것은 대문자 역사에 대한 보충사로서의 일상사가 아니라 소문자 역사들로써 대문자 역사를 해체하고 역사를 복수화하려는 시도로서의 일상사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일상사 연구자는 지배의 호명에 의해 단일한 정체성으로 재구성된 주체를 해체함으로써 다중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행위를 역사화하고, 그들의 행위를 역사화함으로써 대문자 역사담론에 의해 짓눌리고 가려진 소수자의 존재를 가시화 할 수 있게 한다.(29쪽)
위에 인용한 글에서 눈에 띄는 것이 '역사의 복수화'이다. 한 사회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만큼, 그만큼의 다양한 역사서술이 가능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 일상사가들의 기본태도인 것이다. 단순히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류의 호사가적 취미 그 이상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담론과 담론사이, 담론과 행위 사이의 관계를 일상을 매개로 분석해야 한다"(29쪽)는 난점이 도사리고 있지만, 어쨌든 일상사가 기존의 일원론적, 혹은 이분법적 논리에 저항하기 위한 하나의 '관점'임은 분명하다 하겠다.
문제는 이런 관점과 문제의식에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에 걸맞는 연구성과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일상사는 분명 불리한 위치에 서 있다. 상대적으로 '일상'을 규명할 자료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그 숫자도 훨씬 빈약하다. 또 일상사가 어떤 경계를 명확하게 하여 구분짓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만큼, 학계에서나 정치적 맥락에서나 스스로의 위치를 규정하고 자리를 잡아나가기 또한 쉽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다른 이들이 봐주는 것도 아니고 이 또한 이 분야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헤쳐나가야할 과제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론적 논쟁이나 정리 등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있는 이 책의 구성이 가장 큰 강점이다. 특히 한국사 분야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하려는 기획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논의의 수준이 지나치게 이론적이고 거시적이기 때문이다. 미시사가 어떻고 문화사가 어떻고 일상사가 어떻고, 이런 이론적 논쟁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관점과 방법론으로 어떤 결과물을 내놓느냐다. 미시사나 문화사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한국사 연구자라고 해도 '치즈와 구더기'나 '고양이 대학살' 같은 저작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는 건, 그 저작과 저자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 때문만은 아니다. 그 연구들이 모두 이론적 비평을 과는 다른 차원의 역사적 '필드워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주제와 관련된 자료를 보고 분석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해낸 저자에게, 이론만 들이대며 반론을 제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인 소주제 연구들이 필요한 것이며, 그 수준에서 논의가 진행이 되어야 그 어떤 발전이나 새로운 길의 모색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소주제들은 다양하다. 물론 이론적인 탐색도 있지만 그것은 책의 중심이 아니다. 그보다는 시장, 첩, 여공, 가족, 사형(私刑) 등의 주제를 일상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그 결과는 역시 명확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복잡하고 흐릿한 인간들의 삶이다.
하지만 '일상'이라는 전망에서 볼 때 개인의 삶에서 체제에 대한 거리와 수동적인 합의와 참여의 요소는 깔끔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309쪽)
예를들어 '나'를 생각해보자. 나는 어떤 계급인가? 젠더로 보면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나는 어느 곳의 주민인가? 이 모든 것들의 복합체가 사회적 '나'를 설명하는 요소인데 사실 명확하게 나눌 잣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인에 의해 제멋대로 규정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사람들을 우리 마음대로 그렇게 규정할 권리는 어디에 있는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규정할 명확한 이유가 존재하기나 하는가? 일제 강점기 울산의 주민을 생각해보자. 그 지역 주민의 삶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울산의 거주자들이 나름의 뜻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구분이 흐릿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 구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또한 당시 '중견인물'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지역유지들이 모두 일본인이었던 것도 아니다. 어쩌면 지도층의 일본인들은 가난한 일본인 노동자보다 조선인 지역유지와 더 친밀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일이 복잡하다면 좀 더 가까이 들이대고 살펴볼 필요가 생긴다.
주민들의 이해 관계는 절실한 반면 체제를 위협하는 차원으로까지 진화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주민들의 행위양식은 더욱 강렬하고 공격적일 수 있었다. 그만큼 행정당국의 권위는 잘 작동하지 않았다. (89쪽)
공공사업으로 대표되는 지역계발의 구체적인 실현과정에서 지역사회의 내적 차이는 지역사회의 역사, 내부 권력구조의 규정을 받으면서 '공공성' 또는 '지역공동체의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억제되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지역 엘리트의 주도하에 주민들의 집단 정체성의 일부를 구성하며 지역의 기억과 역사를 형성하였다. (107쪽)
그러다보면 어떤 사건이나 유명인물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들여다볼 수 밖에 없다. 큰 사건이나 유명 인물이 일상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일상의 변화가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아니, 일상의 변화 그 자체가 의미있는 흐름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나꼼수'를 다운받아 듣고 낄낄대고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떠들고 블로그와 트위터에 잡설을 늘어놓는 일련의 '일상'들이 지금 어떻게 사회에서 유통되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라.
그러나 오늘 흐르는 냇물이 어제 지나간 냇물과 다른 것처럼 일상에서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시간은 결코 같은 시간이 아니다. 또한 어제와 오늘이 다른 시간이듯 오늘 역시 수많은 다른 시간들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 시간들의 갈림길은 인간의 사고, 문화, 정치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에 밀려나 일상으로 치부되는 '별 볼일 없는 행위'들은 어느 순간 '별 볼일 있는' 상황으로 바뀌곤 한다. (297쪽)
물론 일상사에 대한 기존의 비판들이 모두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수준미달의 연구들도 적지 않으며, 일상사 연구가 되려 엘리트주의로 빠질 혹은 이용당할 위험성도 존재한다. "'그럭저럭 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억압적 질서를 견뎌낼 수 있는 방법"(414쪽)이고 일개 개인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는 존재로 묘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모든 학문이 가지고 있는 위험이기도 하며, 타인이 그 학문을 의도적으로 오용할 위험성이 있다고 해서 그 학문 자체를 비판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어디 정치사, 경제사라고 해서 오용될 위험이 없던가?
이런 추상적인 비판말고 생각해봐야할 지점은 다른 곳에 있다. 우선 사료의 이용. 특히 일제강점기 연구의 경우, 신문자료를 많이 인용하게 된다. 그런데 신문자료를 인용하면서 따옴표를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은 문제다. 오늘날의 신문 기사를 기사 그대로 믿는 것이 얼마나 수준이 낮은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그 자료를 이용하고 분석하고 맥락을 읽어내서 자신의 판단을 기술하는 것이 낫지, 자신은 숨고 기사를 본문에 여기저기 배치를 하는 것은 직무유기에 가깝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몇몇 연구들도 이런 경향을 보인다. 이게 이젠 일종의 트렌드가 되어버린 느낌인데, 개인적으로 이런 서술방식은 썩 좋은 방법이 아닌듯 하다. 또 '변화'를 이야기할 때 특정 순간-"모멘텀"-을 어떻게 잡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신문기사에 많이 등장한다고 변화가 보인다는 판단이 얼마나 타당할 것인지, 만약 그것으로 불충분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보완을 하고 크로스체킹을 할 것인지를 생각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면, 또 다시 특정 사건에 주목해야만 하는 한계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좀 더 큰 수준에서 이야기를 하자면, 일상사의 위치 문제다.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 혹은 이분법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역할 그 이상을 바라볼 수는 없는 걸까,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좋은 연구들이 축적되어야 하겠지만.
그밖에 흥미로웠던 것은 구술사라는 연구 '방법'. 여기 수록된 연구들 중에 구술사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연구도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80년대 운동권들의 가족사 관련 구술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특히 해방 후 한국 사회에서 공적인 담론과 가족사의 역사적 체험이 괴리를 이루면서 가족이라는 '사적인' 공간이 어떻게 정치화되는지 보여준다. 학교를 비롯한 공적인 공간에서 배제된 역사적 사건과 체험에 대한 성찰과 소통이 가족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397쪽)
이런 결과를 내렸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도 구술사의 '기술'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좋았다. 단순히 인터뷰를 하고 그걸 문자로 풀어내는 수준이 아니라, 풀어내는 과정에서 의미부여를 하고 다시 그것을 '텍스트'로 읽어내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질문의 맥락과 동떨어진 대답을 한다거나 정확히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 구술자가 그렇게 대답하는 '이유'를 맥락에서 잡아내는 장면들이 있는데 구술사를 거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굉장히 신선한 부분이었다.
굳이 일상사 분야를 전공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이론과 방법론에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한 말로 들릴 수 있지만, 이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