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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윤리 - 실천윤리학의 거장 피터 싱어의
피터 싱어 지음, 김희정 옮김 / 아카넷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피터 싱어의 책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면서도 엄청나게 불편하다. 윤리학, 특히 실천 윤리학이라는 분야가 워낙 논쟁 거리가 많기는 하지만, 피터 싱어는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능력이 있으며 또 때로는 사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능력도 가지고 있는 학자다. 내가 그의 글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 윤리학 수업을 들으면서 였다.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라는 매우 직설적인 질문을 받을 때면, 사실 책을 그만 덮고 싶어지는 경우도 생기기 마련이다. 이 책에는 9.11 이후 세계적 차원의 윤리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이 담겨있다. 그래서 기존의 책과는 조금 성격을 달리하는 것 같지만, 역시나 책의 말미에선 독자를 밀어붙인다. "네가 여러가지 제한 요소 '때문에' 윤리적 행동을 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그 제한 요소가 얼마나 정당하고도 실질적인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윤리적 행동을 '강요'(?) 받으면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시선을 돌리거나 책을 덮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야 만다. 하지만 결국 저자의 책을 다 읽을 수 밖에 없는 것은, 그의 주장이 단순히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당위를 주장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주장을 하기 전에 수많은 관점에서 문제를 살펴보고 사실관계를 확인하며 반대의 입장도 꼼꼼하게 타진해 나간다. 그야말로 '실천' 윤리학의 거장이라고 할만한 태도다. 이 책에서도 세계화에 관련된 환경, 경제, 법률 등의 문제를 사변적인 서술로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각종 수치와 사실 관계를 들이대면서 논쟁이 되는 지점을 하나 하나 짚어간다.
문제제기의 시작은 존 롤스로부터 시작된다. 싱어가 보기에 롤스의 '정의'는 지구화, 혹은 세계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현재에 적용하기에 너무나 문제점이 많다는 것이다.
윤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변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적인 미국이 성립되는 과정에서의 정의에 대한 20세기 후반의 사고를 대표하는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을 살펴보아야 한다. 1971년 출판된 직후에 읽었을 때, 나는 거의 600쪽에 이르는 이 책이 서로 다른 사회들 사이에 존재하는 극단의 빈부 간의 부정의(injustice)를 전혀 논의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놀랐다. 롤스는 정의의 본질을 밝히는 방법으로, 만약 어떤 지위를 차지할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선택을 할 경우 사람들은 정의의 원칙으로 어떤 것으르 택할 것인지에 대해 묻는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철학도와 정치학도에게 기본 자양분이 되는 방법론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부유한지 가난한지, 다수 민족의 일원인지 소수 민족의 일원인지, 신앙인인지 무신론자인지, 고도의 기술을 가졌는지 아닌지 등등에 대해서 알지 못한 채 정의의 원칙을 선택해야 한다고 상정하는 것이다. 만일 주어진 하나의 사회가 아니라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이 방법을 일률적으로 적용한다면, 선택을 하는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상정해야 할 사실(fact) 가운데 한 가지가 그들이 미국과 같이 잘사는 나라의 국민인가 아이티(Haiti)같이 가난한 나라의 국민인가 하는 점임은 금방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원초적 선택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면서 롤스는 선택하는 사람들 모두가 동일한 사회에 속해 있으며 그 사회 내에서 정의를 이룩하는 원칙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으로 단순하게 가정한다. (32쪽)
존 롤스가 중세나 19세기나 18세기의 학자가 아님을 감안한다면, 싱어의 지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환경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때, 한 사회만을 대상으로 '정의'를 논할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싱어는 이제 '하나의 지구'에는 하나의 환경, 하나의 경제, 하나의 법률, 하나의 공동체에 맞는 윤리가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아직까지도 많은 불신과 무능력함을 지적받기는 하지만, 그가 국제기구의 기능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물론 '하나'로 일원화 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최선의 대안은 국제적 수준으로 기능하는 하나의 기구, 기관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애초에 이제까지의 국가들이 전지구적인 차원의 윤리관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그 자체로 잘못이었을 뿐이라는,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그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 주장도 잊지 않는다. 게다가 이젠 당대 최고의 제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심장부까지도 안심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지구적 차원의 윤리는 당위성만으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도 협의되어야 한다.
잘사는 나라가 전지구적인 차원의 윤리관을 가지지 않는 것은 오랫동안 그저 도덕적으로 아주 잘못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결국, 그로 인해 그들의 안전까지도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37~38쪽)
특히 사회 내에서 더 완전한 평등을 추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들 사이에서 더 완전한 평등을 추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단지 우리가 두 가지를 다 할 수 없을 경우에만 발생한다. 때로는 우리는 두 가지 일을 다 할 수 있다. (224쪽)
두 가지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피터 싱어의 주장이 너무 극단적으로 들리는가? 그러나 정작 들여다보면 이게 그렇게 극단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미국에서 원조에 대한 선입견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조사를 살펴보자. 미국인들인 연방 정부의 예산 중 너무 많은 액수가 원조에 투입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얼마 정도가 적정 수준이겠느냐는 질문을 했다. 전체 응답의 평균치는 15퍼센트. 다른 조사에서는 미국의 원조가 전체 예산의 2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적정 수준은 10퍼센트 정도라고 답했다. 그러나 비정부 차원의 원조를 더하더라도, 미국의 총원조액은 GNP의 0.14퍼센트에 불과하다(게다가 이 원조조차 자국의 이익에 관련된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이게 비단 미국만 그러한 것일까? 우리는 스스로가 꽤나 인간적이고 윤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그래서 수없이 벌어지는 비윤리적인 사건이나 행위에 쉽게 분노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건 말로만 떠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실제와는 다르게 알려질 때 많은 권익을 얻어갈 세력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일지도. 국제 구호 기구에 "국내에도 밥을 못먹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며 저주를 퍼붓는 이들 중에 실제로 국내 빈곤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은, 우리의 '비윤리성'에 대해 아마도 너무 쉽게 제시할 수 있는 경험적 증거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어떤 명확한 '정답'을 내놓고 있진 못하다. 하지만 적어도 특정한 방향을 과감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꼭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생각해볼만한, 그리고 생각해야만 하는 많은 문제들을 접할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세계화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진부하게 들리는 때가 되었지만, 실은 우린 아직 세계화를 시작도 안했을지 모른다. 이 책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