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XX - XX
더 엑스엑스 (The XX) 노래 / 강앤뮤직 (Kang & Music)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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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디지털 같지 않은 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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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선 버터플라이 - 4집 Dreamtalk [재발매]
3호선 버터플라이 (3rd Line Butterfly) / 미러볼뮤직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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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좋아진다.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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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나무 책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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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가격대비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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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 시대를 읽다 - 문화투쟁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백승종 지음 / 산처럼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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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시대와의 불화를 알리는 불만과 저항의 목소리입니다. (4쪽)

 

그러나 애초에 금서가 되길 원하며 책을 내는 작가나 출판사는 없다. 물론, 이 책이 분명 탄압을 받을 것이라는 짐작이야 할테지만. 이 책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권력'과 충돌할 것이란 것을 예상한 (명민한) 작가들은 자신의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좀 더 대중들에게 잘 먹히게, 권력이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도록, 반대로 권력이 과민반응하도록(!), 때로는 시비를 걸어올 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 '전략'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만날 금서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저술이 권력의 탄압에 직면할 줄로 예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신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절실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권력자들의 탄압에서 벗어날 궁리를 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로 금서의 저자들은 저마다 독특한 '서사전략'을 구사했습니다. (5쪽)

 

이 서사전략을 가지고 금서의 저자들은 당대의 권력과 문화투쟁을 했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관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문화투쟁과 서사전략이 어쨌거나 타자가 없이는 벌어질 수 없는 사투였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금서를 쓰는 것은 작가이지만 그것을 금서로 만드는 것은 권력인 셈이고, 더 나아가 작가가 금서를 쓰는 그 순간에도 문화권력은 작가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사전략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책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체, 단어, 형식, 장르 등.

 

저자가 우화의 형식을 빌린 것부터가 그 나름의 서사전략이었지요. 첫째는 인간만 못한 동물의 입을 빌려서 인간 세상을 비판함으로써 비판의 강도를 더한 점입니다. 그게 하나의 전략이죠. 둘째로, 만약 당국이 책의 내용을 문제 삼는다면, '이건 허구다. 그냥 내가 생각해본 거다'라고 둘러대기가 쉬운 점도 있었을 겁니다. 저자는 검열을 염두에 두고 우화의 형식을 택한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100쪽)

 

좀 더 범위를 넓히자면, 이런 분석이나 관점은 금서를 넘어서 저자와 독자 간의 투쟁으로 확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설득하려는 저자와 그 설득에 저항하는 독자. 정확한 의도를 절대 알 수 없지만 그 의도를 파악하려는 독자와 '정확한 의도'를 다시 설명하려 드는 저자.

 

이 책에는 총 8권의 금서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백석의 시집을 다룬 부분이었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한국전쟁 후 금서로 지정당했던 그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기 보다는 식민지기 문화투쟁을 벌이던 식민지 지식인 백석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 때문에 사실 책에서 이 부분을 뺄까 고민도 했다 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런 관점이 이 책의 다양성과 독창성을 살리는 데에 기여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1930년대, 향토성에 집착하던 '모더니즘'. 이 형용모순을 '식민지 지식인'이라는 관점으로 깊게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백석의 그런 특이한 창작에 대해 당대의 지식인들이 보여주었던 다양한 반응도 매우 흥미롭다. "백석의 이러한 지방주의는 결국 조선 문화의 식민지성을 드러냄으로써 예술적 보편성을 포기했다"(167쪽)는 비판은 그 비판 자체로 발언자의 사상적 기반을 얼마나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는가. 이런 사상적인 반대, 그리고 말없이 지켜보는 체제의 감시, 그 속에서 시인 백석은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었던 거다.

 

  요컨대 백석의 시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정리됩니다. 한쪽에서는 그것이 민족적 정서를 되살리는 아름다운 시라고 하는 칭찬이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조금 괴기하다, 또는 너무 지방주의로 흘러서 한국적 정체성을 분해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168쪽)

 

어쨌거나 백석은 식민지 근대를 '사이비 근대'로 인식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추구한 정신적 가치는 근대적이었"다(171쪽). 식민지 근대가 사이비라면 그가 인식했던 진정한 근대는 어떤 것이었을까? 서구적인 풍모나 그가 읽었던 서양의 명작들을 생각하면 다시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는 것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식민지 근대의 이상한 모순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또 식민지 지식인의 정신분열이 여기에서 시작됐던 것은 아니었을까?

 

꼭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자가 각 금서나 그 금서의 저자를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부분도 흥미롭다. 또 김지하의 '오적' 속에서 동학이나 증산교, 정감록과 같은 전통 사상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밝히는 지점도 민중문화의 지속성이라는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칭찬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비하만 한다면 그것은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왜 일본처럼 못했을까?'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 따지고 보면 서구의 몇몇 나라 말고 자력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는 일본밖에 없어요. 우리가 일본이 아니었다고 해서, 뭔가 대단히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94쪽)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영웅주의적 민족주의사관은 별것 아니라고 간단히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신채호가 이것을 주장했을 때의 그 처절한 심정, 처참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그 주장이 비과학적이라든가 비합리적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간단히 비판할 수가 없어요. 그렇기는커녕 우리는 그런 신채호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우리가 신채호와 함께 하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147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매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의 사상이 생명과 평화를 중심으로 삼는 만큼 앞으로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생각입니다. 김지하를 무조건 두둔하고 치켜세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 자신도 잘 모르는 사이에 1970년의 '오적'에서 시작된 문화투쟁이 동학과 증산교와 '정감록'의 전통에 맞닿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생명평화사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김지하다움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근자에는 그의 사고가 너무 우경화된 것이 아닌가 염려되기도 합니다. 그가 매사에 민족을 너무 들먹이는 것이 불편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적'을 통해 붓으로 칼을 이긴 이 시인의 생명은 아직 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적어도 그러하기를 저는 소망합니다. (207~208쪽)

 

리영희의 글에는 '사실의 이론'은 있을지 몰라도 '주장의 이론'은 없었습니다. (213쪽)

 

  잠시 생각해봅시다.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은 같은 민족이 아니어서 매일 이 지경입니까? 노동자와 사용주는 같은 민족이 아니라서 쌍용자동차 문제로 스물두 명이 자살했습니까? 역사가 증명하듯, 민족이란 개념으로는 이런 문제들조차 해결이 안 됩니다. 같은 민족이 아니어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니잖습니까? '우리는 같은 민족이니까 이 문제를 넘어가자. 내가 양보하겠다. 너나 나나 같은 민족이니까 다 양보하마.' 그런 일이 도대체 언제 있었습니까? 지난 100년 동안 다들 민족을 내세웠지만 그렇게 해서 된 일이 무엇입니까? 지난 100년 동안 다들 민족을 내세웠지만 그렇게 해서 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건 해답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273쪽)

 

물론 나는 김지하에 대한 저자의 유보적인 평가에는 100%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생명운동, 환경운동이 정말 필요하고, 어쩌면 이것이 모든 운동에서 최고 가치를 두어야할 부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와 동시에 많은 지식인들이 가장 도피하기 좋은 장소가 바로 생명운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가 김지하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최근 김지하가 목소리를 내는 곳이 원자로나 구럼비였던가?). 저자의 말처럼 이 부분은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야할 문제겠지만, 이 문제에 대해선 김지하와 시대를 함께 살지 않은, 아니 함께 살지 못한 다른 세대의 가벼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세대가 그들만의 사간을 살아왔고 또 살고 있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실이자 운명이다.

 

강연을 책으로 다듬어 만든 것이어서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뭔가 배운다는 느낌을 줘서 '유익'하다. 여러가지 생각해볼 것이 많은 주제이지만 어쨌거나 다음의 주장에 적극 공감한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수없이 보고 경험하지 않았던가.

 

본대 책의 생명은 권력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책의 깊이와 수준입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문제의 금서를 대한 독자들의 태도와 반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3쪽)

 

하긴 이런 책의 생명력을 안다고 하면 그게 어디 권력이겠는가. 회의주의, 허무주의적인 시선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는 끝없이 '투쟁'을 해야만 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얘기. 이 투쟁을 권력이 아닌 자로서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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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nuts 2013 Calendar (Paperback, Engagement)
Peanuts Worldwide LLC / Andrews McMeel Publishing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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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피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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