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잔혹사 - 폭력 공화국에서 정의를 묻다
김동춘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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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보다도 훨씬 폭력이 일상적이었던 나의 학창시절(물론 그 이전의 시대는 더 했을테지만). 유독 강하게 기억이 남아있는 체벌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미술시간이었고 실습이 아닌 이론 수업을 하던 중이었다. 나는 옆에 앉은 친구와 수업시간에 잡담을 하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그렇게 떠들고 있는 걸 몇 번을 참았을 미술 선생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거기 떠드는 놈들, 앞으로 나와!"라고 외쳤다. 우리는 민망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고개를 약간 숙인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교단 쪽으로 나갔다. 수업시간에 그렇게 떠들어 놓고 여전히 웃음을 짓고 있었던 것이 '불온'해 보였던 것일까? 나는 태어나서 받아보지 못한 체벌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전을 찾아보면 '불온'이라는 단어는 "통치계급 또는 기성세력의 입장에서 보아 사상 · 태도 등에 맞서고 대립하는 기질이 있음"으로 되어 있다. 즉 불온의 여부는 확실히 권력을 가진 사람의 자의적 판단에 좌우된다. 또 권력자는 자신의 명을 거역할지 모르는 모든 하급자에게 '불온'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불온은 전형적인 전근대적 정치 용어이지 법률 용어가 아닌 것이다. (151쪽)

 

미술 선생님은 불려나온 우리 둘을 마주세웟다. "정일영, 너부터 뺨 한 대 때려."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곧 팔을 들어 친구의 뺨을 살짝 쳤다. "장난해? 세게 때려." 이번엔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여전히 손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또 한 번 뒤에서 미술 선생님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조금씩 힘을 주면서 서로의 뺨을 때린다. 결국 몇 분간 서로의 뺨을 때리다 보면, 남는 것은 붉게 상기된 뺨과 맞지도 않았는데 함께 상기된 얼굴과 이상하게 그렁그렁대는 눈빛과 서로를 어색하게 쳐다보지 못하는 두 명의 '친구'만이 남게 된다. 이유도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서로 구타를 한 셈이 되었으니 원망 비슷한 감정도 들고 자책 비슷한 감정도 생긴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답을 하기 쉽지 않다. 아니 답은 없다. 사실 실질적인 가해자(혹은 처벌자)는 우리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으니까.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두 개의 문]이 내게 유독 좋았던 이유는, 제대로된 질문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망루에 올랐던 사람들과 현장의 경찰들을 이분법으로 대비시켜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묻지 않았다. 사실 이 사건에 관련된 많은 논쟁은 투입된 경찰들이 과잉진압을 한 것이냐 혹은 망루에 올랐던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냐의 소모적인 논쟁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러나 영화는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시위대 쪽이나 현장 경찰 양쪽 모두에게 위험천만한 과잉진압 명령을 내린 사람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명령은 직접 명령을 내린 사람의 책임만이 아니라 더 위에서 '비명령적 명령'을 내린 사람의 책임이라는 것을. 아니, 가장 위에 있던 사람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것을.

 

흔히 최고 권력자는 명령이 아닌 방식으로 명령을 내리는데 이를 '비명령적 명령'이라고 한다. 즉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지 않더라도 평소 방침과 발언, 인사, 포상과 처벌을 보고 아랫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어떠헥 해야 칭찬받는지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물론 최고 명령자는 직접 발언을 통한 우회적 강조뿐만 아니라 무관심 · 침묵 · 불개입을 통해서도 영향을 준다. 즉 대통령이 노동자 파업이 중단되어야 한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하면서도 진압 때 인명 피해가 없도록 하라는 당부를 추가하지 않는다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진압하라는 암묵적 지시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다. 대통령이 신속히 진압하라고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법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법을 어기는 사람은 용납하지 않겠다"라고 말하면, 경찰 총수는 진압 작전 때 발생할지 모른는 '부수적 피해'는 절대 자기 책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판단하며 오히려 강하게 진압하지 않을 경우 문책당하리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124~125쪽)

 

  그렇다면 사설 용역업체를 공권력 행사에 동원하고, 그 전부터 용역의 폭력을 묵인한 채 시공업체가 절실히 원하는 일을 수행한 경찰을 어떻게 봐야 할까? 나는 앞의 경찰청 차장의 발언 속에 답이 있다고 본다. 이들이 도심 대로변에서 무장하고 있었다는 지적 말이다. 농성자들이 실제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았다는 것을 경찰이 몰랐을 리 없다. 초점은 이들의 무장을 '인내를 갖고' 두고 볼 수 없기에 긴급해 해산시켜야 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항의 농성이 모든 행인에게 보였고, 이는 정부의 법질서 확립이 실패했다는 사실이 온 천하에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문제는 이들이 시민에게 주는 피해가 아니라, 이들의 무장 농성 자체가 행인에게 부각되어 공권력이 무력화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106쪽)

 

알아서 기는 개들. 요즘 경찰이나 검찰이 듣는 욕 중 하나다. 저렇게까지 해서 권력에 빌붙고 또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 싶을까, 정도에서 생각이 그치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오늘날 공권력의 사영화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봐야한다고 말한다. '공권력'. 네이버 국어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공권력은 "국가공공 단체우월한 의사주체로서 국민에게 명령하고 강제할있는 권력"이다. 다시 말하자면, 국민들의 합의 하에 국가에게 폭력 행사권을 부여한 것이다. 때문에 그 폭력은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피로 점철된 대한민국의 역사를 훑어보면, 공권력이 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된 경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격한 시위 현장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정적을 제거하거나 독재에 항거하는 인사들을 고문하고 좌절시키기 위해 공권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잔인한 방식으로 폭력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반복과 순환은 광복을 맞이했던 그 시절, 사상적인 좌표와는 상관없이 '공적 정신을 가진 인간'들을 무차별로 토벌하고 싹을 잘라버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공적 정신을 가진 인간, 즉 일제 때부터 항일운동을 했다가 살아남은 사람이나 지역사회에서 신망이 있던 청년, 주민을 위해 일한 구장 · 반장, 행정 말단 지도자 일부가 자신의 권력과 돈을 지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항일 경력과 해방 직후 지역 정치 참여는 공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에 기초한 것으로,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들이대 판단할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한국전쟁 전후 군경에 의한 학살은 흔히 생각하듯 한국 정치에서 '좌익의 소멸사'가 아니라, 친일 경찰과 군인에 의한 옛 항일운동가들의 수난사이자 우리 역사 최대의 공적 인간 소멸사라 해야 옳다. (76쪽)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폭력이 그 싹을 자르는 데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침묵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침묵한 자들은 자책으로 마음 속에 상처를 가득 만들거나, 반대로 자신을 합리화할 수 밖에 없다. 그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가 되고, 우리 모두의 손은 더욱 더러워져간다. 이 현상이 지속될 수록, 침묵한 자들의 반응은 합리화 혹은 무시라는 선택을 더 많이 하게 된다.

 

가해자의 폭력이 반복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폭력 상황에서의 방관자, 정확히 말하면 다수, 즉 따돌리는 편에 서는 폭력의 묵시적 동조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79쪽)

 

예나 지금이나 개인의 소신이 설 자리가 없는 사회, 중간의 입지를 견지하려는 인간이 설 자리가 없는 사회, 포악한 권력 앞에서 자기주장을 폈다가는 함께 따돌림을 당할 위험이 있는 전체주의 · 집단주의 사회에서 사회 폭력은 창궐한다. (87쪽)

 

어쩌면 폭력이나 부당함에 쪼잔할 정도의 민감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폭력의 싹을 자르지 않으면 어느새 엄청나게 성장한 폭력으로 다가와 우리의 입을 막아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작은 사항에 대해선 너도 나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엄청나게 덩치가 커졌을 때, 그에 대해 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 쉬울 때에 대처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한 번 봐주고 넘어가다 보면,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기회는 모두 사라질지도 모른다. 때문에 '자유주의'라는 말, 그리고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사실상으로는 자유가 아닌 면책 혹은 무관심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면이 있다. '자유'를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그 질문에는 관심이 없다.

 

냉전시절 자유주의에 대해 앤서니 아블라스터(Anthony Arblaster)는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혁명가이거나 혁명에 동조하는 자들이라기보다는 반혁명자일 개연성이 더 높다.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에 가까워졌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찍이 러시아의 사상가 알렉산드르 게르첸(Aleksandr Gertsen)은 한국의 앞날을 예견하듯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를 원한다. 그리고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에서 공화국도 원한다. 공화국이 자신들이 바라는 온건한 범위를 넘어서면 그들은 보수주의자가 된다. 자유주의자들은 행복하게 혁명이라는 관념을 즐긴다. 그러나 1848년 인민 폭동의 광풍 앞에서 공포에 질려 후퇴했다. 그러고는 형제들로부터 문명과 질서를 구하기 위해 계엄령의 총검 뒤에 숨었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53~54쪽)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폭력 그 자체를 무조건 비판하는 것으로 자위할 것이다. 미술 선생님이 서로의 뺨을 때리라고 했을 때 왜 저항하지 못했느냐, 결국 친구의 뺨을 때린 것은 너 아니냐,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어떤 아이는 똑같은 상황에서 그렇게 못하겠다고 저항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생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당시의 학교 분위기에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때 누가 어떻게 행동하지 않았느냐가 아니다. 과거에 어떤 행동이 있었음을 정확히 인식하고 오늘의 입장에서 그 사건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개인의 광기나 폭력성이 사건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조적 문제가 있었는가를 봐야한다. 그렇게 해야만 지금 일어나는 사건을 똑같은 사건 혹은 비슷한 사건으로 규정할 수 있고, 그것을 반대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잔혹한 고문의 현장을 두고, 그 고문을 왜 이겨내지 못했느냐, 너는 왜 김근태가 되지 못했느냐라고 말하는 건 문제의 핵심을 의도적으로 비켜나가는 것이자 또 다른 폭력이다. 고문이나 폭력이 왜 문제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캐내지 않고, 피해자에게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일은 너무 나도 쉽고 또 실제로도 너무 많다(자칭 자유주의자 고종석이 최근 성희롱 문제를 두고 트윗으로 했던 말들이 그걸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건 고종석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즉 고문은 평소의 생각과 신조를 의심하여 처벌의 대상으로 삼기 위한, 혹은 이를 의도적으로 자작해 권력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한 중세식 폭력이고, 폭력에 굴복해 원하지 않는 말을 하거나 동료의 이름을 댄 피해자들에게 치욕과 수모를 안김으로써 이들을 정신적으로 파괴해 주변 사람들 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이중적 폭력이며, 고문당한 사람들의 초췌한 얼굴, 절뚝거리는 발걸음, 망가진 신체를 목격하거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체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권력을 두려워하고 복종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삼중의 폭력이다. (234~236쪽)

 

  '적의 재산', 주인이 없는 재산을 국가가 접수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재산은 법에 의거해 공적으로 관리 · 사용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폭력으로 탈취한 것이라면 시효를 적용하지 않고 돌려줘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공권력은 약점 있는 사람을 초주검이 되도록 마구 두들겨 패고, 사기범 ·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숨도 못 쉬게 해놓고, 세월이 지나 피해자와 가족들이 재산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하면 시효가 지났다면서 "왜 그때 권리 주장을 하지 않았느냐"라고 적반하장 격으로 되묻는다. (197쪽)

 

피의 땅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현대 한국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을 뭍고 있다. 그 고통과 죽음은 다시 침묵을 만들었고, 지금 우리는 그 진상의 대부분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 책은 화가 나면서도 부끄러워지는 대한민국의 잔혹사를 이야기한다. 추상적인 단어를 나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례들을 들어가면서 설명한다. 이건 이미 [전쟁과 사회]에서 보여줬던 저자의 강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로는 매우 불편하고 고개를 돌리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잘못이 자행될 가능성을 키우게 될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과거에 벌어졌던 정도의 폭력에 휩싸여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야만의 전철을 되밟지 않으려면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아야하고, 끊임없이 현재를 감시해야만 한다. 공권력을 공권력답게 하기 위해서, 오늘도 열악한 현장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또 무엇보다 다시 억울한 국민들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과거의 잔혹사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국민'은 하나의 정치 공동체 구성원이다.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생긴 타인의 문제가 내 일이 되는 건 시간 문제다. 우리 사회 내부의 일도 남의 일로 치부하면서, 다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도의적 책임을 지고 반성하라는 이야기를 과연 할 수 있을까?

 

 일본의 전후 세대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과거사 반성을 요구하면, 왜 아버지 · 할아버지 세대의 일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묻는다. 이에 대해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는 일본인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잘라 말한다. 그가 강조하는 일본인이란 혈통을 물려받은 일본인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일본인이다. 정치 공동체 구성원인 모든 일본인 즉 전후 세대는 일본 국가가 국민에게 주는 각종 혜택의 수혜자이고 주권자로서 일본의 정치에 참여하기 때문에 결정 과정에 책임이 있는 주체라는 것이다. (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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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리맨 2013-06-09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너무 훌륭한 리뷰입니다 특히 미술시간에 혼나신거랑 두새의문 언급 짱
 
노동자의 변호사들 - 대한민국을 뒤흔든 노동 사건 10장면
민주노총 법률원.오준호 지음, 최규석 만화 / 미지북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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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같은 세상 꼭 봐야할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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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 19집 Hello
조용필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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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 또 필요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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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 보고서
제임스 길리건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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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분석할 때 너무 깊숙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역사의 인과 관계는 흔히 단순한 데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랠프 월도 에머슨

 

"다 똑같은 놈들이야." 정치, 혹은 정치인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때, 이런 말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거나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드물 것이다. 언듯 맞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한편에서는 답배값이라도 오를라치면 분노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정말 정치하는 놈들은 다 똑같고, 그래서 누가 되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걸까?

 

책 제목만 보면, 왠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정치가가 다른 진영을 공격하기 위해 씌여진 책일 것만 같다. 그러나 의외로 이 책의 저자는 의사다. 그리고 이 책을 쓰기 시작하게 된 계기도 정치적인 의도가 아니라 순전히 의학적인 이유였다. 즉 살인이나 자살이 왜 발생하고 또 왜 급증하기도 하고 급락하기도 하는지에 대해 연구를 하다가 '정치'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의사로서 내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생사의 문제였지 정치가 아니었으며, 정치 주체에 연결된 우연한 발견을 통해 정치를 들여다보는 시도 또한 어디까지나 무엇이 이런 죽음을 낳고 어떻게 하면 아까운 목숨을 살릴 수 있을지를 알아보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23쪽)

 

저자는 미국에서 한 세기 동안 수차례 '전염병 수준'의 치사사건(여기서는 살인사건과 자살사건을 합쳐서 이렇게 칭한다) 발생률이 나타났다는 것을 발견하고 큰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 '전염병'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저자는 우연히 이 죽음의 그래프가 정치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 그래프는 상승하거나 하락했기 때문이다. 평균 수치로 봤을 때 상쇄되어 드러나지 않던 것이 누적수치로는 확연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적어도 그래프만 봤을 때 공화당이 죽음의 정당이라는 칭호를 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자자는 이 우연한 일치를 두고 곧바로 결론을 내지 않고 다시 출발한다. 과연 이 통계를 유의미하게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검증절차에 들어간 것이다. 통계에 오류는 없는지, 그리고 만약 정권이 바뀔 때 이 수치가 변화하는 것이 맞다면 그것은 또 왜 그런지, 인과관계의 연결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지, 책의 초반에는 조금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검증에 매달린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공화당이 집권하면 사람들이 더 많이 죽어나가고 민주당이 집권하면 그런 현상이 줄어든다는 건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놀라운 일은 사실에 가깝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왜 공화당이 집권할 때 치사사건이 급증하게 되는가?

 

"가진 분들과 더 가진 분들을 이렇게 뵈니 감개무량합니다. 여러분을 엘리트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여러분을 저의 기반이라고 부릅니다." - 조지 W. 부시

 

이런 말들이 언론을 탈 때, 흔히 '실언' 또는 '망언'이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실은 이런 실언과 망언이야 말로 저들의 투명한 진심이다. 우리가 집중해서 들어야 할 말은 저들이 진지하게 하는 말들이 아니라 평소에 쉽게 하는 실언과 망언인 셈이다(우리 각하들, 의원나리들의 실언을 다시 생각해보자). 그리고 제일 앞에 제시한 랠프 월도 에머슨의 말처럼 깊게 분석할 것도 없이, 상식적인 수준으로만 생각해보자.

 

  자본주의를 가장 격렬하게 비판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자본주의의 으뜸 가는 철학적 옹호자였던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벌써 이 경제 체제의 결함 하나는 수요 공급의 법칙으로 말미암아 실업률이 높은 경제 체제로 운영하는 것이 고용자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야 '노동 비용', 곧 고용자가 사람들이 고용자를 위해 일하도록 설득하려면 지급해야 하는 임금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체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면 저마다 느끼는 바가 있고 바라는 바가 있는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그저 사고팔 수 있는 상품, 고용자가 보기에는 더 비싸거나 덜 비싸다는 차이밖에 없는 상품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피고용자(노동자)보다 고용자(자본가)를 옹호하고 또 피고용자보다 고용자한테서 지지를 받는 정당은 실업률을 높이는 효과가 있는 정책을 추구해야 남는 장사가 된다. (75~76쪽)

 

칼 마르크스니 아담 스미스니 이야기를 할 것도 없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더 싸게 노동자를 부려야만 이득이 더 남는다. 그리고 그럴 때야만 노동자들끼리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더욱 피터지게 싸울 것이고, 서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최근 사업장 곳곳에서 드러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관계를 들여다보라. 정작 이 구조를 만든 당사자들은 뒤에 빠져 있다는 걸 잊는다. 그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힘을 가진 자들이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상대적 빈곤을 키우는 정당을 지지하도록 다수 유권자를 설득하기 위해 공화당이 내놓은 해법은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해서 내 지갑을 앏게 만드는 주범이 상류층(과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초점을 흐리는 것이었다.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사람들이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과 티격태격하는 한 이 집단은 부자들을 상대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구를 소수의 최상류층과 절대 다수의 어려운 사람들로 양분하는 사회/경제 체제를 상대로 싸움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98~99쪽)

 

그래서 저자는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린다. 저들이 일부러 살인과 자살을 늘린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는 분명 도움이 된다고. 뭔가 음모론 같은가? 그렇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살인과 자살을 유도하는 정책을 쓴다는 건 억지처럼 들린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이 긋는 선을 잘 봐야 한다. 그는 일부러 이런 정책을 써서 살인과 자살을 늘린다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을 뿐.

 

  살인율 증가가 어떻게 인구의 못사는 99퍼센트를 갈라놓아서 잘사는 1퍼센트한테 유리하게 작용할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 법이 범죄라고 규정하는 폭력의 대다수는 가난한 사람이 저지르므로, 폭력 범죄가 늘어나면 중상류층과 중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저소득층에게 공포와 분노를 느끼면서 정작 나라 전체의 재산과 소득을 대부분 가로채는 것은 상류층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법률 제도가 범죄로 규정하는 폭력의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이 저지르지만, 가난한 사람의 대부분은 폭력 범죄뿐 아니라 그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는다. 그리고 폭력의 피해자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이다. (중략)

폭력 범죄율이 올라가면 중산층이 저소득층한테 느끼는 거부감과 저소득층이 같은 저소득층한테 느끼는 거부감, 다시 말해서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다수가 폭력을 휘두르는 소수를 자신에게 가장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데서 오는 거부감도 커지므로 유권자를 분할 정복하기가 쉬워져서 아주 잘사는 사람에게는 유리하다. (중략)

  범죄율과 폭력 발생율이 높아질수록 중산층과 저소득층은 서로를 증오하도록 농락당하며 자기 주머니를 진짜 털어 가는 사람은 자신들 가운데 있는 비교적 소수인 무장 강도가 아니라 더 소수인 아주 잘사는 사람들과 그들을 대변하면서 돈을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손에서 최상류층의 손으로 옮기는 공화당 정치인임을 깨닫기 어려워진다. (101~104쪽)

 

실제로 미국 선거 중 복지 정책에 대한 증오를 유발하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내 그 이야기를 유포시킨 사례가 있다. 결과는 물론 대성공. 결국 보수 집권층이 계속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패해야만 한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이게 사실이다. 복지 측면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을 보라. 대북관계가 경색될 수록 보수 정권은 집권하기가 좋아지고, 또 그들이 집권하면 대북관계는 더욱 경색된다. 꼬리를 물고물며 저들의 권력 유지 기간은 더욱 길어진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민간 경제는 전혀 살아나지 않은 채 다음 선거 기간이 돌아온다. 다시 등장한 보수 정당은 실패한 전력은 지워버린 채, 다시 경제를 이야기한다. 경제가 어려우므로 이 전략은 또 다시 먹힌다. 기가 막힌 순환이다.

 

  사회/경제적 스트레스와 중압감의 수준을 높여서 자살률과 살인율을 높이는 정책을 옹호하면서 공화당은 자신들이 공언한 번영과 치안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선거에서 이긴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보증 수표'다. (104~105쪽)

 

때문에 살인이나 자살은 정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죽음의 그래프가 보여주는 현상이 우연의 일치가 결코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이것을 은폐해야 하므로, 보수 정당은 '사회'를 축소시킨다. 모든 것은 개인의 잘못이거나 책임이고 사회는 그들에게 개입할 의무가 없다는 논리를 펼친다. '철의 여인'처럼 밀어붙인다면, 아예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이것 참 멋진 얘기 아닌가?(내가 문제를 해결할테니 표를 달라.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고? 그건 네 책임이라니까. 그 문제 해결하려고 대통령 후보로 나온 거 아닙니까. 문제가 해결 안 된다고? 왜 그렇게 남 탓만 해?)

 

어떻게 자살과 정치의 관계를 대중이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간 것일까? 불완전하게나마 답변을 하자면 설령 의식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분할 정복 전략이 먹혀든다는 것이다. 즉 자살과 살인을 갈라놓는다는 것이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그랬다시피 사회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극구 부정하는 것이 보수 정당에게는 유리하다. (118쪽)

 

그러자면 자살은 정당의 정책이나 사회 조류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인의 정신 질환이나 절망감 때문에 벌어지는 지극히 사사롭고 개인적인 행위라고 우겨야 한다. (119쪽)

 

이 책이 놀라운 점은, 자살과 살인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 두 사건은 완전히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같은 원인으로 발발하게 되는 경향이 많다는 점, 그리고 그 원인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집단은 이 두 사건을 계속 별개의 것으로 나누고 싶어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지적해낸다.

 

'그들'은 살인을 저지르고 '우리'는. 혹은 적어도 우리 중에서 더 불행한 사람들은 자살을 한다고 나누어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살에서 폭력을 보지 않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래서 제 목숨을 끊는 것을 정신 질환의 세계에 집어넣고 남의 목숨을 끊는 것을 범죄와 폭력의 세계에 집어넣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한다. 그래야만 두 가지 폭력 치사와 정치/경제 시스템의 연관성을 덮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214쪽)

 

살인이나 자살의 원인은 복합적이고도 다면적이지만, 경제적인 조건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실업 같은 것. 해고 혹은 계약만료 등을 통해 실업상태로 들어선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살인이나 자살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건 단순히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수치심' 때문이다.

 

  폴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실업'이라는 말이 마치 한낱 통계인 것처럼, 결국은 커지거나 작아지겠지만 현실의 인간들과는 상관없이 그냥 흘러가는 숫자인 것처럼 말해질 때가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63~64쪽)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이다. 얼마나 약하고 무능하고 모자라고 열등하면 수치심을 느끼겠는가 하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일으키는 사건이 객관적으로 '사소한' 것일수록 수치심이 더욱 커지는 것도 그래서 그렇다. (124~125쪽)

 

때문에 한 사회의 구성원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최소한의 경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게 하는, 바로 '복지'가 중요하다. 의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살인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 CCTV, 감옥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공중 보건'과 '예방 의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복지만 이야기하면 비용을 떠벌이는데, 사실 사후 치료보다도 예방이 훨씬 효율적이며 경제적이다. 자살도 마찬가지다. 자살률 1위니 뭐니 떠들면서 스크린 도어 만들고 옥상문을 잠그고 쇠창살을 끼워넣고. 그런다고 자살률이 얼마나 줄어들까? 무슨 이유로 저들이 죽어가는지에 대해서는 도대체 왜 묻지 않는가? 살인과 자살을 일부러 늘린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해도, 이쯤되면 방관하고 이용한다는 말을 들을만 하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우리가 훨씬 강조해야 하는 것은 폭력 치사라는 전염병은 공중 보건과 예방 의학의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19세기에 우리는 청결한 식수 공급과 하수 체계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의사, 약, 병원보다 죽음을 예방하는 데 훨씬 효과적임을 깨달았다. 20세기에 우리는 식중독에 걸리고 나서 치료하는 것보다 식품이 오염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는 것이 훨씬 싸고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같은 맥락에서 21세기에 우리는 자살, 살인이라는 전염병을 막고 다스리려면, 그런 전염병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불평등, 치욕, 절망이라는 병인을 줄여서 청결한 정치/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그런 위험 요인에 이미 노출된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처벌하는 데 우리의 한정된 자원을 쏟아붓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다. (222~223쪽)

 

실제로 저자는 오랜 기간 동안 주립 감옥에서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출소 후 재범을 저지르지 않을 방안을 연구해왔다 한다. 이 연구팀이 가설로 잡았던 것은, 학부 이상의 고급 교육이 재범의 가능성을 낮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한 무상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실제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재범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기쁜 마음에 이를 제도적으로 안착시키려고 했으나 새로 부임한 공화당 주지사가 이 소식을 들었고, 며칠 후 다음과 같이 기자회견을 했다고 한다.

 

그는 며칠 안 가서 기자 회견을 열더니 이 프로그램을 없애야지 안 그랬다간 대학에 갈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이 교도소에 들어와서 공짜로 대학 교육을 받으려고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프로그램을 박살내는 데 성공했다. (115~116쪽)

 

그래서 저자의 "더 위험한 정치인들이 있다"는 말이 타당할 수밖에 없다. 또한 정치하는 놈들 거기서 거기다, 다 똑같다는 말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다른 정치인들보다 더 위험한 정치인들이 있다. 그들이 나쁜 사람이거나 좋은 일을 결코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정책이 죽음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215쪽)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중 하나였던 중증환자에 대한 지원. 세금이 없어서 못한단다(담배값은 올린다지? 후후. 그러면서 줄푸세 말씀도 계속 하셨더랬지? 후후). 이 와중에 홍준표 도지사는 진주의료원을 폐지한다. 비효율 때문이란다. 사람목숨이 돈보다 중요하지 않느냐는 온정주의 혹은 대의의 차원에서 이야기할 것도 아니다(솔직히 저들에게 먹힐 거 같지도 않고). 오로지 효율만을 따졌을 때조차, 복지가 답일 수 밖에 없다. 아, 물론 돈 없으면 죽어야지 뭘 시끄럽게 떠드냐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슬프게도 한국에서는 '그들이 나쁜 사람이거나 좋은 일을 결코 하지 않아서' 위험한 정치인들이 있다. 그것도 많이. 그것도 꼭대기에. 저자가 인용한 루돌프 피르호의 말은 의사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정치가 규모를 키운 의학이라면, 정치인들은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의사의 소양을 갖춰야만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그런 소양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 이렇게 된 건, 정치하는 놈들이 다 똑같아서가 아니라 똑같다고 이야기하며 조금의 차이조차 눈여겨보지 않은 우리의 탓이다. 개인의 탓으로 돌려야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부분이다.

 

  의학의 진보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겠지만 사회적 여건의 개선은 이러한 결과를 더 신속하게 더 성공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 (바로 그래서) 의사는 본디 가난하나 사람의 변호인이고 사회 문제는 넓게 보면 의사의 영역에 들어간다. 인간을 다루는 과학으로서 의학은 사회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 (중략) 의학은 사회과학이고 정치는 규모를 키운 의학일 뿐이다. (225~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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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flower 2014-02-23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공감 동감입니다.
구입하려고 하는데 리뷰를 퍼가도 될까요?^^;

낮에뜬별 2014-02-23 11:36   좋아요 0 | URL
물론입니다.:)

goldflower 2014-02-23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
 
리얼 Real 12
이노우에 다케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너무 느리게 발매되지만.. 그래도 리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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