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 - 백승종의 한국사 에세이
백승종 지음 / 산처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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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A4 한 장이 안되는 글을 쓰는 게 쉽다는 얘기도 아니다. 오히려 지면의 제한이 있을 때에는 굉장한 압박을 느끼기 마련. 신문지면에 실리는 칼럼이나 사설 중에 인상 깊은 글이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런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역사를 소재로 컬럼을 싣는다고 하면 자칫하다가는 견강부회로 치닫기 십상이다. 틀은 정해져있고 지면은 한정되어 있고, 게다가 마감 기한까지 꼬박 꼬박 돌아오니, 이건 악조건 중의 악조건인 셈이다.

 

하지만 여기, 한 역사학자가 있다. 꼼꼼히 사료를 뒤져가며 독자들에게 친절히 보여주고, 그 속에서 현실에 들이댈 수 있는 날카로운 날을 찾아낸다. 게다가 이 책이 놀라운 것은, 신문 사설을 그대로 모아다가 낸 스크랩북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는 자신의 글을 고치고 또 살을 붙여 책으로 만들어냈다. 희망 따위는 없을 것 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겐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과거의 사람들에게도 '오늘'이란 지리하고도 노곤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과거는 우리에게 교훈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위로도 해준다. 그것이 바로 역사. 하지만 우리를 속이는 것 또한 역사.

 

  유럽 각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19세기 중반부터 노예적 성격을 지닌 피압박계층이 신분 해방의 기쁨을 맞았다. 조선 후기 사회에 나타난 노비의 감소 추세는 그 시기 세계사를 지배한 하나의 흐름이었다. 나라마다 제각각 사정이 조금씩 달랐지만 인신 구속을 통한 전면적 지배는 사라지고, 그들을 상대로 한 노동력의 착취가 또 하나의 풍조를 이루게 됐다. '노비해방'이란 멋진 구호에 비해, 그들이 맞게된 새로운 삶의 정체는 초라하다 못해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우리의 국사 교과서에는 마치 해방된 노비들의 다수가 부자도 되고 양반도 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그들의 해방은 신분상승이 아니라, 빈한한 소작농 또는 임노동자로서의 평행이동이었다. (32쪽)

 

이 관점은 톨스토이가 '우리시대의 노예제'에서 피력했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데,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이든 톨스토이의 관점이든 간에, 이것은 역사적 통찰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역사 지식을 위해서도, 역사적 통찰을 위해서도 좋은, 재미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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