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애의 미디올로지 - 잉여력과 로우테크(low-tech)로 구상하는 미디어 운동 다중지성총서 5
임태훈 지음 / 갈무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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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제목부터가 낯설 것이다. "우애의 미디올로지"라니? 저자의 설명이 필요할 터.

 

  '우애의 미디올로지'의 전선을 크게 셋으로 정한다. 1. 신자유주의의 폭압적인 시장 논리로부터 미디어 환경의 종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기획이면서, 2. '촛불'과 '3.11'의 역사적 잠재성을 밝혀 새로운 사회 문화적 상상력을 구상하고, 3. 불온하고 미천하여 별 볼일 없는 존재들(루저, 컴맹, 무식쟁이, 게으름뱅이, 잡놈, 속물, 변태, 악플러, 괴담 유포자 등등)의 특이성에 감응해 거대 미디어 기업의 하이테크에 맞설 '신체의 기술'을 개발하려 한다. (7쪽)

 

다양성, 상상력, 로우테크. 저자는 이 주요 키워드로 소위 문화평론을 시도하는데, 의외로 그 출발점은 "3.11"이다. "9.11"이 아니라 "3.11"?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여전히 낯선 숫자일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3월 11일은 다름 아닌 일본의 대지진이 발생했던 날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로 인해 촉발된 '핵문제'. "아니, 그게 뭔데 숫자로 명명하느냐"라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으리라(5.16 "혁명" 정도는 되어야 숫자로 명명할만 하지라며). 하지만 과자 이름으로도 하루를 명칭하는 판인데, 자칫 수 백만의 목숨이, 더 크게는 지구 한 편이 날아가버릴 뻔했던 이 사건을 '사건'으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북한이 쏘아대는 로켓(이라고 쓰고 미사일이라고 읽는다)은 언론의 메인 기사가 될 가치가 있지만, 핵발전소가 낡아서 언제 뻥하고 터져버릴지도 모른다거나 발전소의 관리 상태가 엉망이라는 등의 소식은 가십 정도로 치부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3.11은 우리 시대가 더는 근대의 시간 체제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알리는 엄중한 경고"(26쪽)였음에도 우리는 금새 그 경고를 무시하거나 잊어버린다. 왜? 그건 아마도 저들이 독점한 미디어,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지 않는 우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새로운 미디어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 미디어의 기반은 함께 하는 '우애'. 각자의 관심 분야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때로는 싸우고 다시 화해하고 함께 싸우기도 하는, 여기서는 동지이기도 하고 저기서는 적이기도 한 '잡스러운 우애'. 때문에 이 책은 단순히 문학만을 텍스트로 다루지 않는다. 영화나 소설은 물론이고 책이나 복사기라는 '물건'도 텍스트로 다룬다. 아, 처음에 언급한대로 '신체'라는 물건 또한. 이 잡스러움 속에 가능성이 있고 대안이 존재할지 모른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이 청결한 무대엔 이미 우리의 자리가 없으므로.

 

그러니 따지고 보면 카드 결제 기록만큼 세밀한 일기도 없다. 그 안에 적힌 상품명, 거래액, 결제시간과 결제일은 너와 나를 설명하는 가장 외설적인 기록이다. 일상의 동선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 지각, 지식, 감정, 마음, 소통, 욕망까지도 자본의 질서에 동원되고 제약당한다. (45~46쪽)

 

전자책이 더 새롭게 혁신되길 바란다면 무엇보다도 책이 어떻게 그 많은 잡스러움을 수용할 수 있는 매체인지 생각해야 한다. (192쪽)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그래서 "'문학'은 차라리 접속력(168쪽)"이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말에는 나름의 맥락이 있다. 하지만 그만큼 의문점도 많이 남아있다. 저자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미적지근한 촛불"이 정말 "미적지근"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이 설정 자체가 이미 과도하게 자아도취적이거나 또는 반대로 과대포장은 아닐까? 또 "미적지근한"과 "촛불"을 그렇게 딱 붙여놓고 여러사람들을 그 범주에 넣어버려도 괜찮은 것일까? 어떤 면에서는 저자가 피하려고 했던 그 구태의연한 구도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문제제기 자체가 충분히 의미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책 앞부분의 비평보다는 뒷부분의 비평들이 좀 더 매력있었다(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4부 "구 미디어의 재발견". 복사기가 만들어낸 네트워크로 1980년대를 살펴보고 남한 사회의 SF 상상력으로 1960년대를 진단하는 시도와 그 성과는 놀랄만한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현재의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겠다.

 

핵무기는 인류를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핵발전은 쾌적하고 편리한 미래를 위한 약속된 기술이라는 바보 같은 이분법, 끝없이 '핵'을 동어반복하는 프레임의 전형을 <학생과학>은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이 프레임 안에서 냉전 이데올로기의 온갖 억압적 기제와 핵 자본주의의 알파와 오메가가 모두 작동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프레임을 꿰뚫을 수 있는 불온한 SF적 상상력은 1960년대 남한 사회에 부재했다. (263쪽)

 

'SF'는 한 사회의 사회 문화적 상상력의 임계점을 지시한다. 'SF'라는 개념은 그저 장르 용어의 하나쯤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증환을 읽는 척도일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너와 나는 무엇을 상상할 수 없는가? 게다가 무엇을 표현할 수 없는가? 어떤 표현의 어색함, 어떤 작품에 대해 느끼는 견딜 수 없는 저속함은 어느 틈에 내 몸에 새겨진 반응일까? (272쪽)

 

4부가 더 인상적이었다는 말이 자칫 문제제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이 가지는 가장 큰 의의는 역시 문제제기다. 잉여력이나 상상력을 이야기하면서 "자, 이제 우리가 무엇을 상상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게 아니라 "우린 지금 무엇을 상상할 수 없는 걸까?"를 묻는다. "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건 겉보기엔 매우 긍적적이며 적극적인 태도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이미 "할 수 없는 것"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무기력한 과정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불투명하게 만들어야 온건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은, 가능성을 차단하거나 제한하는 것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것을 철저히 막고 있는지부터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엉망진창이라면 작품도 엉망진창인 게 당연하다. 그걸 애써 펴고 다려서 반듯하게 만드는 게 제일 시급한 일일까? 오히려 구겨지고 찢기고 결핍된 그 자리에서 우리의 실패를 분명히 자각하는 일이야말로, 지난 시대 먼저 실패해본 자들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교훈이다. (272~273쪽)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새로운 시작은 없다. 실패는 하나의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장기지속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실패 상태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자존심 상하지만 실패를 인정하고 새롭게 시작할 것인가. 선택의 각자의 몫이다. 아, 힌트가 하나 있다. 실패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것조차도 새롭게 무엇을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고되고 불안하다는 것. 자본주의라는 대표적인 실례가 우리 눈앞에서 그걸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밑져야 본전' 정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족. 솔직히 말하자면, 난 '문학평론' 혹은 '문화평론'이라고 분류되는 글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접했던 대부분의 글들이 불친절하고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책은 그렇게 불친절하거나 폭력적이지 않다. 내가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앞서 얘기한 글들과는 결이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글이 쉽지는 않다. 저자의 문체가 만연체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문제는 단어의 선택인 것 같다. 물론, 새로운 단어(조어)나 한자어의 사용이 필요한 글들이 분명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정도가 과도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애"를 위해서라면 저자의 다음 글은 조금 더 쉬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통에 목마른 우리 세대 젊은 작가이니 충분히 가능하리라 본다. 이 책의 주제의식을 대학원이나 다니는 사람들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볼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우애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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