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지음 / 폴리테이아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현장연구(field work)가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인류학에서조차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암체어(armchair) 연구자라고도 불리는 이들의 연구가, 단지 그 이유로 무시를 당해야할 이유는 없다. 제임스 프레이저 같은 경우 바로 그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의 저작이 가지는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역시 연구실 안에서만 있어서는 결코 알 수 없고 잡아낼 수 없는 현장의 모습과 소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많은 연구자들은 현장에 가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불편하기도 하고, 또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한 정치학 교수가 칠순을 기념하여 출판하는 책에 현장의 목소리가 담겨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기존의 논문을 묶어내거나 제자들의 쪽글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야 하는가를 현장을 통해 느끼고 정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쉽지 않은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아마도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 사회의 '상처'가 너무나 심각해보였기 때문은 아닐까.

 

  오늘날 여당이든 야당이든 모두가 갑자기 경제민주화를 말하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복지국가를 소리 높여 말하고 있다. 필자가 이를 좋게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정당들 간에 존재했던 어떤 신념이나 가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상처받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사회집단들의 규모가 커지고 이들의 표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크게 미치게 된 상황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11쪽)

 

실제로 여당이든 야당이든 가리지 않고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했지만 슬로건만 있을 뿐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은 제시되지 않았다. 심지어 여당의 경우 이젠 경제민주화라는 슬로건마저 철회한 것처럼 보인다. 그건 아마도 제대로된 정책은 디테일해야만 하지만 정략은 그래서는 안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애초에 경제민주화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 자체가 없었다는 얘기. 복지는 여전히 '수혜'로서 이야기되고,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의 후보, 무소속의 후보조차도 복지를 '베풀어 주겠다'는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건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 윤리적 기반"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복지 정책과 제도가 성장주의의 잔여 범주로 실현될 때, 복지 수혜에 대한 대가는 사회 낙오자 내지 열패자라는 낙인이고, 그로 인해 수혜자는 경제적 능력과 아울러 사회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48쪽)

 

미국에서 미혼모에 대한 복지 제공을 반대하면서 '도덕'이 괴상한 무기가 되었듯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복지'수혜'의 딱지는 도덕적 비판의 기준이 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재산이나 성별, 출신과는 상관이 없이 1인 1표를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민권이 비경제적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경제 과정이 기여하는 정도에 비례해 부여되는 가치와는 독립적으로, 다시 말해 시장의 변덕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은 무조건적이기도 하다. 즉 시민권은 사회의 성원이기 때문에 권리를 부여받는 것(그러므로 동시에 의무도 부여받는 것)을 의미한다. (126쪽)

 

문제는 이 원칙이 경제 앞에서는 무력하게 주저앉고 만다는 데 있다. 다시 반복되는 말이지만, 아마도 그건 경제적 무능이 곧바로 '비도덕적인 삶'으로 치환되는 사회적 인식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인식은 외부에서 강압적으로 주입되는 것을 넘어서서 스스로 그 인식을 강화하고 재생산하기에 이르렀다. 경제가 도덕은 물론 정치마저 삼켜버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과연 시장이 모든 것을 삼키는 것으로 무력하게 끝나야만 하는 것일까? 이젠 더 이상 정치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일까? 글쎄. 본문 중의 "이슈가 되어야 할 것이 이슈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갈등이나 이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슈화하지 않는 또는 못하게 하는, 다시 말해 정책 결정의 사안으로 등장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나 영향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118쪽)라는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권력은 시장에게 넘어갔다"고 선언했던 대통령의 행위마저 실은 매우 정치적인 것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책에도 인용되었던 독일 총리 메르켈의 말을 다시 한 번 옮기면 "정치는 시장의 논리를 그대로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자율적인 논리를 갖는다."

 

경제는 정치적인 것이다. 시장 또한 정치적인 것이다. 성장이든 시장 효율성이든 그것은 사회적 힘의 관계와 가치가 반영된 정치적 결정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121쪽)

 

이 사회의 모든 것이 정치성을 띠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과연 어떤 정치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인가?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당이 몇 년 사이 괴멸해버린 지금,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가 무엇인지는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즉 이 '괴멸', 그러니까 기존의 '진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으나 갖추지 못했던 그것이 지금의 폐허 속에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실제 현실의 삶과 유리된 조건 아래 의식화되면서 갖게 된 과잉 이념화된 사고방식과 도덕적 우월 의식은 그것이 지속되는 시간에 비례해 부정적 효과를 더 크게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2쪽)

 

삶과 유리되지 않은 정치. 노동자가 가입하는 노동자 정당. 환경 운동가가 가입하는 환경 정당. 여성들이 가입하는 여성 정당. 정당과 당원의 괴리가 없이 시작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지금의 위기를 조금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외침은, 사실 생각해보면 수없이 반복되어왔던 수사에 불과하다(그렇다면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어도 괜찮았다는 말인가?). "정당의 공적 조직이 아니라, 캠프가 대통령을 만들고 청와대를 지배하고 정부를 주도"(123쪽)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지금 이 구도 속에서는 제대로된 정당 정치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구태 정치 타파를 이야기하는 후보조차도 국회의원 수를 줄여야 한다는 그야말로 순진한 수준(혹은 위험한 수준)의 말을 하지 않았던가. 책에 기록된 힘겨운 현실들을 접하다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제대로된 정당 정치를 위해 폐허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족.

 

대규모 제조업 생산 체제가 아닌 지식, 정보 기술 중심 생산 체제가 주도하는 오늘의 경제적 생산 체제와 국제경쟁력을 요구하는 경제환경에서 노동시장 유연화는 피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160~161쪽)

 

나는 개인적으로 저자의 저 말에는 동감을 하지 못하겠다. 누구나 쉽게 하는, 이제는 클리셰처럼 되어버린 말이지만, 가만이 뜯어볼 필요가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가 지식/정보 기술 중심 생산 체제와 얼마나 연관이 있을까? 이 둘을 연관 짓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만약 그렇다면 오늘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차별,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극한의 투쟁(울산을 보라)이 왜 제조업 생산직에서 주로 벌어지는 것일까? 이런 표현과 말에 대해, 다시 심각하게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