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 국가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과 문화
니시카와 나가오 지음, 윤해동 외 옮김 / 역사비평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자극적인 제목에 눈이 끌려 구입하게 된 책.
실은 일본 학자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거의 없거니와, 당시 자이니치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있던 터라 구입했다.

하지만 여느 자극적인 제목의 책들이 그러하듯이,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터. 그러나 의외로 책 내용이 상당히 좋았다.

 

저자는 '문명'과 '문화'라는 개념과 단어가 어떤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으며, 이것들이 또 어떻게 이용되는가에 주목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서양에서 '문명'과 '문화'라는 (오늘날의) 개념은 근대적인 것이며, 그 둘은 상충하는 면이 있다.

문명은 제1세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프랑스에서 강조되었고, 문화는 후발주자를 대표하는 독일에서 강조되었다.

문명은 보편적인 것, 특히 물질적인 것을 강조하는데 비해, 문화는 특수한 것, 특히 정신적인 것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좀 더 검증을 해봐야하는 것이지만, 꽤 재미있는 주장이다.)

 

  다양한 국가이익을 둘러싼 다툼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은 이렇게 해서 '문명'과 '문화'의 투쟁이라는 형태를 취했던 것이다. 2차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의 전범이 '문명'의 이름으로 심판받았던 것이 기억에 새롭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명과 문화는 근대국가와 국민의 창출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문명과 문화라는 두 개념이 사실과 달리 마치 국가와는 인연이 없는 지고의 가치를 지닌 것처럼 보였다는 바로 그 점이 두 개념의 허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명화론자가 식민주의자로 전락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론자는 제국주의자로 변질되어갔다.

 

이런 저자의 분석은 오늘날의 한국에도 잘 들어맞지 않은가?

 

실제로 '국민 특유의 문화'라는 발상에는 순수한 문화를 희구하고(배타성) 나아가 그것을 과거의 오랜 시대와 전통에서 찾는 바람(복고적 성격)이 감추어져 있고, 극히 자연스런 추세로서 국민적 통일의 구심력이 되는 존재(황제나 천황)을 불러내는 일이 고려되기 때문이다. 또 '국민 특유의 문화'라는 발상은 특히 강력한 국민적 통일이 필요한 위기상황에서 국민적인 자랑과 자부를 요구하며, 그것은 자국 문화의 우월함과 타국 문화에 대한 멸시의 감정으로 쉽게 전화되기 때문이다.

 

결국 '문명'과 '문화'의 대결이었던 2차대전이 종결된 뒤에도, ''문화'나 '문화국가' 슬로건의 기만성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화는 교묘하게 탈정치의 탈을 쓰고 정치적 행보를 꾸준히 밟아나갔던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조선일보'의 '문화면'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자본력, 정치력을 바탕으로한 풍부한 컨텐츠와 물량공세. 그를 통해 매우 적절한 프로파간다를 수행하는 조선일보의 문화면.

'문명/문화가 국가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국가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이 간파되지 않을 필요가 있다.'

마치 조선일보 문화면에 기고하는 지식인들의 변명처럼.

 

어쨌거나.

'내셔널리즘은 '민족'으로부터 도주하여 '문화' 속에 몸을 감췄'는데, 그렇다면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민족은 허구라는 저자의 주장이 수긍은 가지만, 논리적으로 허구라고 해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즉, '허구로서 존재한다'라는 괴상망측한 모순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그래서 제3의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솔직히 답한다. 잘 모르겠다고.

국제적 연대에 대해서도 '국가는 국가이고 국가로 기능하기 때문에 국가 간에 영속적이고 진정한 연대는 있을 수 없다'고도 말한다.

어찌보면 대안이라고 할 것이 제시되지 않아 허망할 수도 있지만, 도발적인 질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저자는 소수를 배제하지 말자는 논리가 더 넓고 강력한 국민통합을 실현하여

'국가의 유지를 원하는 이들에게 경사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거꾸로 국민국가로부터 소외된 여성이나 대중, 외국인이 비판의 관점을 이어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이야기하면서

또 다시 도발적인 질문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계속 '국민'으로 살고 싶은가, 아니면 '국민'을 그만두고 다른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가?

 

어떤 면에서는 이번에 강의를 들었던 자이니치 윤건차 선생님의 논조와도 비슷한 면이 있어 보인다.

(선생님께 메일을 드려 니시카와 나가오에 대한 질문 몇 가지를 해봐야 겠다.)

 

어쨌거나 굉장히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함께, 뛰어난 표현들에 감탄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역시 아무리 학문적인 글이라 할지라도, 그 표현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다.

 

  이번에 <다케우치 요시미 평론집>을 다시 읽어보니 꺼저가는 불을 되살리는 듯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무참한 인상이 남았다. 역사는 두려운 것이다. 역사는 일찍히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허위임을 말없이 폭로하고, 심금을 울리던 명문을 송장처럼 매장해버린다. …… 그러나 시대적 이데올로기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시대의 눈부신 광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똑바로 볼 수 없다. 시대적 이데올로기는 시대의 맹점이기도 하다.

 

또 저자가 인용하는 루소의 표현을 보라.

 

정부와 법이 집단으로서의 인간의 안전, 행복에 필요한 것을 주는 데 비해, 학문 · 문학 · 예술은 그만큼 전제적이지는 않지만 아마 훨씬 강력한 것이고, 인간이 묶여 있는 쇠사슬을 꽃장식으로 가려서 인간이 그 때문에 태어났다고 생각되는 근원적인 자유의 감정을 억압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노예상태를 좋아하게 만들어 이른바 세련된 국민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어떤 한 사람의 출신성분 같은 것이 한 사람의 인생관, 사상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고 믿는 편이다.

저자가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가 1934년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라는 점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을 해보지 않게되는 존재들. 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호기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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