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반대한다 - 우리시대에 고하는 하워드 진의 반전 메시지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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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주의자’라는 단어에 드리운 이미지는 무엇일까? 유약함, 탁상공론, 이상주의자. 아마도 이 세 단어로 정리가 될 듯하다. 실제로 ‘반전주의자’들은 ‘비폭력주의자’만큼이나 비겁하다는 말을 들어야만 한다. 그렇다. 이미 이 세계는 ‘반전’을 이야기할 때 ‘용기’를 가져야만 하는 세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 ‘비겁자’들은 어느 때보다 ‘용감한 자’가 되어 있다.

 

우리는 반전주의자들에게 ‘현실’을 이야기한다. ‘네가 하는 말이 옳은 줄은 알아. 하지만 그건 꿈이라구. 현실은 그렇지 않아. 전쟁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야.’ 이 말은 너무나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더 이상의 전쟁은 안 된다는 외침보다는 ‘전쟁이 다 그런 거지’라는 말이 더 그럴 듯하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겠어. 독재가 다 그런 거지. 남자들이 다 그렇지 뭐.)

 

  자신의 견해를 발언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학자들은 종종 이른바 '현실주의'라는 일종의 자기검열을 행한다. 어떤 문제를 다룸에 있어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사회의 최고 권력자들이 제시하는 대안들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좋은 전쟁’이었던 세계2차 대전에 폭격수로 직접 참전했던 하워드 진의 이 용감한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금세 불편해진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지금 벌어지는 전쟁들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하워드 진이 알리려는 내용이 바로 그 ‘나름의 이유’다. 현대에 벌어진 대부분의 참극은, 그 참극이 일어나기 전에 문제의 해결이 가능한 상황이었으나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그 ‘나름의 이유’ 때문에 참극을 굳이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참극을 일으켰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모호하지도 비현실적이지도 않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정당했다는 주장의 실제 효력은 이미 끝난 그 전쟁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전쟁들에 미치는 것이다. …… 아마 제2차 세계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는 전쟁이 정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계속 존속시켜 줬다는 점일 것이다.

 

그가 전쟁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일단 전쟁이 정당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면, 그 뒤로는 사고하는 것을 중지한 채 승리를 위해 행해지는 모든 일이 도덕적으로 타당하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의 고백대로, 자신이 3만 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한 것과 파시즘을 제거하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볼 여지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비겁하지 않은 우리가 한 번 답해보자.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부시가 일으킨 전쟁도, 하다못해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마저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전쟁이 ‘절대악’으로 규정되지 않는 한은 그 ‘나름의 이유’로 전쟁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 나름의 이유와 전쟁 사이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그리고 군사 행동은 애초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것도 우린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워드 진은 연대와 불복종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연대와 불복종이 그저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님을 실례를 들어가며 역설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시민불복종은 구체적으로 어떤 논리와 방법을 가져야만 하는 것일까?

 

이런 하워드 진의 논리에 ‘현실’을 들이대는 것은 결국 ‘악법도 법이다’를 외치는 오늘날의 누군가와 별 다를 것이 없는 태도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의 성격은 그리 고민할 것도 없이 노골적이다. 우리가 앞서 살펴봤던 베블런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옳다”라는 격률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하워드 진이 이야기하는 불복종의 논리는 무엇인가.

 

시민불복종은 정확히 그런 것이다. 법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선언하기 위해 법률을 일시적으로 자기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법과 인간적 가치 사이에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사실은 때때로 법률을 어김으로써만 공표될 수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반면, 법률을 모든 상황에서 준수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신 자체를 억압하는 것이며 개인의 양심을 전능한 국가에 내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듯이, 국가는 ‘자의적으로만’ 전능하다. 때문에 불복종이 필요한 것이다. 하워드 진은 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2가지 본질적 조건을 제시한다. 하나는 권리 행사를 위한 문제가 ‘생명이나 건강, 자유 같이 근본적인 권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로는 ‘불만의 원인을 시정할 수 있는 법적 통로의 불충분함’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작년의 촛불시위야 말로 최근의 사례 중 가장 대표적인 ‘직접행동’일 수 있겠는데, 한국 사회는 직접행동에 대한 이해의 방식이 특이한 것 같다. 촛불시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비판은 ‘생각 없이’ 혹은 ‘남이 하니까 나도’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의 소리를 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 거리에 나온 사람들에게 ‘왜 나왔냐’라고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도 똑같은 논리로 ‘남이 하니까 나는’ 싫었던 것에 불과하다. 아니면 다른 저의가 있었거나.

 

  우리 시대는 죄악을 대량생산하는 데 점점 더 엄청나게 복잡한 분업이 필요하게 된다. 어느 누구도 뒤이어지는 참사를 적극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든 그 기계에 렌치를 던져 작동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소극적으로 책임이 있다. …… 사회라 불리는 이 왜곡된 자연(자연은 각 종에게 저마다 특수한 필요물을 갖춰준다) 속에서는 간섭 능력이 큰 사람일수록 간섭할 필요성을 덜 느낀다.

  필요성은 가장 많이 느끼지만 렌치를 가장 적게 갖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당면한(또는 내일의) 희생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사용해야만 한다(왜 반란이 드문 현상인가는 이로써 설명될지도 모른다). 이 사실은 빈손보다 뭔가를 약간 더 갖고 있으며 기계를 멈추는데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진 우리에게도 이 사회적 궁지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어떤 고유한 역할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자, 이제 가장 민감한 문제인 ‘폭력’이 남아있다. 시민불복종과 폭력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질까? 사실 ‘폭력’이니 ‘비폭력’이니 하는 말은 모두 부정확한 말이다. ‘그것이 사용되는 정치적, 이념적, 수사적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함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살인자의 칼과 그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칼이 모두 같은 칼로 해석될 수는 없다. 또 공권력이라고 해서 폭력이 아닌 것도 아니고, 무조건 ‘정당한 폭력’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략적으로 접근할 때, 소렐의 폭력혁명을 옹호할 수만도 없다. 에이프릴 카터의 말을 들어보자.

 

정치적 가능성과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근거로만 계산한다면 원칙적으로 폭력적, 비폭력적 방식 모두를 정치의 도구로 채택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폭력 또는 비폭력을, 항의운동가 자신과 사회 전체의, 정서적 반응과 도덕적 신념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현실에서 어떤 정치적 행동을 위한 전술적 사고는 이러한 반응과 신념을 고려해야만 한다.

 

사실 폭력의 사용은 그 효용성(?)에 비해 많은 불리함을 떠안고 있다. 카터의 지적대로 대중의 폭력투쟁은 자유민주주의 또는 부분적인 자유주의 국가에서 ‘정부로 하여금 자유를 제한하도록 유도하기 쉽고 저항자와 사회전체에 더 큰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계층, 계급 및 성별 간의 연대도 어렵게 만든다(폭력시위에서 소외되고 마는 여성을 생각해 보았는가? 투쟁을 하는 약자의 입장에서도 집단 내에서 ‘안전’이라는 이름하에 여성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

 

물론 쉬운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정당성’을 외치며 주장하는 약자의 입장에서는 폭력으로 맞짱을 뜨는 것이 그리 현명한 전략적 선택이 아님은 분명하다. 힘 대 힘으로 맞붙는 논리는 ‘힘의 논리’를 비난하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을 대하면서, 보수유한계급들을 향해 ‘그러는 너희는 얼마나 깨끗한데!’를 외치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짜증이 날지도 모르겠지만, 우린 ‘깨끗해야만’ 한다. 저들과 같아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는데, 하워드 진은 스페인 내전에 자신 참전했던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즉 그는 모든 폭력과 전쟁을 뭉뚱그려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너와 나'의 싸움으로 생긴 것이 아니건만, 전쟁옹호론자들은 반전주의자들을 비난할 때 항상 '너와 나'의 미시적 관점으로만 접근하려고 한다. 즉 반전주의자, 비폭력주의자에게 '그럼 내가 너 때릴 거니까 너 가만히 있어'라는 식으로 비난한다는 거다. 그러나 정작 전쟁옹호 자체 논리는 너무나도 거시적이다. 그러니 이건 분명 의도적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동안 하워드 진이 전쟁과 관련하여 기고했거나 썼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는 재향군인의 날이 이 따위로 전쟁 찬미의 구실이 되서는 안된다고 실명으로 글을 기고하였다. 그 날은 오히려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앞으로는 전쟁 희생자와 참전 군인들을 양산하지 않겠다는 국가적 맹세의 날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스스로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직접 행동으로 옮겨왔다.

 

나로서는 주요한 주장들을 모두 널리 읽고 주의 깊게 경청하긴 했지만, 냉정하면서도 거리를 두는 논평가 행세를 하지는 않겠다.

 

이 책의 미덕은, 하워드 진이 역사학자라는 것에 있다. 폭력과 전쟁은 나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당위적인 외침만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는 각종 자료들을 이용하여 전쟁과 폭력의 '맥락'을 훑어간다. 그리고 그 맥락 속에서 그 침략이, 공습이, 폭격이 굳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밝혀낸다. 우리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무조건 '국가'를 사랑해야하는가? 우리가 사랑해야할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 "애국심은 불한당의 마지막 도피처이다"라는 새뮤얼 존슨의 유명한 말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지속적으로 던져야 한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벙커에 들어가는 대통령을 보라). 저들이 왜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지, 왜 위기감을 고조시키려 하는지 냉정하게 바라봐야만 한다.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을 해야만 한다. 또 다른 희생자가 되기 싫다면.

 

꽤 전에 사놓았던 '폭격의 역사'와 '공습', '국가와 희생'을 함께 읽어봐야겠다. 조만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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