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한 남자 만들기 -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치다
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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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남자'하면 떠오르는 가치가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용기', '강인함', '씩씩함' 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박노자의 이 신간에서는 1890~1900년대 나타나는 '이상적 남성성'의 계보를 살펴보고 있다.

'왠 남성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동안 박노자가 관심을 가져왔던 영역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뜬금 없지도 않다.

박노자는 1900년대 초반 사회진화론,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승열패와 같은 담론에 관심을 가져왔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대충 감이 오겠지만, 1900년대 강조된 남성성은 전통시대의 그것과는 또 다른 '육체적 강자'로서의 남성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전통과 근대가 그렇게 명확하게 단절되는 지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뒷부분에 이영아의 발문에도 지적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너무 '근대의 근대성'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닐까?

 

이데올로기는 권력관계 전체를 정당화하는 상징 영역이다. 이데올로기 영역은 사회 곳곳의 완고한 기존 현상(예컨대 가부장적 가족구조)을 포함한 권력 구조 전체와 관련된 것이다. 또한 "전통"은 전체 권력 구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면에서 비할 데 없이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이데올로기 영역은 대개 혁신성을 가시화하는 데에는 놀라울 만큼 소극적이다. 기의(signified)가 대대적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기표(signifier)들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조선 후기 사회(17~19세기)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추앙받았던 이순신은 근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대담무쌍하고 성공적이며 지능적이고 애국적인 전사의 상징, "조선의 넬슨(Horatio Nelson)"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렇지만 숭배의 내용에 결정적인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숭배를 표현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한 연속성을 드러낸다.

 

여러 자료들과 시대상황을 검토한 후, 저자는 재미있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조선의 경우, "애국적 남성의 훈련된 신체"의 근대적 이상은 최소한 두 가지의 토착적 남성성 패러다임을 혼합, 계승한 것이었다. 하나는 왕조국가와 성리학적인 도덕규범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의 독립과 자주"라는 새로운 지상 가치로 옮겨가던 고답적 "군자"의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근대 민족 이념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겁 없는 협객을 존중해온 김구와 같은 평민들의 패러다임이다. 전통적으로 "고상한 목표", 자기 수양, 도덕적 청렴을 부각시키던 "군자" 패러다임은 최남선 등의 "자기희생" 강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세시풍속의 일종으로서 이웃 마을 사이의 돌싸움에서 드러나는 사납고 거친 남성성에 대한 평민드의 애착은 새로운 남성적 에토스의 군사주의적인 양상으로 이어졌다.

 

이런 양상이 '기댈 조국이 없는', 그러면서도 일제에 의해 총동원되어야 했던 식민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자리를 잡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성성은 강인함(그러나 국가권력에 순종하는)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 남성상은 '배려하는 남자'. 물론 이 배려와 돌봄은 넓은 의미를 가진다.

약자를 배려하고, 사회차원에서는 각종 사회문제들을 무시하지 않고 직접 참여하는 그런 남성.

세계에서 가장 긴 주당 노동시간에 시달리는 점을 감안하면 '배려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도,

근대적 이상이었던 '튼튼한 육체'를 발전적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뒷부분에 같은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두고 있는 이영아의 비판적 발문이 실려 있어 책을 잘 매조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영아의 문제제기 외에 개인적으로 드는 의문도 있다.

 

우선 '정당한 폭력을 "남성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변화시키는 훈육된 남성 투사라는 상투적 이미지는, 개화기와 그 후의 조선사회에서 성차 의식을 "민족화"시키는 과정에서 창출된 것 뿐이다.'라는 저자의 견해.

 

조선시대와 근대를 비교하면서 폭력성에 대한 해석을 할 때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나 싶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근대와 전근대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은 "국민국가를 위해서 칼을 드는 여성"의 근대적 이미지를 쉽게 수용할 만한 문화적 배경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결론은 다소 성급해 보인다.

일단 그것이 '조선만의 특성'이라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분석을 위해서는 당시의 '여성관'도 면밀히 살펴봐야만 한다.

조선의 여성들에게 '칼을 드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좀 더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의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이런 '적극적'인 행위를 권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이 보기에 여성들은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존재였다.

그나마 여성이 칼을 드는 경우의 대부분은 자신의 정절이나 가문의 명예 혹은 부모의 목숨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국가를 위해 칼을 드는 여성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것이며, 그 상상 또한 현실의 남성을 공격하는데 주로 이용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남성들이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공식적'으로는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딸, 부인, 어머니와의 관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데 있다.

때문에 이 시대의 '담론'과 '현실'의 괴리 또한 반드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조금 아쉬운 점도 있다.

우선 '권장'으로 표상되는 남성성만이 아니라 '금기'로 표상되는 남성성도 함께 살펴봤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쉬운 예로, '남자가 왜 질질 짜고 그러냐'는 금지 혹은 비난. '훈육' 속에는 권장 외에도 금기, 금지가 상당한 영역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당시 남성에게 무엇을 금지하였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상적 남성성을 탐구하는 다른 경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나 더 아쉬운 점은, 머리말에 비해 글이 너무 빨리 끝나버린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일제말기를 거치면서 겨우겨우 일상까지 파고든 이상적인 남성성이, 저자의 말처럼 왜 '변화'했는가?

물론 저자의 관심은 1900~1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머리말에 이야기한 문제제기는 현대까지 이어진다.

 

동유럽이나 중남미 사회들의 "이상적 남성" 이미지와 비교하면, 한국 사회에서는 완력이나 담력보다는 학력 및 경제 능력 부분이 더 중요시된다. 일부 지식인 사회를 제외하면 동유럽 여성들은 "근육이 없는 남성", 심하면 "주먹질 못하는 남성"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다르다. "명문대 졸업생"과 "엘리트 대기업 사원"이라면 그 정도의 "결함"(?)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대한민국에서 경제적 측면을 포함한 모든 차원에서의 "인생 성공"은 절대적으로 "학력 자본"에 좌우된다. 고등교육의 대중화는 남미나 동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확인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하지만 거기에서는 한 개인의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철저한 학별의 위계질서가 대한민국처럼 공고하게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적 프로젝트로서의 '건강한 남성의 육체만들기'는 멈추었지만, 여전히 각 기업체는 '군인정신'을 강조한다.

극기훈련을하고, 해병대로 가서 '훈련'을 받고 강인한 '정신'을 요구 받는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왜 나타나게 되었는가?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나의 관심이 많았던 부분이라 좀 아쉬웠다.

다소 허망한(?) 저자의 이상적 남성상을 피력할 것이 아니라 이 부분을 좀 더 분석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영아는 발문에서 여러가지 생산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의 몸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문제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발문 첫부분에 나오는 연예인 군 입대에 대한 해석은 같은 입장에서 완전히 동의를 하지 못하겠다.

연예인 군문제에 일반 남성들이 그렇게나 민감한 것은,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진짜 남자가 된다"는 사회의 암묵적 합의 때문은 아니다.

(군대를 다녀오면 사회의 제대로된 구성원으로 인정한다는 합의가 있는 것은 100% 맞지만 그것이 '남성성'과 연관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물론 이것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의 주장처럼 이 요인이 가장 핵심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그가 부차적으로 취급한 '평등'의 문제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평등'이라고 하니 뭔가 고상한 거 같은데, 표현을 좀 바꾸자. '피해의식'이 더 적절하겠다.

요즘 군대 가는 것을 성스러운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안갈 수 있으면 안가는게 좋다. 군대라는 곳은 이제 그런 곳이다.

그런데 정작 안간 이들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왜? 나는 그런 X같은 곳에 2년 혹은 2년이 넘도록 다녀왔으니까.

나도 다녀왔으니, 너도 가야하는거 아냐?라는 논리가 바로 핵심이다.

어떠한 보장을 위한 평등이 아니라 피해와 불이익의 공유를 위한 '평등'. 때문에 '여자도 군대가라'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1권이 나온 후 한참 나오지 않던 '히스토리아' 시리즈가 다시 시작된 것도 환영할만한 일.

'속편격'으로 집필 중이라는 이영아의 책도 기대가 된다. (근데 이것도 히스토리아 시리즈로 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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