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안건모 지음 / 보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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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는 A4 한 장 정도의 글을 쓰는 것이 별일 아닐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아니, 어려운 일을 넘어서 하나의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이지만, 글쓰기 또한 많은 노력과 훈련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노력’과 ‘훈련’이 주로 정규교육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혹은 그렇게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들을 하기 때문에) ‘노동자’와 ‘글쓰기’ 사이에는 적지 않은 거리가 느껴진다. 그 거리감은 노동자를 바라보는 먹물들의 시선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노동자 스스로도 느끼는 것이리라. 하지만 여기, 노동자, 아니 우리 모두가 글을 써야하는 이유가 있다.

 

현대사 연구에 있어 ‘구술사’라는 연구방법이 유행이다. 물론 유행(?)에 걸맞은 성과물이 나오지는 않고 있지만, 새로운 연구 방법으로 주목을 받는 것만은 사실이다. 기록을 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하는 주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구술사는, 현대사 연구에 있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술사는 오히려 문자화된 역사보다 영상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영상에 직접 담겨 우리에게 보여질 때, 그것은 제3자의 펜으로 기록된 것보다 큰 힘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영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제3자의 시선이므로, ‘자신의 목소리’라고 말하기엔 여전히 부족하다. 만약 구술로 증언한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논리와 플롯을 가지고 글을 써내려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장 먹물티 나는 ‘글쓰기’야 말로 어찌 보면 가장 손쉬운 목소리내기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놓고 생각해보자. 버스기사였던 저자 안건모의 ‘글’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버스회사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버스기사가 어떤 근로조건 하에서 일을 하는지 알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냉정하게 말해서 애초에 관심도 없었을지 모른다. 택시를 타면 가끔 운전하면서 여러 가지로 툴툴대시는 기사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사실 이 책의 글 또한 그렇게 다가올 수 있는 내용이다. 생각해보라. 버스기사들의 생활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 하나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럼에도 이 책의 글들은 우리가 종종 듣곤 하는 불평불만의 수준을 이미 뛰어 넘고 있다. 왜? 저자 안건모가 투철한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전사라서?

 

나 자신도 먹물이기 때문에 가지는 선입견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엔 이게 바로 글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생생한 목소리로 현장의 불평을 들을 때는 시큰둥했던 것이, 글을 통해 한 가지 소재로 집중하면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제 책을 다 읽은 독자들은 괜시리 버스기사와 버스회사에 대해 무엇인가 많은 것을 아는 듯한 이상한 ‘의기양양함’마저 생길지도 모르겠다.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저자가 처음 책을 접했던 순간도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 책은 나를 어둠에서 처음으로 끌어내고, 세상에서 다른 한편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294쪽)

 

세상에서 다른 한편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은 현장 노동자들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우리도 이 책을 접하게 되면서 세상의 ‘다른 한편’을 볼 수 있게 된다. 내가 이 책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 버스 파업의 구체적인 내용을 평생 알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내가 왜 버스 운전기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위장취업을 해가며 투쟁하고 연대하던 그 시대는 이미 추억으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 1980년대와 2000년대는 분명 다르다. 사회의 분위기도 그러할 것이고 노동현장의 분위기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린 다른 이들이 목소리를 들어야하고 또 나의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왜?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 꼴’이라 하는가. 정작 싸움 붙인 사람들은 뒤에서 느긋하게 즐기고 있다. 누구인가. 시내버스 사업주와 정부가 싸움을 붙인 장본인이다. 결국 피해자는 시민과 운전사들이다. (25쪽)

 

재벌과 언론들은 ‘1달러 모으기 운동’, ‘금 모으기 운동’으로 우리 서민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그런 운동은 나라 경제가 이 꼴이 된 게 우리 탓인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76쪽)

 

어느덧 ‘지난 일’이 되어버린 용산참사를 기억하는가? 생존권을 위해 옥상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들과 명령을 받고 현장에 투입되는 경찰이 가장 치열한 순간에 충돌했다. 그 비참한 현장에 있는 이들과 ‘다른’ 계급에 속하는 이들은 쏙 빠져있다. 처참한 현장에 있는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그것을 볼 수밖에 없는 우리는 저 ‘충돌’이 누구와 누구의 충돌인지 순간 알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비난은, ‘옥상에 올라간 테러리스트’들과 ‘강경진압으로 일관한 경찰특공대원’들에게 쏟아지게 된다. 아니, 비난을 하는 ‘우리’조차 서로 엉겨 붙어 싸우게 된다. 자, 한 발 떨어져 바라보자. 이것이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이게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었던가?(이런 의미에서 ‘경찰노조’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한홍구 교수의 견해는 충분히 동의할 만하다.) 어느덧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모르게 잔인한 격투기의 링 위에 올라있다.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링 위에. 하지만 살아남는다고 해서 결코 ‘강자’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여기 이 ‘링의 법칙’이다.

 



혁명이 되거나, 착취가 아닌, 수탈 구조가 돼요. …(중략)… 정상적인 계급 구조와는 좀 달라요. 전통적인 구조는 위에 있는 놈들이 밑에 있는 사람들한테 일을 시키고 임금을 안 주는 건데, 여기는 일도 안시키려고 해요. “놀아”. 착취를 할 게 없잖아요. 비정규직이라도 해야 뭘 착취당할 거 아니예요. 죽거나 말거나 관심 없어요. 사실 지배, 피지배 구조만 되도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이 있을 텐데. ‘열심히 일해라’가 아니고, ‘열심히 공부하고 싫으면 놀아라.’ 그러면 사람들은 ‘아, 내가 놀아서 계속 놀게 된 거구나’ 생각하게 되겠죠. (《작은책》2008년 12월호 기획특집 ‘신자유주의가 어디까지 갈까 - 우석훈 강의’)

 

위에서 억압하는 자들은 따로 있는데, 우리는 현장에서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과 싸운다. 아니 오히려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들과 싸운다. 손님은 버스가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고 멱살을 잡는다. 기사는 니가 뭔데 막말이냐며 욕을 내뱉는다. 내가, 그리고 당신이 싸워야할 근본적인 이유가 과연 나와 당신에게만 있는 것일까? 안건모의 말대로 그건 핑계일 뿐이다.

 

내가 기사들한테 왜 우리가 누려야 할 당연한 우리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냐고 하면 대개 이런다.

“건모 형은 나이가 많고 고참이잖아. 나 같은 쫄따구랑 어떻게 같아?” “안건모 씨는 그래도 집이 안정돼 있잖아.” “건모는 아는 게 많잖아.”

…(중략)…

하지만 노동조합이 힘이 있다는 것은 조합원들 하나하나가 그런 권리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는 회사에 찍힐까 봐 뒤로 빠지고 지부장한테 다 미뤄 버리면 지부장은 어쩌란 말인가. 이를테면 연 ․ 월차휴가를 회사가 안 받아 주면 “우리 노동자들 권리인데 왜 안 받아 주는 거야?”하고 싸워야지 회사한테 네! 알았어요. 하고 나온 뒤 “씨발, 노동조합이 약해서 그래!”하면 장땡인가?

나는 내 권리를 노동조합이나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지금 고참이기 때문에 싸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나이보다 더 어릴 때부터 부당한 대우에 맞서 싸웠고, 지금보다 생활이 더 어려울 때도 싸웠다. 그리고 노동법이니 근로기준법이니 아무것도 모를 때도 싸웠다. 기사들이 말하는 건 다 핑계다.(179쪽)

 

물론 기사의 입장에서 쓴 글을 기사가 아닌 내가 모두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아니, 같은 기사라고 할지라도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미 ‘글쓰기’라는 권력의 도구를 선점한 셈이다. 다른 생각이 있는 기사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추측만할 뿐, 실체는 알 수 없으니). 하지만 기사와 손님이 제대로 싸우려면 뭔가 알아야할 것이 아닌가? 그래야만 서로를 죽이는 싸움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싸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글을 써야 한다. 그리고 정말 웃긴 이야기지만, 글을 쓰는 우리도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직업적 글쓰기도 노동의 한 종류라는 것을 모른척하지 말아야 한다. 너와 나의 같음과 다름을 인지하는 것. ‘연대’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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