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의 뿔」
포근해서 마음이 절로 안정된다. 그게 이 공간에서 처음으로 느낀 것이다.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눈을 뜨고 있는데도 너무 어두워서 주변의 사물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심신이 안마를 받고 있는 것처럼 편안한 탓에 다른 무언가에 굳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지루하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몇 번이나 같은 내용을 반복하다보면 결국은 지루할 뿐이다. 아무리 천상의 미(美)를 지닌 음식이라 할지라도 매일 먹다보면 결국 식상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때 그것은 제멋대로 등장한다. 사실 침착하게 생각해보면 별 거 아닐지도. 하지만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건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다. 설령 이것이 현실과 구별하지 못할 정도의 리얼리즘을 담은 꿈이라는 걸 인식할지라도 말이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는 푸르스름한 빛을 눈으로 확인한다.
깨닫는다. 나는 눈을 뜨고 있구나. 그리고 이 주변은 완전한 어둠으로 둘러싸여있구나― 라고.
소년은 멋대로 저것을 칼이라고 단정한다. 살짝 무릎을 굽혀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빛의 궤도를 피해내면 다른 빛줄기가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날아온다. 그것까지 피해낼 수 있는 재주는 없다.
사방은 새까만 어둠. 자신의 발치조차 분간하기 힘든 시야 속에서 존재조차 느낄 수 없는 누군가의 공격을 피해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소년은 어째서 칼날처럼 느껴지는 푸르스름한 빛줄기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지조차도 알지 못한다.
소년은 차갑게 자신의 사고를 비웃는다. 이유를 안다면 이것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일까? 그럴 리가. 포근하고 안락했던 공간은 이내 차갑고 무자비한 북풍을 품은 냉동 창고로 변해버렸다. 체온이 떨어지면서 점점 몸은 둔해지고 결국 날아오는 칼날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살갗이 베이듯 찢겨지고 그곳에서 붉은 생명수가 줄줄 흘러나오면 그제야 소년은 알아차린다. 아니, 사실은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내용.
몇 번이나 반복되는 광경.
몇 번이나 반복되는 사고.
몇 번이나 반복되는 통증.
칼날에 베인 곳은 처음에는 따갑다가 조금 후에는 간지러워진다. 마치 모기에 물린 것처럼 간지러운 상처를 만지고 있으면 어느 사이엔가 사라진다. 흘러내렸던 피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피는 보이지 않았어야 한다. 여기는 빛이 없는 완전한 어둠이니까. 그런데 어째서 피는 보였던 것일까.
갑자기.
소년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프다. 눈물이 쏙 나올 만큼 아프다. 상처가 아니다. 상처가 없는 가슴이 아프다. 가슴, 그것도 아주 깊숙한 곳. 스스로가 달랠 수도, 어루만질 수 없는 아주 깊은 심연의 수면에 생겨난 파문이 아프다.
아―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통증도 사라졌다.
가슴에 있었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지자 간신히 여유가 생겼다. 시야가 확 밝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눈은 거부감 없이 빛을 받아드린다. 어두운 곳에서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가면 잘 보이지 않는 게 정상이 아니던가. 최소한 찡그리는 표정이라도 지어야 할 텐데.
괜한 걱정을 하고나서 주변을 둘러본다. 사막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 살면서 소년은 사막을 자신의 눈으로 본적은 없지만 끝없는 붉은빛 모래로 펼쳐진 이곳을 백사장이라고 말하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넓었다.
분명 여기는 사막이다.
하늘을 둘러본다.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좋은 날씨? 하하. 소년은 끝이 갈라진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린다. 애당초 좋은 날씨라는 게 뭘까. 맑으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 사막에서는 오히려 흐린 날씨가 좋을 지도 모른다. 이 넓은 사막을 땡볕 밑에서 횡단해야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소년은 지금처럼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흐린 날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세상이 포근하고 안락하면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지의 영역이었다면 지금 있는 곳은 건조하고 우중충한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무엇보다도 주변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더없는 만족감을 주고 있다.
보이지 않아서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여기는 푸르스름한 빛도 없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지금까지 꿨던 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단 방향성 없이 무작정 걷기 시작했었다. 사막에서 그렇게 움직이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는 나중에 인터넷을 찾아보고서야 알았다. 왼쪽과 오른쪽 다리에 평소 가중되는 힘이 완전히 같지 않는 이상 결국 커다란 원을 그리며 제자리를 맴돌게 된다는 게 사막의 무서움이다.
나침판이 필요하다.
소년에게 방향을 지시할만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그런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흐린 하늘 탓에 뱃사람들이 자주 바라봤다는 북극성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소년의 손에 나침판이 쥐어진 것도 아니다. 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어디로 가라고 방향을 지시해주는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혼자의 힘으로 이 메마른 세상을 걸어가야만 한다. 소년은 조금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대체 나보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걸까. 애초에 내가 혼자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능력이나 있는 것일까.
어디가 끝인지 모르고 무작정 걷기 시작한 지 얼마나 흘렀을까. 다리는 점점 무거워지고 건조한 공기 탓에 메말라가는 입술은 달콤하고 시원한 물을 요구한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하늘에게 비라도 내려달라고 소리쳐보지만 대답은 없다. 꿈 주제에 이런 경우는 꽤 현실적이다.
주저앉는다. 힘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같은 행위를 반복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손에 모래를 쥐어본다. 쥘 수 있는 만큼 한 손에 가득 담아낸 모래를 퍼 올리자 금세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고 만다. 얼마나 빠져나가나 가만히 있어본다. 그러자 손바닥에 남은 모래는 처음 잡았던 것에 비하자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었다. 무슨 짓을 해도 그 이상을 담을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한 번 도전해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끝이 없다. 그러다가 앞에 쌓인 작은 모래언덕을 발견하게 된다. 어떻게든 많이 가지고 싶어서 도전했지만 결국 손바닥에 남아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모래들이 하나의 언덕을 이뤘다. 이건 실패의 부산물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손으로는 이것밖에 못 가지는데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마음 때문에 쌓인 욕심의 산이다.
소년은 자신의 과오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는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손으로 쓰러트린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손에 쥔 모래를 바라본다. 손 안에 있는 붉은 빛 모래를 보니 알 수 없는 허전함이 찾아왔다. 이것을 쥐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것일까. 겨우 모래 한 주먹 때문에?
소년은 일어섰다. 제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는 원하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려다가 소년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얻을 수 있는 것? 무엇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걸까? 발에 치일만큼 잔뜩 굴러다니는 이 모래 같은 것들?
허무해졌다. 이번에도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울고 싶지 않았다. 이런 것에 흘리기에는 눈물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눈물이 너무 아까웠다…….
스스로 다리에 힘을 풀어버린다. 털썩 주저앉아버린 소년은 멍한 눈으로 땅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모래 아래에 뭔가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모래만 있는 세상에 딱딱한 감촉이라니.
소년은 두 손으로 바닥을 팠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칙칙한 회색빛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모래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뾰족하게 돋아난 모서리에 닿았던 모양이다.
싫다. 이곳이 정말 싫어졌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 제발 이 무미건조한 공간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줘. 꿈인 걸 알았는데도 왜 여기서 나가지 못하는 걸까. 깨어날 수는 없는 것일까.
물어본다는 건 대답을 기대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공간에 대답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년은 갈증이 선사해주는 괴로움 속에서도 냉정한 판단을 내려야한다고 생각했다. 알고 있으면서 애초에 왜 물어봤던 것이었을까. 그렇다. 소년은 답을 알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해온 꿈이 아니었던가.
막 깨어난 순간까지는 무척 생생하지만 그날 오후가 되어버리면 보통 특이하고 인상적인 장면만 떠오를 뿐 구체적인 이야기는 잊어버리는 게 꿈이란 녀석이다. 그러나 이처럼 몇 번인지조차 세기 귀찮을 정도로 반복된 꿈이라면 싫어도 기억하게 된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전혀 모르던 친구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첫 번째는 어둠.
두 번째는 사막.
세 번째는 뭐였더라.
다음 갔었던 장면을 떠올리기 위해서 소년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뇌리 속에 단어들을 나열한다.
꿈, 어둠, 칼날, 사막, 무풍지대, 건조, 해, 구름, 비, 가뭄, 목마름, 갈증, 빛, 푸른색, 콘크리트, 회색, 통증, 칙칙함, 아픔, 괴로움, 상실감, 허무함, 좌절, 귀찮음…… 아니, 이런 게 아니야. 소년은 머리를 흔들어 방금 전까지 떠돌아다니던 것들을 흩뜨려버린다.
새로운 것.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것.
솨아아아―
소리가 들렸다.
신비로우면서 동시에 그리움을 자극하는 소리에 이끌려 소년은 눈을 뜨고 말았다. 눈앞에 펼쳐진 공간은 사막이 아니었다. 지금 소년이 서 있는 곳은 사막의 붉은빛 모래가 아닌 황금빛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석양에서 나온 빛을 머금은 주홍빛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있다.
그래. 바닷가다.
이번에는 알고 있던 장소다. 어린 시절 맞벌이 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소년을 키워준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곳이었다.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일어난 할아버지가 이름을 부르면 깨어난다. 정성으로 차려진 아침밥을 먹고, 항구로 일을 하러 나가는 할아버지를 뒤따라간다. 집을 나서면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해가 보였다.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 아마도 남은 평생에서도 그런 멋진 광경은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소년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어렸던 그때의 시절을 회상하니 앞으로 볼 일출을 모조리 봐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이렇게 일몰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출렁이는 바다를 따라 수면에 비치는 주홍색 빛줄기가 일렁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확연하게 작아지는 모습을 보니 아쉽다고 생각한다.
해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바다에 삼켜질 때까지 놀아도 전혀 지치지 않았던 동네 아이들. 그 속에 어울리면 정말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영원할 것 같은 즐거움.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도 그 아이들과 바닷가에 있으면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얼마나 좋았으면 항구에서 제법 먼 거리에 있는 백사장까지 데리러 온 할아버지가 내미는 손을 붙잡기가 싫어서 도망 다녔을까.
어린 시절의 했던 철없는 행동이 떠오르자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햇빛을 받고 있기 때문에 얼굴은 이미 붉었지만 열기는 아까보다 더 뜨거웠다. 그 열기는 눈물샘을 자극하더니 결국은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아, 그래.
소년은 드디어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움이 가슴에 사무치는 순간 비로소 터져 나온 값진 눈물이었다.
아, 그래…….
소년은 흐느끼면서도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이 아련한 그리움은 눈물을 받아낼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시절. 지금 떠올리면 한편으로는 부끄럽지만 그처럼 편안했던 시절도 없었다.
그때가 정말 좋았다.
소년은 중얼거리며 바닷가를 향해 나아간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발자국이 모래 위로 선명하게 찍힌다. 썰물이 밀려오면 아마 저 발자국도 지워지겠지. 겁은 나지 않는다. 이제 완전히 캄캄해진 새까만 바다로 들어가는 건 전혀 무섭지 않다.
발목을 적시는 바닷물의 차가움에 부스스 몸을 떨게 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소년은 알고 있다. 그래도 멈출 생각은 없었다.
그때가 좋았다는 말은 지금이 싫다는 의미가 되니까.
소년은 곧 바다가 되었다.
아내는 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오지 못했다고 말해야할까. 그런 말할 자격, 적어도 내게는 없다. 사실 나도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는 책임이 있다. 대한민국의 가정을 꾸린 남자, 한 여자의 남편이자, 자식들의 미래를 지원해주는 든든한 아버지로서 당연히 가져야할 책임이 있다. 설령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충격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이겨내야 하는 게 바로 가장이라고 불리는 아버지들이다.
사흘 전, 아들이 죽었다. 사인은 교수골절에 의한 질식사. 아들은 스스로에게 교수형을 선고하고 세상을 떠났다. 못난 녀석.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만큼의 불효는 없다고 가르쳤는데. 생전에 웃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었던 아들의 뒷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메어지는 통증이 느껴졌다. 타이어가 펑크 난 자동차처럼 덜컹거리는 심장이 울어보자고 재촉한다. 이를 악문다. 지금까지 울었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생전에 서울에서 사법고시를 공부하던 아들이 사용하던 방을 정리하러 왔다가 일기장 하나를 발견했다. 일기라고 생각하기에는 이질적이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낯선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하지만 이건 분명 아들이 쓴 것이었다. 글씨체 같은 걸로 알아본 게 아니다. 부끄럽지만 나는 아들의 글씨체를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일기에서 나온 소년처럼 아들 역시 어린 시절을 바닷가에서 지냈다는 것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장인어른이 계시던 해남. 아들은 유년기를 그곳에서 보냈었다.
한 번 읽고,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었다. 그래도 알 수 없는 건 알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도저히 아들의 심리를 알아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도대체 왜 죽어버린 거냐. 둘도 없는 불효자식아.
다시 한 번 올라오는 서러움을 삼키고 근처의 슈퍼마켓에서 가져온 과자박스에 아들이 공부했던 책들과 사용한 물건들을 담았다.
헌법, 판례, 부속법령집, 민법 강의, 민법학, 경제법, 노동법, 국제법……. 법에 관련된 서적들이 차례대로 박스에 들어간다. 부지불식간에 주인을 잃은 책들은 수용소로 이동하는 차량에 탑승하는 유태인들처럼 처량한 표정을 짓는다.
제길. 시원한 욕설을 한바탕 내뱉은 다음 나는 책을 넣다말고 의자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여긴 온통 아들의 흔적뿐이다.
백사장에 쌓은 모래성을 휩쓰는 파도처럼 후회가 밀려온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사법고시만 통과하면 네 인생은 막 개통된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뚫릴 텐데. 고민할 필요도, 괴로워할 필요도, 이렇게 홀로 외딴 장소까지 와서 공부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왜 참지 못하고 반드시 즐거울 수 있는 미래를 버리는 선택을 해버린 것이냐.
내가 살던 시절에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학에서 새로운 세계를 논하며 짐승처럼 자유를 울부짖던 학생들은 군부독재가 내밀던 논리에 휘말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갔었다. 그뿐이던가. 배우지는 않았어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슴으로 알았던 시민들은 하나같이 거리로 나가 총칼을 든 군인들의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다가 누군가의 명령에 발사된 총알에 맞았다.
학생이 국가전복을 꾀하는 반역자가 되고, 명령 하나에 시민들의 옷에 총탄이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떨어져나간 천 조각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붉은 것들이 선명하게 찍혀있던 시절이었다.
단칸방에 쭈그려 숨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개처럼 울부짖는 세상 바꿔보겠다고 끌려단 학우들과 죽어간 시민들의 장송곡을 응원가 삼아 공부했었다. 오직 공부하여 득세하는 것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던 세상.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요즘은 대학을 나온 것만으로 취직이 되지 않는다. 좋은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졸업증명서가 있어도 회사들은 쉽게 취업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토익, 토플, SSAT 점수는 물론 해외연수나 홀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는 기록은 이력서에 당연히 첨부되어 있어야한다. 그뿐인가? 단군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자격증을 따야만 비로소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시대다. 더 많은 것을 요구했으면 요구했지 결코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고등교육을 배운답시고 다니는 대학교에서 중요한 것은 배우는 게 아닌 학점관리와 자격증의 탑을 쌓아올리는 일이다. 그제야 취업의 문턱에 들어설 자격이 생긴다.
공부에 대해서라면 더욱 엄격해진 세상이었다. 군부독재와 총칼이 생존의 등을 떠미는 시대는 역사 저편으로 숨어버렸고 새로 등장한 무한 자유경쟁이 한 가지에 전문화된 인력이 아닌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를 요구하였다.
나는 안타까움에 목이 타들어갔다. 그래도 네 녀석은 한 우물만 팠어도 성공했을 텐데. 나 때와는 달리 부모들의 전폭적인 지지도 있는데. 무엇이 모자라기에 저 세상에 가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려고 꺼낸 지포라이터를 보고는 눈을 질근 감았다. 제길. 짧게 욕설을 뱉어내고서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아들이 처음으로 한 아르바이트는 호프집에서 서빙을 하는 거였다. 그렇게 번 돈으로 사준 첫 선물. 아들이 잠든 후에야 포장을 뜯고 히죽히죽 웃으며 만지작거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자. 여기에 더 머물렀다가는 정신이 남아나지 않을 거 같다.
은행에 돈다발 대신 산탄이 잔뜩 들어있는 엽총을 들고 찾아간 강도처럼 후다닥 서둘러 짐들을 박스에 쓸어 담고 방을 빠져나왔다.
…….
나는 상자를 들고 문턱에서 걸음을 멈췄다. 지옥의 입구에 들어선 기분이 이런 것일까. 지금 나가면 평생 후회한다는 생각이 다리의 근육을 압박하고 있었다. 11미터 높이에서 처음으로 다이빙을 해보는 사람처럼 크게 호흡을 들이마시고 단번에 뒤를 돌아봤다.
아―
나는 크게 입을 벌렸다.
아들이 책상의 끄트머리에 앉아있었다. 삼나무 책꽂이와 벽이 비쳐 보이는 아들의 희뿌연 모습을 본 순간 나는 극심한 충격을 받고 언어를 한동안 잃어버린 사람처럼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거친 호흡을 내뿜고 있는 게 갈증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아들의 이름을 불러보려다가 급하게 이를 악물었다. 크윽. 혀를 살짝 깨물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아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아들이 앉아있던 책상 끄트머리에는 아까 내려놓았던 지포라이터가 반짝이고 있었다.
놓고 갈 뻔 했구나.
2년 전에 아들의 짐을 여기에 내려주고 사라졌을 때처럼. 이번에도 아들만 이곳에 남겨두고 갈 뻔 했다. 상자를 대충 복도에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 지포라이터를 챙겨 주머니에 확실히 넣었다. 그리고 아들이 앉아있었던 책상에 손을 얹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따뜻하다……라는 느낌이 있다.
아들이 마지막까지 있었던 공간. 최근 들어 점점 이것저것 잊어버리는 속도가 체감이 될 정도이지만 이것만큼은 잊고 싶지 않다. 그래서 시간을 들여 이 공간을 차분하게 머릿속으로 집어넣었다.
주인을 잃은 1인용 침대 하나. 마찬가지로 책상과 의자, 그리고 책꽂이에서는 어떤 종류의 감정이입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었다. 길게 호흡을 내뱉으며 나는 어떤 장소를 생각했다.
창문도 달려있지 않아 하늘이 보이지 않는 이 방이 공기는 건조하고 공간은 삭막해서 마치 사막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떠오른 건 아무래도 우연은 아니지 않았을까.
‘아버지, 이것 말고는 안 되는 건가요.’
아들의 짐을 트렁크에서 내려주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내게 물어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네 어미에게 물어보지 그랬냐. 그런 말도 해주지 못했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맑은 눈동자를 지닌 아들의 시선을 피해 나는 도망치듯 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오늘은 아들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두 눈에서 나오는 밝은 빛이 어두컴컴한 색을 지닌 천을 걷어낸다.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다가오는 도로들을 뒤로 보내며 생각한다. ‘오늘은 정말 조용한 날이구나.’ 라고.
자동차의 엔진이 부르르 몸을 떠는 소리. 타이어와 도로가 살을 맞대며 내는 마찰음.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의 휘파람. 사정없이 전면 유리를 두들기는 빗줄기의 우울한 가락. 일정한 간격으로 리듬을 깨트리는 와이퍼의 잡음.
운전자와 일심동체가 된 이런 소리들은 내 사고를 전혀 방해하지 못한다. 새벽 2시. 이따금 방해되는 건 반대편 차선을 지나가는 트럭 같은 자동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강물은 이쪽의 흐름에 전혀 관여할 수는 없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얻어지는 권리. 고맙다고 생각한다.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비로소 고독해질 수가 있다.
아들은 옆자리에 있다. 녀석의 손때가 묻어있는 책들은 결국 트렁크에 넣지 못했다. 조수석에 놓인 박스를 흘긋 쳐다보며 생각한다. 저 자리에 아들이 앉은 게 얼마만인지.
미련이란 녀석은 예고도 없이 곧장 잘도 찾아온다.
가슴 깊숙한 곳으로 통하는 방에 뒷문을 만들어놓고서 열쇠 구멍으로 이쪽의 사정을 엿듣다가 불쑥 튀어나온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뻔뻔한 낯짝을 들이 내밀며 친절한 태도로 말한다.
‘위로해드릴까요?’ 라고.
그 뻔뻔한 태도가 싫어서 저리 꺼져. 라고 말하면 썩 괜찮은 표정을 짓는다. 고놈 참,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면 천직이란 소리 듣겠다.
시답잖은 자기성찰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여태껏 수면을 두들기던 후회의 손가락들이 멈춘다. 이미 지나간 일들. 어찌하겠는가. 아무리 두들겨도 아들과 관련된 추억만 더럽혀질 뿐이다.
살짝 수면을 손가락으로 찔러 넣는다. 뼈가 시리도록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 끝을 통해서 뇌로 전해진다. 지금이 아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추억의 온도는 따뜻한 남쪽 나라로 휴가를 떠난 것처럼 따뜻해진다. 욕조에 몸을 담근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지만 그리 오래 머물 수는 없다. 과거의 기억은 또렷하지 않아서 한정되어 있다. 결국은 다시 차디찬 북방으로 올라오기 마련이다. 차가울수록 기억은 선명하고 고통스러우며 잔인해진다. 아들과 관련된 최근의 몇몇 기억은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다. 수면에 직접 머리를 담구고 뒤져봐도 따뜻한 기억들이란 없다.
그제야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뿐이 아니다. 인정하는 것은 물론 자책까지 한다. 나는 왜 아들에게 그런 차가운 기억만 안겨주고 세상을 떠나가게 만들었을까. 내 안에 있는 무엇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을까.
잘못된 것은 없다. 고시 공부를 하는 아이가 어디 우리 집 아이뿐이겠는가. 이 세상에 그런 아이는 수를 헤아릴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로 많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짓을 반복할 아이들도 많다. 다를 건 전혀 없다. 태어나면 부모의 기대를 받으며 자라나고, 학교를 가기도 전에 예습하고, 학교를 가서는 복습하고, 학교에 나와서는 학원으로 가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잘못된 것은 없다. 남들이 하는 것을 똑같이 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모두가 옳다고 믿고, 모두가 무난하다고 생각하고, 모두가 당연하다고 따르는 수순이다. 아이들의 미래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가 툭 내뱉은 말에 의해 정해진다. 내 아들의 짧은 인생을 정의하자면 이렇게 된다.
잘못된 것은 없다. 어디선가 이건 오류라고 울부짖는 회로 속에 경고하는 어조로 강하게 말해놓는다. 대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면 과연 진정으로 옳은 것은 무엇이고, 그것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가를 따져본다. 확률은 가히 절망적이다. 희망을 바란다면 조금 더 가망성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게 좋잖아?
「아버지, 정말로 그것 말고는 희망이 없는 것일까요.」
머릿속에서 아들의 목소리로 짐작되는 음성이 울렸다. 아까 환각을 보더니 이제는 환청이 들리는구나. 아무래도 휴게소를 만나면 그곳에서 한숨 자고 출발해야겠다.
「아버지.」
녀석의 목소리는 다시 한 번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저리 꺼져!’ 라고 외칠 뻔 했다. 그걸 깨달았을 때 나는 어금니가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악물고 있었다. 살아있었다면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어버린 지금, 아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비록 아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아버지, 전 여기 있어요.」
아들이 그렇게 말했다. 사실 어딘지는 알고 있었다. 이 좁은 차에서 달리 떠올릴 수 있는 장소도 없다. 나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면서 고개를 살짝 돌려 조수석에 앉아있을 아들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했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아들은 고등학교 시절에 입었던 교복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2시간 전에 봤었던 것처럼 뒤의 풍경이 비치는 희뿌연 아들의 몸을 보니 왈칵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이 자식, 정말로 죽어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감성을 자극했다. 아들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그건 묘한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
나는 오밤중에 미련처럼 불쑥 나타난 아들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아들은 빙긋 웃었다. 여태 보지 못한 환한 미소였다. 지금 아들이 느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고등학교 때 입었던 교복차림. 사실 저것을 유심히 본 적은 없었다. 나도 집에는 꽤 늦게 들어오는 편이었고, 때로는 업무의 과중으로 다음날까지 집에 들어가지 못했던 경우가 허다했었다. 그래도 어쩌다가 집에 들어가는 날이면 아들의 방은 늘 불이 꺼져있었다. 아들은 나보다도 늦게 들어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야간학습이 끝나면 곧장 학원으로 갔었다. 마치 학교 수업의 연장인 것처럼 교복을 입고 학원에서 강의를 듣는다. 그리고 12시가 넘어서야 학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기억하는 아들의 모습이다. 대학교를 가고 나서는 거의 본적이 없다. 그래. 내 기억 속에 남은 아들은 저런 모습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건 영락없는 거짓이구나. 저건 내가 바라는 아들의 모습을 가시화시킨 것일 뿐이다. 이해해버리니 우습게도 마음은 아주 편해졌다.
내가 던진 첫 질문에 아들은 소탈한 웃음을 터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 세상도 그리 몰인정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 이후로 어색한 침묵이 우리 사이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물리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대화의 첫 단어를 선택하는 데 있어 정신적으로 꽤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했지만 결국 도달하는 결론은 하나였다.
담담하다는 얼굴로 조수석에 앉아 끝이 보이지 않는 전방의 도로를 주시하는 아들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왜 그런 몹쓸 선택을 했냐.”
그러자 아들은 나타났을 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정말로 그것 말고는 희망이 없는 것일까요.」
아들이 말하는 「그것」이 뭘까. 섣부른 대답으로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의 앞에서라면 언제나 현명한 조언자가 되고 싶어 한다.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 그런 모습을 욕망하지만 나는 그게 아버지들만이 가질 수 있는 환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살던 시대와 아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같으나 아버지 세대와는 다른 문화를 받아드리기에 가치관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그렇기에 아버지들의 말은 아이들에게는 강압적인 명령으로 들릴 수도 있다. 아무리 완곡한 표현을 쓴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알고 싶어 하는 이유보다는 아들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생각해본다.
“공부 말이냐.”
실망스럽게도, 아들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아들의 희뿌연 눈동자는 옅은 베일에 휩싸여있어 감정의 변화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공부가 아니라면 뭐냐. 진로? 법을 공부하는 네 미래의 모습 말이냐?”
희망을 언급하는 아들의 질문을 떠올리자 연관되는 단어로는 아들의 장래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들은 고개를 가로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을 일관하던 녀석은 허공을 비웃는 것과도 같은 건조한 음성으로 메마른 대기를 두들겼다.
「누구의 미래를 말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내 미래요? 아니면 어머니의 미래? 부모님의 미래라고 말할까요.」
뻔뻔스럽게도 책임을 전가하려고 한다.
“웃기지 마라. 어느 누구도 네게 강요하지는 않았어. 네 죽음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겠다고? 그건 비겁한 짓이다.”
「네. 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잘못을 인정하는 아들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들어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강요하지는 않았죠. 다른 길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렸고, 다른 길을 걷지 못하도록 다리를 부러트려 책상 앞에 앉히고, 다른 길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상상의 산물들을 방에서 치워버렸죠. 어른들은 그걸 권유라고 하던가요.」
제길. 대기를 두들긴 것은 살짝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지, 아들의 목소리가 절대 아니다. 저건 내 아들이 아니다. 그저 내가 상상한 아들의 모습일 뿐이다. 녀석이 왜 죽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에 만들어낸 일종의 도깨비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만들어낸 허깨비의 말에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고자 했다면! 나는 네가 무엇을 원하던 전적으로 지원했을 거다.”
말끝이 약간 떨렸지만 방금 내뱉은 말은 진심이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이었다. 부모의 말에 한 번도 거역한 적 없었던 성실한 녀석이었고 그런 착한 심성을 가진 아이였기에 어떤 꿈을 꿔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아버지는 내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않았잖아요.」
“물어봤다. 너는 분명 검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물어보기도 전에 법대에 집어넣었잖아요.」
숨이 턱 막힐 뻔 했지만 그런 빈약한 이유로 내 논리를 헤집어놓을 수는 없었다.
“너 말고도 법대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애는 많다. 그 아이들이 법대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게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야. 너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했다. 나약해서……. 그래서―”
죽어버린 것이냐. 나는 끝내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씹어 삼킨 다음 헛기침을 했다. 목구멍에 걸린 모양이다. 아들은 그런 나를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는 도망쳤을 뿐이다. 눈앞에 놓인 현실에서 도망쳤어. 네 스스로 다른 길을 찾아 걸을 수 있었으면서도 도망쳤을 뿐이야. 자신의 선택을 미화하지 말거라.”
놀랍게도 아들은 순순히 인정했다.
「아버지 말씀은 틀리지 않았어요. 네, 저는 현실에서 도망쳤어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그것……. 드디어 중심에 도달했다는 느낌이 가슴에 도달하자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내가 침묵하고 있자 아들은 멈추지 않고 이어 말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태어났어요. 누군가가 앞서 닦아놓은 길을 다시 걸어갈 뿐이죠. 그 길의 끝에 뭐가 있을 지도 알아요. 잘못된 것은 없어요. 그게 옳은 세상이잖아요. 그렇게 만든 세상이잖아요. 그렇죠?」
옳다고?
녀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세상이 옳다고 인정하는 아들의 태도에 참을 수 없는 화가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두 손으로 거칠게 운전대를 때렸다. 차가 살짝 흔들렸지만 화는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모른다. 밀려오는 시대의 파도를 노려본다고 무너지거나 물러서는 일은 없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어서 포기했잖아. 어떻게, 어떻게 널 죽게 만든 것들이 옳다고 말할 수 있지?”
잘못이다.
아이들에게 이런 것들을 요구하는 세상을 만들어버린 어른들의 잘못이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그건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 아들은 그게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저는 시대에 치여서 죽은 게 아니니까요. 아버지들이 만든 세상을 부정해버리면 아버지는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
아들은 싱긋 웃으며 핸들을 붙잡은 오른손 위로 자신의 왼손을 겹쳤다. 녀석의 손바닥은 꽤 차갑다. 가까이 다가온 아들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다가 눈동자에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녀석을 빼앗아간 세상에 대해 분노하는 나에게 보내는 시선에는 차가운 손과 달리 온전한 따스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세상은 처음부터 혼자였죠. 그네들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세상을 탓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제가 정말로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외로움이었어요.」
뭐라고?
「친구들은 자기 살길을 찾아가기 바빠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정말 많은 애들을 만난 거 같은데 끝까지 곁에 있어주는 친구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죠. 혼자 밥을 먹을 때면 정말 외롭다는 걸 느껴요.」
아니, 그건―
「가족도 마찬가지죠.」
무엇인가 말하려다가 거침없이 몰아치는 아들의 말에 숨이 멎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가로등이 자주 꺼져 있어서 어두웠어요. 문은 항상 열쇠로 열었죠. 아무도 기다리지 않으니까요. 캄캄한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정리하면서 생각해요. 내일도 똑같겠지. 아무도 기다리지 않겠지. 다녀왔니, 고생했어, 푹 쉬렴. ……그 한 마디면 만족했을 텐데.」
아들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녀석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어른들은 다 마찬가지더군요. 아무도 제 생각에는 관심이 없어요. 다들 미래에만 관심을 갖죠. 사람은 한치 앞도 제대로 못 보는 생물인데. 벌써 몇 년 후의 일을 내다보며 생활하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괜찮아요. 그런 건. 당연한 거니까요. 그냥 어깨에 손을 올려줬으면 좋겠어요. 아닌 거 같아도 그럴지도 모른다며 다독여줬으면 좋겠어요. 그저 그런 걸 원했을 뿐인데…….」
고개를 숙인 아들의 머리카락 사이에는 푸르스름한 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뿔 하나가 돋아나 있었다.
해남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그 사이에 또 울었는지 아내의 목소리는 전보다 더 탁해졌다.
“말해.”
“내가, 내가 죽으라고 했나봐.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그냥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나봐.”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고서 다시 흐느끼는 아내를 위로했다. 당신만의 잘못이 아니야. 잘못이 있다면, 아이들에게 그런 짓거리를 강요한 세상을 만든 우리들이니까. 우리 아이를 외롭게 내버려둔 것도 우리들이니까. 당신만의 잘못이 아니야.
후회된다.
왜 좀 더 일찍 아들의 머리에 난 뿔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