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생애 에버그린북스 10
로맹 롤랑 지음, 이휘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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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로맹 롤랑이 <미켈란젤로의 생애> <톨스토이의 생애>에 이어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천재 음악가 베토벤의 일대기이다. 나는 아주 얇은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의 분량과는 상관없이 엄청난 감동을 느꼈다. 어떤 대목에서는 눈물이 나기까지 했다.

얼마 전, 발레리나 강수진 씨의 발이 공개되어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 적이 있었다. 발가락이 보기 흉하게 변형되도록 끊임없이 연습에 또 연습을 하였기에 세계적인 발레리나라는 찬사를 받을 수가 있었다고 언론마다 극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이 책의 84쪽에는 요셉 단하우저라는 사람이 스케치한 베토벤의 손가락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바로 엑스레이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베토벤이 그런 노력을 한 사람이었기에 세계 제1의 악성(樂聖)이라는 찬사를 받는 것이 아닐까.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77012월 퀼른 인근의 본에서 태어났다. 베토벤은 어린 나이부터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꾸려나가야 하는 소년 가장이었다. 열한 살에 극장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었으며 열세 살에는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열일곱 살에 사랑하던 어머니마저 폐병으로 돌아가시고부터는 두 동생의 교육까지도 떠맡았다.

베토벤은 열아홉 살인 1789년에 본 대학의 청강생이 되었으며 20대 중반부터는 청각장애와 위장병으로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음악이 인류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이 시절 친구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나의 예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에 이바지 하여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활동하고 있던 빈이라는 도시는 음악가들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는 베토벤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를 잃게 되는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는 음악 애호가들이 있었다. 1809년에는 빈에서 가장 부유한 세 귀족인 루돌프 대공, 로코비츠 공, 그리고 킨스키 공이 베토벤에게 빈을 떠나지 않겠다는 조건 대신 해마다 4천 플로렌의 연금을 지급하겠다고 하였다.

사람이란 물질적 근심이 없어야만 전적으로 예술에 헌신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비로소 예술의 영예를 빛내는 숭고한 작품을 창조할 수 있음은 자명한 이치이므로, 본인들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생활을 보장하여 그의 천재적 자질의 발휘를 막아버릴지도 모를 야속한 장애를 제거하기로 결의한다.”

30대 중반인 1806, 베토벤은 사랑하는 여인 테레제와 거의 결혼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온갖 열정을 다 바쳐 사랑했던 여인은 끝내 베토벤을 버렸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신분의 차이 때문이었던가 아니면 베토벤에게 재산이 없었다는 게 그 이유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베토벤의 만년에 어떤 친구가 그를 찾아가 본즉, 베토벤은 혼자 테레제의 초상에 키스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40대 중반이 되자 그의 귀는 완전히 막혀 버렸다. 1822년의 <피델리오> 공연 후 쉰들러의 증언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베토벤은 총 연습 때 자신이 지휘하고 싶어 했다. 1막의 2중창에서부터 그가 도무지 듣지 못한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오케스트라는 그의 지휘봉대로 움직였지만 가수들은 제멋대로 나갔다. 전반적으로 혼란이 일어났다. 평상시의 지휘자 움라우프가 잠시 휴식할 것을 제안하였다. 가수들과 몇 마디 주고받은 후 다시 연주가 시작되었다. 아까보다 더한 혼란이 일어났다. 베토벤이 지휘를 계속할 수 없음은 명백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퇴장하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베토벤은 불안한 마음이 되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여러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며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파악하려고 하는 눈치였다. 실내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내가 그의 곁으로 가서 수첩에다가 연주를 계속하지 말게. 이유는 돌아가서 설명하겠네라고 썼다. 그러자 그는 관중석으로 뛰어내리면서...”

 

동생 카를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의 청각장애에 관한 비통한 마음과 동생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너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따로 살고 있는 나를 용서해 다오. (...)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내 병세를 남들이 알아차리지나 않을까 하는 무서운 불안에 사로잡힌단다. 지난 여섯 달 동안 내가 시골에서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청각을 정양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았던 것인데 그것은 내 스스로 원하던 바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번 나는 시림들과 사귀고 싶어 하는 내 성미에 못 이겨서 사교모임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옆의 사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듣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던가, 또 그 사람은 양치는 목자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는데 내게는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에, 그 굴욕감은 어떠하였으랴! 그러한 경험들로 하마터면 나는 스스로 내 목숨을 끊어 버릴 뻔하였다. 그것을 제지하여 준 것은 오직 예술뿐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이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는 이 세상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 내가 죽은 뒤에도 나를 잊지는 말아다오.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해서든지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주고자 노력했으니, 나를 잊지는 말아다오.”

- 1802106일 하일리겐수타트에서 르트비히 판 베토벤

 

동생들을 극진히 아꼈던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했던 휴머니스트, 평생을 들리지 않는 귀 때문에 고생했던 음악가, 임종 시에 모르는 사람이 눈을 감겨주었을 만큼 쓸쓸하게 이 세상을 하직한 천재 음악가 베토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두고두고 인류의 사랑을 받는다.

그가 천재라는 사실은 5번 교향곡과 엘리제를 위하여를 비교하여 들어보거나, 9번교향곡과 월광소나타를 비교하여 들어보면 누구라도 단박에 알아차릴 수가 있다. 어떻게 그다지도 상반된 음악을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 누구보다도 자연을 사랑하고 숲속에 있기를 즐겨했던 사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전원교향곡을 들으며 그의 다음 글귀를 회상한다.

전원에 있으면 내 불행한 청각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거기서는 한 그루의 나무가 나를 향해서 신성하다신성하다라고 말을 건다. 숲속의 환희와 황홀, 누가 감히 이런 것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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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견문록 홍신사상신서 49
마르코 폴로 지음 / 홍신문화사 / 199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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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계여행을 한다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다. 그것도 우리가 흔하게 갈 수 없는 중앙아시아 지역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무려 800년 전에 그런 여행을, 그것도 단 몇 달이 아닌 장장 20여 년을 하였다면 어떨까? 여기에게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 줄 사람들이 있다. 바로 아버지 니콜로, 삼촌 마페오와 함께 1271년부터 1275년까지 장장 24 동안이나 중동, 중앙아시아, 중국, 몽골, 이란, 인도, 수마트라 등지를 여행하며 기록으로 남긴 마르코 폴로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그저 파란만장(波瀾萬丈)이라는 단어가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모진 풍파가 만 길이나 펼쳐져 있다는 뜻이니 그 고생이 오죽이나 심하였을까? 이제 본격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해 보자. 원체 이들의 여정이 복잡하므로 그냥 큰 줄기만 이야기하여야 하겠다.

무역상이었던 아버지 니콜로는 마르코 폴로가 태어나기 전 보석 무역을 위해 동생인 마페오 폴로와 함께 동쪽으로 떠났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도중에 원나라의 사신을 만났는데 그의 제안으로 원나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1년을 여행하면서 동방의 이국적이고 신기한 풍물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원나라에 도착하여 쿠빌라이 황제를 알현하게 된다. 니콜로와 마페오는 쿠빌라이가 서방의 교황에게 파견하는 사신으로 임명되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지만 당시 교황이 사망하는 바람에 다시 선출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269년 아버지와 삼촌이 고향인 베니스로 돌아오자 마르코는 15년 만에 아버지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새로 선출된 교황이 이들 3명을 만나 쿠빌라이에게 보내는 서신으로 원나라에 파견한다. 이렇게 하여 1271년 지중해를 건너 터키를 지나 호르무즈해협에 도착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해로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결국 육로를 이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파미르 고원을 경유하여 타림 분지에 이르렀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지나,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쿠빌라이의 여름 궁전이 있는 상도(上都:현 네이멍구자치구의 도시)에 도착하여 쿠빌라이를 알현하였다. 그것이 1274년이었으니 길로 3년의 긴 여행이었다.

당시 20세가 채 되지 않은 마르코는 원체 총명하여 원나라의 말과 습관을 금세 익혔으며 그런 마르코를 쿠빌라이는 극진히 총애하였다. 마르코는 원(중국)에 머물며 여러 차례 황제의 특사로 외국에 파견되었다. 마르코는 17년간 원나라에서 머물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쿠빌라이칸에게 청하였지만 그를 총애한 칸은 번번히 거절하였다.

마침 마르코 폴로 일행은 이란의 몽골왕조인 일 한국(汗國)의 왕비가 사망하자 그 나라 왕에게 시집가는 원나라 공주의 여행 안내자로 선발되어 겨우 원나라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행은 이번에는 해로로 자바 ·말레이 ·스리랑카 ·말라바르 등을 경유하여 이란의 호르무즈에 도착하였는데, 또다시 우여곡절 끝에 1295년에야 겨우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런 엄청난 거리를 당시 폭도, 산적, 해적, 풍토병의 위험이 도처에 널려있는 상황에서 20여 년을 여행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보아야 하겠다.

우리들이 읽는 이 책도 우여곡절 끝에 마르코 폴로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옆 사람에게 구술한 것을, 원본은 없어지고 여러 사본들(F, FG, VA, P, R, Z본 등이 있다) 중에서 F본을 바탕으로 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책에는 수백 가지의 진기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지면상 겨우 다섯 개 정도만 소개하겠다.

마르코 폴로 일행이 소재한 쿠빌라이 칸의 황금패자(일종의 마패로 46cm x 10cm2kg 무게의 순금)는 어느 곳에서든지 내보이기만 하면 필요한 모든 물품, 장비, 인원, 숙소 등을 제공받을 수 있다. 만약 어기는 족장, 성주, 국왕은 멸문지화를 당한다.

티베트의 어느 지방에서는 처녀를 아내로 맞지 않는다. 남자를 전혀 모르는 여자는 신이 잃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외지에서 손님들이 찾아오면 처녀의 어머니들은 그들에게 제발 자기의 딸과 동침하여 달라고 사정사정한다.

중국 사천성의 어느 부족은 lq에 손님이 찾아오면 자기 아내를 빌려주고 저기는 계속 외부에 머물러 지낸다. 부인은 손님이 갈 때까지 집 문 앞에 손님의 모자나 옷을 걸어 놓아 손님이 아직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남편은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을 때에야 집에 돌아온다.

수마트라 섬에서는 병자가 죽으면 그 가족들이 죽은 시체를 뼈만 빼놓고 살은 모조리 발라 먹는다. 뼈에 조금이라도 살이 붙어 있으면 벌레들이 파먹게 되는데, 그러면 망자의 넋에 재앙이 닥친다고 믿는다.

인도의 바라문교도들 중 어떤 족속은 완전 나체로 지낸다. 남자건 여자건 그들은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하기를, 인간은 원래 알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알몸으로 지내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지팡구(일본)는 손바닥 두께의 황금으로 길이 뒤덮여 있다는 이야기며(이것은 저자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바그다드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하여 산을 1km나 옮겼다는 이야기, 칸의 궁전에서는 술잔이 이리 저리 공중을 날아다니면서 신하들에게 술을 전달한다는 등, 믿기 어려운 대목들도 여러 군데 있지만, 1280 ~ 1290년대 세계의 절반이나 되는 지역의 풍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진기한 책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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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론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26
맬서스 지음, 이서행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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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 스미스의 계보를 이으면서 후일 다윈(1809~), 마르크스(1818~), 케인즈(1883~)등의 후학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진 책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가레트 하딘의 1968년도 논문 공유지의 비극이론도 결국은 여기서 차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도 들 정도이다. 그만큼 이 책은 여러 학자들에게 두고두고 영향을 준 책이다.

    토마스 로버트 맬서스(1766 ~ 1834)는 런던 남부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집안은 꽤 잘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그가 후일 목사로 살았기 때문에 책에 지나치게 가정을 강조하고 난잡한 성 풍속을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케임브리지대학의 킹스칼리지에 입학하였는데 그가 1학년일 때 교재로 쓰였던 페일리의 <도덕철학 및 정치철학의 원리>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인들이 흔히 <인구론>하면 가장 잘 알고 있는 두 가지 핵심사항이 있다. 첫째,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밖에 증가하지 않으므로 인구와 식량 사이의 불균형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둘째, 여기에서 기근 ·빈곤 ·악덕이 발생한다는 주장이다. 책은 맨 앞의 제1(인구와 식량증가율)에서 인구론의 핵심으로 위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이론을 풀어나간다.

    현재 세계인구가 10억이면 인류 총수는 1 - 2 - 4 - 8 - 16 - 32 - 64 - 128 - 256으로 늘어날 것이지만, 생존자원은 1 - 2 - 3 - 4 - 5 - 6 - 7 - 8 - 9로 늘어날 것이다. 200년 뒤에는 인구 대비 생존자원 비율은 256 9 ...(p22)

그러면서 그 해결책으로 타락한 풍습과 질병, 그리고 생존자원과 무관한 인간을 약화시키고 파괴하는 모든 정신적, 물질적 원인들을 개선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이것이 인구론의 핵심주장은 맞다. 하지만 인구론에는 우리들이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여러 가지의 주제들과 사상들이 담겨져 있다.

   우선은 인구론이 단 한 번에 완성된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들이 인구론을 검색하면 1798년에 출판되었다고 나오지만 이것은 처음 초판본이 나온 때를 말함이다. 맬서스는 그 후에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6판을 26년 만인 1824년에야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분량으로 치자면 초판본 분량의 무려 다섯 배에 달한다. 그러니까 맬서스는 초판본에서 인구론의 아주 핵심적인 내용과 연구 방향만을 밝혔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인구론의 내용이 아주 방대하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위의 두 가지 명제(또는 핵심 사항)은 아주 단편적인 결론일 뿐이다. 그는 이러한 결론을 유도해 내기 위하여 2편과 3편에서(책은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전 세계의 생활습관을 장장 300여 페이지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야만사회의 경우, 아메리카 인디언의 경우, 미크로네시아 군도의 경우, 고대 북유럽의 경우, 북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근대 유목국가의 경우, 아프리카의 경우, 시베리아의 경우, 인도, 중국, 일본의 경우까지, 정말 거의 전 세계의 결혼 및 생활습관을 분석하고 있으며, 그들 각 지역의 출생과 사망에 관한 통계를 여러 학자들이나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분석하고 있다.

    프랑스의 인구 증가를 설명하는 통계가 재미있다. 1820년의 출생 수 957,875, 사망 수 764,848, 혼인 수 218,917, 사망 대비 초과 출생 수 193,027인데, 여기서 초과출생 수를 대략 20만으로 단순화 해 볼 경우 매 25년마다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한다는(20년 후면 3천만) 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당시의 프랑스 인구가 3,045만 명이라고 하는 통계는 <프랑스 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인구 숫자와도 일치한다.

그러면 책에서 강조하는 부분들을 아주 간략하게 살펴보자.

 

전쟁, 야만성, 폭력, 강간, 식인습관, 불결한 위생상태, 전염병 창궐과 같은 원인들이 인구를 감소시킨다.

유목민에게는 강한 이동능력이 있는데, 그것을 곧 전투능력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것도 결국은 훈족의 이동이 게르만족의 연쇄 이동을 불러 온 때문이었다.

중동-아프리카 지역에는 무더위로 인한 게으름이 만연해 있으며 여자들은 조혼으로 인하여 11살부터 아이를 낳기 시작한다.

중국은 땅이 비옥하고 통치자가 농업을 장려하는 문화가 있다. 이것이 인구 증가에 기여한다.

그리스-로마의 경우는 많은 숫자의 노예가 인구 증가에 방해요인으로 작용한다.

터키-페르시아의 경우는 일부다처제 때문에 남자의 정력이 30세 전후면 고갈된다.

조혼이 성행하는 가난한 나라의 사망률(1:20)은 교육이 좋고 부유한 나라의 사망률(1:40)보다 두 배의 차이가 난다.

질병은 자연재해가 아니다. 불결과 게으름 - 전염병 창궐 - 인구 다수 사망 - 하수도 확충 - 위생개선 - 통풍 개선 - 전염병 근절 - 인구증가의 선순환도 가능하다.

구빈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 속에서 양육되어야 한다. 사생아들은 일찍 죽는다.

 

    맬서스는 책의 제3편에서 책 전체 분량의 1/3을 할애하여 구빈법 제도를 설명하고 있다. ‘영국 엘리자베스 빈민법또는 구빈법으로 불리는 이 제도는 1500년대부터 시행되어 왔는데, 그는 영국뿐만이 아니라 아일랜드, 스웨덴, 프랑스, 네델란드, 독일, 노르웨이 등등의 다양한 제도를 연구하고 나서, 구빈법은 국가 전체의 자원을 감소시킴으로 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며, 극단적인 가난은 구빈제도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어떤 인간의 방법과 노력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기부금과 같은 강제행위는 결국 그것이 물가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가장 먼저 지적할 것은, 기부금의 강제적 납부는 필연적으로 노동에 대한 간접세와 동일한 작용을 하며, 애덤 스미스가 적절히 언급한 바와 같이, 결국 이를 부담하는 것은, 그것도 더욱 값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노동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이라는 점이다. 결국 이 정책은 구빈세를 높아진 인건비와 물가로 대체하는 셈이 된다.(p515)

    요즘의 우리나라에서 만연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복지제도를 수립하고 집행하는 정부 부서들이 참고해 볼만한 구절이다. 물론 지금 우리는 인구증가가 문제가 아니라 인구감소를 걱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맬서스의 인구론은 두고두고 곱씹어 보아야 할 명저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다음 결론은 반드시 명심해야 할 내용이다.

    “인간의 이기심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p550 전체 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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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원의 증언
나경원 지음 / 백년동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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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올바른 정치인의 올바른 생각을 읽었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판사 생활을 하다가 정계에 입문하여 4선 의원으로 자유한국당(현재 국민의힘) 원내총무를 역임했던 나경원 전 의원의 에세이이다.

나의 서재에는 많은 정치인들의 회고록 또는 자서전이 있다. 이승만, 박정희, 노무현, 김영삼, 전두환, 김대중, 이인제, 이명박, 박근혜 등등, 그 여러 책들 중에서도 이 책은 비록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한 정치인의 생각을 가장 사실적으로 솔직하게 표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기나 자서전은 본인이 자신의 양심을 걸고 집필하는 책이다. 비록 그것이 본인 스스로가 썼던 아니면 다른 대필 작가의 손을 빌렸던 간에 솔직하게 쓴다라는 사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어떤 책들은 읽으면서 무언가 사실을 교묘하게 왜곡하여서 썼다는 의심이 들었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그게 아닌데, 분명 자서전에는 그렇게 써 놓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책은 상당히 사실적이고 솔직하다. 본인이 시종일관하게 견지하여 온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옹호하면서 일반적인 상식에 근거하여 정치를 해 보려는 저자의 생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몇 군데를 살펴보겠다.

나는 대법원의 강제징용판결이 옳은가 그른가를 가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대법원 판결이 수년간 미루어져 온 것을 사법자제리는 법리로 옹호할 생각도 없다. (...) 나는 바로 이러한 점에 비추어 문재인 정권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정치적으로 필요로 했다고 하는 것이다.(pp68 ~ 69)

위 글은 강제징용판결을 사법농단이라고 몰아세우면서 정략적으로 이용하였다는 저자의 생각을 밝힌 부분이다. 내가 알기로도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에서 우리는 무상으로 3억 달러를 받았다. 그해의 우리나라 무역액이 30억 달러 정도였다니까, 일 년 무역액의 10%를 배상금 형식으로 무상으로 준 셈이다. 그 금액을 올해 우리나라의 무역액으로 환산해 보자. 2020년 무역액 1조 달러의 10%1천 억 달러, , 환화로 치면 120조 원에 달하는 엄청난 거금이다. 가령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 우리가 과거에 일본에게 몹쓸 짓을 하였다고 치고 지금 120조 원을 배상금으로 주었는데, 50, 70년이 지난 다음에 그건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다시 더 내놓으라고 하면 그것이 과연 온당한 처사인가? 그 돈으로 우리가 고속도로도 닦고 포항제철도 세우고 해서 산업을 일으킨 것 아닌가?

한번 서울을 보십시오. 저 높은 빌딩, 우리는 대한민국의 역사가 자랑스럽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역사를 가진 민족입니다. 우리는 전쟁의 폐허, 가난과 절망의 늪 위에 풍요와 긍정의 땅을 일군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뭐라고 했습니까? ‘독재의 후예라고 했습니다. 3대 세습 독재에 나 몰라라 하고, 북한 인권 나 몰라라 하는 문재인 대통령, 그런 말 할 자격 있습니까? 오히려 지금 좌파 독재를 곳곳에서 펼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이야말로 좌파 독재의 화신이 아닙니까?(p147)

위 글은 201910월 광화문집회 때에 나경원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한 말이다. 내가 1979~ 1980년에 현대차 포니를 수출한다고 돌아다닐 때에 중동과 아프리카를 다녀보면, 한국은 대사관조차도 변변히 없었다. 어떤 나라에는 그저 영사관이라고 해서 호텔에 방 하나 빌려서 태극기 걸어 놓고 거기서 영사 혼자서 업무를 보고 있는 나라도 있었다. 반면에 북한은 대사관 건물의 담장이 무려 100m가 넘었다. 그것도 번화가의 쉐라톤 호텔 바로 옆에 그렇게 번듯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북한에 한참 뒤져 있다고 했고 또 우리들도 그런 말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지냈다. 그런 대한민국을 불과 반세기 만에 이렇게 눈부시게 발전시켜 놓은 것이다. 다 시장경제의 힘이요, 위대한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엄마 꿈 깨!”

나는 이 말이, 딸이 엄마인 나경원 의원에게 한 말인 줄로 알았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경원 의원의 딸이 다니는 학교의 교장이 한 말이란다. 저자의 딸이 다운증후군이 있다는데 받아주려고 하는 학교가 없어서 동부서주 하던 중, 어렵사리 어느 사립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과 면담이 잡혔단다. 아이를 입학시키려고 원서를 써서 들고 간 김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확인을 받고 싶었단다.

그날 교장실에서 겪은 일은 나를 180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책상 뒤로 교장선생님이 앉아계셨다. 이 분야 교육의 개척자로 잘 알려진, 인터넷 검색 창에 넣으면 주루륵 뜨는 이름이다. 그 교장 선생님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장애 아이를 교육시킨다고 해서 보통 아이처럼 되는 줄 알아? 꿈 깨!”

나는 꿈이 깨졌고 꿈에서 깨어났다. 장애를 가진 딸을 반듯하게 교육시켜서 꼭 결실을 맺겠다는 꿈이 아니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교육자라면 모름지기 보듬어주지 않을까 하는 꿈이 깨졌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세상은 충분히 좋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꿈에서 깨어났다.(p196)

그때까지만 해도 꼼짝도 않고 오히려 장애아를 가진 학부모라고 무시하던 교육청과 학교 측에서, 저자가 자신이 판사라는 신분을 밝히자, 그 때서야 겨우 태도가 바뀌더라는 현실을 고발한 대목이다.

다음은 책에 부록으로 삽입한 무너지는 헌법가치 국민과 함께 지켜내겠습니다라는 제목의 20193월 국회 원내교섭단체 대표 연설 중 일부이다.

(...) 이 위대한 대한민국이 좌파 정권에 의해 무너지고 있습니다. 국민을 편 가르는 정치, 당장의 인기에만 집착하는 정치, 정의의 논리를 독점하며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정치, 과거에 얽매여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정치, 동맹의 소중함과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는 정치...... 바로 그런 정치가 이 나라를 뿌리째 흔들고 있습니다.(...)

 

나경원 전 의원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또 그녀의 미래가 어떻게 풀려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낙선의원 변호사로서의 인생을 살게 될지, 또는 다시 정계로 돌아와서 서울시장이 될지, 아니면 더 큰 일까지도 할지는 오직 신만이 일고 계시리라.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실제로 우리나라의 변화를 체험하고 목격한 사람으로서, 이런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앞으로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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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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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에 따른 죄인가? 자발적으로 저지른 죄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심리학 또는 사회학 용어를 탄생시킨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 ~ 1975)는 유대인으로, 독일의 유대인 학살로부터 탈출한 사람이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자를 자세히 아는 것이 필수이다.

한나 아렌트는 1906년에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칸트가 평생을 보냈던 도시다. 그녀는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성장하였다. 16세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만큼 조숙하고 명석한 소녀였다. 가정교육과 베를린 대학교 청강을 거쳐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하여 그곳에서 신진 철학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마르틴 하이데거 교수를 만난다. 18세의 한나와 이미 기혼자였던 35세의 마르틴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이후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스승이자 연인이 된다.

하이데거가 인간의 본질을 회복하는 과제를 기본적으로 개인 차원에서 모색하였다면, 아렌트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란 곧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며, 그런 자유를 부정하고 모든 사람의 생각을 하나의 의지에 통합하려 하는 파시즘은 정치가 아닌 폭력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1929, 23세가 된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의 개념>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때까지 그녀는 유대인으로서의 자기 인식이 뚜렷하지 않았지만 히틀러가 떠오르면서 그에 저항하기 위해 유대인 조직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19331, 히틀러는 마침내 권력을 잡자, 아렌트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일주일 동안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다음 프랑스로 망명한다. 같은 해에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총장에 취임하는 한편 나치당에 가입하는데, 이때부터 연인이자 사제의 관계였던 둘운 갈라서게 된다.

이후 아렌트는 1941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며 반 나치 운동 등에 참여하고, 남편과의 이혼, 재혼을 겪다가 프랑스가 독일에 유린되자, 가까스로 독일을 벗어나서 미국으로 간다. 생활이 비로소 안정되면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학술 연구에 몰두하는데, 1951년에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내놓아 일약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이 책에서 그녀는 서로 정반대의 이념을 가진 듯한 파시즘과 스탈린 식의 사회주의 체제를 전체주의라는 틀로 묶고, 이들은 어느 것이나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광기와 공포로 지배하는 정치형태라고 주장한다.

1958년에 낸 <인간의 조건>은 그녀를 현대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그녀는 교양잡지 뉴요커의 지원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건너가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1960,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정보부에 붙잡히고 이스라엘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아렌트는 잡지사 뉴요커의 특별 취재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판과정을 취재한다.

196112월에 열린 아이히만 재판을 직접 재판정에서 지켜본 그녀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는 1963년에 출판되어 큰 논쟁을 일으킨다. 아렌트는 피고석의 아이히만에게서, 실제로 저지른 악행에 비해 너무 평범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또 그녀가 보기에 그는, 피에 굶주린 악귀도, 냉혹한 악당도 아니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냥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재판과정 내내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고 한다.

 

이제는 실제로 책 속에서 아이히만의 행적을 살펴보자

아이히만은 1906년 칼과 가위로 유명한 독일 마을 솔링겐(프랑크푸르트 북페어에 다녀올 때면 쌍둥이 칼세트를 사서 친척들에게 주었던 기억이 새롭다)에서 태어났다. 그는 직업학교를 그럭저럭 다녔고 전기설비회사 등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했다. 그의 평범한 삶은 1932년에 그가 나치당에 가입하고 친위대에 들어가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악명 높은 친위대장 힘러의 지휘 아래 들어간 그는 전쟁이 시작되는 19399월이 되면 베를린으로 진출하게 되고(그 전까지는 여기저기 변경 부대에 하급지휘관으로 있었다) 유대인 이주를 책임지는 제국본부의 수장이 된다. ‘유대인 이주라고 함은 유대인들을 여기저기서 잡아들여서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는 일을 말한다. 다음은 책의 152쪽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그 해 가을에 그는 직속상관인 뮐러의 지시에 따라 폴란드 서부지역의 학살센터를 조사하러 갔다. 이 죽음의 수용소는 쿨름에 있었는데 이곳은 유럽 전역에서 이송되어 온 3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1944년에 살해된 곳이다. 여기서 일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그 방법이 달랐다. 가스실 대신 이동용 가스차량이 사용된 것이었다. 이이히만이 본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유대인들은 큰 방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옷을 벗고 트럭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 그 트럭은 넓게 파인 구덩이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고 그리로 시신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 민간인이 치과용 집게를 가지고 이빨을 뽑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보고서를 작성한 후, 아이히만은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라고 기술하여 놓았다. 그런 것으로 보면 이 사람이 이런 일을 즐겨서 하거나 기꺼이 한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이 책을 모두 읽고 난 나의 전체적인 소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에 뜨이는 대목은, 히틀러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 공동체라는 이런 저런 유대인 위원회들이 나치스와 협력하여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마치 우리나라 6.25한국전쟁 당시에 인민위원회라는 조직이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한 것과도 같다.

모든 국가 당국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위원회도 아주 빠르게 나치스의 도구가 되어버린 네덜란드에서는 103000명의 유대인이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대략 5000명은 테레지엔슈타트로 통상적인 방법을 통해 이송되었는데, 이는 물론 유대인 위원회의 협력을 받아서였다.” p197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의 번역이 형편없다고 서평을 달아 놓았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편집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출판사 사장이라는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볼 때, 보통 책들이 23~ 24줄인데, 이 책은 무려 28줄이나 된다. 그래서 읽기가 굉장히 힘들다. 책을 420페이지에서 끝낼 것이 아니라, 좀 더 읽기 편안하게 해서 500페이지 분량으로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랬더라면 독자들로부터 꽤 좋은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텐데 조금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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