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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평점 :
명령에 따른 죄인가? 자발적으로 저지른 죄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심리학 또는 사회학 용어를 탄생시킨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 ~ 1975)는 유대인으로, 독일의 유대인 학살로부터 탈출한 사람이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자를 자세히 아는 것이 필수이다.
한나 아렌트는 1906년에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칸트가 평생을 보냈던 도시다. 그녀는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성장하였다. 16세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만큼 조숙하고 명석한 소녀였다. 가정교육과 베를린 대학교 청강을 거쳐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하여 그곳에서 신진 철학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마르틴 하이데거 교수를 만난다. 18세의 한나와 이미 기혼자였던 35세의 마르틴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이후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스승이자 연인이 된다.
하이데거가 인간의 본질을 회복하는 과제를 기본적으로 개인 차원에서 모색하였다면, 아렌트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란 곧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며, 그런 자유를 부정하고 모든 사람의 생각을 하나의 의지에 통합하려 하는 파시즘은 정치가 아닌 폭력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1929년, 23세가 된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의 개념>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때까지 그녀는 유대인으로서의 자기 인식이 뚜렷하지 않았지만 히틀러가 떠오르면서 그에 저항하기 위해 유대인 조직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1933년 1월, 히틀러는 마침내 권력을 잡자, 아렌트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일주일 동안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다음 프랑스로 망명한다. 같은 해에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총장에 취임하는 한편 나치당에 가입하는데, 이때부터 연인이자 사제의 관계였던 둘운 갈라서게 된다.
이후 아렌트는 1941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며 반 나치 운동 등에 참여하고, 남편과의 이혼, 재혼을 겪다가 프랑스가 독일에 유린되자, 가까스로 독일을 벗어나서 미국으로 간다. 생활이 비로소 안정되면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학술 연구에 몰두하는데, 1951년에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내놓아 일약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이 책에서 그녀는 서로 정반대의 이념을 가진 듯한 파시즘과 스탈린 식의 사회주의 체제를 전체주의라는 틀로 묶고, 이들은 어느 것이나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광기와 공포로 지배하는 정치형태라고 주장한다.
1958년에 낸 <인간의 조건>은 그녀를 현대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그녀는 교양잡지 뉴요커의 지원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건너가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1960년,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정보부에 붙잡히고 이스라엘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아렌트는 잡지사 뉴요커의 특별 취재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판과정을 취재한다.
1961년 12월에 열린 아이히만 재판을 직접 재판정에서 지켜본 그녀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는 1963년에 출판되어 큰 논쟁을 일으킨다. 아렌트는 피고석의 아이히만에게서, 실제로 저지른 악행에 비해 너무 평범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또 그녀가 보기에 그는, 피에 굶주린 악귀도, 냉혹한 악당도 아니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냥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재판과정 내내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고 한다.
이제는 실제로 책 속에서 아이히만의 행적을 살펴보자
아이히만은 1906년 칼과 가위로 유명한 독일 마을 솔링겐(프랑크푸르트 북페어에 다녀올 때면 ‘쌍둥이 칼‘ 세트를 사서 친척들에게 주었던 기억이 새롭다)에서 태어났다. 그는 직업학교를 그럭저럭 다녔고 전기설비회사 등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했다. 그의 평범한 삶은 1932년에 그가 나치당에 가입하고 친위대에 들어가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악명 높은 친위대장 힘러의 지휘 아래 들어간 그는 전쟁이 시작되는 1939년 9월이 되면 베를린으로 진출하게 되고(그 전까지는 여기저기 변경 부대에 하급지휘관으로 있었다) ‘유대인 이주’를 책임지는 제국본부의 수장이 된다. ‘유대인 이주’라고 함은 유대인들을 여기저기서 잡아들여서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는 일을 말한다. 다음은 책의 152쪽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그 해 가을에 그는 직속상관인 뮐러의 지시에 따라 폴란드 서부지역의 학살센터를 조사하러 갔다. 이 죽음의 수용소는 쿨름에 있었는데 이곳은 유럽 전역에서 이송되어 온 3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1944년에 살해된 곳이다. 여기서 일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그 방법이 달랐다. 가스실 대신 이동용 가스차량이 사용된 것이었다. 이이히만이 본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유대인들은 큰 방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옷을 벗고 트럭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 그 트럭은 넓게 파인 구덩이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고 그리로 시신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 민간인이 치과용 집게를 가지고 이빨을 뽑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보고서를 작성한 후, 아이히만은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라고 기술하여 놓았다. 그런 것으로 보면 이 사람이 이런 일을 즐겨서 하거나 기꺼이 한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이 책을 모두 읽고 난 나의 전체적인 소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에 뜨이는 대목은, 히틀러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 공동체’라는 이런 저런 유대인 위원회들이 나치스와 협력하여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마치 우리나라 6.25한국전쟁 당시에 ‘인민위원회’라는 조직이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한 것과도 같다.
“모든 국가 당국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위원회도 아주 빠르게 ‘나치스의 도구’가 되어버린 네덜란드에서는 10만 3000명의 유대인이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대략 5000명은 테레지엔슈타트로 통상적인 방법을 통해 이송되었는데, 이는 물론 유대인 위원회의 협력을 받아서였다.” p197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의 번역이 형편없다고 서평을 달아 놓았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편집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출판사 사장이라는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볼 때, 보통 책들이 23줄 ~ 24줄인데, 이 책은 무려 28줄이나 된다. 그래서 읽기가 굉장히 힘들다. 책을 420페이지에서 끝낼 것이 아니라, 좀 더 읽기 편안하게 해서 500페이지 분량으로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랬더라면 독자들로부터 ‘꽤 좋은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텐데 조금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