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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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겠다는 소망은 해리엇과 데이비드를 하나로 만들었다. 그 둘에게는 어떤 틈도 존재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박해 보이는 그들의 꿈으로 시작된 생활은 다섯째 아이인 벤이 태어나면서 점점 더 균열이 생긴다. 가정의 축을 이루고 있는 부부,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사이에도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이 간극을 벌이면서 둘 사이에 어떤 틈을 만들어내게 된다.

 

 

   소설의 초반부에 보면 해리엇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혼전에 성관계를 맺지 않음으로써 순수를 지키고 바른 생활을 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들이 나온다. 나는 해리엇이 남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또 결혼을 함에 있어서 타인보다 한 단계 위에서야 하는 고통스러운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소설에서는 해리엇의 이런 욕망들이 고통스러운 것으로, 그리고 타인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는 않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해리엇이 결혼할 때 가졌던 꿈과 이상이 얼마나 허상한 것인지가 드러나게 된다. 이것은 그것이 얼마만큼 주체적으로 성립된 것이 아닌지를 보여주는 반증 같았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결혼을 하면서 자신들의 사정에 맞지 않는, 자신들의 경제사정에 많이 넘쳐 부모님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집을 장만한다. 그곳에서 해리엇은 남편 데이비드와 아이들을 여럿 낳고, 행복한 일상을 보낼 것을 계획하고 다짐하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다섯째 아이인 벤이 태어나고 가족이 균열이 일어나기 전인 시점에도 위 계획은 별로 주체적인 계획이 못 되어 보인다. 위에서도 말했듯, 부모님의 돈을 빌려 가면서까지 무리를 해서 자신들의 삶의 기반인, 집을 마련한 것이 오로지 자신들이 원해서 한 일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게 생각된다고 해도, 그것은 타인들의 시선, 세상의 시선 또 남들의 욕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면화 된 것이리라 생각됐다.

   해리엇의 남들보다 위에서려는, 고통스러운 욕망의 모습은 나르시시즘의 형태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마음이 지치고 텀 없이 아이를 가진 탓에 몸이 많이 망가졌지만 계속해 아이를 가지고 낳는 것을 보면서 비정상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해리엇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하는 행동이지만 왠지 현실의 행복과는 뒤틀린 모습 같아 보였다. 힘들지만 다시 또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낳는 것의 반복은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행동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이를 통해 아이 자체를 보고 그에 따른 기쁨을 갖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통해 자신의 현재를 보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타인보다 한 단계 위에 서야 하는 과정에서 타인을 희생시키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타인을 자신의 밑에 두는 과정에서 타인의 희생은 어떤 모습으로든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그 희생자는 해리엇의 어머니인 도로시라고 생각 한다. 해리엇이 더 많은 아이를 낳을수록 도로시는 지쳐간다. 해리엇의 뒷바라지를 하며, 전에 나온 아이들을 돌보는 일까지 하기에 도로시는 점점 더 늙고 말라가는 것이다. 해리엇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계획한 것에 따르며 살아가는 도중에 그의 어머니 도로시는 그저 해리엇을 거드는 존재로 희생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희생시킴으로써 해리엇은 자신이 계획한 대로 살 삶의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60페이지를 보면 데이비드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이야기에서 또한 해리엇의 심리가 나르시시즘과 관련되어 있는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데이비드가 아이들에게 해준 얘기에서 아이 하나는 숲속에서 길을 읽은 후 연못가에 앉아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물에 비친 소녀는 고약한 미소를 짓게 되고 아이는 그 소녀가 물 밖으로 튀어나와 자신을 끌고 들어갈 거라고 느끼게 된다. 남편의 이 이야기를 들으며 해리엇은 자신의 이야기 같아 괴로워한다.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은 자연스레 나르시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아이가 물 밖으로 튀어나와 자신을 끌고 들어갈 거라고 느끼는 부분은 데이비드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해리엇의 심리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섯 째 아이를 가지며, 다른 아이들을 가졌을 때와는 다른 몸의 이상을 느끼고 자주 불안해하는 해리엇의 모습은 자신의 행복이 깨지게 될까봐, 자신이 애써 계획하고 만들어온 현실이 깨지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읽혔다.

 

   다섯째 아이인 벤을 가진 8개월 째, 해리엇은 브래트 박사에게 가서 유도분만을 해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브래트 박사는 이를 거절하게 되고 해리엇은 그에 반응하여 자신을 그저 히스테릭한 환자로 보는 것이냐며 브래트 박사를 비난하게 된다. 벤을 가진 후 점점 더 시간이 흐르고 벤이 세상에 나올 때가 다가오며 해리엇은 자주 불안해하며 지칠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벤의 출산이 가까워져 오면서 해리엇은 자신의 말대로 히스테릭한 사람이 된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해리엇의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도 힘들어 하게 된다. 해리엇의 이런 신경증 적인 모습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떠올리게 했다. 오늘날 신경증은 그 개인에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경험이 계기가 되어 그 반응으로서 나타나는 심리적 또는 신체적인 기능장애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되는 것이 통례이다. 체험이 그 개인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따라서도 좌우된다. 공통적으로 보이는 필연적 성질로서는 개인의 원망 또는 욕구의 충족이 거부되는 좌절체험이나 갈등체험에 의하여 자기의 안정성이 심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위기적 상황에 빠지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의미에서 본다면 신경증은 위기상황에 있어서의 일종의 인격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위기적 상황에 의해 야기되며, 또는 위기의 도래를 예고하는 불안을 회피하려고 하는 자아의 방위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또 한계상황에 있어서의 거부반응이라고 보는 입장도 이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해리엇은 이전의 아이들을 가졌을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경험을 겪으면서, 자신의 앞날에 도래할 불안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삶에 있어 닥쳐올 위기상황에 있어서 거기서 야기될 불안을 피하기 위해 히스테릭한 부분이 나왔으리라 예상된다. 해리엇이 느낀 이런 불안을 다루는 심리적 방어 기제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억압이다. 억압은 모든 인간의 욕구 자체를 비롯해서 심리적 갈등에서 유발되는 긴장이 의식수준으로 떠오르는 것을 억누르는 기본 방어 기제다. 그러나 억압은 항상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긴장이나 불안 같은 감정을 전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이것을 조절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 같은 노력은 심리적인 균형과 현실에서의 적응을 목표로 이루어지는데, 억압만으로 이 목표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신경증을 가진 환자들은 정신증 환자들이 보이는 망상이나 환각, 괴상한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만큼 불안정한 정서와 생활 태도를 보이게 된다. 신경증 환자들은 현실 감각이 있으며 자기의 증상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느끼고 이 때문에 증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쓰게 된다.

  소설에서 보면 해리엇은 벤을 가진 상태에서 낮이고 밤이고 걸음을 옮기고 거의 뛰다시피 빠르게 움직인다. 이것은 하루 종일, 몇 달 동안 계속된다. 소설에서 이 부분을 보다보면 해리엇이 그렇게 걷는 것은 살기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단지 걷고 싶어 걷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걷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걷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증상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느끼고 여기서 벗어나려는 애를 이런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다섯 째 아이 벤을 낳은 후 해리엇과 주변 사람들은 벤이 다른 아이들과는 다름을 느끼게 된다. 그 사실이 벤이 자라면서 점점 더 명확해지는데 해리엇은 이러한 사실에 힘들어한다. 82쪽을 보면 해리엇이 데이비드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게 바로 옛날 원시시대에 변종을 낳은 여자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보여주는 거야. 마치 그 여자만이 잘못한 것처럼. 하지만 우린 문명시대에 살잖아!’ 이에 대해 남편 데이비드는 해리엇에게 그것은 과장한 것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벤은 점점 더 변해가고 힘이 세져가 해리엇을 비롯한 가족 누구의 통제도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마다 해리엇의 집을 찾아오던 사람들도 이런 벤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의 집에 발을 들이지 않게 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데이비드는 그의 부모와 합의해 벤을 수용소로 보내게 된다. 그렇게 보낸 후 분노를 느끼던 해리엇은 날마다 죄의식과 공포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에 따라 해리엇은 밤에 잠을 자지 못하게 되고 잠이 들어도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 소설에서는 이것을 그저 악몽을 꾸었다라고만 나와 있고 그 내용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서 프로이트의 억압된 것의 회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의식을 통해 억압된 무의식의 것들은 말실수나 증상, 꿈을 통해 회귀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이론이다. 그 중에 나는 꿈을 이 악몽과 연결 시켜 생각했다. 애써 억눌러왔던 벤에 대한 생각이 그녀의 꿈을 통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실제로 해리엇은 악몽을 꾸고 깬 후에 수용소에 있는 벤을 찾아가게 된다.

 

   수용소에 도착한 해리엇은 오물에 거의 널브러져있다시피 한 벤을 본 후 충격을 받고 다시 집으로 벤을 데리고 오게 된다. 벤이 태어나고 평안이 깨졌던 해리엇의 집안은 해리엇이 데이비드를 수용소에서 다시 데려 온 후 균열이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해리엇과 벤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의논 없이 벤을 데려온 해리엇의 행동에 대해 상처를 받고 점점 더 벤을 챙기느라 다른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는 해리엇과 벤을 가족에서 분리시키게 된다.

 

   전문가와의 상담에서 해리엇은 이런 말을 한다. ‘전 제 자신을 비난하지 않아요. 당신이 그 말을 믿기를 기대하지 않지만요. 하지만 이건 정말 불쾌한 농담이에요. 난 벤이 태어난 이후 줄곧 벤 때문에 비난을 받아온 것 같아요. 난 죄인처럼 느껴요. 사람들이 내가 죄인처럼 느끼도록 만들어요.’ 이 부분을 통해 해리엇의 심리는 죄의식과 자기비난으로 간 것처럼 보였다. 죄의식이란 기본적으로 양심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에고 슈퍼에고의 이론과 연관 지어 이야기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리엇이 아무리 벤을 낳은 엄마라고 해도 감당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것이고 수용소에 다시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해리엇의 의식과 무의식에 동시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라 예상된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해리엇에게 도덕적 불안, 즉 죄의식이나 부끄러움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드, 에고, 슈퍼에고라는 개념을 설정하였는데, 에고와 슈퍼에고는 협력하여 생물학적 욕구인 이드를 통제한다. 이 통제를 방해하는 요소가 죄의식이나 ‘부끄러움’의 감정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생기는 것이 도덕적 불안이라는 것이다.

   해리엇의 이런 도덕적 불안을 조금이나마 해결해 준 것은 해리엇의 슈퍼에고였을 것이다. 슈퍼에고는 성격의 나머지 부분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분리감은 에고와 슈퍼에고와의 갈등, 고통스런 열등감 또는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드러나는 갈등으로 인해 명백한 것으로 여겨진다. 벤에 대한 해리엇의 의식을 그녀의 양심, 도덕과 같은 슈퍼에고가 통제했고 그것은 위에서 말한 분리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해리엇과 벤이 가족에게서 분리되는 모습은 이것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끝이 없어 보이는 다락의 어둠뿐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 애는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서는 것을 느꼈고 차가운 전율을 느꼈다―본능적인. 이성으로는 그 애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공포로 온몸이 뻣뻣해졌다.’

 

   이 부분에서 나는 해리엇의 이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녀가 벤에게 느끼는 이성적 감정이 아닌,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 부분을 통해 어쩌면 해리엇은 이드에서는 벤을 통해 해리엇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부분의 바로 밑에 부분을 보면 ‘자신이 인간임을 모르고 멀고 먼 과거로 되돌아간 이 위험한 야생의 다락에서, 그녀는 인간적인 요구를 담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다정하게 말했다.’라는 부분이 나오게 된다. 여기서 나는 이드의 영역을 단지 해리엇의 이드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 전체의 이드로 확장시켜 볼 수 있었다. 인간이 본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과 의식, 또한 그것들을 통제하는 초자아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인, 158쪽에 보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했다. 「그 불쌍한 사람들. 우리 거기에 가요, 적어도 일주일이라도……」불쌍한 데이비드……. 항상 그런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을 해리엇은 알았다. 때때로 불쌍한 해리엇, 그러나 그 경우는 드물었다. 대개는 무책임한 해리엇, 이기적인 해리엇, 미친 해리엇……’이라는 부분이 등장한다. 나는 여기서 소설의 초반부와는 다르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해리엇을 밑에 놓고 자신들이 그 위에 서는 나르시시즘의 상태에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이란 용어를 정신분석 용어로 도입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자기의 육체, 자아, 자기의 정신적 특징이 리비도의 대상이 되는 것, 즉 자기 자신에게 리비도가 쏠려 있는 상태이다. 보다 쉽게 말하면 자기 자신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에 따르면 유아기에는 리비도가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이 상태를 1차적 나르시시즘이라고 하였다. 나중에 자라면서 리비도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 외부의 대상(어머니나 이성)으로 향한다. 그러나 애정생활이 위기에 직면하여 상대를 사랑할 수 없게 될 때, 유아기에서처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것이 2차적 나르시시즘이다.

   소설에서 벤의 유아기 때의 모습과 그의 엄마 해리엇의 모습을 통해 이런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벤의 모습을 통해 1차적 나르시시즘을 보여줬다면 벤과 해리엇의 관계를 통해 2차적 나르시시즘의 상태를 보여줬다고 봤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해리엇과 벤의 모습이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고도 보였다. 소설의 앞부분에 보면 벤은 자주 ‘불쌍한 벤’이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위의 부분을 읽으며 앞에 벤의 이런 중얼거림이 오버랩 되었다. 결국 벤의 모습은 해리엇에게 있는 부분 중 일부이기도 하면서 인간 모두에게 있는 일부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또한 나는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 해리엇이 자기경멸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다. 이것은 죄의식과도 연결 되는 부분일 것이다. 해리엇은 데이비드에게 ‘우린 벌받는 거야. 그뿐이야’라는 말을 한다. 나는 이런 죄의식에도 또 나르시시즘에도 어느 정도의 자기 경멸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계속해서 아이를 가지고 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집에서 보내게 한 것은 나르시시즘의 형태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것 안에는 결국 자가 자신을 가학하는 태도가 숨겨져 있다고 보았다.

 

  해리엇과 벤의 관계, 이 둘과 다른 가족과의 관계를 보며 인간 전체의 관계로 확장시켜 볼 수 있었고 프로이트의 이론인 이드와 에고, 슈퍼에고의 관계에서도 좀 더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 해리엇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겪게 되는 심리 변화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인간이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심리 중 하나이고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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