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쳐가는 노래 창비시선 349
진은영 지음 / 창비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진은영 시인을 이야기 하면서 ‘시와 정치’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시인은 첫 시집부터 꾸준히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 왔고 이번 시집에서 그 고민은 더 깊어졌다. 이것은 시인이 어떤 정치색을 띈다거나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인은 그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 고민으로 시를 써 나갈 뿐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진은영 시인에 대해 쓴 어느 글에서 ‘시는 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철학의 문으로 나올 수 있고, 철학은 철학의 계단을 더 높이 올라갈 때 시의 문으로 나올 수 있다’고 말하며, ‘단호히 제 길을 갈 때 그 둘은 궁극에서 만난다. 시인 진은영은 시만 생각한다.’라는 말을 이었다.

 

 

   1.

   “세상의 절반은 삶 절반은 노래”(「세상의 절반」중)

 

   표제작에서뿐만 아니라 시집 안에는 여러 번 ‘노래’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 노래가 정확히 어떤 곡조의 노래인지, 어떤 가사를 가지고 있는 노래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시집을 읽은 독자라면 그것이 상관없는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래’는 그저 ‘노래’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정말 그렇다. 굳이 ‘음악’이나 ‘노래’와 같은 시어가 등장하지 않은 시라도 시인만의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언어들이 빚어내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어떤 삶의 노래를 듣게 된다.

 

   세상의 절반은 붉은 모래

   나머지는 물

 

   세상의 절반은 사랑

   나머지는 슬픔

 

   붉은 물이 스민다

   모래 속으로, 너의 속으로

 

   세상의 절반은 삶

   나머지는 노래

 

   세상의 절반은 죽은 은빛 갈대

   나머지는 웃자라는 은빛 갈대

   세상의 절반은 노래

   나머지는 안 들리는 노래

 

   -「세상의 절반」부분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있다」부분

 

   위의 시들을 읽다보면, 이 시집에서 ‘삶’과 ‘노래’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의 절반은 삶/ 나머지는 노래’라고 하던 시인은 결국 ‘세상의 절반은 노래/ 나머지는 안 들리는 노래’라고 말한다. 이것은 삶(세상)은 들리든 들리지 않든 결국 노래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봄의 능란한

   흰 몸을 떨고 있는 한그루 자두나무 같네

 

   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

   좁은 장소를 치우고

   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

   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는 여자 가정부처럼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나의 가난한 처녀야

 

   -「훔쳐가는 노래」부분

 

   이 시를 보면 시인은 ‘사랑’의 순간을 어떤 약탈의 순간으로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를 ‘떨고 있는 한그루 자두나무’로 비유한 것이나 사랑을 ‘기계’로 표현한 것,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라고 말하는 목소리 등을 통해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삶이 우리로부터 뭔가 훔쳐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 약탈의 순간이 사랑의 순간과 겹쳤어요.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 그런 결과의 연쇄를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요.”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2.

   “이 시를 몰라요 너를 몰라요 좋아요”(「인식론」중)

 

   ‘시인 진은영은 시만 생각한다.’라고 신형철 평론가가 말했듯, 진은영 시인의 시들을 읽다보면 그 시들을 써나가는 순간에도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잠시도 놓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시’ 혹은 ‘시인’이란 단어를 시 속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낡은 의자에서…… 언제쯤 일어나게 될는지

   몰라요 나의 둘레를 돌며 어슬렁거리는 녹색 버터의 호랑이들

   대체 뭘 바라는 거죠? 몰라요

   이 시를 몰라요 너를 몰라요 좋아요

   -「인식론」부분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익했다

   그래서 너를 생각했다 무엇에도 무익하다는 말이

   과일 속에 박힌 뼈쳐럼, 혹은 흰 별처럼

   빛났기 때문에

 

   (중략)

 

   여기까지 시작되다가

   이 시는 멈춰버렸다

 

   (중략)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쓰러진 흰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부분

 

 

   시인은 시에 대해, 아름다운 시에 대해 고민을 멈추지 않지만 그것을 어떤 식으로 단정지어 보여 주려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인식론」이라는 시를 보면서 나는 ‘몰라요’라는 말에서 오래 서성였다. 이 시에 이 말이 자주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 ‘몰라요’라는 말은 이 말에 붙어 있는 다른 말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예를 들어 이 시의 첫 행인 ‘호랑이를 왜 좋아하는지 몰라요’와 같은 부분에서는 이 ‘몰라요’라는 말 때문에 내가 평서 알던 호랑이 외의 어떤 다른 호랑이의 의미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행 ‘이 시를 몰라요’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시를 통해 어쩌면 시인이 ‘시’를 생각하는 방식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시’를 오히려 모른다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시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는 것이다.

   시인의 다른 시,「아름답게 시작되는 시」를 보면서는 시인이 아름답게 생각하는 시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인지’ 오래도록 고민 하는 것이다. ‘쓰러진 흰 나무들 사이’는 시인이 오래도록 마주하고 있는 시가 쓰여지기 전의 흰 백지를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이 ‘아름답게 시작 된다는 것’의 고민은 당연한 듯 보이지만 시인은 이 문장을 시 속에 담담하고 진솔하게 써냄으로써 그것에 대한 가치를, 고민을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3.

   “내가 아는 것은 하나 우리가 둘이라는 거”(「우리에게 일용할 코를 주시옵고」)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정치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함께 사느냐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시인은 사회에서 소리 없이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까지 시선을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하나

   우리가 둘이라는 거

   하나나 둘 사이에는 슬픔의

   무한소수가

   바퀴벌레처럼 줄지어 지나간다는 거

 

   -「우리에게 일용할 코를 주시옵고」 부분

 

 

   내 죄를 대신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내 병을 대신 앓고 있는 병자들에 대해

   한없이 맑은 날 나 대신 창문에서 뛰어내리거나

   알약 한 통을 모두 삼켜버린 이들에 대해

 

   (중략)

 

   나 대신 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이들과

   나 대신 어두워지려는 저녁 하늘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묘비들

   나 대신 울고 있는 한 여자에 대해

 

   -「고백」부분

 

 

   시인은 이렇게 세상에, 세상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나 대신’이라는 표현으로 다른 이들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고 있다. 그리고 나와 타인 사이에는 ‘슬픔의 무한소수가 바퀴벌레처럼 줄지어’ 지나간다. 슬픔을 바퀴벌레로 표현하는 일은 흔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진은영 시인의 시들을 읽다 보면 이해가 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시인은 지금 우리 시대에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줄지어 지나가는 바퀴벌레들을 지켜보는 일처럼 어렵고 난감한 일임을 알고 있고, 타인과 함께 하는 것, 타인을 바라보는 것의 슬픔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집이 해설을 붙이고 나오는 것과 달리 이 시집은 어떤 해설도 없다. 오롯이 시인의 시 자체 뿐이다. 시인은 이에 대해 “시와 노래는 많이 훔쳐갈수록 아름다워지는 법이니까요.”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이 시집에서 어떤 것을, 얼마만큼 훔쳐가느냐는 전적으로 이 시집을 읽는 이들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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