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시인은 몇 권의 시집 외에도 <마음사전>과 <시옷의 세계>라는 두 권의 책을 낸 적이 있다. 이 두 권은 모두 시인 나름대로 단어들을 정의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책들이다. 모든 시인과 소설가들의 머릿속에는 각자 나름의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렇게 책으로 내어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작가는 많지 않다. 이것은 곧 김소연 시인이 그만큼 여러 말들에 자신만의 옷을 입히는 걸 즐기고 또 중요하게 여김을 알 수 있다. 위의 책 두 권 뿐 아니라 시인의 이런 특성은 시인의 시집들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나 잠깐만 죽을게/ 삼각형처럼’
표제작에 있는 이 구절은 위와 같은 시인의 특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시집 전체에 드러나는, 불분명한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시인의 태도 혹은 바람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위 문장을 읽으면 시의 화자는 현재 죽은 상태가 아닌, 삼각형처럼 죽고 싶어 하는 ‘바람’의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상태를 삼각형이라는 눈에 보이는, 선명한 무언가로 표현하고 싶은 것 또는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시의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시집 뒤쪽에 실린 발문에서 황현산 평론가는 ‘너의 명증한 수학자가 두뇌의 민첩함과 숨을 멈추고 잠시 죽음 속에 들어가며,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아침마다 「수학자의 아침」을 맞는 것도 그 때문이지.’라고 이야기 한다.
시집을 다 읽은 후 시집의 제목을 곱씹어 보면 ‘수학자’의 자리는 곧 시인의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이라는 낱말에 김소연 시인은 ‘수학자’라는 옷을 입히는 작업을 한 것이고 나는 이 시집 전체가 그 옷을 입히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집의 또 다른 시「새벽」을 보면 시인은 이 시에서 도시를 이야기하며 ‘무서운 짐승을 숨겨주는 무서운 숲이 걷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뒤 이어 ‘그곳에서 해가 느릿느릿 뜨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해가 뜬 후에는 아침의 시가 올 테고 그 시간은 이 시집 전체에서 시인이 원하고 머물고 싶어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웃거리는 햇볕이 방 한 쪽을 백색으로 오려낼 때’
이 시집에 있어 ‘아침’이라는 시간은 위에서도 말했듯, 중요한 시간이다. 그 시간은 ‘먼지가 보이는’ 시간이고, ‘길게 누워 다음 생애에 발끝을 대는’ 시간이다. 시인은「장난감의 세계」에서 ‘아침에만 잠시 반짝거리는 수만 개의 서리’라고 아침의 시간을 보여준다. 이런 문장들을 통해 우리는 이 ‘아침’이라는 시간이 다른 시간에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시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 아침의 시간에 무엇을 하는가? 나는 그 답을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그래서」부분) 라는 시 구절에서 찾아보았다. 그것은 ‘슬픔’이 머무는 시간인 것이다. 그 이유는 인용한 부분의 아래를 보면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라는 부분에서 느낄 수 있듯 시인은 어떤 슬픔의 상태 안에 머물고 싶어 하는데 시를 통해, 아침이라는 시간에 그것이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멀어졌지만/ 저것은 출발을 한 것이다’
이 시집을 읽다 보면 불분명한 것을 분명하게 해보이려는 태도와 함께 눈에 띄는 것은 현재 시인이 있는 곳에서 최대한 멀리 가고 싶어 하는 태도이다.
시 속의 화자들이 이렇게 줄곧 멀리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살 수 없는 세상’에까지 가닿게 한다. 「여행자」의 ‘나’는 ‘살 수 없는 장소’에서 그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햐한 사람이 서있을 자리’에 서서 바깥을 본다. 어쩌면 이 시의 제목인 ‘여행자’의 위치는 ‘수학자’에 이어 시인이 서 있는 또 다른 자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가 쏟아진다면」이라는 시를 보면 ‘나는 먼 곳이 되고 싶다’라는 화자의 고백으로 시가 시작됨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시인은 이 시에서 더 멀리 가는 것을 ‘아이의 마음’이 되는 것과 같게 이야기 한다. ‘목적 없이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손을 흔들어 주는, 그런 아이의 마음 말이다.
책날개에 인용된 황현산 평론가의 발문 중 나는 김소연 시인을 두고 ‘지금 한 줌 물결로 저 먼 바다를 연습하고 실천’해 보려한다고 부분이 인상 깊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시인의 이런 태도 역시 이렇게 현재에서 멀리 가 보려는 마음과 연장선에 놓인다고 여겨졌다.
‘아슬아슬해, 라고 말하려다, 아름다워, 라고 하지요’
「격전지」에 나오는 이 구절을 읽다 보면, 이것은 곧 시인이 이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 시대 사람들은 도무지 슬픔을 모르는 사람들 같고, 더 이상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슬픈 일은 너무나도 많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말이다.
시집 안 「연두의 고통」이라는 시를 보게 되면 이 ‘연두의 고통’은 곧 새잎이 나는 고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은 벌레가 갉아먹은 하나의 나뭇잎 안에서 ‘격투의 내력’을 읽어낸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은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이라는,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비유와 만나게 된다. 시인은 벌레와 나뭇잎이 서로를 견디며 상처 내며 살아가는 것, 또 연두색의 새 잎이 돋아나는 것을 우리의 인생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 시는 ‘왜 하필 벌레는/ 여기를 갉아 먹었을까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들고 네가/ 질문을 만든다’로 시작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만든다’라는 서술어에 오래 눈이 갔다. 사실 벌레가 나뭇잎의 특정 부분을 갉아 먹는 일은 없다. 그저 벌레가 갉아먹는 곳이 나뭇잎이 갉아 먹힌 곳이 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것은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기에 자연스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닌, 만드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세계’에서 슬픔을 겪는다. 그리고 그 슬픔으로 어떤 안위를 얻는다. 시집 전체에 은은히 배어 있는 이 슬픔들을 모두 지난 후, 시집을 덮게 되면 어느새 시집 안의 슬픔이 우리 안에 배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슬픔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