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 - The housemaid
영화
평점 :
현재상영


이 시대 하녀들의 삶에 대한 분명한 문제 인식.

 

 

한국 스릴러의 걸작 김기영 감독의 60년작 <하녀>가 2010년에 이르러 임상수의 리메이크로 다시 탄생되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60년작의 리바이벌 혹은 그를 바로 따라 잡으려는 영화는 아니다. 원작을 현대에 맞추어 감독 특유의 조롱을 섞는 블랙 코미디적인 <하녀>로 그려졌다. 임상수의 그러한 영악하고 과감한 태도는 적절한 선택이었다. 원작을 표방하며 자기 색깔 없는 영화는 결코 입에 담을 거리가 못 된다. 그런 리메이크들은 많다. 김기영 감독 스스로도 <하녀>의 변주로 여러 작품의 리메이크 판을 만들어냈을 정도니 굳이 임상수 감독이 2010년에 이르러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김기영 감독이 고찰했던 60년에서 80년 대에 흐르는 변화하는 사회 시대상은 이 시대의 것은 아니다. 그는 영화 전면에 깔린 위기감이라는 것으로 쁘띠 부르조아의 괴담을 서늘하게 마무리하는 스릴러 형식으로 만들었다. 거기에는 변화하는 시대에 대해 느끼는 남성으로서, 곧 감독 스스로의 공포가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임상수의 하녀는 시선으로 보자면 하녀와 주인 누구의 입장도 아닌 묘하게 경계를 타고 있는 식이다. 영화를 찍는 감독도 방관자,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방관자들이다. 우리는 60년작 <하녀>가 감독의 시선, 즉 '가진 자'가 공포스러워하는 그것을 위협하는 것에 함께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임상수의 <하녀>는 결국 우리들이 모든 것을 방관하고 있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우리 스스로 권력자이기 보다는 '하녀'에 가까운 노동자로서 아직도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폭로한다.

 

60년작 <하녀>에서는 뜬금없이 들인 하녀로 인해 충동적으로 일어난 한 가정 속의 섹스스캔들을 통해 남성 위기에 대한 공포를 담는다. 과거의 시대와는 다르게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일어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영화 속 가정은  부유하다고는 할 수 없는 적당한 선의 여유로움 때문에 더욱 위기와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임상수의 2010년 <하녀>의 가정은 으리으리한 대 저택에 돈과 지위로서는 더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이들의 집이다. 그래서 더이상 하녀와 그녀의 임신으로 인한 가장의 고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내가 가진 것이 많아서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며 당당하게 행동한다. 그리고 이 가진 것이 많은 자는 자식도 많이 가질 수 있다는 특권을 자랑한다. 60년 작의 쥐가 내포했던 여성의 출산, 그리고 인구 증가에 대한 공포감을 드리웠다면, 2010년의 <하녀>에는 쥐 대신 정면으로 여성의 출산을 보여준다. 사장과 안주인은 임신 중에도 섹스를 하며 번식에 대한 열망을 보인다. 물론 그것은 사장이 아리나 안주인의 욕망과 열망이 더 크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또 그것은 육아의 부담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는 이 시대의 가난한 맞벌이 가족들과 비교되는 모습이다. 결국 이 안주인은 쌍둥이를 낳기에 이른다.

 


임상수 감독은 변질된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 속에서 新계급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는 식당 일을 하며 일명 고시텔로 불리는 변두리의 하숙방에 사는 은이라는 여자가 대 저택의 하녀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은이라는 여성의 위치는 이 사회 계급 중에서도 가장 위태로운 것이다. 대학 중퇴에 현재 남편과 이혼했으며, 마땅히 사회적 경력과 재주가 없는 여자는 식당 일로 근근히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임상수가 목격하는 이 시대의 여성상이 녹아있는 것이다. 그런 여성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물론 원작과 마찬 가지로 2010년의 <하녀>역시 침입자에 대한 영화다. 그러나 은이라는 여자에게 누군가를 공포에 떨게 할만한 카리스마는 부족하다. 이 영화 속의 전도연에게는 원작의 이은심이 연기한 하녀와 같은 치명적인 위력은 결코 없다. 그러나 영화는 단순히 침입자 '하녀'로 인한 공포감, 그에서 해방됨을 그리지는 않는다. 노동자에서 더 이상 신분의 변화를 이룰 수 없음에 하녀는 분신으로서 '아니꼽고 치사한 세계'에  마지막 인사를 고한다. 임상수 감독은 결코 일반 노동자들의 '그들만의 리그'에 들어설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모호한 것이 있다. 오프닝의 투신하는 여자는 누구인지, 그 정체가 마지막 하녀 은이의 행위와 반복을 이루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생일 파티 장면의 겉도는 판타지는 바로 직전까지의 저돌적인 자세와는 다르게 너무나 비겁한 마무리다.   

by  명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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