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etr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소녀에서 어머니가 된 여자들, 상처를 가린 아름다운 꽃.

 
시, 누가 이렇게 명료하게 뇌리를 때리는 간결하고 의미있는 제목을 자신의 작품에 사용할 용기가 있을까. 물론 사용은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진심으로 느껴지는 그 정서적 파문을 일으키는 이가 있을까 말이다. 이창동은 그에 잘 어울리는 이다. 문학가로서 출발한 지점에서 사회의 소외된 이들, 혹은 상처가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쓰고 영화를 찍어왔기 때문이다. 이 번 영화 <시>는 분명 그의 이전 영화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그의 영화 속에서 여성들은 초기에는 수동적이고 인형같은 이미지로 남성 주인공들의 주변인물이었다. <오아시스>나 <밀양>에 이르기 까지 여성 캐릭터가 점점 전면으로 등장했지만 그녀들이 결코 능동적으로 변하지는 못했다. 그녀들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사회 속에서 소외 되었고, 누군가의 그림자를 얼굴에 뒤덮고 있었다. 감독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녀들이 피해자임을 알지만 누구도 바꿀 수 없다고. 이 영화 <시>에서도 다시 여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역시 태도의 진화는 없다. 하지만 이창동은 그녀들에게서 자신이 빚진 것, 언제나 수동적으로 그렸고 그 자리에 남겨두었던 그녀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시대의 남성들이 누리는 것들, 가지는 태도들. 이 바꿀 수 없는 것들 속에 수난당하는 여성들이 아직도 있음을 사과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엔딩에 만나게 되는 소녀의 얼굴 위로 마치 이창동의 목소리가 오버랩 되어 들리는 듯 했다. "소녀야, 미안하다."

 

<시>는 배우 윤정희의 연기를 오랜만에 볼 수 있으며 어쩌면 영화 속에 만나는 마지막 영화일 것이다. 그런데 이 <시>라는 영화를 자신의 시간과 만난 윤정희의 영화 속 모습은 절묘하다. 어떤 여배우가 이렇게 아름답게 영화 속에서 자신의 시간과 동일한 인생의 한 부분을 이야기할 행운이 있을까. 영화 속의 할머니 미자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예뻐보이는 것이 아닌가 걸리기도 하지만, 윤정희가 왕년의 미모의 여배우였다는 것을 잊고 한 인물로 본다면 감상에 어려울 것이 없다. 너무나 소녀같고 천진한 그녀의 모습은 가끔씩 우리들의 어머니에게서도 볼 수 있는 점이다. 다만 그녀는 한번도 세상과 자신의 환경 속에 불순한 것들이 끼어있다고 깨닫지 못했던 착오는 있었던 것 같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그녀의 아름다운 심상에 찬물을 끼얹는다. 시, 라는 제목과 동시에 얼굴을 묻고 강물에 떠내려오는 소녀의 시체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이것은 미자에게는 보여지지 않고 관객만 본다. 그녀가 본 것은 들것 위의 소녀의 주검을 덮은 하얀 천이다. 미자는 하얀 천으로 가려진 전달된 사건만으로도 상처를 받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곧 그 하얀 천은 열리고 그녀의 삶 속으로 세상의 잔혹함이 밀려온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잔혹함에 맞선다. 

 

영화 속에서 손자의 잘못을 덮으려는 그녀의 결정은 일종의 매춘이다. 감독은 어머니가 매춘으로 자녀를 구해내는 지, 그리고 그 오염된 세상이 그녀들을 어떻게 살게 하는지 매우 당연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어머니는 그렇게라도 자식을 구해낸다. 봉준호는 <마더>에서 어머니가 살인으로 아들을 구하지만 그 완전 범죄의 뒤 끝은 찝찝하다고 말한다. 그게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창동과 봉준호는 비슷한 사건으로 대한민국의 여성들을 이야기한다. 소녀와 어머니에 대한 영화이다. 소녀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어머니가 되어 자신들이 또 범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미 늦었고 그녀들은 바꿀 힘이 없다. 이창동은 봉준호가 완결한 어머니 이야기와는 다른 결말을 내린다. 어머니의 여행, 소녀를 불러낸 그 시선에서 진심의 위로가 전해진다. 소녀로서 일찍 죽은 그녀들, 어머니로서 살아남은 그녀들, 위로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여성을 대하는 사회의 시선이 변했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시대이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사건과 사고 속에 여성들은 주된 피해자이고 남성들은 주요 범죄자이다. 이창동 감독은 영화 속에서 배드민턴 장면을 보여준다. 손자와 할 때도 그 손자를 잡아가는 형사와 할 때도 미자는 경기에서 지고 만다. 이 사회의 가치관은 결코 바꿔지지 않을 단단한 벽이다. 미자는 그 벽을 향해 힘겨운 배드민턴 경기를 펼치는 것이다. 사회 모든 곳에 침잠하여 연약한 소녀를 노리는 시선들. 그 시선들이 너무나 익숙해서 공포 속에서도 그냥 살아가야하는 여성들, 그 작은 소녀들. <시>는 소녀와 여성들을 위로하는 영화이다. 이 진심의 온기는 한 사회의 겉과 속, 바닥을 모두 훑어보는 감독의 걸작이라고 볼 수 있다. 

by 명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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