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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인류
이상희 지음 / 김영사 / 2025년 9월
평점 :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대학교의 인류학과 교수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1호 고인류학자인 이상희 교수님의 에세이 <사소한 인류>.

저자는 이 책에 대해 사소한 개인의 일상 기록이라고 서론에 겸손하게 설명하지만, 그간 동양인이자 여성인 학자로서 30년 이상 미국에서 살아남은 긴 여정이 담겨있어 읽는 내내 그 시간이 녹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눠 이민자, 연구자, 교수, 동양인, 여성, 아내, 엄마 등 다양한 정체성으로 살아오며 겪은 일상을 덤덤히 풀어냈다.

글 하나하나 허투루 살아오지 않은 그녀의 최선이 담겨, 마치 큰 강의 하류에 서서 강물의 잔잔한 흐름을 보고 있는 듯하였다. 그 강물은 지금은 고요히 흐르지만 때로는 굽이치고, 넘실대며,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부딪혀왔을까? 여러 고비를 열심히, 성실히 넘어오며 실어 나른 부산물로 비옥한 토지를 일구어낸 강인한 내공이 느껴져 자연스럽게 존경하는 마음이 품어진다.
인류학자의 관점으로, 남성성이 강했던 학계의 분위기를 극복하려는 학자의 관점으로 주변과 일상을 써 내려가니 그 내용이 너무나 유익하고 흥미로운 점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학자로서 본인이 이해가 가지 않은 상황에서는 적당히 눈감아버리고 물러서지 않는 에피소드나 생각이 곳곳에 나온다.
“사냥은 남자가 하고, 도구는 사냥을 위해 만들어지고 쓰였다는 전제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지만 널리 퍼지고 받아들여져서 문장가의 글에 등장해도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식이 되었다. 검증된 적 없는 상상이 이토록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이유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스러운 장면인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와 비슷한 풍경이기 때문이리라.”-58쪽
일상에서 갈등을 마주할 때도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도 보여주는데, 학자답게 세세하게 분석하기도 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우리는 데이터를 모으기로 했다. 집안일 목록을 모두 적고 그 일을 누가 했는지 하나씩 표시하기로 했다. 장보기, 요리(식단 계획, 재료 수급 포함), 설거지(닦기와 정리, 수납을 별도로 계산), 청소(부엌, 화장실, 거실, 방 등 공간별 기재), 정리 수납, 빨래(세탁기 돌리기, 빨래 개기를 별도로 계산)...<중략> 그렇게 한 달 동안은 꼼꼼히 기록하는 데 집중했다. 기록은 내가 주로 담당했다. 데이터 수집까지 내가 맡은 것이 불공정한 가사노동 분담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드디어 한 달 뒤, 데이터를 합산하고 정리해서 살펴보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내가 집안일의 90퍼센트를 하지도 않았고 남편이 50퍼센트를 하지도 않았다. 내가 70퍼센트를, 남편이 30퍼센트를 하고 있었다.” -192, 193쪽
“나는 시간 사용 기록을 차곡차곡 꼼꼼하게 적어 나갔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솔직하게 기록했다. 그렇게 모은 일주일, 나의 168시간 기록은 놀라웠다. 내게 중요한 일, 업무상 해야 하는 일, 소중한 일보다는 무의미한 잡무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잡무는 없었다. 기나긴 리스트에서 하지 않아도 되는 잡무는 없었다. 기나긴 리스트에서 하지 않아도 될 일, 없애서 시간을 짜낼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전부 내가 할 일이었다. 나는 결국 목록에서 무엇도 지울 수 없다면 각 일들에 시간을 조금이라도 덜 들이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먼저 습관의 힘을 빌렸다. 습관은 시간을 짜낼 수 있는 지름길이다.”-131, 132쪽
곳곳에서 인류학의 대중화를 고민하는 학자로서의 얼굴도 볼 수 있다. 이 책 역시 인류학자의 시선이 담긴 일상에 대한 소회라 그 고민의 결과 중 하나 아닐는지.
고인류학자로서 상아탑에만 갇혀있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대중과 소통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절실하게 느껴져, 이 책을 만난 것이 행운이라 여겨진다.
완벽하게 연주할 수 없음을 알지만 ‘빠르게’를 포기하고 ‘즐겁게’ 계속 첼로를 배운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매 순간 치열하게 살아가며 차곡차곡 삶을 그려내는 그녀의 열정적인 태도를 다른 이에게도 소개해 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