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연 작가의 신작 <나의 돈키호테>를 읽으면 이들처럼 대전 옛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꿈을 좇는 이들을 만나볼 수 있다.
2018년 서울에서 PD 생활을 접고 대전으로 내려온 솔은 마치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홀로 튕겨 나간 쓸모없는 돌멩이가 된 기분이다. 서른 살이지만 아직 눈에 보이는 번듯한 디딤돌이 없다. 여차하면 엄마의 통닭집에서 닭을 튀기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 15년 전 중학생 시절 드나들던 선화동 비디오 가게를 마주하게 된다. 그곳은 '돈키호테 비디오 가게'. 그 가게의 주인인 돈 아저씨(자칭 한국의 돈키호테 아저씨)와 영화와 책 이야기를 나누던 곳. 라만차 클럽이라는 사조직도 있었다. 공부에 치이고 사춘기에 몸부림치는 중학생들끼리 뭉쳐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갔었더랬다.
추억을 곱씹으며 그 시절을 떠올리던 솔은 돈 아저씨의 행방도 궁금하다. 돈 아저씨의 아들인 한빈과 비디오 가게의 건물의 주인인 성민의 사정도 한몫 더해 적극적으로 아저씨의 행방을 찾아 유튜브 채널도 만들어 콘텐츠를 제작하게 된다. 이 채널의 주요 콘텐츠는 주로 그 시절 아저씨가 추천했던 영화와 책 이야기, 그리고 종적을 감춘 아저씨를 찾는 과정이다.
이 책은 절반 이상을 오리무중인 돈 아저씨의 행방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담고 있다. 아저씨의 과거는 마치 돈키호테처럼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무모하지만, 저항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아저씨의 지인을 만나는 장면에서는 젊은 시절 함께 이상을 꿈꿨으나 중년이 되어 세상과 타협하여 순응하거나 오히려 저항의 대상이던 이들의 모습을 닮아버린 이들도 나와 씁쓸하다.
"그 모든 과정을 겪는 와중에도 아저씨는 <돈키호테> 번역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표와 몇몇 직원들의 싸늘한 시선과 은근한 압박에도 꿈쩍 안 하고 자리를 지켰다. 지긋지긋해진 김승아 씨는 퇴사를 고민했지만, 아저씨를 두고 혼자 회사를 빠져나갈 순 없었다.
한 교수와 얽힌 사전이 모두 마무리된 뒤 아저씨는 출판사를 그만뒀다. 마치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김승아 씨는 아저씨가 그만두기 전날 자신을 대신해 한 교수와 싸워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물었다. 어떤 용기로 한 교수 같은 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었는지를. 그건 부끄러웠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문이기도 했다. 아저씨는 이렇게 답했다. 한 교수 같은 사람이 이 사회의 지식인으로 인정받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그걸 깨기 위해 나섰다고. 지식인은 많이 배운 사람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세상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179~ 180쪽
"가끔 보면 그런 놈들 있어. 호의를 베풀면 아, 이 사람한테 내가 통하나 보다 하고 뭘 자꾸 더 요구한다고. 그럼 끝인 거야. 규칙을 모르는 얼간이란 게 들통난 거지. 자네들 호의의 대가가 뭔지 알아? 그건 호의를 받으면 입 닫고 사라지는 거야. 뭘 더 요구해서도 안 되고 어디 가서 자랑도 금물이고. 말하자면 호의는 베푸는 사람의 의지지 받는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는 거." - 220쪽
책을 읽다 보면 9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이면 공감할 수 있는 대목도 많이 나와 반갑다. 특히 영화나 책을 좋아했었다면 작가가 소설 구석구석 녹여낸 그 시절 영화 이야기에 빠져볼 수 있을 것이다. '아~~ 나도 그 시절 '씨네21' 영화 잡지를 손에서 놓지 않던 꿈 많던 학생이었는데.' 하며 잠시 감상에 젖기도 했으니.
그리고 작가의 전작 <불편한 편의점> 독자라면 반가운 산해진미 도시락이나 앞 글자를 딴 작가 특유의 신조어를 보며 겹치는 부분을 발견해 재미도 느낄 것이다.
"2001년 한국 영화계에서는 '와라나고 운동'이 벌어집니다. 여러분 와나라고 운동 아세요? 새마을 운동도 아니고 금 모으기 운동도 아닌 와라나고 운동은, 흥행은 못했지만 완성도가 뛰어난 한국 영화를 응원하고 지지하기 위해 영화인과 영화 팬들이 자발적으로 벌인 운동입니다. -중략- 여기 '와'는 바로 <와이키키 브라더스>입니다." 103~104쪽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과 대사가 있는데요, 지금 소개해 보겠습니다. 배두나가 맡은 캐릭터 '태희'와 옥지영이 맡은 캐릭터 '지영'은 인천 지하철 위를 지나는 고가를 건너다가 한 미친 여자와 마주칩니다. 두 사람은 애써 그 여자를 피해 지나가는데, 잠시 뒤 지영이 태희에게 이렇게 말해요. "아까 그 거지 말이야. 솔직히 나는 그렇게 될까 봐, 무섭다." 그러니까 태희가 이렇게 답해요. "무섭다는 생각은 안 해봤고, 가끔 그런 사람들 보면 궁금해서 따라가고 싶어. 매일 뭐 하면서 지내는지, 아무런 미련 없이 자유롭게 떠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 좋은 거 아닌가?" 그러자 지영이 다시 이렇게 말해요. "그걸 자유라 그러니?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렇게 다니다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떡하게?"
저 역시 이 장면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 시절 저희집도 IMF로 가계가 어려워진 지 좀 됐고 저도 딱히 뭐가 되고 싶은 게 없었거든요. 그러다가 목척길이라고 저희 선화동에 구옥들 모여 있는 어두운 골목에서 이상한 할머니와 마주치면, 정말 발이 딱 멎고 나도 저렇게 마귀할멈처럼 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도 들곤 했거든요. 영화의 이 장면이 그런 제 마음과 정확히 겹쳤어요. 그리고 지금 유튜버가 된 서른 살의 저는, 혹시라도 미친 여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답니다. 이제 태희처럼 마음껏 자유를 꿈꿀 호기는 없지만, 지영이처럼 넘 겁을 먹지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105~106쪽
그 사람이 걸어온 궤도를 쭉 그어보면 누구나 소설 한두 권 쯤의 이야기를 품고 있지 않을까? 그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릴 적 간직했던 꿈이 커져 있을지, 닳고 닳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지 알게 된다. 여기 <나의 돈키호테>의 돈 아저씨는 꺼져가던 꿈을 다시 살려 자신만의 소설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거 같다는 기분 좋은 느낌이 든다. 나도 나의 옛 비디오가게에 무엇이 담겨있었다 들여다봐야 할 거 같다.
***네이버 미자모 카페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