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돈키호테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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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를 위한 길과 곳곳에 멋스러운 성당. 끝없이 펼쳐진 올리브밭과 하얀 풍차가 떠오르는 곳. 스페인!

유럽에서 제일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스페인 하면 이사벨 여왕이나 콜럼버스보다 돈키호테와 가우디가 제일 먼저 떠올랐던 거 같다. 아마도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나 성 파밀리에 성당의 가우디가 힘들고 비참한 생으로 마감하지 않았다면 내 유럽 여행 다이어리도 내용이 바뀌지 않았을까?

이 둘의 공통점은 세상 끝 막다른 곳에서도 희망을 품었고, 끝까지 문학적 예술적 모험을 멈추지 않았다는 거 아닐까?



김호연 작가의 신작 <나의 돈키호테>를 읽으면 이들처럼 대전 옛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꿈을 좇는 이들을 만나볼 수 있다.

2018년 서울에서 PD 생활을 접고 대전으로 내려온 솔은 마치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홀로 튕겨 나간 쓸모없는 돌멩이가 된 기분이다. 서른 살이지만 아직 눈에 보이는 번듯한 디딤돌이 없다. 여차하면 엄마의 통닭집에서 닭을 튀기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 15년 전 중학생 시절 드나들던 선화동 비디오 가게를 마주하게 된다. 그곳은 '돈키호테 비디오 가게'. 그 가게의 주인인 돈 아저씨(자칭 한국의 돈키호테 아저씨)와 영화와 책 이야기를 나누던 곳. 라만차 클럽이라는 사조직도 있었다. 공부에 치이고 사춘기에 몸부림치는 중학생들끼리 뭉쳐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갔었더랬다.

추억을 곱씹으며 그 시절을 떠올리던 솔은 돈 아저씨의 행방도 궁금하다. 돈 아저씨의 아들인 한빈과 비디오 가게의 건물의 주인인 성민의 사정도 한몫 더해 적극적으로 아저씨의 행방을 찾아 유튜브 채널도 만들어 콘텐츠를 제작하게 된다. 이 채널의 주요 콘텐츠는 주로 그 시절 아저씨가 추천했던 영화와 책 이야기, 그리고 종적을 감춘 아저씨를 찾는 과정이다.

이 책은 절반 이상을 오리무중인 돈 아저씨의 행방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담고 있다. 아저씨의 과거는 마치 돈키호테처럼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무모하지만, 저항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아저씨의 지인을 만나는 장면에서는 젊은 시절 함께 이상을 꿈꿨으나 중년이 되어 세상과 타협하여 순응하거나 오히려 저항의 대상이던 이들의 모습을 닮아버린 이들도 나와 씁쓸하다.

"그 모든 과정을 겪는 와중에도 아저씨는 <돈키호테> 번역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표와 몇몇 직원들의 싸늘한 시선과 은근한 압박에도 꿈쩍 안 하고 자리를 지켰다. 지긋지긋해진 김승아 씨는 퇴사를 고민했지만, 아저씨를 두고 혼자 회사를 빠져나갈 순 없었다.

한 교수와 얽힌 사전이 모두 마무리된 뒤 아저씨는 출판사를 그만뒀다. 마치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김승아 씨는 아저씨가 그만두기 전날 자신을 대신해 한 교수와 싸워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물었다. 어떤 용기로 한 교수 같은 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었는지를. 그건 부끄러웠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문이기도 했다. 아저씨는 이렇게 답했다. 한 교수 같은 사람이 이 사회의 지식인으로 인정받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그걸 깨기 위해 나섰다고. 지식인은 많이 배운 사람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세상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179~ 180쪽

"가끔 보면 그런 놈들 있어. 호의를 베풀면 아, 이 사람한테 내가 통하나 보다 하고 뭘 자꾸 더 요구한다고. 그럼 끝인 거야. 규칙을 모르는 얼간이란 게 들통난 거지. 자네들 호의의 대가가 뭔지 알아? 그건 호의를 받으면 입 닫고 사라지는 거야. 뭘 더 요구해서도 안 되고 어디 가서 자랑도 금물이고. 말하자면 호의는 베푸는 사람의 의지지 받는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는 거." - 220쪽

책을 읽다 보면 9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이면 공감할 수 있는 대목도 많이 나와 반갑다. 특히 영화나 책을 좋아했었다면 작가가 소설 구석구석 녹여낸 그 시절 영화 이야기에 빠져볼 수 있을 것이다. '아~~ 나도 그 시절 '씨네21' 영화 잡지를 손에서 놓지 않던 꿈 많던 학생이었는데.' 하며 잠시 감상에 젖기도 했으니.

그리고 작가의 전작 <불편한 편의점> 독자라면 반가운 산해진미 도시락이나 앞 글자를 딴 작가 특유의 신조어를 보며 겹치는 부분을 발견해 재미도 느낄 것이다.

"2001년 한국 영화계에서는 '와라나고 운동'이 벌어집니다. 여러분 와나라고 운동 아세요? 새마을 운동도 아니고 금 모으기 운동도 아닌 와라나고 운동은, 흥행은 못했지만 완성도가 뛰어난 한국 영화를 응원하고 지지하기 위해 영화인과 영화 팬들이 자발적으로 벌인 운동입니다. -중략- 여기 '와'는 바로 <와이키키 브라더스>입니다." 103~104쪽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과 대사가 있는데요, 지금 소개해 보겠습니다. 배두나가 맡은 캐릭터 '태희'와 옥지영이 맡은 캐릭터 '지영'은 인천 지하철 위를 지나는 고가를 건너다가 한 미친 여자와 마주칩니다. 두 사람은 애써 그 여자를 피해 지나가는데, 잠시 뒤 지영이 태희에게 이렇게 말해요. "아까 그 거지 말이야. 솔직히 나는 그렇게 될까 봐, 무섭다." 그러니까 태희가 이렇게 답해요. "무섭다는 생각은 안 해봤고, 가끔 그런 사람들 보면 궁금해서 따라가고 싶어. 매일 뭐 하면서 지내는지, 아무런 미련 없이 자유롭게 떠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 좋은 거 아닌가?" 그러자 지영이 다시 이렇게 말해요. "그걸 자유라 그러니?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렇게 다니다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떡하게?"

저 역시 이 장면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 시절 저희집도 IMF로 가계가 어려워진 지 좀 됐고 저도 딱히 뭐가 되고 싶은 게 없었거든요. 그러다가 목척길이라고 저희 선화동에 구옥들 모여 있는 어두운 골목에서 이상한 할머니와 마주치면, 정말 발이 딱 멎고 나도 저렇게 마귀할멈처럼 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도 들곤 했거든요. 영화의 이 장면이 그런 제 마음과 정확히 겹쳤어요. 그리고 지금 유튜버가 된 서른 살의 저는, 혹시라도 미친 여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답니다. 이제 태희처럼 마음껏 자유를 꿈꿀 호기는 없지만, 지영이처럼 넘 겁을 먹지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105~106쪽

그 사람이 걸어온 궤도를 쭉 그어보면 누구나 소설 한두 권 쯤의 이야기를 품고 있지 않을까? 그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릴 적 간직했던 꿈이 커져 있을지, 닳고 닳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지 알게 된다. 여기 <나의 돈키호테>의 돈 아저씨는 꺼져가던 꿈을 다시 살려 자신만의 소설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거 같다는 기분 좋은 느낌이 든다. 나도 나의 옛 비디오가게에 무엇이 담겨있었다 들여다봐야 할 거 같다.

***네이버 미자모 카페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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