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임 머신 - 수치심이 탄생시킨 혐오 시대, 그 이면의 거대 산업 생태계
캐시 오닐 지음, 김선영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치심은 질서를 유지하는 데 아주 탁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식당이나 카페의 무개념 매너에 대한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리면, 사람들은 그 행동에 대해 주인 대신 비난하고, 당사자는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는다.

이러한 수치심 주기와 부끄러운 감정들은 일상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땐 버스나 식당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많았다.

버스 기사 아저씨의 담배 연기를 맡아가며 멀미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으니... 요즘은 어떠한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기만 해도 불편한 시선에 얼른 흡연실을 찾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코로나 시국에는 어땠나? 마스크를 끼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밀려오는 수치심에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바로 내리기도 했다.

수치심... 부끄러움... 이는 유독 염치가 많은 나 같은 소시민이나 많이 느끼고 산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인간은 예로부터 수치심에 기반하여 공동체를 지켜내고, 수치심을 느낄 상황이라면 적절한 비난도 받아 가며 질서를 유지하기도 한다.

이처럼 수치심에는 순기능도 있지만, 이를 이용해 대중을 조종하거나 돈을 버는 자들도 있다.

이 책 <셰임 머신>에서는 인간의 선택권이나 해결책이 없는 영역의 수치심을 자극하여 돈을 벌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드는 '수치심(셰임) 머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 버나드 칼리지 수학과 교수를 거쳐 월스트리트에서 금융상품 관련 수학 모형을 개발했던 캐시 오닐은 플랫폼과 알고리즘을 통해 외모와 가난, 젠더, 피부색 등 여러 측면에서 수치심을 자극하고, 정치적,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을 '수치심(셰임) 머신'이라고 정의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수치심을 이용하는 영역으로 비만, 약물중독, 빈곤, 외모 등으로 나눠 어떻게 이들 영역으로 수치심이 파고들어 대중을 조종하는지 이야기한다.


우선 비만은 자기 관리를 멋지게 할 수도 있었는데, 노력 부족과 식습관의 관리 실패로 인한 문제라는 관점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는 뷰티와 노화 등 외모에 관해서도 마차가지인 프레임을 씌워 시작한다.

이런 프레임에 빠져들면 유사과학과 SNS나 TV 등이 한몫 거들어, 비록 지금은 실패하여 비루한 몸 상태이지만 @@을 접하면 날씬한 몸매, 젊어진 외모, 심지어는 향기로운 질 냄새까지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렇게 반복되는 도전, 실패, 도전, 실패는 개인의 삶에 또다시 자기 관리 실패라는 수치심과 혐오, 무기력을 선물한다. 비만이나 뷰티, 안티에이징 관련 산업들만 돈을 벌게 되는 구조다. 왜 이런 말이 있지 않나? 다이어트는 평생 하는 거라고... 다이어트를 한 번만 하는 사람은 없다... 이 책에도 나왔듯.

어느새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다이어트나 외모 관리는 성공적인 삶의 주요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내 늘어진 팔뚝살이나 헝클어지고 부스스한 머리칼, 주름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해결할 수 있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ㅜㅜ (수치심 100포인트 올림!)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약물 중독이 이슈가 되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심각한 약물중독도 개인의 선택에 따른 문제로 치부하려고 한다. 약물 중독에 쉽게 빠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개선하거나 재활을 돕는 정부의 역할을 개인 탓으로 쉽게 돌려 대중은 그들을 쉽게 비난하고, 그들이 보기엔 의지력 부재인 그들의 갱생은 꿈도 못 꾸게 사회에서 매장해 버린다. 여기선 포용도 해결의 여지도 주지 않는다.

이 셰임 머신은 약물 중독자들의 갱생 시스템을 마련하고 재활을 도우며 사회로 구출할 책임에서 물러서려는 정부나 각종 보험회사가 조종하고 있다. 거기에 제약회사의 '중독성 없는 진통제' 판매라든지, 약물처럼 중독성 있는 담배나 술 등의 판매, 이들을 사회로부터 격리 수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을 무시 못 하는 시설이나 기관들이 포진하고 있다.

내가 많이 격분했던 것은 수치심에 기생하는 이들 재활 관련 사업체들이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이들의 직업 훈련 시설이나 중독자에 대한 재활 시설들이 회복을 돕기보단 오히려 무너진 이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일삼는 경우였다. 하지만 거기엔 수치심으로 똘똘 뭉쳐 이들을 공격하는 대중도 한몫했을 것이다. 범죄와 중독에 노출된 그들의 순간의 선택의 잘못되었다고 믿으며 이들을 손가락질해가며 더 이상 사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입막음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어쩌다 우리는 잘못된 수치심에 기반하여 문제를 정확하게 직시할 수 없게 되었을까?

거기에도 거대한 산업 메커니즘의 의도가 숨겨져있다.

저자는 알고리즘과 각종 플랫폼 기업의 예를 든다.

끊임없이 생산되는 수치심의 원동력은, 돈이 된다 싶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 수치심에 기름을 붓는다. 근거도 그럴싸한 유사 과학과 조작된 통계의 도움을 받아 나름 검증된 정보를 거대 기업의 플랫폼 기업의 sns가 열심히 실어 나르고 거기에 알고리즘의 편향된 정보로 안내되어 우리를 자극한다.

이들의 목적은 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아 트래픽을 늘려 광고를 얻어내고, 돈을 버는 목적뿐. 그 정보가 정확한지, 올바른지, 특정 기업에만 유리한지 전혀 판단하지 않고, 걸러낼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할 수 있음에도.

하지만 이러한 수치심은 때로 정의로운 무기로 사용될 수도 있다.

여기서는 펀치 업을 날린다고 표현하는데, 나이지리아의 독재에 대한 저항 촛불 시위, 간디의 소금 행진, 미투 운동 등 그 집단의 가치를 공유한 힘 있는 자들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모욕을 주기도 한다. 순기능이다.

수치심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삶에서 영향을 끼친다. 나 또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릴 때는 이러한 수치심의 발로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스스로를 자책하기에 바빴다. 이제는 그 근거도 불분명한 나를 괴롭히는 수치심의 화살촉을 외부로 돌려보기로 하자. 나에게 해당되는 내용일 수도 나와는 무관하다 여길 수도 있는 각종 이슈나 통용되는 관념 등에 하나하나 해체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저자 또한 평생을 괴롭히던 자신의 비만에 대한 수치심을 직시하며, 잘못된 수치심을 해체하는 노력을 하였다.

나도 혹시 나와 상관없다 여기고 묵인하며, 이 머신의 힘에 은연중에 지지했던 것은 아닐지 고백도 해보며, 각종 수치심 머신 해체 작업에 함께 수치심 렌즈를 끼고 들여다보아야겠다. 또한 주변으로 눈을 돌릴 때, 수치심 머신에 길들여져 날카로워진 시선을 거두고, 따뜻하게 포용하며, 공감해 보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할 거 같다.

살면서 이러한 시선을 거둘 수 있도록 이 책을 여러 번 다시 읽어 보아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