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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루스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9월
평점 :
#제공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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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대 흑사병이 유행하던 중세 러시아의 루키나 마을에서 태어난 아르세니는 할아버지로부터 약초의 효능을 배워 사람들을 치료하며 살아간다. 그의 마법 같은 의술은 사람들의 신망을 얻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임신한 몸으로 나타난 우스티나라는 여인을 돌보며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가 아이를 낳을 때 제대로 처치하지 못해 그녀는 아이를 낳다 아이와 함께 죽고 만다. 정작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죽게 만든 죄책감에 빠진 아르세니는 집을 나와 유럽을 떠돌아다니면서 회개와 연인 우스티나와 그의 아들의 구원을 위한 수도자의 인생을 살아간다.
❝ 그는 여러 시대를 살면서 서로 다른 네 개의 이름으로 불렸다. ❞
오만한 마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부인하며 마치, 네 명의 인생을 살듯 아르세니는 유로디비 우스틴, 친구 암브로조의 이름을 딴 암브로시우스, 그리고 수도자 라우루스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인생을 살아간다. 의술을 펼치며 명성을 얻지만 부유와 편리한 삶을 탐하지 않는다. 다양한 인연과 죽음을 마주하며 그의 삶에 대한 성찰은 깊어간다.
그의 인생은 선한 희생을 통한 삶과 죽음, 믿음과 구원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여정이었다. 삶 속의 시간은 선형적이 아닌 와선을 그리며 순환하는 원을 그린다. 우스티나와 그의 아들은 마지막 아나스타시야와 그의 아들과 대칭을 이루고, 늙은 라우루스가 자신의 모습에서 할아버지 흐리스토포르를 본 것도 대칭을 이룬다.
❝ 라우루스는 삶이 시작 지점을 향해 이동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삶은 모자이크 같다. 처음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수없이 만들어낸 조각들(만남, 사건, 등)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모자이크를 만들어 나간다. 나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삶은 신비 자체다.
#커다란초록천막 을 번역한 승주연 역자의 번역도 매끄럽고 좋았다. 번역이 좋았던 것도 이 책을 온전히 즐기는데 한몫했다. 👍
📍416p 150킬로미터->150미터가 아닐지..
🔖'마치 내가 방금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어른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는데 지금껏 내 삶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고 싶은 걸까? 혹은 기억이라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으니 지금까지 겪은 것 중에서 좋은 것만 기억하고 싶은 것일까? 내 기억은 이따금 나를 버리며, 머지않아 나를 영원히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잊히는 것만으로 용서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은 사실과 다르며 내 질문도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다. 내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이자 고통인 우스티나 없이는 내 구원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 당신께 기도드립니다. 제게서 우스티나를 구원할 희망이 존재하는 기억을 앗아 가지 말아주십시오. 만약 제 영혼을 거두시어 당신께로 인도하신다면 부디 제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녀가 이 땅에서 한 일로 인해 심판하지 마시고, 그녀를 구원하고 싶어 한 제 간절한 바람으로 심판하여주십시오. 그리고 제가한 일 중 얼마 안 되는 착한 일은 그녀가 한 것으로 기록해주십시오. (213p)
🔖알고 보니 사건들이 늘 시간 안에서 흘러가는 것은 아니더군. 이따금 사건들은 독자적으로 흘러가곤 하오. (256p)
🔖"내가 좀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해볼까 합니다. 나 역시 시간이 없는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알 수는 없을 테니까요. 내 생각에 시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우리가 혼돈에 빠지지 않기 위함인데, 인간의 의식은 모든 사건을 동시에 기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나약함으로 인해 시간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345p)
🔖"담수가 염분이 있는 바닷물로 유입되는 것은 이 세계의 달콤함이 결국은 짜고 쓴 것으로 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395p)
🔖"바로 그겁니다. 기하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시간의 움직임은 와선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복이긴 하지만 무언가 새롭고 조금 더 높은 수준에서의 반복인 것입니다. 혹은 새로운 사건을 겪긴 하지만 완전히 새롭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과거에 겪은 일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46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