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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렘 입숨의 책 - 구병모 미니픽션
구병모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1월
평점 :
#제공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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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렘 입숨 같은 더미가 되었다. 행간에 무언가가 숨어 있는 듯하나 실은 그 무엇도 없는 말들. 콘텐츠가 아닌 폼과 셰이프를 위해 만들어진 말들. (71p)
'로렘 입숨의 책'은 원고지 30장 내외의 미니픽션(엽편소설, 초단편소설) 13편으로 이루어졌다. 매 단편이 끝나면 작가노트가 짧게 이어진다. 책 커버를 벗기면 보이는 표지아트는 단편들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깨알같이 그렸 넣었다.
이 책은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해 밤이 새는 줄도 모르게 쭉 읽어나갔다.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다양한 이야기가 판타지와 현실을 오간다. 초단편이라 가볍지 않을까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두세 번 재독할 때마다 행간에 숨은 것들이 보인다. 마치 건빵에서 별사탕을 찾는 것 같다. 인간과 신, 전쟁과 환경, 선악 등 철학적인 주제에서 현실적인 문제까지 넘나들며 이에 대한 작가의 거침없는 사유가 노골적이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특히, '동사를 가질 권리'에서는 소설 즉, '이야기 짓기'라는 것에 대한 생각과 주장이 드러난다. 마치 공해와도 같은,비슷한 콘텐츠와 스토리의 홍수 속에서 작가는 지속적으로 '낯설기'를 시도한다. 주어에 합당하지 않더라도 모든 동사를 대입해 볼 시도 같은 것. 작가는 보편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을 지속적으로 말한다.
구병모 작가의 독특한 문체는 이 책에서도 두드러진다. 우리가 잘 쓰지 않는 단어(한자어)들은 초단편이 가질 수 있는 가벼움을 묵직하게 하고 독백하는듯한 문장들은 이야기에 더 쉽게 몰입하게 한다. 화장(花葬)과 화장(火葬), 조화(造化)와 조화(調和), 꿈, 서바이벌(생존, 경연)등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언어유희도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책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은 '겪어본 적 없는, 흔들림과 기울어짐. 그러나 그 진동과 요동, 가파른 경사 안에서 자신에게 찾아오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스카의 지상화처럼 우리에게 흔적을 남긴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조금씩이라도 더럽고 악한 인간(24p)임을, 자연이야말로 얼마나 정직하며 스스로의 실체를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없이 담담하게 드러내는지를(25p)
🔖인간은 하나하나 서로 다른 환경과 내성을 지니고 있어서, 장기간의 가뭄 속에 죽음의 형벌을 받는 자들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며, 사악하고 부유한 죄인들은 그런 와중에도 기갈을 모르고 아사로부터 자유롭다(30p)
🔖협력, 통솔, 적대관계를 맺음으로써 존재 의미가 확립되는 인간과 달리 신은 그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는 존재, 그리하여 자신의 역사나 기획 의도에 대해 누구에게도 세세히 설명하고 가르쳐줄 의무가 없었으므로.(32p)
🔖세상의 어떤 글도 존재하지 않음이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궁극의 글쓰기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정적보다 완벽한 음악이 없듯이, 점 하나 찍지 않은 흰 도화지가 화려한 그림을 압도하듯이, 태어나지 않음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삶이듯이. (74p)
🔖아름다움과 기분 좋음에 대한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진 이들이, 무엇을 도구 삼아 타인의 기량과 예술성을 판단한다는 말인가. (103p)
🔖이렇게 실체가 있고 무거운 말을, 인간은 그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난사한다. 허공에 값 없이 흩어지는 말들도 있으며 어떤 말들은 사람의 심장에 가서 박히고 그를 죽인다. 드문 일이지만 특정한 말은 듣고 죽어가거나 반대로 죽어가다가 살아나는 꽃도 있는 것처럼. (203p)
#로렘입숨의책 #구병모 #안온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