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마라 세계문학의 천재들 5
에바 킬피 지음, 성귀수 옮김 / 들녘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론 내가 사전에 세워줬지. 쿠키 반죽을 하듯 열심히 주물러줬다니까. 여자한테 그 일이 얼마나 신기한 건지 당신이 안다면! 그 창조적 환희 없이는 난 도저히 못 살 것 같다니까. 그건 마치 온전한 인간을 하나 만들어내는 느낌이야. 사람 모양의 빵을 빚어낸다고나 할까. 열심히 주물러주면 죽어 있던 물건이 문득 살아나기 시작하고, 결국 엄청난 크기로 성장하는 거지. 삶에 필수적인 강도와 유연성 모두를 갖춘 기관인 셈이야. 자고로 변신능력이라는 것은 무척 드문 자질이거니와, 아마 생명이 가진 모든 능력 중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몰라.”


‘타마라’가 그 창조성과 변신 능력에 찬사를 보내는 이 대상은 무엇일까? 바로 남근(男根)이다. 원제인 ‘타마라(Tamara)’에 ‘불가능한 사랑’이라는 우리말이라는 부제가 덧붙은 이 책은 거리만큼이나 심리적으로도 멀게 느껴지는 북구의 나라, 핀란드에서 온 뜨거운 소설이다. 1972년에 출간되었을 당시 에로티시즘 문학의 전통이 없었던 자국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새삼 출간된 지 40년이 넘은 지금 ‘세계문학의 천재’로서 작가 에바 킬피(Eeva Kilpi)를 우리나라에 소개하게 된 것은 모두 번역가 성귀수 덕분이다.(핀란드어 원작을 프랑스어로 중역했다.)

전쟁터에 나간 남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자, 남자가 숱한 여자들 중 언젠가는 나를 선택해주기를 고대하는 여자, 삽입에 이어 오르가슴에 도달한 여자의 신음소리 묘사로 끝나는 정사(情事)……. 『타마라』는 이 모든 클리셰를 빗겨가는 에로티시즘 소설이다. 하지만 성적(性的) 주체인 여성 타마라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의 화자 ‘나’는 남자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남자는 사고로 하반신이 불구가 되어, 성기능이 마비된 ‘불능’의 대학교수다. 그는 타마라가 숱한 연인들과 섹스를 하고 그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언젠가는 둘만의 관계에서 영속성(永續性)을 찾을 수 있기를 고대하고 또 고대한다. 갖가지 별명으로만 불리는 타마라의 애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해 그들과의 정사를 상세히 묘사해달라며 타마라를 조르기도 한다. 한편 타마라는 성적으로 자유분방하고, 결혼한 남자와의 애정 전선에 뛰어드는 데 거리낌이 없으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아들은 있는 여성이다. 남자는 마치 전쟁터에 나간 연인이 무사히 귀환하기를 기다리듯, 타마라가 사랑의 전장(戰場)에서 비록 상처는 입을지언정 그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영속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한다.

언뜻 보면 이 작품은 육체적 사랑과 쾌락에 빠진 한 여자의 각종 행각을 묘사하는 것이 목적인 듯 보이나, 독자는 남자와 타마라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이 책이 여성심리의 단호한 해방 의지를 표출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킬피는 타마라라는 인물을 통해 편견, 위선, 우리 인생을 죄스럽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온갖 족쇄들에 공격을 가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모든 여성, 핀란드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여성이 성(性)과 애정생활에서 주체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왜 하반신이 마비된 학자의 시선으로 ‘타마라’의 이야기를 썼냐는 질문에, 작가인 에바 킬피는 이렇게 대답했다. “화자가 장애를 갖고 있다고 설정한 이유는, 우리 모두가 사실은 감정에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출판사에나 몇 년씩 묵은 원고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원고들은 기획자나 처음에 원고를 담당했던 편집자가 자리를 떠나면서, 부모 잃은 아이처럼 후임자에게 맡겨지고, 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가 결국엔 적당한 담당자를 찾지 못한 채 컴퓨터상의 문서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가제로 남는다. 『악녀의 재구성』은 출판사에서 ‘조선의 악녀들’로 불리던 원고였다. 처음 기획한 편집자는 회사를 떠난 지 오래였고, 세 명의 저자가 몇 꼭지씩 써서 완성한 조각글들은 한 번도 하나의 원고로 묶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조선 시대의 여인들만 다루는 원고도 아니었다.(음?) 침묵하는 출판사에 저자들의 원망은 쌓여갔고 마지막으로 이 원고의 담당자가 된 편집자는 밀린 방학숙제를 해치우는 심정으로 편집을 시작했다……는 것은 어느 책에나 사족처럼 붙는 비하인드 스토리다. 사실 『악녀의 재구성』은 조각글의 형태로 존재했을 때부터 좋은 원고였다. 단지 어떤 제목을 붙여 어떤 순서로, 어떤 주제를 내세워 책으로 만들어야 할지 명확하지 않았을 뿐. 몇 번의 미팅을 거친 후에는 빠른 순서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이야기 속에도, 현실에도 그런 여자들이 있다. 현모(賢母)도, 양처(良妻)도, 열녀(烈女)도, 효녀(孝女)도 아닌 여인들. 하지만 현대의 독자들은 옛 여인의 이야기라면 저도 모르게 앞의 네 가지 키워드 아래 이어지는 내용을 추측하려는 버릇을 들이고 말았다. 옛 서사란 지식인-남성이라는 필터를 거쳐 살아남곤 했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런 필터를 거치지 않고 생명력을 발휘하는 서사 속(혹은 역사 속) 여인들을 조명해보려는 시도 또한 계속되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옛 여인들을 다루는 시선에도 사실 익숙하다.

『악녀의 재구성』은 이런 시도(지식인 남성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여성들을 조명하려는 시도)에서조차 주목받지 못했던 기묘하고 일그러진 여인들에 주목한다. 아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귀신에게 ‘잡아갈 테면 잡아가라’고 받아치는 어머니, 양성인(兩性人)이라는 혐의를 받는 여장남자를 옆에 끼고 사는 사대부 여인. 이 시대의 눈으로 보아도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들지만 불편하다고 말하지는 못할 그런 여인들. 차마 말은 못하지만 비정한 어머니라거나 음탕한 여자라는 비난을 받기 딱 좋은 인물들 아닌가. 고전문학을 공부한 세 저자(홍나래‧박성지‧정경민)는 이 여인들의 마음자리에 주목하고, 그들에게 덧씌워진 이데올로기를 하나씩 지워낸다.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고 그 마음의 속살을 들여다봤을 때 남은 것은 순수한 ‘욕망’이었다.

이데올로기는 그녀가 훌륭한 어머니였노라고, 어진 아내였노라고 말하지만 세 저자는 ‘모성’ ‘양처’ ‘열’로부터 탈주해 마음의 속살을 본다. 가부장 체제 아래에서 남성의 부속물처럼 살아갔던 옛 여인들의 욕망을 인정하는 일이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 마음자리에 남는 것이 있다. 바로 ‘주체성(subjectivity)’이다. 이는 근대 서양학문과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고서야 가능한 말이 아니라고 세 저자는 주장한다. 그 시대의 여성들이라고 자기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겠는가? 그들은 여성이 굳건한 언어로 삶의 의지를 표현할 수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탓에 ‘내 팔자가 이러하네’ 하며 더 거대한 의지를 가진 듯한 운명에 몸을 맡긴다 했을 뿐이다. 세 저자들의 눈에 보인 것은 이 여인들의 순수한 욕망, 팔자나 복이라는 말로 형상화된 주체성 그리고 소용돌이치듯 솟아나는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