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출판사에나 몇 년씩 묵은 원고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원고들은 기획자나 처음에 원고를 담당했던 편집자가 자리를 떠나면서, 부모 잃은 아이처럼 후임자에게 맡겨지고, 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가 결국엔 적당한 담당자를 찾지 못한 채 컴퓨터상의 문서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가제로 남는다. 『악녀의 재구성』은 출판사에서 ‘조선의 악녀들’로 불리던 원고였다. 처음 기획한 편집자는 회사를 떠난 지 오래였고, 세 명의 저자가 몇 꼭지씩 써서 완성한 조각글들은 한 번도 하나의 원고로 묶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조선 시대의 여인들만 다루는 원고도 아니었다.(음?) 침묵하는 출판사에 저자들의 원망은 쌓여갔고 마지막으로 이 원고의 담당자가 된 편집자는 밀린 방학숙제를 해치우는 심정으로 편집을 시작했다……는 것은 어느 책에나 사족처럼 붙는 비하인드 스토리다. 사실 『악녀의 재구성』은 조각글의 형태로 존재했을 때부터 좋은 원고였다. 단지 어떤 제목을 붙여 어떤 순서로, 어떤 주제를 내세워 책으로 만들어야 할지 명확하지 않았을 뿐. 몇 번의 미팅을 거친 후에는 빠른 순서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이야기 속에도, 현실에도 그런 여자들이 있다. 현모(賢母)도, 양처(良妻)도, 열녀(烈女)도, 효녀(孝女)도 아닌 여인들. 하지만 현대의 독자들은 옛 여인의 이야기라면 저도 모르게 앞의 네 가지 키워드 아래 이어지는 내용을 추측하려는 버릇을 들이고 말았다. 옛 서사란 지식인-남성이라는 필터를 거쳐 살아남곤 했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런 필터를 거치지 않고 생명력을 발휘하는 서사 속(혹은 역사 속) 여인들을 조명해보려는 시도 또한 계속되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옛 여인들을 다루는 시선에도 사실 익숙하다.

『악녀의 재구성』은 이런 시도(지식인 남성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여성들을 조명하려는 시도)에서조차 주목받지 못했던 기묘하고 일그러진 여인들에 주목한다. 아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귀신에게 ‘잡아갈 테면 잡아가라’고 받아치는 어머니, 양성인(兩性人)이라는 혐의를 받는 여장남자를 옆에 끼고 사는 사대부 여인. 이 시대의 눈으로 보아도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들지만 불편하다고 말하지는 못할 그런 여인들. 차마 말은 못하지만 비정한 어머니라거나 음탕한 여자라는 비난을 받기 딱 좋은 인물들 아닌가. 고전문학을 공부한 세 저자(홍나래‧박성지‧정경민)는 이 여인들의 마음자리에 주목하고, 그들에게 덧씌워진 이데올로기를 하나씩 지워낸다.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고 그 마음의 속살을 들여다봤을 때 남은 것은 순수한 ‘욕망’이었다.

이데올로기는 그녀가 훌륭한 어머니였노라고, 어진 아내였노라고 말하지만 세 저자는 ‘모성’ ‘양처’ ‘열’로부터 탈주해 마음의 속살을 본다. 가부장 체제 아래에서 남성의 부속물처럼 살아갔던 옛 여인들의 욕망을 인정하는 일이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 마음자리에 남는 것이 있다. 바로 ‘주체성(subjectivity)’이다. 이는 근대 서양학문과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고서야 가능한 말이 아니라고 세 저자는 주장한다. 그 시대의 여성들이라고 자기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겠는가? 그들은 여성이 굳건한 언어로 삶의 의지를 표현할 수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탓에 ‘내 팔자가 이러하네’ 하며 더 거대한 의지를 가진 듯한 운명에 몸을 맡긴다 했을 뿐이다. 세 저자들의 눈에 보인 것은 이 여인들의 순수한 욕망, 팔자나 복이라는 말로 형상화된 주체성 그리고 소용돌이치듯 솟아나는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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