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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영초언니> - 서명숙 지음, 문학동네, 2017.
책을 배달받자마자 단숨에 꼼꼼하게 읽은 지 몇일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이 책에서 받은 감동과 그 여운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바로 그 시대를 공유했던 나에게는 행동하지 못한 부끄러움과 함께 그 시절에 대한 아련한 추억들이 생각나서 남이야기 같지 않았다.
저자 서명숙은 서귀포에서 나고 자라서 고대(76학번)에 진학했지만 나는 같은 나이지만 재수해서 다음 해에 그 근처의 대학(77학번)에 들어갔다. 이 책의 주인공인 영초언니가 고대 72학번이었고 문재인 대통령도 72학번이었다. 학번을 들먹이는 것이 그 당시 선택받은 자들만 가던 대학을 못 다닌 분들에게는 불쾌한 경우일 수도 있지만 바로 그 72학번이 대학에 입학한 그 시기부터 서명숙과 내가 대학을 다닌 1980년말 까지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긴급조치 시대였고 영초언니와 서명숙이 활약한 그 무지막지하고 살벌한 시기였기 때문에 꼭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 시기가 지금은 많이 잊혀져 미니스커트나 장발 단속과 같은 코메디 같은 일이 벌어진 시대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리고 웬만한 사람들이야 좀 움츠리고 살아야 하는 정도의 시대 상황이었지만, 실제로는 박정희 장기독재와 불법통치에 저항한 사람들을 아무런 체포-구속영장이나 합법적 절차도 없이 불법체포-불법감금-고문수사-군사재판-엉터리 판결까지도 가능했고 영초언니와 서명숙과 같이 고문수사를 받고 감옥살이 한 사람들은 부지기수였고 사형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분들도 많다.
이 책은 그 살벌한 시대에 활약한 영초언니와 서명숙이 대학 선후배로 만나서 민주화 투쟁하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감옥에 가서 고초를 겪고 그리고 그 후일담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당시에는 박정희정권을 비판하거나 반정부 집회나 시위를 하거나 반정부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반독재-민주화운동을 하면 바로 감옥에 가는 것을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 웬만한 사람들은 다들 죽어지냈는데, 그래도 목숨 걸고 민주화투쟁을 한 분들 덕분에 박정희의 장기독재와 불법통치는 끝이 났다.
서명숙과 내가 1957년생이고 박정희가 1961년에 정권을 잡았으니까 내가 자의식이 생기고 초등학교를 들어갈 때쯤부터 (박정희가 죽은 날이 1979.10.26.일이었으니까) 내가 대학교 3학년 때까지 19년 동안 줄곧 대통령은 박정희였다.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말이 내 머리 속에 얼마나 확실하게 각인이 되었으면 나중에 그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 똑같이 ‘박대통령’이라고 호칭되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에게는 문득문득 박정희대통령이 먼저 생각났고, 아니라는 상황을 깨닫고는 나는 그 지긋지긋한 박정희의 망령(亡靈)에 진저리를 쳐야만 했다. 아마도 서명숙도 그러하지 않을까?
이 책은 1970년대 그 시절 이야기다. 서명숙은 영초언니를 끌어들여 그 시절을 증언하고 있는데, 그 단서는 올해 국정농단의 주역인 최순실이가 호송차에서 내리면서 엉뚱하게도 ‘민주주의’를 언급하는 장면이었다고 프롤로그에 썼다. 나도 최순실의 그 장면을 화면으로 보면서 1970-80년대에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잡혀 들어가서 재판을 받던 그 혈기왕성한 학생들과 민주투사들이 호송차에서 내리는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하여 민주주의를 외치던 모습을 떠올렸었다. 교도관들은 소리치는 입을 막으려고 덤벼들었고! 서명숙은 최순실의 그 장면을 ‘비현실적’이라고 표현하였는데 나는 ‘참 생뚱맞다!’고 느꼈었다.
이 책을 보면서 생각나는 말은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것! 이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김대중-김영삼-노무현-문재인 대통령도 그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시대라는 난세에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한 분들이었고, 이 책에 언급된 심재철, 유시민, 최순영 같은 분들은 그래도 보상을 받아서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때 활약을 하고 고초를 겪었음에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수많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있었다. 나중에 제정된 민주화보상법, 더 정확히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로도 보상받을 길은 없었지만 뒤에서 열렬히 지지해주고 희생적으로 열심히 뛰어준 사람들이 많았고 그 중에 상당수가 안타깝게도 빛도 못보고 그냥 시들어간 경우도 많았다. 이 책에 나오는 정문화가 그렇고 내 주변에도 그런 친구가 있다.
나는 법대를 다녔는데 헌법 시간에 그 엉터리 유신헌법을 배웠다. 대통령의 중임제한 규정도 없고 3권분립도 적법절차 조항도 유명무실해진 그 황당한 헌법과 그것보다 더한 헌법현실을 보면서 많이도 착잡했다. 아마도 대학 시절 내가 겪었던 가벼운 우울증 증상은 이러한 갑갑한 시국과도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헌법을 가르치셨던 소심했던 교수님은 워낙 한심하게 쓰여진 헌법조문의 대목에서는 얼버무리시면서 그냥 지나쳤다.
나의 경우는 그 때나 지금이나 성향이야 운동권 못지않았으나 성격이 소극적이고 제대로 된 선배를 못 만나서 운동권은 못되었다. 하기야 신문사나 탈춤반 같은 써클에 운동권 기질을 가진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지하에 이념써클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 누가누가 잡해갔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어 모른체 했다. 나는 심정적 지원군 정도!
이 책의 앞부분에 서명숙이 초등학교 5학년 때 국민교육헌장을 단 하루만에 외웠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러한 머리는 타고 나는 것인데 서명숙은 워낙 머리가 좋았나 보다. 나도 그 때가 얼핏 생각나는데 선생님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라 하니 뜻도 모르고 외었는데 그래도 2~3일은 걸렸던 것 같은데...
그 당시의 운동권에는 여전히 가부장제적 전통이 강했다고 들었다. 운동권 아니더라도 그 당시에는 여자 후배가 남자선배들에게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영초언니와 서명숙처럼 운동권 여학생들은 담배를 많이 피었다. 그 당시에는 운동권에서는 말도 못 꺼내는 분위기였지만 다른 사람들(부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은숙 포함)이 나중에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쓴 글들을 보면 ‘여자무시’를 넘어서는 성희롱 성추행 같은 것도 있었겠다. 이 책에는 그러한 상황이 순화되어 나오지만 여학생들이 따로 모임을 결성하는 등 어렴풋이 언급되는 상황을 보니 가부장제적-성희롱적인 횡포가 심한 경우도 많았으리라.
기자출신인 서명숙의 글발은 끝내준다. 그녀의 이전 책들처럼 이 책도 술술 잘 읽힌다. 표현은 사실적이고 문장은 매끄러우면서 간결하고 정확하다. 이러한 솜씨도 타고난 소질에 그 동안에 갈고 딱은 수련의 덕분이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명숙은 소신이 확실하고 야무지다. 그럼에도 부모님의 기대를 온몸으로 받으면서 자라고 서울로 유학까지 온 저자가 곳곳에서 흔들리는 모습도 인간적으로 잘 그려졌다. 하기야 “흔들리며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서명숙의 이러한 재능과 경력과 내공이 한 여인의 몸과 마음에 응축되고 오랜 시간을 거쳐 숙성되어 마침내 ‘제주올레길’로 화려하게 만개하였다. 그녀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아무도 생각해 보지도 못한 치유를 위한 걷는 길! 제주올레길을 최초로 고향 제주도에 만들었고 그 길이 각광을 받으면서 각 지자체로 전세계로 전파되었다. 대한민국 최남단 서귀포시의 서명숙상회의 딸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아주 새롭고 유익한 트랜드를 만든 아주 자랑스러운 유명인이 되었다.
영초언니나 서명숙 같이 이 땅의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고생하고 희생한 분들의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 정치적 민주주의의 절차와 제도를 구현하며 살고 있고 인권과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있으니 이런 책을 읽으면서 그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듬뿍 가져야겠다. 작년과 올해로 넘어오면서 계속되었던 그 촛불 시위와 그 이후의 과정도 일제 강점기 시대의 독립운동부터 해방후에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수많은 분들의 희생이 밑거름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역사는 그렇게 진행된다. 감사할 따름이다.
쓸데없는 사족:
1. 서명숙이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연애하고 결혼을 한 동지였던 엄주웅과 21년만에 이혼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서명숙의 그 이전의 책들에서도 이런 내용은 확실하게 안 나왔는데, 그래도 나는 전에 대충 그런 얘기는 들었는데 여기서 확인하니 내가 당황스러웠다. 천하의 서명숙이!
다들 사이좋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부부관계를 포함한 가족관계가 다들 어려운가 보다.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2. 누구의 말을 들으니 서명숙 이사장은 벌써 2년전쯤에 담배를 끊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책에서 그런 사실을 밝혔으면 좋았을텐데! 그러면 서명숙 팬들이 좀 더 안심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