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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평점 :
1. 낭만과 예술과 자유의 도시 빠리
나는 지난 달(2005년 10월)에 빠리를 여행했었는데 그 때에 빠리에서 받은 깊은 인상이 지워지지 않아서 빠리에 관한 책을 찾던 중에 예전에 읽은 이 책을 발견하였고 다시 읽었다.
역시 좋은 책은 언제 다시 읽어도 좋았다.
이 책에서는
1) 요즈음에는 우리에게 흔하지 않은 망명객으로서의 홍세화.
2) 생존의 수단으로 선택한 택시운전사로서의 홍세화,
3) 망명의 계기가 되었던 남민전 활동가로서의 홍세화
의 개인적인, 그렇지만 한국현대사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빠리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다.
망명객! 어디서 들어 본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니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이 결국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10년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살해되었다.
여기에서 지식인 망명가인 홍세화에게 빠리라는 도시가 제법 잘 어울렸던 이유는 빠리가 연상시키는 ‘자유와 낭만’의 이미지와 똘레랑스 라고 하는 이민족이나 망명객에게도 너그러운 관용적인 태도가 아니었을까.
그러한 프랑스가 예전의 무지막지한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를 많이도 약탈하고 착취하여 쌓아 놓은 부와 여유를 토대로 형성된 것이라고 하더라도(12-13쪽), 빠리를 저렇게 화려하고 조화롭게 단장해 놓고, 세월이 흘러도 전혀 퇴색되지 않을 예술미를 가미시켜 놓은 것은 분명 그들의 예술적인 감각 때문일 것이다.
‘자유 박애 평등’의 프랑스 혁명의 이미지가 이번 ‘무슬림의 폭동’으로 많이 퇴색되었지만 (특히 이민자들에게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은 매우 우려할 만한 것이지만), 그리고 요즈음은 좌익정권(예전에는 좌익정권이 이민자들에게 더욱 너그러웠다. 143쪽)이나 우익정권이나 모두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려서 정체성을 알아보기 힘들어졌지만, 내가 본 낙엽이 지던 10월의 빠리는 관광객에게는 역사와 예술과 낭만의 도시였다.
관광객에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도시가 망명객인 홍세화에게는 아름다워서 더욱 슬픈 도시였을 것이다. (285쪽).
2. 빠리 사람들
이 책은 그냥 스쳐가는 관광객이 볼 수 없는 빠리의 속모습을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택시정책이나 이민정책이 주로 언급되지만 그것을 통하여 빠리 사람이 사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빠리의 택시정책은 우리의 회사택시 개인택시 제도와 대체로 우리와 비슷해 보이며, 저자가 그려낸 택시 손님들의 모습은 결코 우리의 지금(!)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들한테 다녀오는 할머니 이야기(160쪽), 택시요금 안 내고 도망가는 사람이야기(184쪽). 인종주의자들(189쪽)의 모습. 프랑스에서의 신분과 직업의 귀천 문제(107쪽) 등.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야 다 그렇다고 하지만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여유롭고 너그럽게 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유럽여행을 다녀오고 얼마 후에 프랑스에서 ‘무슬림폭동’이 일어나고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 책에서도 프랑스인들이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을 가장 싫어하고 갈등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188쪽).
하기야 어느 사회든 근본주의자 내지는 수구꼴통들이 왜 없겠는가? 프랑스는 우리보다 훨씬 많은 비율의 이민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 런던과 빠리는 마치 인종전시장 같다. 그 현상이 제국주의 시대에 자기들이 저지른 엄청난 범죄 행위들에 대한 업보이고, 이민자들이 대개 사회의 하층부에 속하고, 그들이 하는 일들은 대개 백인들이 하기를 꺼려하는 3D업종에 속하는 허접한 일들이지만, 그래도 그 정도로 어울려서 부지런히 평화롭게(?) 살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었는데.
(프랑스가 경제성장기인 60년대에 일손이 부족해서 집중적으로 이민족을 받아들였고, 일거리가 많았을 때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처럼 프랑스가 상시적인 고실업사회가 되면서, 이민 2-3세대들의 불만은 고조되고 있고 이번 폭동은 그 결과이다).
우리가 단일민족이라는 것이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니라 이민족과 약자에 대한 민족주의적 혹은 국수주의적인 배타성의 표현일 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얼마 안 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프랑스의 이민자들보다 훨씬 안 좋게 차별대우하고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고 있을 것이라는 데로 생각이 미쳤다.
3. 1970년대와 80년대의 암울한 현대사
저자의 발은 빠리에 걸치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돌아가지 못하는 한국의 서울을 맴돌고 있었다. 그는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회사일로 1979년에 한국을 떠난 후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은 암울했던 1970년과 80년대의 한국의 현대사를 증언하고 있다.
군사독재정권시절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크고 작은 희생을 치렀고 고통을 겪었다. 그중의 일부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상당한 보상을 받았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5년도 당시에도 빠리에서 유일한 한국인 택시운전사로 일하면서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고 한국에 간절히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다.
그의 프랑스에 망명신청을 하여 받은 망명증명서 관련 부분을 읽으면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여행목적지’ 항목을 보는 순간, 나는 갑자기 깊은 심연 속으로 자지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여행목적지: 꼬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153쪽)”
나도 그러한데 홍세화는 저자는 얼마나 몸서리쳐지도록 슬펐을까?
그는 쎄느강변에서 포도주를 먹으면서 이렇게 외쳐댔다.
“나는 배반하지 않았어. 내가 배반한 것이 아니야. 네가 배반했어. 배반한 것은 바로 너란 말이야! 따져보자구. 하나하나 따져보자구! 정말 누가 배반했는지 따져보자구!”
그는 그렇게 망명객이 되었다. 조국에 배신당해 조국을 버린 망명객의 애닯은 심정이 이 책 읽는 내내 절절하게 독자들의 가슴에 전해졌다. 저자의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유려한 글솜씨, 그리고 무엇보다도 치열한 의식과 그의 험난했던 인생의 경험들이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70-80년대의 한국의 부자유와 증오와 공포의 비극적 정치현실이 그 당시의 자유롭고 여유롭고 낭만적인 빠리와 교차되면서 더욱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책은 훌륭한 문학(소설)책이고, 대한민국 현대역사책이고, 빠리 생활의 기행문이다.
이 책은 결국에는 bestseller (2001년에 36쇄)가 되었다. 속된 말로 그는 이 책으로 ‘떴다’. 물론 이 책은 그동안의 힘들게 쌓은 내공의 결과물이겠다.
그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민전 사건이 재조명되면서 결국에는 사건 관계자들은 다 자유의 몸이 되었고 저자도 한국 신문에 글을 발표할 수 있게 되고, 결국 2002년에 한국에 영구귀국한다. 20년만에 이후에도 몇 권의 책을 냈고, 지금도 문필가로서 맹활약 중이다.
4) 엘리트의식. 선비의식. 저항의식.
저자는 노동자로 일하면서도 글을 읽고 쓰고 싶어했다. 그는 그 어려운 속에서도 ‘르몽드’ 신문을 매일 사서 본다. 그 당시의 프랑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싸구려 황색신문을 보았다. ‘르몽드’ 신문은 많이 팔리지는 않지만 부동의 영향력 1위의 신문이다)
그럴 여건이 안 되면 더욱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아마 그는 품위 있는 선비처럼 살고 싶었을 것이다.
하기야 이 시대의 성골인 KS마크를 단 사람에게 빠리에서도 한국에서도 택시운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 어울리지 않음과 그 원인이 이 책에서는 제일 주요한 소재이다.
저자가 그 시대와 不和를 겪지만 않았어도 그는 더 우아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어차피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서 작동된다. 나머지 군중은 시키는 대로 따라하고 휩쓸리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엘리트 그룹을 누가 차지하느냐와 그들이 올바르게 잘 통치하느냐이다.
소수의 엘리트(지도자)그룹 중에서도 잘나가는 사람/소외된 사람, 그 시대와 잘 소통한 사람/불화를 겪는 사람, 참여하는 자/저항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인데, 저자는 체질상으로 결코 앞의 그룹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알고 보니 그런 집안의 핏줄을 타고 났다. 깐깐한 선비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70년대 80년대의 저항 그룹, 특히 서울대 문리대 데모꾼(!)들이 민주정권의 정치권에서 큰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도 거대 정당에 기웃거렸다면 멋진 감투를 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민주노동당 소속이다. 아마 그는 영원한 아웃싸이더로 남을 것 같다.
5)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대공분실, 보안사...
저자에게 많은 직접적인 육체적 고통을 가했던 저런 국가기관이 (모습을 바꾸어가면서) 지금까지도 국민들에게 군림하고 있다. 권력자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政敵들을 도청하고 감시했던 장본인(국정원장)들이, 그 책임자(DJ)가 오히려 큰 소리치고 있다. 자기들이 피해자라고, 그 전에는 더 했다고, 왜 자기들만 문제 삼냐고,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10년이 지나고 20-30년이 지나도 군부독재의 고문과 도청과 억압의 악습과 관행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는 구시대 인물들의 최후의 발악이다.
군사독재정권에게 감시와 억압을 당했던 YS와 그 정권이 정적들을 도청하고 감시하고 억압하였듯이, 그렇게 당하고도 DJ 정권은 다시 정적들을 감시하고 도청했다.
그렇지만 도청당한 노무현 정권은 이제는 정적들에 대하여 도청과 감시를 하지 않는다.
지금의 이 땅에 이만큼의 자유가 보장되고 도청과 감시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 많은 고통을 당했던 홍세화 같은 민주화 투쟁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국민들에게 고통을 가했던 기득권세력이 또다시 온갖 반칙과 불법을 통해서 또다시 득세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경계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 노무현 정권이 실패하면 다음에는 팟쑈(극우)정권이 들어설 것이고 그러면 국민들의 자유와 인권침해는 상당할 것이다. 두렵다.
(이 글은 2005년에 쓰여졌는데, 정말 노무현 정권 이후에 극우정권인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들어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