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삶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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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이번에는 언제 떠날 거야?”
“여름까지는 여기 있을 거야.”
“여름이 지나면?”
“이번에는 안 기다려.”
“기다린 적이 있었어?”

참치의 눈이 사나워져 있었다.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기다린 적이 있었냐고?
내가 너를 알게 된 후로 나는 내내 기다리고 있다.
네가 나에게 말을 걸기를, 내 손을 잡기를, 나를 간절히 원하기를,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를. 나에게 영원히 돌아오기를. 그런데 어떻게.

“넌 여기를 떠날 생각만 하잖아.”
간신히 나온 말이었다. 그 순간 참치가 웃었다. 한꺼풀 벗겨진 얼굴이었다. 참치는 희미해졌다가 희미해지기 전보다 선명해졌다. 선명해진 입으로 참치가 말했다.

“떠날 생각만 하는 건 너야. 가끔 넌 없어져. 여기에 없는 건 너야.”



마른 모래를 손으로 꽉 쥔다. 손 안에 가득 차도록 쥐어보지만 결국 손바닥에 맞닿는건 모래가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일 것이다 . 더 잡고 싶어도 잡을수록 아무것도 남질 않는데, 마른 모래라 손바닥을 탈탈 털면 아무것도 남질 않을것이다.

다만, 손 금 사이사이로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채 다 털어지지 못한 모래가 남아있을 터인데 그 잔 모래들을 보면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일 것이다.

너구리와 참치가 만나고 스쳐지나가는 과정의 감정들이 그 털려고 해도 털어지지 않는 잔 모래들일 것이다.

잠시나마 무언가를 잡으려 했지만-정확히 말하자면 참치만이 그랬지만- 결국 쥐어지는건 자신의 손일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야기. 그렇다고 털어낸다 해서 다 털어내지지 않는 이야기.


그렇게 그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릴 것이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마음 속에 달아두었던 각주를 좀 더 늘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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