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나오는 우유우유치즈라면과 대파대파후추라면을 가족들과 해먹었다

아무리 가보고 싶았던 호텔이라도 가격을 아는 순간, 전혀 가보고 싶지 않은 곳으로 돌변한다. 한번쯤 먹어볼까 싶었던 요리도 메뉴판을 보는 순간, 절대 그가격만큼 맛있을 리가 없다는 확신으로 바뀐다. 어쩔 수 없어서과한 소비를 했을 때에는 뒤따라오는 죄책감이 어마어마하다. 죄책감은 시도 때도 없이 방법을 바꿔가며 지속적으로 나를 공격한다. 이 집요한 공격의 이유를 알고 싶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심지어 통장의 잔고와도 상관없는 마음의 반작용이다. 놀라울 정도로즉각적이고, 심각할 정도로 공고한그러던 어느 날, 이따위 감각으로 평생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나를 스쳐갔다. 그건 좀 지겹다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생각은점점 덩치를 키워갔다. ‘내가 아는 나 자신을 존중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내가 모르는 나 자신은 왜 존중 안 해? 1년에 한두 번쯤은 나의 성향을 무시해버리자. 고급 레스토랑을 가는 거야. 안 해본 경험도 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 맛을 느껴보자. 그러다 보면 또새로운 감각이 깨어날지도 모르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결론은단순해졌다. ‘그래! 모험을 하는 거야.‘

회사 생활을 20년 가까이 하고서야 나는 이제 돈 쓰는 맛을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버는 것도, 모으는 것도, 투자하는 것도, 투자로 성공하는 것도 모두 중요하지만, 자기에게 맞는 방식으로 돈쓰는 법을 아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치통장을 타고 나는 낯선 맛의 세계를 모험하는 중이다. 이 모험은맛있고, 실은 너무 맛있고, 그래서 계속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엔 어디에서 우리 사치해볼까?

우리 인생에는 약간의 좋은 일과 많은 나쁜 일이 생긴다. 좋은 일은그냥 그 자체로 놔둬라. 그리고 나쁜 일은 바꿔라. 더 나은 것으로이를 테면 시 같은 것으로보르헤스의 이 문장에서 ‘시‘를 ‘음식‘으로 바꾸어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보르헤스의 동의는 얻지 못했지만.)

크루아상 추천 가게 홍댜 올드크루아상팩토리
라이스버거를 먹어봐야지

류승완 감독이 2021년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영상을 찾아봤어요. 화면 속에서 감독은 매우 상기되어있었어요. 긴장한 탓에 다소 장황하게 느껴지는 수상 소감을 들으며 최근 몇 년간 그가 겪었을 롤러코스터를 짚어봤습니다. 전작<군함도>로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이고 흥행에도 실패하며 마음고생이 심했을 감독, <군함도>를 만들기 직전에는 <베테랑〉으로천만 영화를 만들어서 찬사받은 감독. 절치부심해 해외 올로케로영화를 만들었는데 운 나쁘게 코로나 시국을 만나 영화관 개봉자체가 불확실해진 상황을 맞이한 감독, 거리두기 4단계 속에서 극장 개봉을 강행했고 결국 3백 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손익분기점을 넘긴 <모가디슈>의 감독. 그 모든 상황들을 겪은 후에 시상식무대에 올라서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화를 만들면서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는데 오늘은좋은 때인 것 같습니다. 사실 진짜 제가 뭐라도 된 것처럼 들뜨는

순간도 있었고 제 경력이 끝장날 정도의 위기로 보이는 순간도 있었어요. 근데 어떻게 묵묵히 버티고 가니까 이렇게 이 자리까지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뭔가 답답해서 안 뚫리고 어둠 속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영화인들, 조금만 잘 버티시죠. 버티시면좋은 날 옵니다."
"버티시면 좋은 날 옵니다"라고 말하는 감독의 얼굴을 보면서실은 그 말이 그가 스스로에게 맹세하듯 자주 내뱉었던, 그가 가장 절실히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남에게 행하는 조언이라고 하는 건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자기라도 자기를 믿어주려고 다짐하던 문장이 대부분인 것 같아요.

양가 부모님도 모두 지방에 계시고, 우리에겐 딱히 아이를 돌봐줄사람이 없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셋이서 함께 있다. 아내와 둘이서 데이트하는 날은 1년에 두세 번이나 될지 모르겠다. 결국 언제나 식당도 셋이서 가게 되고, 아이가 먹을 수 있는 걸 고르는 게항상 최우선이 되는 것이다. 아마, 이쯤 되면 아이를 키우지 않는사람들도 왜 그렇게 놀이동산이나 동물원 같은 곳에서 ‘돈가스‘를필수 메뉴로 두는지 이해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이를 키우지 않는 청춘의 입장에서는 꽤나 괴로운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이어서, 막상 적응하고 나면 매번 돈가스 먹는 것쯤이야 그리 대단한 일도 못 된다. 오히려 나는 이것을 약간 재밌는 일처럼 느낀다. 인생을 통틀어서 이렇게 돈가스를 자주 먹을 때가 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절은 일종의 돈가스 시절인 셈이다.

아이랑 살아가는 일은, 나와 아내의 삶에 아이 하나가 추가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아이라는 새로웅 세계로 입장하는 일에 가깝다. 그것은 내 어릴 적의 세계도 아니고, 이미 경험했다고 하기엔 거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아주 생소한 세계로의 입장인 셈이기도 하다. 혹은 내가 이미 버렸고, 지나왔다고 생각한 세계로의 시간 이동 같기도 하다.
하루는 벌레 잡기나 모래 놀이로 채워진다. 둘만의 데이트 공간보다는 셋이서 함께 가는 동물원이나 공원이 주요 나들이 일과다.
스시나 양념치킨보다는 돈가스나 짜장면을 먹으러 다닌다. 우아한 음악을 듣기보다는 만화 주제가가 집 안에 울려 퍼진다. 나는어느덧 예상한 적 없는 이상한 삶에 입장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삶이란 오늘 내가 꼭 먹고 싶은 걸 먹거나 지금 꼭 듣고싶은 음악을 듣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 시절 자체를 긍정하는 마음도 중요한 것 같다. 나는 매번 내가 꼭 먹고 싶은 ‘바로 그것‘을 먹지는 못한다. 그보다는 내가 먹고 싶은 것과 아이가 먹고 싶은 것, 나아가 아내가 먹고 싶은 것 사이에서 조율해야 한다. 그렇게 조율해서 먹는 것이, 일주일 내내 돈가스일 수도있다.
그렇지만 나는 일주일 내내 돈가스를 먹더라도 불행하진 않다.
오히려 그런 흥미로운 시절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드는것 같기도 하다. 내게 행복이란, 당장 내가 먹고 싶은 걸 먹는 즐거움이 아니라, 한 시절을 받아들이는 방식 그 자체인 것처럼 느껴진다. 행복이란, 이 순간의 쾌감보다 더 넓은 무엇이다.

함께 살아가는 행복이란, 바로 그러한 서로의 조율속에서 발맞추어 만들어가는 삶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에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을 재미있게 만드는 지름길이 있다면, 약간의 사건사고를 자처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큰 사고는 안 된다. 심각한사건도 좋지 않다. 사건사고는 만화 <보노보노>에서 나오는 에피소드들처럼 소소한 것들이어야 한다. 고구마나 반딧불이를 찾아나서거나, 나무껍질로 괴상한 놀이를 시도해보거나,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보는 식이다.
우리는 매번 그런 사고들을 만들기 위해 사는 것만 같다. 돌도안된 아이를 데리고 떠난 여행에서 아이를 안고 다니느라 진땀 빼기도 하고, 대책 없이 분수대에서 흠뻑 젖어버린 다음에는 햇빛에한참 앉아 간신히 몸을 말리기도 하고, 알파카를 보여주겠다며 산골 깊이 들어갔다가 길을 헤매기도 하는 일들을 겪어나가면서, 삶이 따분하지 않은 행복의 지름길로 갔다고 느끼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삶을 약간의 시트콤같이 만드는 것, <보노보노>에피소드처럼 만드는 것이 삶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아닐까? 나는 점점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자기 자신의 결핍을 마주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특히, 어린 시절의 결핍은 우리가 스스로 억눌러 기억 저편에 숨겨져 있는 경우도 많아서,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하기도 하다. 내가 그 무언가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그것과 관련된 어린시절의 기억을 뒤져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욕망을 수정해나가고, 진짜 내 삶을 위한,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사람을 위한욕망이랄 것들을 만들어갈수 있다.
물론, 사랑과 권태를 다룬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Waltz)에 나오는 대사처럼 ‘인생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이고, 그걸일일이 다 메꿔가면서‘ 살 수는 없다. 가령, 내가 마이구미나 페레로로쉐에 결핍이 있다는 걸 알아도, 때론 그 정도는 인정하면서,
나 자신을 약간 귀엽거나 가엾게 여겨주면서 먹어줄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의 결핍에 관해 잘 안다고 하여도, 신이 아닌 이상 완벽한 인간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삶의 여러 결핍들을 찾고, 욕망을 재점검하거나 수정해나가면서도, 때론 내 욕망을 인정할 필요도 있다. 때로 어떤 음식은 그것을 너무도 먹고 싶었던, 내 안의 어린 나를 달래주는 일이 된다. 그러나 어떤 음식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나스스로 고쳐야 할 마음의 병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한 욕망과 자신을 괴롭히는 욕망사이에서 삶을 보다 균형 있게 만들어가야 한다. 결국에는 그를 통해 내가 진짜 원하는 삶과 욕망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야 한다.

정지음 작가의 문체가 좋다! 이 작가의 에세이를 더 읽어봐야지!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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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한 인간이 일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지혜가 제공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이다.ㅡ에피쿠로스 주요 교설 중

우리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켜봐줄 누군가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내뱉는 말은 다른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지낸다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받는 것이다.
친구들은 우리를 알아주고 돌봄으로써 우리에게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있는 힘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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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태도로 걷는 삶은 어떤 삶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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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잠 - 이보다 더 확실한 행복은 없다 아무튼 시리즈 53
정희재 지음 / 제철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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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많은 나에게 위로가 되어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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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우리의 ‘사적인 것’은 결코 언어화될 수 없다. 만약 언어화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사적인, 자신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이것이 ‘모두의 것이기도하고 누구의 것도 아닌‘ 말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것의 옳고 그름은 별개로 하고 말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인간 중에도 타인의 감정에 유독 둔감한 사람이 있다. 타인에게 공감할 수 없는 사이코패스라고불리는 사람들이다. 그저 타인과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인 경우가 자주 있을 것이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감

정을 그대로 연장하는 것일 뿐(그저 착각)인 일은 자주 일어난다. 마음을 쓴다고 할 때의 ‘마음‘은 자신의 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인간의 구조상 타인의 감정을 내면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가다 보면 인간도 로봇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 ‘타인(로봇을 포함한)은 이해할수 없다.
그런 상태에 있는 우리는 타인(혹은 로봇)과 교류할 때 어떻게 하면 될까. 무언가 지침 같은 것이 있다면 좋겠는데. 절대로 타인(혹은 로봇)의 감정은 알 수 없으므로 그 헤아릴수 없는 영역(타인이나 로봇의 마음)은 일단 놔두고, 하루하루 생활에서 타인(혹은 로봇)과 어떻게 관계 맺으면 되는지는 그다음 문제다. 그 지침 같은 것이야말로 비트겐슈타인의 다음 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구나 자신에 대해 "고통‘이란 무엇인지, 오로지 자신에 관해서만안다"고 나는 말한다! 누구나 상자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안에는 우리가 ‘딱정벌레‘라고 부르는 것이 들어 있다. 가정해보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자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딱정벌레를 본 것뿐이면서 딱정벌레가 무엇인지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단칸방)안에 있고, 타인은 그 안에 있는 등장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앞에서도 이야기했다. ‘나‘와 ‘타인‘은 그 모습이 완전히다른 법이다. 물론 ‘타인‘도 나와 비슷한 모습인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아쉽게도 없다. ‘타인‘은 ‘나’라는 유일무이한 세계의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나‘라는 것은 그런 모습을 취하는 만큼, 무척성가시게도 자기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없다. 하나의무대이자 하나의 세계의 얼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신기하게도 언제나 앞면만을 향한다. 그렇게 세계라는 무대를꾸미느라 아침부터 밤까지 분주하기 때문이다. 영화관의 스

크린에 영화 자체를 쏘는 영사기가 스크린 뒷면을 보는 것(뒷면에 빛을 쏘는 것)이 불가능하듯, 언제까지고 앞면만을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면의 무대에 아무리 봐도 나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무대에는 다양한 존재가 있고, 다양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그중에 나에게 말을 거는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이 인간이다. 우리는세계라는 무대를 항상 만들어나간다. 그 무대에서 삼라만상이 전개되는데, 그중에 자꾸만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거는 존재, 곧 다른 인간이 있는 것이다. 고맙게도.
그리고 나도 점점 그 존재들이 사용하는 음성을 자연스럽게 (혹은 싫든 좋든) 습득하고, 그 존재들과 마찬가지 소리를 내고, 그 존재자들과 공동으로 생활한다(억지로 그렇게되어버린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존재들이있음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로소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척 이상한 모습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나와 타인은 전혀 차원이 다른격리된 모습을 하고 있다(자타의 비대칭). 그런데 동시에 나자체의 모습을 가르쳐주는 것도 그 격리된 타인인 것이다.

자기 세계의 등장인물이 이쪽(나세계)의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정보를 제공해준다. 무척 복잡하고 이상한 관계다.
타인이 없다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이것은 말하고 보면 ‘자타의 상호보완성‘(자신과 타인이 서로 보충하여완전한 것)을 이루어 존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모습이다. 물론 타인이라는 존재는 나에게는 발붙일 곳조차 없는 심연이므로, 타인이 어떤 구조를 이루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느낌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상호‘라는말을 붙이는 것은 조금 내키지 않지만 아마도 그런 상호적인 모습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여(타인 대부분과 지금까지 나눈 대화 등을 참고하여 예상했다), 자타의 상호보완성이라고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물론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요컨대 우리는 ‘자타의 비대칭성‘이라는 근원적인 모습을 하고 있고(이는 나 안에서 확인 가능하다) 동시에그것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모습, 이른바 ‘자타의 상호보안성‘이라는 모습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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