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의 철학자들 - 일상에 흘러넘치는 철학에 대하여
나가이 레이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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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쫓아 달려가는 남자는 승객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길 바라고 있다. 남자가 승객을 부른 것은 맞지만, 승객은 자유롭게 거절할 수도 있다. 승객 역시 마찬가지다. 승객은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남자가 손을 잡지 않을 가능성을 알고부른 것이다. 서로의 자유를 전제로 이뤄진 부름에 의해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고 남자는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사실 잘 이해되지 않는 사례지만, 어쨌든 나는 사르트르의
‘부름‘에 관한 메모를 정리하여 밑바탕으로 삼고 ‘승인‘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윤리학 논문을 썼다.

그런위험성까지 포함해서 타인과 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정확히 설명하는 것 같다.
대화란 무서운 행위다. 타인에게 무언가 전하는 것은 저기 멀리 있는 상대를 향해 힘차게 뛰는 것과 마찬가지다. 충분히 도움닫기를 하고 힘껏 뛰어도 상대에게는 닿지 않는다. 당신과 나사이에는 넓고 깊은 계곡이 있다. 그래서 타인에게 무언가 전하는 행위는 항상 위험성을 동반한다. 도약에 실패하는 건 그대로고꾸라지는 걸 의미한다. 그 말은 반대로 애초에 타인에게 무언가 전하려 하지 않으면, 딱딱한 지면에 부딪칠 일도 없다는 걸뜻한다. 마음먹고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었건만, 실수로 넘어뜨려서 다치게 할 수도 있다.
버스를 향해 달리는 내게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긴 할까. 누군가 나를 눈치채줄까. 타인에게 무언가 전하려 하면, 오해를 사고, 무시당하고, 때로는 상대를 다치게 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사르트르가 말했듯이 부름은 결코 강제여서는 안 된다. 많은 위험성을 감수하고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며 불러야만 한다.
내 부름이 완전하게 상대방에게 전해지고, 상대의 부름 역시내게 완전히 닿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타인과 서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타인에게 무언가를전달하기란 불가능해요. 이런 감각은 오늘날 널리 공유되는 것 같다.

서로 이해할 수 없으니까 재미있다, 혹은 타인이란 이질적이기에 창조적인 것이 생겨난다, 하는 말도 주위에서 많이 듣는다. 그 말대로다. 맞는 말이다. 정말로 완벽하게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굳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과 서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렇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서로 이해하려고 하는 느을 계속하고 싶다고, 나는 바란다. 완전히 통하지 않아도 된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목표가 아니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하는 것. 함께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전혀 모르는 사람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무방비에,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위다. 그 때문에 대화는 언제나 무서운 것일 수밖에 없다.
예전에 어떤 철학 대화를 하다 한 남성이 "대화가 물러터졌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남성은 "이렇게 미적지근한 건 그만두고, 서로 더 의견을 부딪치면서 승패를 가려야 해. 더 싸움이 붙을 만한 이야기를 해야 해."라고 했다.
무르다. 그렇게 말한 남성은 대화란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친구와 함께, 모두 사이좋게 하는 것. 그날의철학 대화가 그렇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대화란무지막지하게 어렵고, 때로는 괴로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철학 대화에서는 좋든 싫든 대화의 어려움과 직면해야한다. 사람과 함께 생각하는 것, 내 생각을 전달하는 것, 타인의생각을 듣는 것. 너무 어려워 현기증이 일어도 계속해야 한다.
승패를 정하기란 간단하다. 이쪽이 알기 쉬워요, 논리적이야,재미있어 등등 서로 상처 입히는 걸 감수하고 싸우기란 더욱 쉽다. 정말로 간단하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모르기 때문에 비로소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서로 닮았고, 형편도 공유하며, 쌍둥이 같았다면,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귀를 기울이고, 잘 듣고, 끈질기게 생각할 수 있다. 무책임한 공감 따위는필요 없다. 내 친구가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뭔가 말할 때마다 다 같이 입을 모아 "완전 알겠어!"라고 맞장구치는 여학교에 간 적이 있다. 나는 이렇다고 생각해 완전 알겠어! 나는 이럴지도 맞아, 맞아, 이해해! 무슨 말을 해도 아이들은 서로 공감하며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차근차근 끈기 있게 이유를 물어보자 사실은 전혀다른 전제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이 드러났다. "뭐지?" 누군가가의아한 표정을 짓고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묻기 시작했다. 의견이 전혀 다르던 두 사람이 같은 이유를 공유했던 게 밝혀지기도 했다. 말을 쓰는 법, 받아들이는 법이 처음부터 전혀 달랐다는 사실도그들의 왕국이 조금씩 무너져갔다. 하지만 학생들의 표정은오히려 안도하는 듯 평온해졌다. 몇 사람에게, 아니, 아마 모두에게 그 왕국은 허구였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가두는 감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인상을 느끼며 아무튼 아이들과 함께참을성 있게 생각했다. "이 얘기 간단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네." 누군가가 불쑥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이 구해준 사람 또한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사람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세계와 맞서며 고독하다고 하는이유는 아마 자기만 홀로 떨어져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괴물로 보이고, 자기만 혼자 겉도는 느낌.

괴물들이 쫓아온다. 나를 몰아붙인다. 막다른 길로 몰려서 바닥에 쓰러진다. 내 손바닥을 보는데 무서운 짐승의 발톱이 돋아있다. 소름이 끼친다. 괴물은 나였던 것이다. 주위는 모두 평범한 사람이었다. 계속 이랬다. 나 혼자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까.
그렇지만 세계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때로 사람은 주위가 모두 똑같고 서로 이해하며 공감하는데오로지 나만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세계는모호하고 불확실하며 복잡하다. 거기서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외로워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안달복달하거나 웃으면서 살아간다. 이 세상에 무수히 존재하는 ‘나 혼자‘들은 뿔뿔이두서없이 흩어져 제각각 외로워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평등하다.
철학 대화를 하다가 거북한 동조나 참기 어려운 고독이 대화를 감쌀 때, 나는 바란다. 더욱더, 더욱더 뿔뿔이 흩어지자 뿔뿔이 흩어져서 제대로 절망하자. 세계는 처음부터 항상 다양했고,
복잡했고, 모호했고, 불확실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가엾고,
모두 평등한 외톨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힘드네."라고 웃으면서 함께카페오레를 마실 수 있다.

어느 기업에서 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주제로 철학대화를 했다. 한 여성 참가자는 말하면서 뚝뚝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생각과 이해하지 못한 것과 고독감이 왈칵 흘러넘친 것이다. 그 자리의 누구도 "나도 알아."라고 하지않았다.
우리는 단 한 사람과도 서로 알 수 없다. 그 사실을 누구나 알jok고 있다. 그 사실이 우리를 부드럽게 연결한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모른다. 당신의 슬픔을 영원히 모른다.
그래서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여성의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리고, 어느새 우리는 모두 물속에 있다. 함께 숨을 멈추고 깊이 잠수해서 집중한다.
뿔뿔이 흩어진 우리는 같은 바닷속에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은 ‘일관성‘을 동경한다. 힘 있게 뻗어나가며 흔들리지않는 나무의 줄기 같은 것을 신뢰한다. 생각이 변하면 일관성없는 우유부단한 사람이라고 한다. 논의하는 자리에서 의견을바꾸는 것은 패배를 뜻한다.
‘불변‘도 동경한다.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건 30년 전과 똑같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멋지다고 감탄한다. 육체가 사라져도바통처럼 이어지는 불변의 영혼을 꿈꾸듯이, 시대와 환경이 변해도 꿈쩍 않는 생각에 매료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변하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운명을 함께하자 맹세한 연인은 허무하게 갈라선다. 초심을 잃고 오로지 욕심만 차린다. 변한다. 변해버린다.

그렇지만 우리는 변하는 것을 정말 어려워하기도 한다. 잘못을 인정하거나 신념을 바꾸거나 전제를 의심하지 못한다. 기존의 내 입장을 버리지 못한다. 나도, 당신도 아저씨도, 어린아이도, 엄마도, 고등학생도 변하기란 어렵다. 변하는 것은 갑옷을천천히 벗고 말랑한 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영혼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남이 만지게 두는 것이다.
교수님의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반복된다. 철학 대화에서는 매번 다양한 규칙을 채용하는데, 변화를겁내지 말라는 규칙을 정한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라고지금은 생각한다. 변화를 겁내면서도 반기는 것, 그리고 변화에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할 수 있기때문이다.

철학 대화는 돌봄이다. 철학 대화로 치유된다는 뜻은 아니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로 돌봄이라 한 것이다. 철학은 지체를돌본다. 진리를 돌본다. 그리고 타인의 생각을 듣는 나 자신을돌본다. 입장이 변하는 것을 겁내는 나를 돌본다. 당신의 생각을 돌본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 대화는 결코 투기장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 대화가 서로 공감하는 공동체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대화dialogue‘라고 하면 흔히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로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하는 행위를 떠올린다.

영어 ‘dialogue‘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디아로고스dialogos‘로‘말logos’을 ‘통해dia‘ 사람과 사람이 교류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그리고 파생어로는 ‘디아렉티케dialektike‘가 있다.
디아렉티케. 즉, ‘변증법‘, 나는 이 말을 철학사 교과서에서처음 봤다. 물론 수많은 철학자가 수많은 방식으로 이 말을 사용했다. 하지만 내가 일종의 변증법을 처음 ‘실감한 곳은 바로철학 대화가 이뤄지는 자리였다.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를 하면 공감하든지 싸움을 벌이든지,
둘 중 하나로 끝나리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변증법은 그것들과 전혀 다르다. 변증법은 나와 다른 의견을 마주하고 자포자기하듯이 내 의견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차이를 확인하고 내 의견의 개요를 더욱 다지는 것도 아니다. 변증법은 나와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내 생각을 쇄신하는 것이다.
중간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타협도 아니다. 대립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다만 그러려면 대화하면서 ‘변모하는 것‘이 용인되어야 한다.
예전에 보았던 눈빛이 무서운 그 사람도, 가볍게 자신의 생각을 쇄신한 사르트르도, 그들이 그저 겸허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입장보다도 진리를 돌보고, 나와 다른 생각을 받아들여서 생각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증법이 이뤄지는 곳에서는 누구든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진리에 공헌하는 사람으로 대우받는다.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존재가 된다.

철학 대화라고 하면, 원모양으로 배치한 의자에 사람들이 ㅇ아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ㄷ을 것 같다. 물론 그런 이미지는 수평적으로 대화하는 장소를상징하는 장면이고, 탐구 공동체의 상징이기도 하다. 철학 대화는 승패를 가리는 게임이 아니고 투기장도 아니다. 마주 본다고하면 ‘대결‘이 떠오르지만 그 역시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서로를 꿰뚫지 않고, 누구도 활과 화살을 쥐고 있지 않다.
교수님과 눈빛이 무서운 그 사람의 먼 곳을 보던 눈을 떠올린다. 시선은 분명 나를 향했지만, 결코 나를 차갑게 찌르지 않았다. 철학 대화를 할 때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앉는다기보다 수면에 떠서 둥실둥실 움직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같다.
내가 무언가를 조심조심 이야기한다. 선생님은 힘을 빼고 물결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림을 즐기고 있다. 선생님의 귀는 분명히 내 말을 듣고 있지만, 눈은 머나먼 저편의 무언가를 보고 있다. 무거운 활과 화살을 내버린 나 역시 힘을 빼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 눈앞에 있눈 무언가를 보려고 하늘을 올려다볼 것이다.

인간에게는 숭고한 가치가 있고, 각자 사명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믿으려는 건 아니다. 삶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라는 언설도 넘쳐나는데, 잘 알고 있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에 답하는 일종의 ‘닭‘도 잔뜩 있다. 생물학적인담도 있고, 사회학적인 답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들은결국 내가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고, 그로 인해 나는 상처입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질문이 있다. 때로는 어이없고, 때로는 골머리를않고, 주룩주룩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질문이언제까지 계속 일해야 하는 건가요?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무엇인가요?
보통이란 뭔가요?
나는 태어나도 괜찮았던 걸까요?
하루하루는 내게 탐구의 쾌감과 고통을 가르쳐주었다. 모르는 것이 점점 늘어났고,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외려 허물을벗듯이 틈새를 보이며 전혀 모르는 것으로 변해서 다가왔다. 우리는 넘어지면서도 질문의 답을 찾으려고 계속 달린다.

흔히 ‘생각을 하면 사람은 강해진다.‘라고 여긴다. 주체적으로 자기 결정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대화를 하면사람들과 협동하는 ‘힘‘을 기를 수 있고,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철학 대화가 영 내키지 않는 학생에게 어른들은 "사회에 나가서 도움이 돼."라든지 "구직할 때 써먹을 수 있어."라면서 장려한다. 생각하는 것이 너를 성공으로 이끌고 안정을 손에 넣을수 있다는 식으로,
막상 사람들과 모여 천천히 생각해보면 깨닫게 된다. 생각하는 것은 외려 약해지는 것이라고 확고하던 자기라는 존재가 무르고 연약해져서 마음이 불안해진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타인의 반문으로 인해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익숙했던 것이 이리저리 구불구불하다가 불가사의한 것으로 변모한다.

처음 보는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란 어렵다. 가능하면잘 아는 사람들과 함께 잘 아는 것을 공유하거나 나 혼자 무언가에 몰두하고 싶다. 하지만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준 남성도,
자동차에 통행을 양보한 여성도, 그들이 한 행위는 모두 타인과하는 커뮤니케이션이었다.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 하는 강한 의지가 있었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내게 교재를 보여주려 했던 그 역시 내게 관여하려 하는방식으로-나와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도덕이 뒤흔들리면서도 나에게 관여하려 함으로써 나와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닐까

여러분이 살기 이전 인생은 무無이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여러분의 일이며, 가치란 여러분이 고르는 이 의미이외의 것은 아니다.
사르트르의 말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인생에 의미 같은게 없기 때문에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는 역설.

생각할 때, 사람은 의미의 바닷속에서 같은 바다에 거주하는모든 사람들과 이어져 있다.ㅡ모리타 노부코

잘난 척하지도 않고, 아는 척하지도 않고, 교수님은 싱겁게모른다고 말하고는 다시 오래 읽어서 낡은 책을 진지하게 보기시작했다.
아마 수십 년 동안 수십 번은 읽었을 책에는 선배들의 의견과 교수님 자신의 생각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나는 이 대단한 교수님과 같은 바닷속에 있구나 깨달았다.
철학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같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고 깨닫는 경우가 있다. 계기가 되는 일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모두 ‘모른다‘고 공유했을 때 같다.
"모르겠는데."라며 다 같이 노력해서 탐구를 진전시키려고 할때, 내 귀에는 바닷소리가 들린다. 명민하게 논문을 척척 써내는 선배가 "음, 모르겠어."라며 고민하는 걸 보면 왠지 기쁘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맞서는 것은 드넓은 바다에서 계속 헤엄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혼자서는 쓸쓸하지만, 다른 사람과함께 빠지면 좀 마음이 든든하고 웃을 수 있다.

우리는 육지가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필사적으로 헤엄치며,
웃고 있다. 친구도 선배도 대단한 교수님도, 다 함께 빠져 있다.
잘 응시해보면 분명히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하이데거나 키르케고르도 파도에 휩쓸리고 있는 게 보일 것이다.
계속 헤엄치다 보면, 구름의 틈새로 사랑하는 진리가 언뜻 보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찾았다!‘라고 외칠 그날까지, 우리는 오늘도 ‘초월론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에 밑줄을 친다.

대화를 하는 건 타인과 만나는 거구나 생각했다. 친숙하던 친구가 ‘뭔가 나와 다른,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하는 존재‘로 모습을 바꾼다. 거짓말,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뭐, 영혼이 있다니.
그리고 우리는 대화를 계속하는 사이에 자기 자신 역시 내게타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말하면서 ‘뭐야, 이 생각은?‘ 하고스스로에게 놀란다. 분명한 줄 알았던 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고 하는 순간 손아귀에서 술술 빠져나가는 미꾸라지로 변모해버린다.
타인을 이해하려 하는 것은, 상대방을 만날 수 없는 약속과비슷하다. 신주쿠역에 도착한 나는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구에게 "안녕! 나는 도착했어! 지금 어디야?"라고 메시지를 보

낸다. 그러면 친구는 "안녕, 나도 도착했어! 그쪽으로 갈 테니까어디인지 알려줘."라고 답을 한다. 나는 "고마워! 동쪽 출구 근처에 있을게."라면서, 실은 한 층 아래에 있지만 알기 쉬운 장소로 이동한다. 그런데 친구가 "미안해, 나는 신주쿠산초메역에서내렸어."라고 하고, 나는 ‘아, 친구는 나랑 노선이 다르지.‘라고생각하면서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게!" 하고 걷기 시작한다. 친구는 다시 "아냐, 벌써 동쪽 출구로 가고 있으니까 기다려! 그런데 출구 근처 어디라고?"라고 물어본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상상만 해도 숨이 찰 것 같다.
그렇지만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말을 나의 말과 힘껏 비교해서 어딘가 교차하는지점이 없는지 찾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동쪽 출구근처의 자판기 앞에서 딱 마주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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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 천사와 악마 사이 더 나은 선택을 위한 안내서
마이클 슈어 지음, 염지선 옮김 / 김영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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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 유쾌하다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계속 성찰하고 성찰하라
굿 플레이스 드라마 꼭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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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의 철학자들 - 일상에 흘러넘치는 철학에 대하여
나가이 레이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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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나의 마음과 비슷한 구석이 이렇게나 많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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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건 자기 집을 찾는 여정 같아"
언니가 그렇게 말한 건 케이크를 먹던 중이었다.
"타인의 말이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나 자신과 평화롭게 있을 수 있는 상태를 찾아가는 여정 말이야"

인생이 집을 찾는 여정 같다던 말. 우리의 집은 어디일까? 언젠가는그 집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것이 아닌 욕망과 거짓된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운 ‘나의 집‘에. 그곳을 이정표 삼아 걷는다. 아무리 쫓아내봤자 다시 떼를 지어 찾아오는 불안과 유혹에 눈이 가려져 몇번이나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될지라도 먼 나라에 살았다는 어떤 왕의 말처럼 인생이 결국엔 헛되고 헛된 것에 불과할지라도.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겠지만 슬픔이 너무 커서 세상에 대해 원망만가득했던 마음이 찬란한 가을 햇살 속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풍경들에 황홀함으로 물드는 걸 느낄 때마다 나는 아름다움은 어쩌면 삶을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정해놓은 목적지도 없이 팔랑팔랑, 느릿느릿 걷는 매일매일이 쌓이는 동안 내 눈길이 오래 머무는 모든 것의 이름 또한 틀림없이 ‘아름다움‘일 것이다. 아름다움은 도처에서 저마다의 빛을 품은 채 자라고있다.

4월 중에 튤립 모종을 사다 심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식물들을 키우는데 소질이 없어 죽이게 될까 두렵지만 정말 잘 키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뉴스를 보면 볼수록 나라 안팎으로 혐오와 폭력이 득세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그럴 때는 나도 허무와 좌절에 몸을 맡기고 싶어진다.
하지만 혐오나 폭력만큼이나 허무와 좌절에 빠지는 것 역시 너무나도 손쉬운 해결책이란 걸 아니까, 그럼에도 또다시. 이럴 때일수록 이 봄엔 희망에 대해 조금 더 말하고 싶다. 희망은 더디게 피어나는 꽃이니까. 나무줄기의 색을 조금씩 바꾸고 꽃망울을 날마다 부풀리며 더디게 봄이 오듯이.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길러내는 일엔 언제나 긴 시간이필요한 법이니까.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는 행복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행복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깊은 밤 찾아오는 도둑눈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사라지는 찰나적인 감각이란 걸 아는 나이가 되어 있었으니까. 스무살이었던 나의 빈곤한 상상 속마흔과는 다르지만 나의 40대가 즐겁고 신나는 모험으로가득하리란 걸 나는 예감할 수 있었다. 어린 날들에 소망했듯 나 자신을 날마다 사랑하고 있진 않지만, 나쁘지만은 않다. 앞으로 살아가며 채울 새하얀 페이지들에는 내 바깥의더 많은 존재들에 대한 사랑을 적어나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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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나오는 우유우유치즈라면과 대파대파후추라면을 가족들과 해먹었다

아무리 가보고 싶았던 호텔이라도 가격을 아는 순간, 전혀 가보고 싶지 않은 곳으로 돌변한다. 한번쯤 먹어볼까 싶었던 요리도 메뉴판을 보는 순간, 절대 그가격만큼 맛있을 리가 없다는 확신으로 바뀐다. 어쩔 수 없어서과한 소비를 했을 때에는 뒤따라오는 죄책감이 어마어마하다. 죄책감은 시도 때도 없이 방법을 바꿔가며 지속적으로 나를 공격한다. 이 집요한 공격의 이유를 알고 싶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심지어 통장의 잔고와도 상관없는 마음의 반작용이다. 놀라울 정도로즉각적이고, 심각할 정도로 공고한그러던 어느 날, 이따위 감각으로 평생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나를 스쳐갔다. 그건 좀 지겹다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생각은점점 덩치를 키워갔다. ‘내가 아는 나 자신을 존중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내가 모르는 나 자신은 왜 존중 안 해? 1년에 한두 번쯤은 나의 성향을 무시해버리자. 고급 레스토랑을 가는 거야. 안 해본 경험도 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 맛을 느껴보자. 그러다 보면 또새로운 감각이 깨어날지도 모르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결론은단순해졌다. ‘그래! 모험을 하는 거야.‘

회사 생활을 20년 가까이 하고서야 나는 이제 돈 쓰는 맛을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버는 것도, 모으는 것도, 투자하는 것도, 투자로 성공하는 것도 모두 중요하지만, 자기에게 맞는 방식으로 돈쓰는 법을 아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치통장을 타고 나는 낯선 맛의 세계를 모험하는 중이다. 이 모험은맛있고, 실은 너무 맛있고, 그래서 계속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엔 어디에서 우리 사치해볼까?

우리 인생에는 약간의 좋은 일과 많은 나쁜 일이 생긴다. 좋은 일은그냥 그 자체로 놔둬라. 그리고 나쁜 일은 바꿔라. 더 나은 것으로이를 테면 시 같은 것으로보르헤스의 이 문장에서 ‘시‘를 ‘음식‘으로 바꾸어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보르헤스의 동의는 얻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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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스버거를 먹어봐야지

류승완 감독이 2021년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영상을 찾아봤어요. 화면 속에서 감독은 매우 상기되어있었어요. 긴장한 탓에 다소 장황하게 느껴지는 수상 소감을 들으며 최근 몇 년간 그가 겪었을 롤러코스터를 짚어봤습니다. 전작<군함도>로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이고 흥행에도 실패하며 마음고생이 심했을 감독, <군함도>를 만들기 직전에는 <베테랑〉으로천만 영화를 만들어서 찬사받은 감독. 절치부심해 해외 올로케로영화를 만들었는데 운 나쁘게 코로나 시국을 만나 영화관 개봉자체가 불확실해진 상황을 맞이한 감독, 거리두기 4단계 속에서 극장 개봉을 강행했고 결국 3백 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손익분기점을 넘긴 <모가디슈>의 감독. 그 모든 상황들을 겪은 후에 시상식무대에 올라서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화를 만들면서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는데 오늘은좋은 때인 것 같습니다. 사실 진짜 제가 뭐라도 된 것처럼 들뜨는

순간도 있었고 제 경력이 끝장날 정도의 위기로 보이는 순간도 있었어요. 근데 어떻게 묵묵히 버티고 가니까 이렇게 이 자리까지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뭔가 답답해서 안 뚫리고 어둠 속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영화인들, 조금만 잘 버티시죠. 버티시면좋은 날 옵니다."
"버티시면 좋은 날 옵니다"라고 말하는 감독의 얼굴을 보면서실은 그 말이 그가 스스로에게 맹세하듯 자주 내뱉었던, 그가 가장 절실히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남에게 행하는 조언이라고 하는 건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자기라도 자기를 믿어주려고 다짐하던 문장이 대부분인 것 같아요.

양가 부모님도 모두 지방에 계시고, 우리에겐 딱히 아이를 돌봐줄사람이 없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셋이서 함께 있다. 아내와 둘이서 데이트하는 날은 1년에 두세 번이나 될지 모르겠다. 결국 언제나 식당도 셋이서 가게 되고, 아이가 먹을 수 있는 걸 고르는 게항상 최우선이 되는 것이다. 아마, 이쯤 되면 아이를 키우지 않는사람들도 왜 그렇게 놀이동산이나 동물원 같은 곳에서 ‘돈가스‘를필수 메뉴로 두는지 이해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이를 키우지 않는 청춘의 입장에서는 꽤나 괴로운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이어서, 막상 적응하고 나면 매번 돈가스 먹는 것쯤이야 그리 대단한 일도 못 된다. 오히려 나는 이것을 약간 재밌는 일처럼 느낀다. 인생을 통틀어서 이렇게 돈가스를 자주 먹을 때가 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절은 일종의 돈가스 시절인 셈이다.

아이랑 살아가는 일은, 나와 아내의 삶에 아이 하나가 추가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아이라는 새로웅 세계로 입장하는 일에 가깝다. 그것은 내 어릴 적의 세계도 아니고, 이미 경험했다고 하기엔 거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아주 생소한 세계로의 입장인 셈이기도 하다. 혹은 내가 이미 버렸고, 지나왔다고 생각한 세계로의 시간 이동 같기도 하다.
하루는 벌레 잡기나 모래 놀이로 채워진다. 둘만의 데이트 공간보다는 셋이서 함께 가는 동물원이나 공원이 주요 나들이 일과다.
스시나 양념치킨보다는 돈가스나 짜장면을 먹으러 다닌다. 우아한 음악을 듣기보다는 만화 주제가가 집 안에 울려 퍼진다. 나는어느덧 예상한 적 없는 이상한 삶에 입장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삶이란 오늘 내가 꼭 먹고 싶은 걸 먹거나 지금 꼭 듣고싶은 음악을 듣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 시절 자체를 긍정하는 마음도 중요한 것 같다. 나는 매번 내가 꼭 먹고 싶은 ‘바로 그것‘을 먹지는 못한다. 그보다는 내가 먹고 싶은 것과 아이가 먹고 싶은 것, 나아가 아내가 먹고 싶은 것 사이에서 조율해야 한다. 그렇게 조율해서 먹는 것이, 일주일 내내 돈가스일 수도있다.
그렇지만 나는 일주일 내내 돈가스를 먹더라도 불행하진 않다.
오히려 그런 흥미로운 시절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드는것 같기도 하다. 내게 행복이란, 당장 내가 먹고 싶은 걸 먹는 즐거움이 아니라, 한 시절을 받아들이는 방식 그 자체인 것처럼 느껴진다. 행복이란, 이 순간의 쾌감보다 더 넓은 무엇이다.

함께 살아가는 행복이란, 바로 그러한 서로의 조율속에서 발맞추어 만들어가는 삶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에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을 재미있게 만드는 지름길이 있다면, 약간의 사건사고를 자처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큰 사고는 안 된다. 심각한사건도 좋지 않다. 사건사고는 만화 <보노보노>에서 나오는 에피소드들처럼 소소한 것들이어야 한다. 고구마나 반딧불이를 찾아나서거나, 나무껍질로 괴상한 놀이를 시도해보거나,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보는 식이다.
우리는 매번 그런 사고들을 만들기 위해 사는 것만 같다. 돌도안된 아이를 데리고 떠난 여행에서 아이를 안고 다니느라 진땀 빼기도 하고, 대책 없이 분수대에서 흠뻑 젖어버린 다음에는 햇빛에한참 앉아 간신히 몸을 말리기도 하고, 알파카를 보여주겠다며 산골 깊이 들어갔다가 길을 헤매기도 하는 일들을 겪어나가면서, 삶이 따분하지 않은 행복의 지름길로 갔다고 느끼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삶을 약간의 시트콤같이 만드는 것, <보노보노>에피소드처럼 만드는 것이 삶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아닐까? 나는 점점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자기 자신의 결핍을 마주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특히, 어린 시절의 결핍은 우리가 스스로 억눌러 기억 저편에 숨겨져 있는 경우도 많아서,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하기도 하다. 내가 그 무언가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그것과 관련된 어린시절의 기억을 뒤져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욕망을 수정해나가고, 진짜 내 삶을 위한,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사람을 위한욕망이랄 것들을 만들어갈수 있다.
물론, 사랑과 권태를 다룬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Waltz)에 나오는 대사처럼 ‘인생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이고, 그걸일일이 다 메꿔가면서‘ 살 수는 없다. 가령, 내가 마이구미나 페레로로쉐에 결핍이 있다는 걸 알아도, 때론 그 정도는 인정하면서,
나 자신을 약간 귀엽거나 가엾게 여겨주면서 먹어줄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의 결핍에 관해 잘 안다고 하여도, 신이 아닌 이상 완벽한 인간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삶의 여러 결핍들을 찾고, 욕망을 재점검하거나 수정해나가면서도, 때론 내 욕망을 인정할 필요도 있다. 때로 어떤 음식은 그것을 너무도 먹고 싶었던, 내 안의 어린 나를 달래주는 일이 된다. 그러나 어떤 음식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나스스로 고쳐야 할 마음의 병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한 욕망과 자신을 괴롭히는 욕망사이에서 삶을 보다 균형 있게 만들어가야 한다. 결국에는 그를 통해 내가 진짜 원하는 삶과 욕망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야 한다.

정지음 작가의 문체가 좋다! 이 작가의 에세이를 더 읽어봐야지!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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