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
정지돈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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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작가가 되는 데 가장 필요한 재능은 착각이다. 문장력이 좋거나 머리가 좋거나 인내심이 있거나 책을좋아하거나 기타 등등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라는 착각이다. 이건 굉장히 슬픈 지점이다. 만약 작가를 만드는 요인이 남다른 언어 감각 같은 실질적인 재능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착각과 자신감이라면, 많은 작가들이 왜 그렇게 덜되어먹은 건지 알 수 있기때문이다. 동시에, 뭔가를 해내는 인간들의 성취 중 많은경우가 단지 자기 확신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세상이왜 이렇게 엉망인지 알려주는 것 같다.

"내가 해(가)봐서 아는데~" 천만에!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엄밀하게 말하면 해본 만큼만 알고, 더 엄밀하게 말하면 해본(살아본) 만큼 안다고 믿는 것뿐이다. 다른 말로 이를 ‘꼰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일까. 고르기아스의 전언처럼 (경험)해도 모르고, 안다 한들 전달하지 못하는 상태가 인간의 한계일까.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는 가정하에 대화를 나눈다. 그러지 않고야 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암묵적 약속이다. 아무것도 진정으로 알 수 없지만 대충은 안다고 (가정)하고 대략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사회적 약속. 쉽게 말해 우리 삶의 근본 전제는 ‘대충‘이다. 이걸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파고들면 결과는 대부분 정신병동행이다. 운좋으면 대철학자나 예술가, 과학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운을 바라진 말자. 언제나 그렇듯 운은 우리편이 아니다.

공쿠르 형제의 일기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파리와 프랑스 예술에 대한 책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자료다. 그리고내가 좋아하는 문학 역시 이러한 종류의 것들이다.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종합할 수 없이 들쑥날쑥하는 일련의 경험과 생각들이 오가는 것. 이론화하거나 미학적으로 다듬을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의 배아가 보이지만 모든 것이 시간이나 생각의 흐름에 휩쓸려 지나가버리고 결국에는 감당할 수 없는 산더미 같은 짐, 일종의 텍스트 더미만 남는 것. 그러나 여기에 일관성이 아주 없진 않다. 전기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전기 작가들이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의미 부여할 수 있는 서사나 패턴을 찾아내서가 아니라, 그것을 묶을 수 있는 환경으로서 한 사람의 신체가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무위는 실현되어야 할 어떤 본질이 주어져 있지 않은 상태, 특정한 본성이나 소명이 부과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무능이나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일종의 잠재성으로 1)할 수 있는 가능성과 2)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 모두를포함하는 가능성이고 이는 아감벤의 정치철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삶-의- 형태 Form-of-Life와 연결된다. 쉽게 말해(쉽지 않을지도・・・・・・ 존재를 규정하지 않고 임의적으로열어두는 것이며 종교적이고 목적론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순전한 인간의 삶"이 시작될 수 있는 잠재성이다.

울프와 발저의 산책이 좋은 이유는 그들이 걷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않았고 우울해하지도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의 산책은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것이었지만 멜랑콜리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걸을 때만진정으로 쾌활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산책과 글쓰기가 가진 유일한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거나 결말을 맺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실한 어느 지점에서, 주제와 의도, 인과와 의무를 망각한 지점에서만 진정한 글쓰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뒤라스와 에드가르 모랭은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미래와 양심은 스탈린주의에 있다고그들은 한때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곧 박살났고 파리의 공산주의 진영은 분열됐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을 비판하길 거부했다. 에드가르 모랭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서두 번 저항하기란 어렵다." 한번 나치와 부르주아에 대항해싸운 사람들은 공산주의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자신을 받아준, 자신의 고향 같은 곳과 싸워야 하는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외면했고 이 때문에 장주네는 사르트르를 포기했다. 저항은 특정한 대상이나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본성에 저항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대상이나 친구들에게 저항해야 할지도 모르고 믿어왔던 것에 저항해야 할지도 모른다. 차별과 혐오는 예외적인 행위가 아닌 일상적인 상태에 가깝다.
그러므로 저항 역시 그래야 한다. 저항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져야 할 상태다.

여기서 말하는 아우라는 정확히 뭘 뜻할까. 흔히 ‘후광‘
으로 번역되는 아우라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비견될 수 없는 가치, 완성도, 그로 인한 카리스마, 분위기 또는 가격(?)등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가 작품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아우라는 "공간과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 작품 자체가 아닌 작품과 맞닥뜨리는 장소이며, 바로 ‘지금, 여기‘를 뜻한다. 과거 예술에서는 우리가 그곳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아우라가 발생했다면 현대 예술에서는 "사물을 자신에게 더 가까이 끌어오려고" 하기 때문에 아우라가 상실된다. 그러므로 아우라의 핵심은 ‘의식ritual‘과 ‘거리 distance‘다.

파울 첼란의 시 「하얗고 가벼운 것」의 일부다.
하얀 것,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
무게도 없는,
우리가 주고받는 것,
하얗고 가벼운 것.
그것을 떠다니게 하라.


1968년 2월 29일, 네 명의 학생 영화감독과 진행한 공개토론에서 장뤼크 고다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삶에서 차이를 추구하려 하는 반면 사실 우리는 유사성을추구해야 한다." 2014년 6월 2일 온라인 라이브 방송에서로이 바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여러분은 모든 이가 자유로워지기를 원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모든 이가 공동현존하기 때문입니다."

크라카우어가 말한 대의 없는 사유/생활 방식은 내가 예전부터 생각해온 것이다. 소설을 쓰고 예술의 가능성을 고민할 때, 혁명과 혁명 이후의 세계를 탐색할 때 필연적으로발생하는 적대나 충돌, 실패나 백래시, 전 세대 혹은 현세대와의 갈등, 주의와 대의의 필요성과 한계에 대해 고민할수밖에 없었다. 소모적이고 반복적으로 보이는 과정을 극복하거나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헤겔은 진정한 비극은 옳음과 그름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옳음과 옳음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둘 모두 옳다면 갈등은 왜 발생하는가. 이게 정말 필연적인 과정일까.
크라카우어처럼 내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특정 대의가 아니라 대의에 공감할 때조차 대의들 사이의 틈새였다. 대의를 실천하면서도 대의로부터 (거의) 자유롭게생활하고 사유하기, 상충하는 대의를 함께 유지하기, 대의들 사이에 공유되는 공간에 머물기, 믿음 없이 살기, 하지만 어떠한 믿음 속에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이러한

삶의 표본으로 에라스뮈스를 떠올린다. "시대의 논객들 틈에서 논객으로 살지 않은 인물로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대부분의 것을 대단히 놀라운 방식으로 보여주는" 사람으로서. 종교개혁 시기의 가톨릭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뮈스

에라스뮈스는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종교인이었지만 애매모호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는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공격받았다. 보수적인 사람들이 봤을 땐 위험한 개혁가이자 비판자였고 진보적인 사람들이봤을 땐 혁명에 진지하지 않은 쾌락주의자였다. 타락한 구교를 혁신하고 제도를 바꾸기를 원했지만 자기 마음속의깊은 열망들이 제도화된다면 이 세상에 의해 타락하리라고 생각했으며 "참여하지 않으면 결국 패배하리라는 것을알면서도, 자신의 대의가 대의로 전락하는 것을 차단했고

"자기 생각들을 유동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했다. 개혁자로서 초기에 동지였던 루터는 나중에는 에라스뮈스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음험한 사내"라고 비난했다. 그럴싸한 말은많이 하지만 도움되는 말은 하나도 안 하는 놈이라나, 실제로 에라스무스는 가톨릭을 격렬히 비판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슬쩍 발을 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분쟁이 일어난다면 나는 평화를 깨기보다는 진실의 일부를 포기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결국 에라스뮈스가 가장싫어하고 피하고 싶었던 것은 교조적인 태도, 엄숙주의, 억압적인 권위, 폭력이었지 특정 사상이나 종교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그가 원했던 것은 평화나 기쁨이었지 다른 사상이나 종교-이를테면 신교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어정쩡한 태도는 역사의 흐름에 밀려나기 마련이고 새로운 세력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요한 하위징이는 에라스뮈스 평전에 "그가 중간노선을 취하는 바람에 많은 친구들과 마음에 맞는 영혼들이 그의 곁을 떠나갔다"라고 썼다.
사람들은 "에라스무스의 저 온유한 미소를 견디지 못했다.
(・・・・・・) 그가 주변 환경을 무시하고 자신의 길만 용감하게걸어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그럼 에라스무스와 같은 태도는 무의미한 걸까. "에라스뮈스의 사상은 지금까지 역사를 형성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유럽의 운명을 형성하는 데 뚜렷한 영향을 끼친 적도

없었다."20세기 들어 많은 이들이 에라스뮈스를 위대한 인문주의자로 다시 호명한다. 혼돈의 시기에 중도와 관용, 평화를 지킨 사람으로 말이다. 그러나 크라카우어의 관점은조금 다르다. 크라카우어는 에라스뮈스의 위치를 중도라고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타협자가 아니었다. 언제나약자의 편이었고 쉬지 않는 비판자였다. "그가 옹호하는 대의는 바로 역사적 대의들을 끝장내는 것이었다." 단지 그가원했던 대의가 극지를 표류하는 빙산처럼 고정될 수 없는일시적인 장소였을 뿐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에라스뮈스의 이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이상만이 영원한 회귀성을 갖는다."
더 중요한 건 에라스뮈스와 같은 이들이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믿음이다. 크라카우어는 이를 "에라스뮈스-분위기"라고 부른다. "그의 메시지가 낳은 것은운동이 아니라 분위기, 한밤중의 순간적 불빛같이 막연하고 요정의 약속같이 막연한 분위기였다." 에라스뮈스-분위기는 특정한 목적이나 주장, 대의에서 자유로워도 된다는 아이디어다. 어느 쪽 편을 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태도이며 단지 지식의 즐거움과 삶의 기쁨에 헌신해도 된다는 해방감이다. 누군가는 이를 방관이나 비겁함이라고 말할지도모르겠다. 그렇게 해서는 세상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에라스뮈스는 부당한 권력 앞에

한 번도 방관자였던 적이 없으며 종교개혁의 큰 공헌자 중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가 믿었던 대의가 삶이었던 것뿐이다. "그는 할말을 다 했으면 무대를 떠나도 좋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무대보다 더 중요한 건 무대 아래의삶이다. 혁명보다 혁명 이후의 정치, 사건 이후 post-event의 생활이 그에겐 더 중요했다. 에라스뮈스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조건이 시원한 나무 그늘이 있는 집과 선량한 친구들과의 산책, 정원에서의 식사라고 생각했다. 물론 모순의왕답게 평생 생계를 걱정하며 일정한 주거지 없이 떠돌아다녔고 틈만 나면 친구들을 의심하고 싸웠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에라스뮈스 - 분위기에서 용기를 얻고 힘을냈다. 강요와 요구, 대의들 사이에 엿보이는 삶의 지대, 잠깐 존재했다 사라지는 유토피아, 참고로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는 에라스뮈스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토머스 모어는 에라스뮈스가 죽기 일 년 전 왕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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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장면
고수리 외 지음 / 유유히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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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동안 마중 나가는 다정이 자연스레 몸에 밴다면 좋겠다. 버스나 기차가 멀어질 때까지 손 흔들고 배웅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만,
멀리서 누가 온다고 했을 때 먼저 나가 맞이하는 사람이고 싶다. 혼자에서 이르게 벗어날 수 있도록. 기대치 못한 곳에서 반가울 수 있도록. 같이 걸어 ‘집‘으로 돌아올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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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공들여 써 낸 문장 하나하나가 책 속으로 나를 흡입력있게 빨아들인다. 섬세하지만 함축적인 문장이 인상적인 책!
킨셀라 아주머니가 주인공의 실수에
˝매트리스가 낡아서 말이야. 이렇게 습기가 차니 뭐니. 항상 이런다니까. 널 여기다가 재우다니,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이었을까?˝ 라는 말을 건넸던 것처럼
아이의 실수에 사려깊은 태도를 가진 어른이 되고 싶다.

욕조 물이 차오르자 흰 욕실이 어딘가 변해서 눈앞을 가린다. 전부 다 보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 걸어가고, 양동이의 가장자리를 타넘는 바람이 가끔 속삭인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애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올린다.

아저씨는 자기가 한 말의 파도에 갇혀서 거기 그대로 서 있다.

마당을 비추는 커다란 달이 진입로를 지나 저 멀리 거리까지 우리가 갈 길을 분필처럼 표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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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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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한 번 실패했던 책. 문유석 작가의 책에서 추천한 책이라 다시 읽게된 책.
4월의 빗소리를 자세히 들어보아야지. 4월의 빗소리는 미, 칠월의 빗소리는 솔을 감각하는 감수성이라니..!

내가 쓰는 소설에 어떤 진실이있다면, 그건 그날 저녁, 여행에 지친 우리가 조금의 의심도 없이야즈드의 불빛이라 생각했던, 지평선을 가득 메운 그 반짝임 같은것이라고 믿었으니까.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머나먼 지평선의 반짝임을 바라보며 천천히 나아가는 시간들이라고. 그게 야즈드의불빛이라서, 혹은 야즈드의 불빛이 아니라고 해도.
작가의 말 중에서

어쩌다 이런 구석까지 찾아왔대도 그게 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 없는 것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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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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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에서에 이어 달과 6펜스
서머싯 몸이 그려낸 스트릭랜드가 폴 고갱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 스트릭랜드가 가졌던 순수한 예술적 열망이 그의 삶을 고결하게 만들었지만, 폴 고갱의 삶은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6펜스의 세계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소설과 현실의 괴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를 몰랐다.

난 나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하네. 내가 보기엔, 사랑에 자존심이 개입하면 그건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야. 

나는 그가 말하려는 것을 짐작해 볼 도리밖에 없었다. 스트릭랜드는 그때까지 자신을 얽매어왔던 굴레를 과감히 깨뜨려버렸던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뭐랄까, 전혀 생각지 못했던 힘으로 넘치는 새로운 혼을 발견했던 것이다. 강렬하고 특이한 개성을 대담하고 단순하게 묘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살결은 열정에가득한 어떤 관능, 불가해한 어떤 것을 품고 있는 관능으로 채색되어 있었는데, 그렇다고 채색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중량감, 그러니까 육체의 무게를 뚜렷하게 느끼게 해주는 그런중량감에 그치는 것만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어떤 영적인 것이혼을 어지럽히는 전혀 새로운 어떤 영성(性)이 깃들어 있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상상을 이끌어 가면서, 영원한 별들만이 빛나는 어둡고 텅 빈 우주를 벌거벗은 영혼이 두려움에 떨면서 새로운 신비를 찾아 모험의 여정을 나선 그런 우주를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이 설명이 수사적으로 여겨진다면 그건 스트로브가 수사적이었기 때문이다(사람이 감정에 빠지면 자기도 모르게 소설을 쓰듯이 이야기한다지 않는가). 스트로브는 여태까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어떤 느낌을 표현하려고 애썼지만 그것을 보통의 어휘로 표현해 낼 줄 몰랐다. 그는 마치 언어로는 기술할 수 없는어떤 것을 말로 설명해 보려고 애쓰는 신비주의자 같았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표현했다. 사람들은아름다움이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사용한다. 말에 대한 감각이없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함으로써 그 말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별것 아닌 것들을 기술하면서 온갖 것에 그 말을 갖다 쓰기때문에 그 이름에 값하는 진정한 대상은 위엄을 상실하고 만다.

그저 아무것이나 아름답다고 말한다. 옷도 아름답고, 강아지도아름답고, 설교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아름다움자체를 만나게 되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생각을 돼먹지 않은 과장된 수사로 장식하려는 버릇이 있어그 때문에 감수성이 무뎌지고 만다. 신령한 힘을 어쩌다 한번체험하고선 그것을 늘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속이는 돌팔이 의사처럼, 사람들은 가진 것을 남용함으로써 힘을 잃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스트로브는 구제할 길 없는 어릿광대이면서도, 아름다움에 대해서만은 자신의 영혼처럼 성실하고 정직한 사랑과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신자들이 경외하는 신과 같아서 그것을 볼 때에는 외경심을 느꼈다.

스트릭랜드가 왜 갑자기 그림을 보여주겠다고 했는지 알 수없었다. 잘됐다 싶었다. 작품은 사람을 드러내는 법이다. 사람이란 사교적인 교제를 통해서는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외양만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람을 진짜로 알기 위해서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소한 행동이라든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스치는 순간적인 표정을 통해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때로는 가면을너무 철저히 쓰고 다니다가 정말 그 가면과 같은 인격이 되어버리는 일도 있다. 하지만 책이나 그림은 진짜 모습을 꼼짝없이드러내고 만다. 겉만 그럴싸한 것은 곧 속이 텅 비어 있음을 나타낼 뿐이다. 옷가지를 쇳조각처럼 칠한다 해도 쇳조각처럼 보일 리는 없다. 아무리 특이하게 꾸민다 해도 평범한 정신을 감출 수는 없다. 그냥 우연히 만들어진 작품에서도 날카로운 관찰자는 영혼의 깊은 비밀을 읽어내고 만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홀로이다. 각자가 일종의 구리 탑에 갇혀 신호로써만 다른 이들과 교신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신호들이 공통된의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마치 이국 땅에 사는사람들처럼 그 나라 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온갖 아름답고 심오한 생각을 말하고 싶어도 기초 회화책의 진부한 문장으로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들과 똑같다. 

정말 아브라함이 인생을 망쳐놓고 말았을까? 자기가 바라는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은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섬 생활에 신나는 일은 없어요. 바깥 세상
하고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생각해 보십시오. 타히티까지오는데만도 나흘이 걸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린 섬 생활이 행복해요. 어떤 일을 시도해서 그걸 성취하는 사람은 많지 않죠.
우리 생활은 소박하고 순진합니다. 야심에 물들 일도 없고, 자부심을 가진다고 해봐야 그건 우리 손으로 해낸 일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그런 자부심뿐이고요. 악의를 가질 일도 없고, 부러움으로 속상해 할 일도 없어요. 아, 정말이지, 선생, 사람들이신성한 노동이다 뭐다 하는데 그건 헛말이에요. 하지만 내게는그게 아주 절실한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작품해설 중

가정을 팽개쳐버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일을 작가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제스처를 씀으로써 오히려 내적충동의 필연성과 신비감을 강렬하게 만들고 있다. 세속의 윤리와가치를 일거에 넘어서버리는 그 비약을 비약 자체로 남겨둠으로써오히려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나레이터를 처음부터 주인공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만들었던 것도 같은 효과를 겨냥한 수법이다. 이야기의 중반 이후는 나레이터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엮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수법은 흔하지만 여기에서는 신비감을 고취하는 데 특별히 효과적으로 이바지하고 있다. 독자는 주인공이 산 삶의 중요한 부분을 직접보거나 들을 수 없어 서로 다른 관점을 통해 그의 삶의 성격을 짐작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진실이나 자유의 정체는 결국 그런방식으로밖에 접근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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